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설교] 이사야 40:1-8 I 위로의 새로운 정의 I 송태근 목사
오늘의 이사야서는 1:2에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굉장히 시적인 표현이 등장을 합니다. 하늘이 어떻게 듣고, 땅이 어떻게 귀를 기울일 수 있을까요?
위로의 새로운 정의
하늘, 땅 사이에 뭐가 있을까요? 하늘과 땅 사이에는 초등학생 말로 '과'가 있다는 의미는 아니겠지요. 하늘과 땅 사이에는 인간의 수많은 역사와, 사랑과 배반과 증오 등이 다양하게 녹아져 있어요. 그걸 시적인 표현으로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그러면 우리가 느낌적 느낌으로 안단 말이에요. 그렇듯이 이 이사야서의 말씀은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마땅히 하나님의 자녀로서 표현이 되는데 소도 나귀도 주인을 아는데 내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녀로 양육을 했건만 그들이 어떻게 나를 배반하느냐? 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표현을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라고 표현을 하고 있는 거예요.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는 표현들을 사극이나 어른들이 쓰시는 것을 종종 듣게 됩니다. 하늘이 어떻게 알고, 땅이 어떻게 듣나요? 온천하가 다 안다는 거 아니에요? 그와 같은 시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면, 하늘과 땅 사이에 던져진 이스라엘의 운명과 그리고 인간의 역사, 인생을 보면 뭐가 있을 것 같아요? 여러 사람 예를 들것도 없이 인생의 최고 정점을 찍었던 상징적 인물, 솔로몬. 솔로몬은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을 누릴 때까지 누려본 사람입니다. 그가 전도서라는 책을 쓰면서 인생을 딱 세 단어로 정의했지요? 모순, 불확실, 허무. 인생을 그렇게 정의했어요. 모든 인간사가 심은 대로 나지 않더라고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정말 애지중지 나의 백성, 그들의 왕이 되셔서 잘 앙육했건만 그들은 한시도 하나님께 집중하는 법 없이 한눈팔고, 딴짓하고 배반해서 하나님이 이들을 역사의 풀모에다가 집어넣으시지요. 앗수르의 포로를 만들고, 바벨론의 포로를 만들어요. 몇 년을 그 역사의 풀무에 던져졌냐 70년. 그리고 오늘의 본문 1절,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1절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이후에 표현되는 모든 구절들을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너희는'이라는 표현은, 같은 표현과 단어지만 대상 자체가 다릅니다. 앞의 '너희'와 뒤의 '너희'가 다릅니다. 뒤의 '너희'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벌어진 인간의 삶의 문제를 의인화시켜서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쉽지 않으시죠? 다시 한번 설명드릴게요. 하늘과 땅 사이에 벌어진 허무, 모순, 인간의 배반, 증오, 눈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역사의 고난과 같은 것들을 총칭해서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그러니까, 이런 겁니다. 그들이 지금까지 남의 나라에 끌려가서 포로가 되어서 겪었던 실패, 넘어짐, 좌절, 실망 등 모든 것들이 마지막에는 사실상 이 백성을 위로하는 것으로 쓰인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그것을 지난 아팠던 시간과 역사를 의인화시켜서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우리가 살다 보면 그렇잖아요? '왜 하필 이런 일들이 나에게 생길까? 이건 정말 내 인생에서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한 일인데..?' 당시에는 이렇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길을 가다 보면 혹독한 추위도 만나고, 심장이 터져나갈 것 같은 언덕도 만나고, 산 넘었나 싶으면 더 가파른 산을 만나고.. 이게 내 인생 속에서 무슨 의미가 있고 무슨 소용이 될까 싶었는데 그게 하나님의 커다란 손길과 만짐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마지막에는 위로하는 도구로 쓰였더라고요. 그러면 그 내용을 한번 더 보겠습니다.
2절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도대체 이스라엘 백성들의 위로가 뭘까요? 이들의 포로기가 끝나고 곧 고터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것을 암시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포로에서 해방되는 것이 이들에게 위로라는 말일까요? 물론, 넓은 범주에서 그것도 위로일 수가 있어요. 그런데 여기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글을 받아 적으면서 진짜 위로는 단순히 그들이 포로생활을 하다가 해방이 되고 풀려나서 위로가 아니라 그들이 풀무의 역사 속에서 고통을 겪으면서 점점 더 누구에게만 간절하게 되었다고요? 하나님에게만 간절하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게 위로라는 거예요. 고린도후서에 보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편지를 쓰면서 위로의 내용을 7장 즈음에 가서 언급합니다. 그때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곤고함을 입은 자 때문도 아니고 그 곤고함을 가해한 가해자를 위한 것도 아니다." 피해자를 위한 것도 아니고 가해자를 위한 것도 아니다. "어떤 벌어진 혹독한 그 일로 말미암아 교회 공동체 자체가 하나님만 소망하게 되고, 하나님께로 만 간절하게 된 것이 위로다." 그런 말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사야 선지자가 단순히 그들이 70년의 고통에서 이제 풀려나고, 복역의 때가 끝난 것이 위로라는 것이 아닙니다. 복역의 풀무의 역사 속에서 그들이 지난 모든 과오(하나님을 불신했던 죄악들을 제거하고)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만 간절하게 된 그 심령의 상태를 위로라고 말하는 거예요.
3절 '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우산 여기, '대로'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이 도로는 왕이 행차할 때 사용되는 도로를 말합니다. 시온의 대로라는 표현이 있지요? 왕이 출입하는 길을 말하는 것이에요. 여기서의 왕은, 세상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이 대로는 왕이 폼 잡고 단순히 행차하는 그런 길이 아니라, 왕이 뒤에다가 전쟁을 치러 낸 끝에 백성들을 회복하고 백성들을 도로 찾아서 승리를 가지고 돌아오는 행렬입니다. 그것이 포로 귀환입니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고난과 흑암의 어두운 골짜기로 던져놓고 팔짱 끼고, 정신 차리나 안 차리나 두고 보자는 식으로 계셨던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도 그들의 눈물 속에, 그들의 부르짖음 속에, 고난 속에 함께 하셨다는 것이에요. 그들이 아주 무너지지 않도록.. 아주 주저앉지 않도록.. 그래서 400년 히브리 노예들이 복역의 때가 끝날 때 모세를 부르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그들의 고통을 정녕 히 보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그들의 우거를 알고"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겨운 나그네 순례길에 팔짱 끼고 나 몰라라 하셨던 분이 아니에요. 복역의 때를 보내게 하실 때 그곳에 같이 계셨어요. 그리고 이제 그것을 마치고 그들을 이끌고 왕의 대로로 오는 거예요. 그래서 그 길을 예비하라. 그 길이 어디에 있었나요? 광야 또는 사막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곳은 어떤 공간입니까? 먹을 식량이 없고, 사람이 살기에는 부족한 모든 조건을 다 갖춘 무서운 곳이 광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걷는 광야와 우리가 걸어가는 광야는 똑같은 공간이지만 본질적으로 다르지요. 풍랑은 어디에나 있어요. 그러나 그 속에서 예수님과 고요를 누리고, 평안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포로 되었던 자녀들을 복역의 때로 끝내고 이 하나님의 대로로 등장하시는 거예요.
4절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걸었던 길의 지형도예요. 어쩔 때는 죽을 것만 같은 골짜기에 처박혔다가 어떤 때는 허파가 튀어나올 정도의 산길을 걷게 하셨다가.. 그런데 그 길을 지나다 보니까 심장이 튼튼해지고 다리에 알통이 배기고 근육이 만들어졌어요. 결국 그런 순례와 나그넷길이 힘겨웠던 시간들이 그 길 끝에서 보니까 나를 강건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했다는 거예요. 그것이 하늘과 땅 사이라는 인생살이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에요.
요즘 연세대 명예교수님이신 김형석 씨가 이런 강연을 하시네요? '백세를 살아보니..' 툭툭 던지시는 강연을 몇 편들어봤어요. 한 마디 한 마디가 어마어마한 인생의 이야기가 녹아져 있더라고요. 특별히, 연세 드신 분들이 젊은이들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가? 100세를 사신 분이 그런 해안이 나오는지 몰라요. 그분이 겪어서 나오는 거겠죠? 우리도 광야길을 걷다 보면, 골짜기를 만나고 산을 만나고 합니다. 만날 때는 이 골짜기가 왜 있어? 산은 또 뭐야? 구시렁거리고 댕댕거리며 지나왔는데.. 그런 지형도를 지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내가 유약해 빠지고 병들고 더 형편없이 결말을 맺게 되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인생사에 나에게 수없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밀어닥치는 파도들이 무의미하거나 불필요한 내용들이 없다는 거예요. 믿으십니까? 자, 그런데 그러한 것들이 왜 필요했던가?
5-8절 '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6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짧게 3년을 사역하시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데 그 3년 동안 남긴 예수님의 족적 가운데 가장 중심 골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부활마저도, 고난마저도, 죽음마저도 전부 뭘로 처리되지요? '성경대로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400년 동안 히브리 노예들이 애굽에서 부르짖었지요? 부르짖어서 하나님이 구원하신 것도 있지만 바로 앞절에 보면 이런 기록이 등장을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야곱의 하나님이 그들에게 하신 언약을 기억하사..' 언약을 기억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 모~ 든 진행되는 역사가 좁게 보면 싫은 것도 피하고도 싶고, 아닌 것도 있지만.. 조금 떨어져서 하나님의 주권적 시각에서 보면 이 모든 것들이 전부 누구의 주권대로 역사하는 것인가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나를 위로하시기 위해서 진행되는 역사라고요. 제가 자주 인용하는 요셉의 이야기 많이들 들으셨죠? 자기는 영원히 피해자인 줄 알았어요. 그러고 형들은 영원히 가해자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온천하게 기근이 들어 식량을 구하러 엎드린 형들의 모습을 보면서 소스라치게 깨달아지는 게 하나 있지요? 형들도 힘들었더라고요. 아버지의 편애로 가슴에 멍을 담은 채 그걸 하나님의 시선에서 바라보니까 요셉의 마음속에 첫 번째로 무너졌던 것이 가해자와 피해자의 담이 무너져요. 형들도 힘들었구나!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이 하신 거구나! 이 기근의 때에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런 고백을 쏟아내지 않습니까? 여호와의 영광을 본 거예요
결국 이사야는 오늘의 말씀을 마무리 지어집니다. 9절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입니까? '보라 하라'입니까? 결국, 진짜 위로는 이사야에게 백성들에게 찾아가서 위로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그 희망을 잃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찾아가서 인간적인 관계나, 인간적인 설득과 노력으로 그들을 위로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게 진짜 위로라는 거예요. 우리는 어설프게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인간적인 매너와 인격으로 다가갑니다. 물론 그것도 필요해요. 필요하다고 봐요. 그런데 정말 필요한 것은? 양자가 누구를 바라보는 자리까지?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자리까지 가게 될 때 진짜 위로가 와요. 사람의 설득과 매너와 노력으로 만 되는 게 아닙니다. 목회적 실수가 거기서 벌어집니다. '하나님을 보라 하라' 이것이 이제 나타날 영광 앞에 이사야가 부여받은 시대적 사명이었어요. 그리고 그것은 곧 이 시대의 삼일교회가 감당해야 할 또 하나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이 땅의 모든 교회의 위용스러움과 찬란한 영광은 계속 내려놓고 오직 교회는 이 시대를 향해서 하나님의 실존, 하늘과 땅 사이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인간의 군상들의 몸부림을 통해서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진행되고 있으며, 그 결말이 결국은 우리에게 궁극적인 위로가 될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주목케 하는 데까지의 순종이 진짜 위로라는 것입니다. 오늘 또 새날을 맞는 우리 모든 삼일의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진짜 위로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하나님께 시선을 둘 때 참된 위로가 있음을 기억하여 지금도 또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숙제, 이 순례길 여정 끝에 그분의 영광을 만나는 복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찬양 - 마라나타
기도
'너희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 거기서 말하는 '너희는' 우리가 살면서 이 시대 속에서, 이 시공간 속에서 피하고 싶었던 모든 곤고한 어려움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들이 그 힘겨웠던 시간들이 결국 우리를 위로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위로의 결정은 바로 그리스도께 하나님께만 간절하게 되는 은혜를 이야기합니다. 그 말씀 붙들고 기도합시다. 주님 다시 오실 길에 부름 받은 이 순례길에 있는 우리가 오늘 주신 말씀을 다시 붙들고 일어나 묵묵히 그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