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story/송태근목사

사도행전 강해(6) 사도행전 3:1-10 I 미문 곁의 인생 I 삼일교회 I 송태근 목사

№1★↑♥ 2021. 7. 22. 11:47

  오늘은 사도행전 3장을 중심으로 해서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가 일어난 아주 유명한 사건을 조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이 본문을 설교할 때나, 읽으면 잊지 못할 설교 한편이 생각이 납니다.

 

 

미문 곁의 인생

 말씀을 들을 때, 송태근이 하는 설교로 이해하지 마시고 내가 오늘 엄위하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존전 앞에 앉아 있다는 마음으로 마리아가 주님 무릎 앞에 말씀을 듣던 심정처럼 "주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며 말씀을 들을 때, 성령께서 여러분들의 눅눅하고 축축했던 저 심령 깊숙했던 곳까지 빛으로 말씀으로 조명하셔서 건드리시고 만지시고 소성케 하시는 시간이 될 줄 믿습니다. 

 

  3:1, '제 구시 기도시간에..' 시 55:17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하루에 세번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저녁부터 기록이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저녁부터가 하루가 시작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이들의 의식 세계 속에서는 마지막이 좋아야 모든 게 좋다는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루에 세 번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는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제 구시 기도시간에..' 여러분구시에 여섯 시간을 더하면 우리가 이해하는 시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시간 개념으로 오후 3시의 기도시간에.. 그때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올라갑니다. 

  베드로와 요한이라는 사람의 이름이 밝혀져 있지만, 사실 여기서 이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두명이라는 숫자입니다. 히브리어에는 숫자마다 의미와 개념이 담겨 있죠? 2는 '증거의 수, 증인의 수'입니다. 이 두 명이 등장할 때는 앞으로 이들을 통해서 펼쳐질 사건이 역사에 매우 중요한 메시지가 되고, 의미를 담은 사건이라는 것을 두 증인의 수로써 암시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중요한 사건에는 둘 이상의 사람을 세워서 겪게 만들고 증인이 되게 하신다. 틀림이 없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서 펼쳐질 사건은 매우 중요하고,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정한 시간에 기도하러 가다가 어떤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2절입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카메라 렌즈는 좁은 현장을 자세하게 들이대고 있습니다. 성전의 미문이라는 문이 있는데, 그 앞에 매일 걸인 하나가 사람의 등에 엎혀서 구걸하는 초라한 행색의 사나이를 조명하고 있어요. 우선 이 걸인에게 초점을 맞추기보다 미문이라는 것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영어 성경은 이 문을 'beautiful gate'라 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문'의 또 다른 별명이 하나 있었는데 'golden gate'. 왜 그런 별명이 붙었는가? 그 문이 실제로 황금으로 덮여 있었기 때문에 그 문의 화려함과 위용은 어마어마했습니다. 그러면 이 성전의 문을 왜 그렇게 만들었으며, 유대인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에 대해서 좀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성전을 지은 사람은 헤롯입니다. 헤롯은 혈통적으로 컴플렉스가 있습니다. 에서의 혈통입니다. 그래서 분봉왕으로 유대 땅을 통치는 하고 있었지만, 유대인들이 정서적으로 협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힘들겠어요? 헤롯이 고민하다가 까탈스러운 유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 로마 정부의 허가를 받아서 예루살렘에 1/4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대지위에 무지막지한 재정을 들여서 성전을 지어요. 종교심이 강하기 때문에 성전을 멋지게 지어주면 자신에 대한 신뢰가 상승하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금과 헌금을 많이 거둬들여서 무지막지한 성전을 짓습니다. 그리고 그 성전의 가장 중요한 상징이 오늘의 '미문'입니다. 그 문짝은 황금으로 입힌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때만 그랬던 게 아니고 역사적으로 교회 건축사를 보면, 교회 정문을 만드는데 어마어마한 재정을 들였어요. 이 때는 얼마나 건축이 컸는지 예수님 당시 때도 건축을 진행하고 있었고, 완공이 안되었을 때입니다. 그래서 웬만한 교회에 가면 정문에 가장 공을 들입니다. 유대인들의 종교적 허영심을 충족케 하는 문인 데다가, 그 문을 지나 예배드리러 들어갈 때의 자부심은 대단한 것입니다. 허영과 교만이 녹아져 있는 대표적인 상징적 문이 바로 이 문입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알고 오늘의 본문을 보셔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미문 옆에 자기 힘으로도 올 수 없는, 나면서부터 앉은벵이가 된 걸인 하나가 사람들의 수고에 의해서 거기다가 매일매일 던져지는 인생이 하나 있어요. 그리고 거기서 생존을 해요. 이 사람은 생존을 위한 수단이 바로 예배자들의 종교적 허영심을 먹고사는 인생입니다. 그 종교적 허영심은 이런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절대 틀릴 수 없는 선택받은 예배자로서 황금 문을 들어간다'는 의미를 다니면서 온갖 넓은 술과 화려한 옷을 차려입고 예배하러 들어가요. 그런데 그 옆에 거지들이 앉아있단 말이에요. 그러면 예수님은 구제를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도록 하라고 하셨지만, 외식 주의에 뿌리 박힌 유대인들은 기도를 해도 골방에서 하는 법은 모르고 광장에서 소리쳐 기도하고, 시장거리에 서서 기도하고, 구제를 할 때에도 제스처를 과장되게 하여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알 수 있도록 종교행위나 구제 행위를 했단 말입니다. 그런 종교적 허영심을 건드려서 먹고사는 인생이 이 앉은뱅이입니다. 여러분 이 거지는 누구일까요? 또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허영이 가득한 예배자 속에 또 다른 측면입니다. 그것을 이렇게 또 다른 한 인생으로 설정하여 설명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거지는 어떤 또 다른 사람이 아입니다. 허영이 가득하고 교만의 상징인 저 문으로 들어가는 예배자 속에 웅크리고 드러나지 않은 그림이에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 

  오늘도 무엇을 바랄까? 구궐하는 인생. 이게 오늘 우리의 예배의 요소 속에 허영심이 가득한 모습 뒤에 감추어진 또 하나의 모습이라는 것을 절대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오늘 바로 이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그 문으로 들어가다가 이 사내를 보게 됩니다. 4-5절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김춘수 씨가 쓴 꽃이라는 시가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 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무심히 길바닥에 잡풀 같은 인생이었어요. 그런데 내가 불러주고, 내가 눈 여겨주고, 호흡을 넣어주는 순간 그 잡풀이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처음 이 성전에 들어갔나요? 오늘 이 거지는 처음 이 자리로 나와서 영업을 시작했을까요? 수십 년 그렇게 살아왔을 것입니다. 매일 그 미문에 앉아서 구걸을 했을 거예요. 이 사도들도 처음 들어가는 길은 절대 아닙니다. 지겹도록 정해진 시간에 뭔가를 구하기 위해 출입했을 것이고 그 미문의 오늘도 생존을 앉아 있는 거지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 거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해요. 그리고 웬걸 두 사도가 자기를 주목하더니 자기를 불러줘요. "우리를 바라보라." 여러분, 이 무심했던 관계를 생명으로 이어주었을까요? 위로부터 임했던 성령의 역사입니다. 어제의 사도들이 아니에요. 오순절이 임하고 마가의 다락방에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임하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물건을 서로 통용하게 되고,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생명을 나누고, 그 생명을 확인하고, 기쁨이 있었어요. 이 사도들은 어제의 사도들이 아닙니다. 무심히 지나쳤던 수많은 시간들이었지만.. 오늘은 그 한 영혼이 눈에 들어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오늘도 하루의 생존을 위해서 미문에 앉아 있던 거지입니다. 그런데 성령 받은 사도들이 주목하여 바라봐주고, 부르면서 말씀 앞에 영광 앞에 주목케 하니까, 어떤 역사가 일어납니까? 결과를 보면서, 결과가 갖는 의미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4-8절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여기 하나님을 찬송했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드디어 참된 예배자로 회복이 되었다 그말입니다. 이것이 이 땅에 성령의 임재를 통해서 설립케 하신 교회가 붙들어야 될 가장 중요한 목적지입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 하루 생존을 하고 있던 이 걸인이 성령이 임하고, 생명이 들어가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뛰기도 하고, 걷기도 하며 노래하는 자 예배자가 되었습니다. 

  겔 37: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죽은 시체가 아니라, 시체를 뛰어넘어서 뼈들이 골까기에 가득합니다. 2절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어느 정도로 오래된 뼈인지 아시겠어요? 아주 말라버린 정도예요. 3-4절 '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뼈들이 말씀을 들을 수 있나요? 뼈들이 청취할 수 있어요? 이것은 하나의 선포요 선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도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이기 때문에 죽은 심령 같은데도 하나님의 말씀이 던져지고 심어지면.. 언젠간 그 말씀이 운동력이 있기 때문에 싹이 나고 줄기가 솟아서 열매를 맺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누구입니까? 사울입니다. 스데반이 던졌던 그 설교를 듣고, 돌팔매질하며 상대를 죽였던 장본인입니다. 그런데 부활의 주님과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그 마음에 던져졌던 말씀이 폭탄처럼 심령 안에서 터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는 유럽을 뒤집는 선교자가 되지요.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장 말씀이 이해가 가지 않더라도 무심히 듣는 것 같아도 들어두세요. 말씀 자체가 능력입니다. 뼈들은 반응할 수 없습니다. 5-절 '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6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성령님을 말합니다. 성령이 호흡하시고, 성령이 내주하시도록 성령이 들어가면 마른 뼈도 살아납니다. 믿습니까? 마른 뼈도 일어납니다. 뭘로 일어나느냐? 10절입니다.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골짜기의 시체보다 더 비참한 마른 뼈들이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고, 성령의 바람이 불자 하나님의 큰 군대로 일어섭니다. 우리 삼일교회에 이런 부흥이 다시 있기를 축복합니다. 한국교회는 지금 골짜기에 가득한 마른 뼈들과 같아요. 재정도 갖추었고, 인적 자원도 갖추었는데 생기가 없어요.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꼼짝도 못 하는 생존을 위해 급급한 앉은뱅이와 같은 인생입니다. 오늘도 이 성령의 바람이 삼천리 반도 강산, 황폐하고 척박한 땅 백두에서부터 한라까지 불어 임할 때, 그 선봉에 여러분들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자, 그런데 이 참된 예배자로 성전 미문에 앉았던 한 사람이 일어나는 이 사건이 성경 전체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오순절 날 성령이 강림하시고 이 땅에는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하나님의 교회가 탄생이 됩니다. 그리고 이 앉은뱅이가 일어나 사건기 첫 기적이었어요. 그러면, 이 기적은 무엇을 내포할까요? 단순히 일어서지 못하던 자가 고침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에 머물지 않습니다. 첫째는, 드디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는, 그래서 그 나라의 주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시작이 되었다. 믿습니까? 이제는 그분의 나라가 임했고 그분의 통치가 시작된 것입니다. 누구에게? 성령 받은 사람들에게..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사인입니다. 여러분들은 각자가 하늘나라의 분소요 지점입니다. 여러분들이 저 문을 나서서 삶의 예배 자리로 나갈 때, 예배자로 나가면서 하나의 교회로 나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우리 삼일교회가 다시 한번 불을 지피고, 기도로 들끓는 가운데 성령의 내주를 경험하고 생기와 같은 바람이 죽은 뼈들 사이에 들어가서 저 눅눅하고 축축한 죄악 깊은 곳에, 얽매였던 곳에 폭탄처럼 부어져서 모든 것들이 소멸되고, 다시 한번 새로운 생명으로 일어나는 복음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찬양 : 여호와의 유월절

내 심령 깊숙하나 곳에 미문에 앉은 뱅이의 모습이 없는가를 돌아보십시다. 성령님, 이 시간 내 영혼 깊숙한 곳에 터치해주시고, 임재해주시고, 만져주셔서 다시 한번 죽었던 삶의 자리가, 참된 예배로 일어서는 기적을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끊어졌던 소망이 회복되게 하시고 절망의 자리에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조명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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