설교story/설교문

고성준 목사 I 야고보서 I 야고보서 2장 14-20, 26절 I 믿음 2

№1★↑♥ 2024. 5. 27. 12:24

지난주 믿음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특별히 신약성경에서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책은 세 가지라고 했죠? 히브리서, 로마서, 야고보서. 지난주 설교를 통해서 히브리서와 로마서를 살펴보았지요?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의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해주는 데,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일어난 일처럼 취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은 믿는 게 아니지요? 아는 거지요. 이미 일어난 일을 믿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표현이고, 이미 일어난 일은 믿는 게 아니라 아는 거지요. 그래서 믿는다고 할 때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믿는 것이고, 보이지 않지만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의 본질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미 일어난 일처럼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아멘!

둘째, 우리는 로마서의 말씀을 통해서 믿음의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믿는다고 했을 때는, 내용이 있다는 것이지요. 믿습니다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을 믿느냐에 대한 내용이 있다는 거예요. 그것은?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 상 주시는 분이심을 믿는 거예요. 우리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기 원하시고, 축복하기 원하시고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거예요. 그것을 믿는 것이고,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거예요.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시고 우리 죄를 위해 대신 죽어주신 분이라는 것을 믿는 분이시고, 셋째는?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믿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께서 부활하셨고, 우리도 부활하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해 영원한 생명을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게 내용입니다. 

 

오늘은 세번째로,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믿음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로마서와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의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다면 야고보서에서는 그러면 이 믿음이 실제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발현되는가? 실제로 우리 삶에 어떻게 믿음이 들어오고, 생기고, 그 믿음이 역사하는가? 하는 믿음이 형성되고 발휘되는 프로세스, 단계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믿음은 결국 어떻게 된다? 우리의 행동으로 삶으로 나타나야 그게 믿음이라는 거예요. 

믿음이 아무리 우리 마음으로부터 시작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마음 안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라는 거예요.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취하는 마음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로 인하여 우리가 취한 영원한 생명에 관해 동의하는 머리에서, 내면에서 일어나는 어떤 활동으로 시작하는 것은 맞아요. 그렇지만, 그것이 결국 우리 삶의 행동으로, Action으로 나타나야만 온전한 믿음이고, 완성된 믿음이라는 것을 야고보서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의 믿음의 프로세스는 보통 세 가지 과정을 거쳐서 우리의 믿음이 온전해지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은 이 과정을 살펴보는 것을 통해서 성경이 이야기하는 온전한 믿음이 역사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믿음의 첫번째 단계는, 지적으로 동의하는 거예요. 동의하는 것 없이 믿음이 시작될 수 없어요.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믿음의 내용들 있지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어 상주시기 원하시는 분이고, 예수 안에만 구원이 있고, 예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셨고, 우리도 부활하여 영원히 살 것이라는 성경의 내용들을 이해하고 동의하는 데서 믿음이 시작됩니다. 만약 그런 지식이 없이 "믿습니다!"하고, 무분별하게 선포하는 것, 단지 긍정적 사고는 믿음이 아니라는 거예요. 믿음은 무엇을 믿는지, 성경이 무엇을 얘기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거기에 대한 동의로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믿음은 먼저 '듣는 것' 듣는 것이란? 이해하고, 뭔가 정보를 얻고, 동의하는 것을 말해요. 그러니까, 아는 것에서 부터 시작한다는 거예요. 내가 무엇을 믿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아무거나 붙잡는 것이 믿음이 아니고 무엇을 믿는지 정확하게 아는 데서 시작되는 것. 그 들음은 어디서부터 오냐? '그리스도의 말씀', '성경'에서부터 온다는 거예요. 

그래서 믿음은 철저하게 성경에 기초하고 있어요. 성경을 아는 것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진리들에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믿음의 첫 번째 단계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인생의 매뉴얼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분, 사람을 지으신 분이 사람의 인생은 어떻게 어떻게 살도록 지었다는 것을 설명하는 거예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설명서 없이 우리가 물건을 제대로 이용할 수 없 수 없듯이 이 복잡한 인간의 인생이, 복잡한 삶의 현장이 우리를 지으시고 창조하신 분의 설명 없이 온전하게 갈 수 있겠어요? 이것은 굉장히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인생의 얼마나 복잡한 지 모든 상황에 다 길이 보이고, 해답이 있던가요? 제가 42년 살아오면서 해답 없는 문제들을 수도 없이 만났었거든요? 사람은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려고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하지만 항상 해답이 있는 게 아니에요. 해답이 없는 문제가 그렇게 많더라고요. 해답이 있으면 좀 어렵더라도 어떻게든 해보겠는데 답이 아예 없는 문제들이 그렇게 많더라고요. 이런 복잡한 인생 가운데 우리를 만드신 분의 설명 없이 과연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 수 있을까요? 

아마 그렇게 살아간다고 했을 때는, 혼돈과 혼란과 후회로 가득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는지, 무엇이 우리 인생에 있어서 진짜 축복이고 저주인지, 무엇이 우리 인생에 좋은 것이고, 나쁜 것인지..  인간은 결국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왜 예수가 우리 인생에 필요한지? 이것이 성경이 들려주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이 진리에 대한 것들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 '아! 그래서 이렇게 되는 거구나? 우리 인생은 여기서 와서 여기로 가는 거구나! 성경이 말하는 죄는 이런 거구나! 아! 죄가 우리를 이렇게 망가트리고 우리를 이렇게 후회하게 만드는구나? 구원이란 무엇이구나?' 이것이 성경이 주는 진리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고 동의하는 데서부터 믿음이 시작되는 겁니다. 그러기에 성경의 사람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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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성경을 읽지 않고서는 믿음이라는 게 생길 수가 없어요. 성경을 읽지 않고 우리가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거예요. 믿는 게 아니에요. 믿음의 내용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성경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 세대의 큰 문제 중 하나는? 믿음의 첫번째 단계를 건너뛴다는 거예요. 진리에 대한 이해와 동의 없이 그냥 "믿습니다!" 하고, 정확히 알아볼 생각을 하지 않는 거예요. 올바른 지식보다는 감정이 더 중요해요. 그래서 예배 때 감정이 동하고, 감격이 동하면 믿겠다 하고, 하나님 위해서 살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믿음=감정이라는 생각들이 팽배해요. 그런데 이것은 교회 안에서 만의 현상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적인 사조와도 연관이 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무엇이 진짜 진리인지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어요. 그것보다 무엇이 나에게 의미가 있느냐에 훨씬 더 관심이 있어요. 

과거에는 무엇이 진리인가?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그것이 진리라면 좀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진리이기 때문에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요즘은 시대가 바뀐 것 같아요. 무엇이 진리인가? 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그게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냐? 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예수를 믿어도 무엇이 진리냐? 그것이 진리임을 알면 살면서 손해를 좀 보더라도 진리이기 때문에 그 길을 가겠다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으면 나에게 무슨 유익이 있고, 예수 믿으면 어떤 혜택이 있는지 등이 훨씬 더 중요하게 되었다는 거예요. 이것이 불필요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이 자기 자리를 벗어나서 감정이 너무너무 중요한 것이 되어 버렸다는 거예요.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의미가 중요하고, 감정이 중요하고, feel이 중요해요. 이러한 부분이 물건을 구매하는 데에 반영이 되는 것 같아요. 물건의 효용성보다 물건이 주는 필, 디자인이 어떠냐? 이걸 내가 가지고 다니면 내 이미지가 어떠냐? 이런 게 훨씬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요즘 광고를 보면 옛날과 참 많이 달라진 게.. 물건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주는 광고가 별로 없어요. 그런 광고는 구닥다리 광고로 느껴지고 대부분의 광고는 이미지를 파는 광고더라고요. 오늘의 사조를 정확하고 반영하는 한 단면이에요. 

이러한 사조가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들어온 거 아십니까? 그래서 진리가 무엇인지, 예수를 믿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는 다 생략합니다. 예수 믿으면 나에게 어떤 필이 오는가? 예수 믿으면 나의 불안한 감정이 위로를 받는가? 내 감정에 어떤 자극이 오는가? 이런 것에 훨씬 더 큰 관심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감정이 잘 동하면 잘 믿는 것 같고, 안 따라오면 헤매고.. 이게 요즘의 신앙 패턴 같아요. 특별히 젊은 이들, 여러분과 같은 세대, 청소년부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그래서 어떨 때 보면 참 헷갈려요. 어느 때는 정말 선교사 뺨치는 믿음의 사람인 것 같은데 다음 주 보면 교회를 안 나와요. 왜 그런가 보면, 감정이 안 좋은 거예요. 여러분 이게 뭔지 아세요? 그날 예배 어떤 감동이 있었고, 감정이 좋으면 선교사가 되었다가 그런 부분이 없으면 불신자가 되어버리는.. 이게 평균을 유지하는 게 아니라 막 극과 극을 왔다 갔다 하면서 널뛰기를 해요. 왜냐하면, 이것이 진리와 지식에 기초가 안 세워져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내 믿음의 기초가 감정에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감정이 좋으면 잘 믿고, 감정이 안 좋으면 안 믿는.. 이것이 우리를 널 뛰게 하는 거지요. 

여러분, 이것은 올바른 믿음. 성숙한 믿음이 아니에요. 믿음이란? 감정이 동해서 움직이는 게 아니에요. 좋을 때 믿는 거 누가 못하겠어요? 여러분 아이와 어른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아이들은 기분이 좋으면 하고, 나쁘면 안하지만.. 어른은? 기분이 나빠도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어떻게 서든 해요.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정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것은? 아주 어린 신앙이고, 성숙한 것은? 우리의 감정이 업되든 다운되든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거기서 우리의 믿음이 발휘되는 것으로 시작되어야 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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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예수 믿게 된 계기는 성경 때문입니다. 제가 기대와 흥분 속에서 기대를 가지고 대학생활을 시작했는데 온통 혼란과 헷갈림 뿐이었어요. 제 안에 있던 혼란이 무엇이었느냐? 정말 이 길이 맞는가에 대한 확신이 없었고 무엇이 진리인지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도대체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혼란과 혼동 가운데 머무는 위기가 찾아왔어요. 그러던 어느 날 성경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제가 어느 날 성경을 펼쳐서 읽기 시작했어요. 20년 동안 모태신앙으로 자라, 나름대로 신실하다는 소리도 들으며 자라오면서 내 손으로 성경을 스스로 펼쳐 읽는 처음이었어요. 혹시 이 가운데 그러한 기적가운데 있는 분이 계시다면, 빨리 탈피하고 나오십시오. 성경을 여러분 손으로 펼쳐서 읽지 않는다면 죄송하지만 아직 여러분의 믿음이 아니에요. 그것은 누군가에 의해  끌려나온 믿음이에요. 내 믿음은 어디서 나오냐? 모태신앙으로 몇년을 신앙생활을 해왔다? 교회를 떠나 한번도 사고 친 척도 없었어요. 하여간 정말 착실했어요. 그런데 그게 내 믿음이 아니었더라고요. 왜요? 내 손으로 성경을 한 번도 펼쳐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제가 그 성경을 펼치면서 느끼는 첫 감정은 당혹스러움이었어요. '아니? 내가 20년을 신앙생활을 해 왔는데 내 손으로 성경을 펼쳐서 읽어본 적이 없잖아?' 당황스러움이었어요. 그리고 신약을 펼쳐서 읽기 시작하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요. 성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순식간에 신약성경을 다 읽었어요. 아마 일주일도 안 걸린 것 같아요. 그리고는 큰 충격이 왔어요. 구약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구약은 읽어보니까 처음에 어렵더라고요. 그때에 감사하게도 저를 전도했던 선배가 성경을 같이 읽자고 하면서 구약성경을 가르쳐 주어서 6개월 만에 구약성경을 다 읽게 되었어요. 구약을 읽고 그 사이에 신약을 몇 번 읽었어요. 그 사이에 제 안에 믿음이 생기기 시작하는데.. 무슨 믿음이냐? '이거는 진리인 것 같아!' 이것을 사람이 썼다고 하기에는 너무 신기한 거예요. 성경을 한 사람이 쓴 것도 아니고, 여러 명의 저자가 수 천년에 걸쳐서 쓴 건데 이건 말이 안 된다. 이게 거짓말일 가능성은 10%도 안 된다. 제 전공이 수학이었잖아요? 100%까지는 모르겠는데 하여간 이게 거짓말일 가능성은 10%도 안된다. 그러면서 제 안에 믿음이 싹트기 시작했어요. 이게 제 믿음의 시작이었어요. 

여러분, 믿음은 어디서부터 올까요? 들음에서부터 오는 거예요.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부터예요. 이 가운데 아직도 성경을 여러분의 손으로 펼쳐서 읽어본 적이 없는 분이 계시다면 오늘 시작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의 믿음이 되어야지, 끌려 나오는 믿음이 되어서는 안 돼요. 믿음은 나의 믿음으로 서는 것이지 부모님의 믿음으로 서는 것 아니에요. 그러려면 내가 성경을 펼쳐 읽어봐야 해요. 성경에는 부인할 수 없는 진리가 담겨 있어요.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능력이 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그래요. 제가 지난 30년 간 성경과 동행하면서 읽으면 읽을수록 '야! 깊도다 이 진리여! 능력 있도다 말씀이여!' 하나님의 약속에는 헛 된 것이 없어요. 그대로 다 지키세요. 말씀에 능력이 있어요. 제가 경험했던 이야기예요. 그런데 이게 전부는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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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단계가 있습니다. 믿음의 두 번째 단계는 드디어 여러분이 기대하셨던 감정의 단계입니다. 들음으로 이해 한 것이 내면에서 확신으로 바뀌는 겁니다. 이 확신으로부터 구원의 감격이 나오고, 기쁨도 나오고, 눈물도 나오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은 마음도 생기는 이런 단계에요. 이런 감정이 믿음의 두 번째 단계에요. 이 두번째 단계가 없으면 잘 못된 두 길로 빠지게 되는데 첫째는, 하고 싶지 않은 신앙생활을 억지로 해야 하니까.. 바리새인과 같은 율법주의자가 되거나 아니면 하기는 싫은 데 억지로 나왔으니까 예배는 나와도 삶은 개판으로 사는 명목상 그리스도인이 되거나 둘 중 하나로 흐를 가능성이 커요. 왜? 마음 가운데 감정이 없고, 하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 억지로 끌려서 하는 신앙생활이기 때문에 그래요. 아무리 그것이 진리이고 그것을 하고 싶은 마음, 감정이 따라오지 않으면 위선적인 것이 되어버리거든요.

그래서 여러분, 믿음에 있어서 두번째 단계는 매우 중요해요. 목사님 앞에서는 감정이 믿음이 아니라고 하더니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아니요, 여러분 감정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순서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돼요. 그리고 이것이 그다음 단계로 발전해 나가게 되는 데 순서가 바뀌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하여간 감정이 중요해요. 왜냐하면, 사람이 무엇인가를 결정하도록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정보가 아니라 감정이에요. 감정이 훨씬 더 파워풀해요. 예를 들어서 여러분 번지 점프 해보셨나요? 저도 안 해봤어요. 번지 점프 절대로 안전합니다. 저 줄 굵기가 계산해서 만든 것이고, 물리학의 법칙에 따르면 절대로 끊어질 순 없습니다. 맞아요, 사실이거든요? 물리학의 법칙에 의하면 줄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내가 뛰어내려도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 확실합니다. 그 사실은 정확한 정보입니다. 그런데 그 정확한 정보와 비교할 수 없는 두려움이 저를 막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여러분 결국 어떤 결정을 내리나요? 아무리 지식은 뛰어내려도 괜찮다는 믿음을 주어도 결정은, '무섭다'는 감정 때문에 뛰지 않기로 결정하는 거 아닐까요? 

사람이 뭘 결정할 때 보면, 지식이 우리에게 주는 정보에 의해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훨씬 더 크다는 거예요. 반대로 번지 점프를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재밌을 것 같다는 감정이 두렵다는 감정보다 크면 뛰는 거예요. 번지 점프를 예로 들었지만, 이 원리는 결정하는 많은 부분에 있어서 대부분 비슷해요. 지적인 정보는 확신이라는 감정이 나오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결정의 근거는 많은 경우 감정이에요. 

그래서 감정에 호소하는 광고들이 효과를 거두는 거예요. 내구성이 좋다는 정보가 없어도 감정을 터치하면 팔리는 거예요.  그래서 감정이 중요해요. 그런데 감정이 앞서게 되면, 우리의 믿음이 파괴적이 돼요. 순서가 있다는 거예요. 먼저는 믿음은 들음에서, 하나님의 말씀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감정으로 가야 하는 거예요. 이 순서가 바뀌면 아주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감정이라는 것이 파워가 있기 때문에 지식은 무시가 되어 버려요. 감정에 휩쓸려 잘못된 결정을 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서 자동차 구입을 예로 들어볼까요? 지식 없이 감정이 앞선 사람은? 필이 오는 대로 사는 거예요. 그러면 뭘 살까요? 페라리 스포츠 같은 걸 사겠지요? 그러면 무슨 일이 생길까요? 막상 사고 나니까 우리나라에서는 이 차를 몰만한 곳이 없다는 거예요. 아우토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서울에서 출퇴근하는 사람이 빨리 달리는 스포츠 카가 무슨 소용이겠어요? 차 세우기도 불편하고, 주차해놔도 걱정이고.. 더 큰 문제는 고장 나면 비용이 너무 비싸요. 보험표, 부품값. 가장 중요한 거, 사고 나서 보니까 내가 돈이 없는 거예요. 이게 뭐예요? 망하는 거예요. 

여러분 지식에 근거하지 않고 감정에 의해 결정을 내린 결과입니다. 반면에 지식에 따른 감정에 의한 결정은 어떻게 되나요? 먼저 정확한 지식을 얻는 거예요. 나에게 필요한 차가 뭔가? 수중에 내게 돈이 얼마나 있나? 나는 차를 주로 어떤 용도로 활용하나? 이런 부분들을 고려하고, 꼼꼼히 따져보니까 그중에 내 맘에 딱 드는 차가 있어요. 마음에 든다는 게 뭐예요? 감정이지요. 이렇게 해서 구입하는 것이 정상적인 거잖아요. 신앙생활도 이 순서로 해야 하는 거예요. 먼저 정확한 지식과 그것에 의해서 내 안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감정들을 누리는 것이 건강하고 정상적인 거예요. 그렇지 않고, 성경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이 그냥 감정만 가지고 클릭을 하게 되면 페라리 자동차 산 것처럼 되는 거예요. 살 때 잠깐, 며칠을 기분이 좋을지 몰라요. 통장의 잔고를 보면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는.. 그래서 아까 얘기했던 분명히 전 주에는 선교사 같았는 데 이번주에는 새 신자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므로 여러분 이 믿음의 순서들을 잘 기억하시고 성경에 기초한, 그리고 그 위에 감정이 얹어진 신앙생활을 하게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번째 단계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제가 첫 번째 단계를 스킵할 까바 강조하긴 했지만 두 번째 단계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 단계가 없으면 우리의 신앙이 굉장히 사변적이 되고, 신앙의 능력이 없어요. 왜? 삶의 변화가 없어요.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지식이기보다 감정이기 때문에 그래요. 감정이 안 움직이기 때문에 삶의 동력이 없어요. 우리도 성경의 말씀대로 믿음 대로 살게 해주는 것은 사실은 이 감정이에요. 그러니까, 감정이라는 표현이 조금 애매하긴 한데 기독교에 대해서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다'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체험이라는 것은? 지식의 동의가 아니라 뭔가를 경험해서 감정이 움직였다는 거예요. 그래서 체험의 종교라는 말을 사용하는 거예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지적인 동의가 어떻게 감정적인 동의로 이어지는 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소개팅 보는 걸 이야기해볼게요. 어떤 사람을 소개받기로 하면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받게 되지요? 그러면 여러분 이런 지적인 정보를 공유받았다고 해서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이 올라오나요?  그러면 그거 진짜 속물이지요. 정보만 보고 사랑이 올라오지 않지요? 우리의 감정이 지식에 바로 반응하지 않는단 말이에요. 물론 그러한 정보들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호감을 만들 순 있어요. '이 사람 괜찮을 것 같은데?' 그렇지만, 감정이 언제 올라오냐 하면, 실제로 만나봐야 하는 거예요. 만나서 이야기 나누고, 데이트도 해보면서 '이 사람 참 좋네?' 그러면서 감정이 생기는 거 아니에요?

우리의 신앙이 그렇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이론이 아니고, 종교가 아니라 살아계세요. 글자 속에만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고 살아계신 분이세요. 그러기에 우리의 신앙은? 성경을 가지고 이해하고 동의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아요. 그다음 단계인, 성경을 가지고  이해하고 동의하는 단계가 뭐냐? 소개팅할 때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과 같다 할 수 있어요. 사랑이라는 감정은 만나서 데이트를 하면서 올라오는 거지요? 이게 뭐냐 하면, 여러분~ 기도라는 거예요. 기도는 여러분,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고 이 기도를 통해서 영적인 체험들을 하게 돼요. 저는 우리의 믿음에 있어서 기도와 기도를 통해서 영적인 체험을 절대로 스킵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 체험이 없으면 우리의 신앙이 어린 단계를 넘어갈 수 없어요.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 속에만 갇혀 있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예요. 하나님을 이론으로만 생각한다면 성경을 읽고만 끝나면 되는데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실제 하신다는 믿음 때문에 기도하는 거예요. 실존하지 않으신다면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이 기도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으로 우리를 이끌어 줄 거예요. 그러면 거기서부터 영적인 크고 작은 체험들이 나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것이 믿음이 정상적으로 성장하는 단계예요. 여러분 이 단계로 접어드셨나요? 그래서 기도할 때 여러분,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거예요. 이러한 체험을 통해서 우리 안에 감정이 생기는 거예요. '아! 하나님 좋으신 분이시구나! 이렇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구나!'라는 것이 생기는 거예요. 

제 간증을 조금 더 이어갈게요. 성경을 읽고 제 안에 믿음이 싹텄어요. 그렇다고 해서 제 삶에 구체적인 변화가 일어났냐? 그건 아니었어요. 성경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 이외에는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친구를 따라 참석했던 기도 모임을 통해서 하나님을 체험했어요. 영적인 체험을 한 거예요. 성령 체험을 한 거예요. 그리고 제 안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제 안에 감정이 생긴 거예요.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가 느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하고, 은혜가 무엇인지가 느껴지기 시작하면서 이게 믿음이구나!라는 것이 깨달아졌어요. 성경은 90%의 확률로 사실일 거야라는 믿음이 100%로 바뀌게 되었어요. 이게 여러분 믿음이에요. 

믿음의 첫 번째 단계를 위해서 성경이 필요했다면, 믿음의 두 번째 단계를 위해서는 기도가 있어야 하는 거예요. 이 기도의 응답하시는 성령님의 역사, 체험. 꼭 기적을 이야기하는 것만이 아니라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이 많으시고, 좋으신 분이신지 느껴보신 적 있으세요? 여러분들이 기도한 것이 응답되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으세요? 이 체험이 있어야 해요. 이 체험은 언제 생기냐? 기도할 때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기독교는 말씀과 기도 위에 세워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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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세 번째 단계가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가 본문에서 마지막 구원의 세번째 단계를 이야기 합니다. 세번째 단계까지 이르러야 진짜 믿음. 온전한 믿음이 되는데 그게 뭐냐? 행동이에요. Action이에요. 의지를 발휘해서 실제로 뭔가 움직이는 행동이요. 이것이 일어나야 비로소 그 믿음이 온전한 참된 믿음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믿음에는 지적인 동의도 필요하고, 감정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런 지식과 감정은 결국 마지막 세 번째로 가야 합니다. 우리의 의지를 움직여서 행하기까지 해야 이것이 온전한 믿음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믿음은 우리의 지정의를 다 거쳐야 하는 거예요. 지식적인 동의, 감정이 움직이고, 그래서 우리의 의지가 동원되어 뭔가 일을 하게 하는.. 행동하게 하는.. 움직이게 되는 것이 온전한 믿음이요. 구원에 이르게 되는 믿음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행하는 거예요. 야고보는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 그 자체로 죽은 것이다.'라고 했어요. 믿음으로써 가치가 없다는 거예요. 진짜 믿음이 있다면, 행동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비가 올 거라는 진짜 믿음이 있으면 당연히 우산을 챙기지 않겠어요?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노아에게 무엇을 보시고 믿음이라고 하셨나요? 잘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어느 날 노아에게 나타나셔서 "비가 올 거다. 배를 만들어라."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노아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마치 일어난 일인 것처럼 취합니다. 그래서 배를 만들지요. 이걸 하나님이 믿음이라고 하셨어요.

예를 들어서 이런 상상을 해볼까요? 하나님이 노아에게 나타나셨어요. "비가 올 테니 배를 만들어라." 그랬더니 노아가 "제가 그 말을 믿습니다."라고 해놓고선 지금까지 살던 대로 지내면서 배를 만들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조금 지켜보고 계시다가 다시 나타나셨어요. "비가 온다니까~ 배를 만들어라." 그러니까, "오! 알겠습니다. 믿습니다." 이러면서 걱정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여전히 배를 만들지 않고 살던대로 사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 노아가 믿음이 있는 건가요? 없는 건가요? 노아가 분명히 지적으론 동의했잖아요? 감정은? 걱정했잖아요. 그래도 믿음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뭐를 해야 진짜 믿음이 있는 거예요? 배를 만들기 시작해야 믿음이 있는 거예요. 비가 올 거라 얘기했으면 배를 만들기 시작해야 그게 믿음이 있는 거지.. 아무리 "알겠습니다. 큰일 났네요." 밤마다 누워서 "비 오면 어떡하지?" 걱정해요. 그래도 믿음이 없는 거란 말이에요. 믿음은, 그래서 배를 만들기 시작할 때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거지.. 배 만들기 전까지는 믿음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해되십니까? 

우리 삶 가운데서도 마찬 가지예요. 우리가 아무리 "믿습니다." 수 백번 반복하고, 큰 은혜를 받고, 감동을 받아서 눈물, 콧물을 쏟아도 우리의 믿음이 실제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방금 이야기했던 노아의 예처럼.. 과연 그것이 믿음인가? 생각해보아야 하는 거예요. 우리 신앙생활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 야고보 사도가 이런 믿음을 가리켜 아주 기막힌 네이밍을 해요. '귀신 믿음' 야고보서 2:19-20,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귀신도 믿고 떤다는 거예요. 왜요? 귀신도 하나님이 한분이신 걸 알아요? 몰라요? 알아요. 그러면 귀신은 감정이 있을까요? 떠느니라.  그 믿음에서 나오는 감정도 있어요. 그런데 '아~ 허탄한 사람아..' 왜? 귀신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안 산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이걸 야고보서 사도가 '귀신 믿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지식도 있고, 감정도 있는데 행동이 안 나와. 그러면 이게 귀신 믿음이라는 거예요. 여러분들 가운데 이런 분이 없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다운 믿음을 갖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귀신 믿음이 아니고 진짜 믿음입니까? 이 믿음의 행위는 뭡니까? 야고보서 2:15-16,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진짜 믿음은 이 행위가 나오는 믿음이라는 거예요. 너희 중에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그냥 가서 "평안하라."라고 말만 한다면 그게 무슨 믿음이냐는 거예요. 우리의 믿음은 평안하게 가게 하고, 덥게 하고, 몸에 쓸 것을 주는 것이 이것이 진짜 믿음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아는데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게 정말 믿음이냐? 는 거예요. 성경에 분명히 말씀하셨어요.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 고아와 과부는 문자적인 고아와 과부만이 아니라, 가장 소외되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돌보라는 거예요. 평안히 갈 데가 없는데, 덥게 할 데가 없는데, 배부르게 할 데가 없는데.. 모르면 모르겠는데.. 이 사실을 알고.. 또 도울 길이 전혀 없으면 모르겠는데 우리가 도울 수 있는 길이 있는 데 그것에 대해서 아무런 액션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이 정말 믿음인가? 멀리 난민까지 갈 것도 없이.. 우리 주위마에, 내 주위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 나눔과 섬김이 필요한 사람이 있는데 내가 그걸 아는데.. 도울 수 있는 길이 전혀 없으면 모르겠는데 도울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면 그 믿음이 진짜 믿음이냐? 이게 오늘 성경이 던지고 있는 도전이에요. '형제를 덥게 하고, 배부르게 하고, 그 몸에 쓸 것을 주라'라고 했는데 어떤 이유에서든 내가 움직이지 않고 있다면 그것이 과연 진짜 믿음일까요?

믿음의 마지막 단계는? 사랑으로 움직이는 거예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에요. 제 간증을 마저 할게요. 성경으로 인해서 믿음이 싹트고, 체험을 통해서 마음이 뜨거워졌어요. 그러자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덥게 하고, 배부르게 하고, 몸에 쓸 것을 주라 했는데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주고 싶은 불이 제 안에서 일어나더라고요. 이것을 어딘가에 전해주고 싶은데.. 그러다가 어느 날 광고를 하나 봤는데 '야학 교사를 모집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교사로 지원하여, 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니까 눈이 안 보이는 사람들이 있는 거예요. 그 사람들은 삼청동 쪽에 가면 국립 맹아학교라고 있습니다. 거기에 있는 학생인데 눈이 안 보이니까 공부를 못하는 거예요. 그 학생들을 도우라는 마음을 주셔서 거기에도 교사로 지원하여 그곳을 돕기 시작했어요. 대학생활 내내 그 일을 하다 보니 장애인들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그래서 장애인들을 섬기러 다니고, 그러다가 거기서 좋은 자매 만나서 결혼하고.. 결혼은 그런데서 하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이 일을 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는데 저는 이것이 감격이 되어서 한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고 싶어서 한 거예요. 누군가를 섬기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는 섬기는 게 아니고, 나에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경험하게 되더라고요. 내가 정말 복을 받고 있구나! 어느 날 맹아학교의 수업을 마치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서 어떤 생각이 드냐 하면, '이 길이 맞는 길이구나! 이렇게 쭉~ 살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하겠구나! 정말 이렇게 살고 싶다.' 불과 몇 개월 전에 있었던 내 안의 혼란, 혼돈들.. 이 길이 맞아?' 이 고민이 어느 순간 하나도 없어져 버렸어요. 그리고 제 안에 드는 확신이 하나 있는데.. '맞아, 하나님이 사람을 이렇게 살라 하셨지?' 제 안에 믿음이 생기는데.. 사랑하며 살라고 만드셨고, 형제가 헐벗은 것을 보고 형제가 굶주린 것을 보면 움직이라고 만드신 것이지.. 이게 맞는 길이지.. 제 안에 확신이 생기더라고요. 이게 여러분 뭐예요? 믿음이에요. 지식과 감정은? 사변적이에요. 이것이 실제가 되는 것은 움직일 때 실제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에요. 이 믿음의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도 꼭 알려주어 살고 싶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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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정리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 비밀을 꼭 전해주고 싶습니다.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십시오. 온전한 믿음은 지적인 동의에서 시작되지만 단순한 동의가 아닙니다. 온전한 믿음은 기도를 통해서 영적인 것을 체험하는 믿음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온전한 믿음은 그 위에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에요. 사랑으로 움직이는 믿음이에요. 나누고 섬기는 믿음이에요. 이것이 온전한 믿음입니다. 그리고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갈 때 우리 안에 역사하던 혼돈과 고민과 고통들이 비로소 사라져요. 그리고 하나님 안에 있는 평화와 기쁨과 축복이 우리 안에 넘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도록 만드셨어요. 그래서 야고보 사도가 2장 16-17절에서 했던 '형제와 자매가 헐벗고 굶주리고 있는데 평안히 가라 하면서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고 하면서 쓸 것을 주지 않는 것.'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에요. 사람은 하나님이 어떻게 살도록 지으셨냐 하면? 형제가 굶주리면 먹을 것을 주고, 형제가 추우면 따뜻하게 할 것을 같이 나누고 배고픈 자가 있으면 나누어 먹고, 함께 나누고 섬기며 살도록 만드셨어요. 그래서 믿음은 여러분? 이것에 클릭이 되어야 믿음이에요. 믿음은 지적인 동의에서 시작하고, 영적인 체험을 거치면서 성장하지만 믿음이 진짜로 온전해지는 것은? 우리의 이웃들과 주변에 필요가 있는 사람들과 나누고 섬기는 사랑의 액션들이 나올 때에야 비로소 믿음이 온전하다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므로 여러분, 주변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사랑하십시오. 그들 안에 있는 필요를 채우고, 그들과 함께해 주세요. 그 믿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큰 축복이 있어요. 이 하나님의 축복가운데로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그러한 삶을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해를 거듭할수록 여러분들의 믿음이 온전해 지기를 다시 한번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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