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1) 사도행전 1:1-5 I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I 삼일교회 I 송태근 목사
보통 사도행전하면, 초대교회가 갖고 있었던 순수함, 열정, 능력 그런 역동성을 그리워한 향수 때문에 오늘날 많은 수의 현대교회들이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표어를 말하는 것 같아요. 그러나 초대교회로 돌아가서는 안 되겠지요. 왜냐하면, 초대교회는 문제가 없었나요? 초대교회도 많많치 않게 많은 문제를 생산하고, 문제를 담고 있었습니다.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우리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핵심의 가치는 이런 것이어야 하겠지요?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통해서 교회를 설립하시고, 그 사도들을 통해서 1세기 때에 나타났던 순수한 복음의 능력, 복음의 역사. 아마 그것을 오늘날 교회가 회복하고, 복원하고, 목표해야 맞겠지요? 이제 우리는 특새 중에 있습니다.
이번 특새는 선교적 제자로 전환하라. 사도행전을 통해서 우리는 두가지 초점을 맞추고 싶습니다. 첫째는, 내년이면 60주년을 맞는데, 더 나은 60년을 위해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 것인가? 에 초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 사도행전 강의를 통해서 각 개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경영의 비밀은 뭘까? 많은 청년들의 기도제목을 받아보면, 의외로 개인 진로 문제, 비전, 소명 문제에 대해서 갈등하고 고민하는 형제자매들을 많이 만납니다. 마땅한 고민이고 굉장히 중요한 고민입니다. 그래서 이 강해가 마쳐질 즈음이면 온 교회가 온 성도들이 그런 주제들에 대해서 답을 얻는 분명한 계기가 될 것입니다. 오늘은 첫 시간으로 서론의 시간으로 차근차근 말씀 안으로 들어가 보면, 사도행전 전체 28장을 어떤 관점으로 보게 되어야 할지 눈이 열려지는 그런 시간이 될 것입니다.
우선 1장 1절입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데오빌로라는 이름이 나오지요? 이 이름은 로마식 이방이름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이 이름이 갖는 의미가 우리의 눈길을 끄는 부분이 있습니다. '데오빌로'라는 이름은 사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런 의미를 담은 이름으로 봐서 이분은 일단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으로 추정이 됩니다. 그런데 아직 이 사람의 정체에 대해서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 뒤에 보니까 '내가 먼저 쓴 글에는'이라 되어 있지요? 그러면 이 사도행전은 누가 썼습니까? 사도행전은 의사 출신인 누가가 썼어요. 그러면 누가가 먼저 쓴 글이 있었다는 것이겠지요? 먼저 쓴 글은 누가복음을 얘기합니다. 사도행전을 읽기 전에 반드시 누가복음에 대한 성격과 누가복음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사도행전으로 자연스럽게 넘어올 수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 두 책은 사실상 하나의 묶음으로 취급이 되었었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분리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쓴 글로 넘어가볼까요? 누가복음 1장입니다. 눅 1:1-2 '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이 말은 말씀의 목격자가 되어서 그 말씀의 내용을 쓰려고 누가 말고도 여러 사람이 있었다는 그 말입니다. 3절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여기에 누가 나오지요? 사도행전 1장에서 등장했던 '데오빌로'가 여기서도 언급이 됩니다. 그런데 이 데오빌로 뒤에 어떤 호칭이 붙어있죠? '각하' 그런 것으로 보아서 이 데오빌로는 로마의 고급 관리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상당한 레벨이 있는 귀족 또는 고급 관리였던 것이 맞아요. 그런데 당시에는 로마 관리들이 예수를 받아들이는 경우가 왕왕 있었습니다. 특별히 여자들부터 복음의 전환, 개종의 역사가 많았습니다. 그중에 데오빌로가 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조금씩 정체가 밝혀지죠?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질문을 해보기 원합니다. 사도행전에는 '데오빌로'라고만 써져 있는데, 누가복음에는 아주 예를 갖추어서 '데오빌로 각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조금 더 볼까요? 3하-'3하..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4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이 사람은 복음을 막 받아들여서 눈을 뜬 사람이거나, 복음에 대해서 호의를 갖고 있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많은 학자들의 공통적인 견해가 전자 쪽에 무게를 둡니다. 이 사람의 이름이나, 누가가 특별히 이 사람을 대상으로 글을 쓰는 것을 보아, 이미 복음을 받아들였는데 아직 복음의 초신자에 불과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데오빌로'는 한 개인을 사실상 말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받아들이거나 복음에 호감을 갖고 눈뜨기 시작한 모든 이방인들을 위한 글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역사입니다. 그런 상징적인 인물로서 '데오빌로'가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4절을 보니까,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이런 그리스도인들을 이어령 박사가 세련되게 표현을 했더군요. '잠재적 그리스도인' 불신자 보다는 훨씬 나은 것 같아요. 그런데, 오늘 이 문장의 모든 내용으로 미루어보아서 누가는 이제 막 복음을 영접하고 복음에 눈 뜨기 시작한 이 이방인을 상징하는 데오빌로에게 신앙의 성장과 성숙을 위해서 이 글을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방금 전 질문을 했던 것처럼 누가복음에는 각하라는 표현이 있어요. 사도행전에는 '각하'라는 표현이 생략되고 그냥 이름을 부릅니다. 왜 그랬을까요? 누가복음이 먼저 쓰였고, 훨씬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쓰인 책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뭐가 달라졌냐? 호칭이 달라졌어요. 이 미세한 차이는 굉장히 중요한 간격을 설명합니다. 예를 하나 드리지요.
5-6년 전에 전방에 별들만 모이는 기독모임이 있었는데 거기에 집회를 하러 갔었습니다. 저는 별들을 한꺼번에 가까이서 밥 먹으면서 보기는 처음이었어요. 그런데 별의 위용, 포스가 대단하더라고요. 이분들 호칭이 재미 있습니다. 서로를 부르는 데, "김 장로님, 박 집사님" 그러다가 식사를 하는 중간에 대위 목사님이 들어오시는데 놀랍게 별단 장군들이 일어나시더라고요. 계급사회인데 자신보다 훨씬 나은 대위 목사님에게 별단, 장군들이 일어나시더라고요. 그런 겁니다. 예를 들면, 데오빌로가 처음에 복음을 들을 때는 누가도 그분의 세상적인 지위와 위치를 고려해서 '데오빌로 각하여'라고 이 글을 썼겠지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점점점 하나님의 경영과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깊숙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면서 '각하'라는 호칭이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왜 기록되었는가?에 대한 진술을 사도행전 기자가 이렇게 진술을 합니다. 1장을 보시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어디에? 누가복음에.. '3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드디어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이제는 예수를 처음 믿을 때, 각하라는 호칭을 붙여야 했던 낯설고 초신자 시절의 데오빌로가 아니라, 이제는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써 깊숙이 성숙해 들어와 있습니다. 뭐가 된 거지요? 가족이 된 거예요. 여러분 이게 왜 중요할까요?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와 속성을 하나 꼽으라면 여러 개를 말할 수 있지만, 그중에 제일 중요한 가치가 가족이라는 개념입니다. 가족을 매일 만나고 있습니까? 항상 삼일교회 성도들은 앉는 자리에만 앉지 마세요. 그러다 보면 그 사람밖에 몰라요. 만 명이 넘는 교회인데 그럴 수 없잖아요. 중요한 건, 왜 그래야 할까요?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가족으로 우리를 불러주시고 묶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각하'라는 호칭이 떨어져 나간 것으로 보아서 누가의 판단에 데오빌로를 로마의 고급 관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가 이미 교회라는 가치와 가족이라는 개념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드디어 하나님 나라의 일을 얘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강아지 눈 뜬 식으로 초신자에게 덮썩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맡기지도 않고, 하나님 나라의 경영을 섣불리 설명하지도 않아요. 하나님은 성장하고 훈련되고 성숙한 교회와 성도들에게 그 일을 말씀하십니다. 우선, 우리는 그러면 여기서 도대체 그 성숙한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공개하고 싶고 공유하고 싶고, 부탁하고 싶었던 하나님 나라의 경영이 뭘까? 누가복음 24장을 열어가겠습니다. 25-26절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 대목은 낙심한 제자들에게 두 제자가 예루살렘에서 따랐던 스승이 처형당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고, 그에 처형과 함께 그들은 낙심을 하고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바로 그 현장입니다. 그때 엠마오 도상에서 제자들은 함께하시는 분이 예수님임을 예수님으로 알아보지 깨닫지 못해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에게 질책을 하시며 말씀하시는 것이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고는 이런 얘기를 하지요. 27절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구약에 예언되었던 그리고 예수님이 친히 오셔서 설명해주셨던 이 복음의 핵심과 내용들을 제자들이 다시 듣게 됩니다. 부활의 주님을 통해서.. 그런데 이들이 이것을 어떻게 깨닫게 되냐하면? 32절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누가 하신 역사에요? 성령님이 내주 하셔서 그들의 마음을 여시고, 그들의 어두웠던 눈으르 열어 주셔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드디어 알아먹게 됩니다. 깨닫게 됩니다.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다섯 가지 하나님 나라의 일을 부탁하세요. 그것이 사도행전 1장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그리고 그 일을 그대로 이루어지는 현장이 어디일까요? 사도행전의 현장입니다.
자 24장 44절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 일에 첫번째가 무엇입니까? 구약의 메시아에 대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예언되었던 일들이 오늘날 세워진 교회를 통해서 성취되는 것을 교회에게 맡긴 일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맡긴 일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와 오늘날 성도는 첫 번째로 감당해야 할 역사가 뭡니까? 구약의 예언을 성취케 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볼까요? 45절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깨닫고 알기 위해서는 두번째, 뭘 공부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일을 맡기고, 현장으로 보내실 때 무기 들리지 않고 보내시지 않아요. 전쟁터로 내보내는 병사들에게 훈련도 안 시키시고 무기도 안 들려서 보내는 지휘관은 없어요. 우리는 먼저 가자 하기 전에 교회가 뭐에 대한 가치가 중요합니까? 성경에 대한 이해. 그래서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담임목회자의 개인적인 성향이 중요한 것도 아니고, 담임목회자의 목회철학이 중요한 것도 아니에요. 또 교회가 하는 목적이 우선적 가치가 될 수 없어요. 교회가 가장 중요한 목적과 가치는 성경이 가라는 가는 교회입니다. 그러려면 성경을 공부해야겠어요? 안 해야 되겠어요? 해야지요. 제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우리 삼일교회 젊은이들과 성도들에게 죽기 전에 창세기-계시록까지 다 말씀을 드리고 가는 것이 소원인데 될지 모르겠어요. 그 안에 예수님 오시면 젤 좋고.. 진심입니다.
교회는 어떤 사람의 영향력이 앞장서서도 안되고, 어떤 세속의 가치와 트렌드가 교회의 방향이 될 수도 없어요. 중요한 키는 성경이 어디로 가라고 말하는가? 그러려면 교회가 제일 창념해야 될, 땀 흘려야 될 작업이 무엇인가? 성경을 배우는 열기입니다. 호세아 시대에, 사사시대에 왜 그 시대가 사람들이 각기 자기 소견에 대로 행하였나요? 말씀을 무시한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끊어진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의 선지자 사무엘을 일으키신 거예요. 몰락해 가던 이스라엘이 어떻게 꿈결처럼 다시 일어납니까? 브엘세바에서부터 단까지 사무엘의 말씀이 가르쳐지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이스라엘이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이 민족이 사는 길, 이 시대가 사는 방법은 다시 우리 선배들이 그토록 붙들고 목숨처럼 사랑했던 성경 한국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강단마다, 푸른 그리스도의 복음이 새롭게 싹트는 꿈을 가져야 해요. 민족이 사는 길, 교회가 사는 길, 청년들이 사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은 배우는 길입니다. 제자들을 내보내실 때에도 그냥 뜨거운 가슴 하나로 가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두 번째 항목이 뭐였습니까? '이에 그들이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 일을 위해서 두 번째 필수적인 조건이었어요.
세번째, 46-47절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세번째 하나님의 나라 일에 대한 예수님의 데오빌로나 오늘날 사도들이나, 오늘날 교회들에게 부탁하셨던 내용이 무어십니까? 예루살렘에서부터 땅끝까지 회개의 복음이 전파되는 일이었어요. 잘 사는 복음이 아니고, 성공하는 비결의 복음이 아니고 회개의 복음이었어요. 성경에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기 이전에 가장 먼저 외쳤던 깊은 그 시대를 향한 메시지가 뭐였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오늘날 현대교회의 지독한 뒤틀림은 회개를 촉구하는 복음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회개를 선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냥 좋은 게 좋은 거. 아니에요. 오늘도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일에 대해서 사도들과 교회들에게 부탁하시면서, 회개의 복음이 왜 인류가 십자가 앞으로 돌아와야 하는가.. 우리는 영원히 형벌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 주인이었다는 사실을 통회 자복하고 옷을 찢고 재위에 앉아서 베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가 오늘날 부족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회개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땅끝까지 이르기를 교회에다가 맡긴 것입니다.
네번째, 48절입니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여기서 증인은 법적인 용어입니다. 사건의 진상을 목숨을 걸고라도 사실 그대로 전하는 자를 증인이라고 합니다. 세상 법정에서도 위증을 하면 처벌을 받아요. 그런데 요즘은 법이 하도 물렁해서 위증을 떡 먹듯이 하지요. 그리고 자기 이익에 맞게, 자기 쪽에 유리하도록 증언을 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증인은 그래서는 안돼요. 이것은 가고 싶고, 가기 싫고, 이것도 부당한 기준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 모두에게 부탁한 내용이에요. '너희는 이 일에 증인이라.'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을 입고, 용서받아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전부다 '증인'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사건의 진상을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가? 내가 어떻게 구원을 얻었는가? 그 고백이 분명한 자라면 누구나 이 증인의 삶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탁한 일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49절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기다려야 해요. 이 성에 머물라. 왜 기다려야 할까? 그 답을 오늘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이렇게 설명합니다. 본문 4절입니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뭘 기다려야 할까요? 5절입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이제 드디어 예수님의 승천과 함께 약속한 그분이 오세요. 그분이 누구십니까? 성령님. 왜 그분이 오셔서 우리에게 임하셔야 합니까? 여기에는 중요한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여기 성령님을 또 다른 말로 '보혜사'라고 했어요. 여기의 보혜사는 '보호자, 내 옆에 항상 계시는 자, 나와 동행하시는 자'라는 뜻입니다. 누가 오시면? 성령이 오시면.. 즉, 성령이 그렇게 오셔서 우리와 영원히 내주 해주시는데 여러분 그 사실을 믿습니까? 서양 사람들의 최고의 욕 중에 하나가 "성령 받지 말고 목회나 해 먹으라"라고 해요. 그만큼 성령의 임재를 중요하게 생각하신다는 것이지요. '그가 오시면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엠마오로 향하던 낙심한 두 제자가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직접 예수께로 들었지만 깨닫지 못했던 것은 뭐의 도움이 없었어요? 성령님의 도움이 없었어요. 성령님이 그들에게 임재하셔서 그들의 마음을 불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해 주실 때 답답하고 열어지지 않던 진리의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제가 가끔 가다가 먼저 교회에서 설교를 내가 해도 어려울 정도 어려운 설교를 할 때가 종종 있었어요. 걱정이 됩니다. 연세 많으신 분들이 알아 들으셨을까? 그래서 한 번은 나가다가 80이 가까운 분인데 공부가 짧으신 분이에요. 물어봤어요. 오늘 설교 알아들으셨어요? 그런데 그분이 기다렸다는 듯이 "너무 은혜를 받았어요." 저는 좀 의아하더라고요. 그래서 언제 한번 그들을 편안한 자리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어요. 설교를 어떻게 이해하셨는지 물어봤는데, 정확하게 다 설명을 하세요. 내가 어떻게 성경을 깨달았고, 무엇으로 은혜를 받았는지.. 제가 깜짝 놀랐어요. 내가 바보 같은 짓을 했구나.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이해력, 지혜, 설득력으로 깨달아지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말씀은 배움이 짧던 길건, 그게 중요한 기준이 아니고 누가 임재하셔야 해요? 그래서 말씀을 읽을 때는 반드시 누구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까? 설교를 듣기 전에 누구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까? "성령님 내 이성 속에 임재하셔서 내 세속의 가치나 무지를 거두어주시고 성령님 밝은 빛으로 조명하시어 생생한 하나님의 음성을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늘 이 기도 속에 말씀을 읽고, 말씀을 들어야 해요. 보혜사 그분이 오시면 모든 가르친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또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우리의 준비됨, 우리의 논리력, 우리의 말재간으로 상대방이 설득당할 것이라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누가 증언하세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여러분 성령님은 예수님을 소개하는 분이에요. 그분이 소개하세요. 여러분들의 순종을 통해서.. 우리의 말재간으로 상대방이 설득당하는 것이 전도가 아니에요. 하나님이 이미 마음을 열어 놓으셨어요. 바울이 빌립보에 도착했을 때, 그 강가에 한 무리의 여자들이 말씀을 듣고 깨닫기 시작합니다. 성경이 정확히 머라고 설명하시죠? 성령께서 그 마음을 열어놓으셨다고 해요. 안 될 것 같은데, 우리 표현으로.. '어! 하나 얻어걸렸네?' 아닙니다. 성령이 미리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분은 예수님을 증거 하시는 분이세요. 그래서 성령 충만한 분은, 항상 주님만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주님만 높이게 되어 있어요. 성령 충만의 가장 첫 번째 열매가 겸손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교회 성도들은 성령 충만하면 무서워져요. 겁나요. "너 예수 믿어!" 어떤 녀석들은 나에게도 "목사님, 예수 믿습니까?!" 기도원 갔다 와서.. 성령 충만한 사람은 겸손해져요. 왜? 성령님의 역할이 항상 자기를 드러내러 오신 게 아니라, 예수님 드러내러 오신 거예요.
마지막으로, 고린도전서 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주실 것입니까? 주신 것입니까? 그것을 알게 하려 하시려고 누가 오시는 거예요? 성령님이 오시는 거예요. 믿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미 많은 보석을 주셨는데, 보석을 보석으로 보지 못하고 돌멩이로 알고 살아가는 가난한 인생들.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런데 성령님은 오셔서 그것을 보석으로 보게끔 조명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 힘으로 살겠습니까? 성령님 의지해서 살겠습니까? 그 싸움이에요. 그러니까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전이 아니라 성령님의 행전이에요. 삼일교회가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모든 성도님들이 위로부터 임하는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의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다시한번 교회 공동체에게 명하신 하나님의 꿈 우리 각 개인에게 명하신 소명에 붙들리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적용찬양 - '성령이 오셨네'
기도제목
하나님의 꿈을 실현하는 교회 되게 하시되, 성령님 임재하셔서 필히 앞장서 주시옵소서. 내 개인의 인생 속에서도 충만히 찾아오셔서 내가 이 일을 하다 죽어도 좋다는 소명을 발견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소명에 눈 뜨는 성령에 충만한 자가 되게 하여 도와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