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I 마태복음 9장 18-26절 I 믿음의 세 단 계 I 송태근 목사
삼일교회 송태근 목사 특별새벽기도(땅 끝에서 주를 만나리라) 마태복음 9장 18-26절 믿음의 세 단계 설교문. 본문은 그를 '한 관리'라며, 본문을 기록한 마태는 그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밝히지 않았는데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을 종합해 보면 그는 회당장임을 알 수 있습니다. 회당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붙들려 가면서 이방 땅에서 불가피하게 흩어져 살아갈 때... 그들의 예배처가 만들어졌고, 거기에서 회당장이라는 직함이 생겼습니다. 그러니까 포로기 이후로 보면 됩니다.
특별새벽기도(땅 끝에서 주를 만나리라) I 믿음의 세 단계
- 삼일교회, 송태근 목사 -
그러면 이 회당은 뭐 하는 곳인가? 단순히 예배만 드리고, 말씀만 가르치는 곳을 뛰어넘어서 유대인들의 모든 삶의 복합적인 공간이라 할 수 있어요. 문화적인 영역도 이루어지고, 만남의 장소로도 활동이 될 만큼 유대인들의 일상에서 빠트릴 수 없는 매우 중요한 공간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회당장이라는 것은, 꼭 제사장만이 되는 것이 아닌데.. 상당한 식견과 능력과 모든 걸 구비하지 않으면 임명될 수 없는 그런 위치. 여기서 예배가 드려질 때의 순서를 결정하고, 누가 성경을 읽을 것이지 등에 대한 배치를 해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회당장은 상당한 위치에 있었던 자로 이해할 수 있어요.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어요. 당시의 모든 것을 사실상 가지고 있던 사람. 그에게 외동딸이 있었어요. 그의 상태를 성경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8절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
오늘 본문에서 딸이 방금 죽었다고 말했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 누가는 조금 표현이 다릅니다. 마가는 '내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라고 말했다고 소개하고, 또 의사 출신인 누가는 '그의 딸이 죽어간다.'라고 묘사를 한다. 그러면 두 사람의 입장이 같고 마태의 기자와 기록의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맞는 것 같은가요? 마태는 조금 그 상황을 극단적으로 묘사를 한 것 같습니다. 그럴 수 있지요? 희망이 없을 때, 그냥 '죽었다.'라고 묘사할 수 있지요. 그런데 다른 복음서를 종합해 보면, 또 의사의 시각에서 보는 게 좀 더 명확하기에 '죽은 것'은 아니고 '죽어가고 있었다.'라고 보는 것이 좀 더 객관적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죽어가고 있는 상태는 되돌이킬 수 없는.. 즉 희망이 없을 만큼 절체절명의 상태를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내 힘으로는 모두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모든 걸 갖추고, 모든 걸 가진 이 사람에게 외동딸은 전부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12살이면 얼마나 이쁠 나이입니까? 그런데 모든 걸 가지고 있었던 회당장이 하나밖에 없는 사랑 스런 딸아이가 죽어가는 고통 앞에서 어찌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누구를 찾았나요?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자, 이 부분도 우리가 조금 더 깊게 풀어헤쳐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이 회당장은 예수님을 어떻게 찾아왔을까요? 적어도 예수님에 대한 기본적으로 주변에서 듣고, 보고 돌아다니는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분이 고친 병자가 이런저런 사람이 많더라..' 그뿐 아니라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다." 여러분, 회당장의 이 고백을 어떻게 보십니까? 믿음이 아주 없었던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조금 샤머니즘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오셔서 손을 얹어 달라.'는 회당장의 모습은 백 부장의 믿음에 비하면 조금 처지는 것 같습니다. 백 부장은 "내 집에 들어오시는 것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말씀만 하소서."라고 한 것을 보면, 아마 그 믿음까지는 미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정보를 듣고 있었고, 그 정보를 기초로 조금 뒤섞인 믿음이긴 해도 지금 워낙 자기가 직면한 상황이 급하니까, 와서 손을 얹어주시면 내 딸이 나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연약하지만... 예수님께 왔던 것입니다. 어느 아버지인들 안 그러겠습니까? 고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무슨 짓이든 할 충분한 여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왠 걸 예수님이 그 회당장의 상황에 대해서 아무 언급이 없이 따라나섭니다. 19절입니다.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지금의 모습에서는 예수님이 회당장을 따라나섭니다. 그러나 나중에 회당장이 누구를 따르게 되냐? 예수님을 따라나서게 됩니다. 패턴과 의도가 바꾸게 된 것입니다. 두 개의 사건이 엉켜 있습니다. 20절입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12해를 앓던 혈루병 걸린 여인이, 청중이 바짝바짝 둘러싸 이동하던 중에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지금의 상황은 분초를 다투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능력이 나가서 한 여인이 고침을 받았다면, '아! 그런 일이 지금 벌어졌구나!' 인지하고 빨리 본 목적지를 향해서 가셔야 하지 않을까? 예수님이 계셨던 곳에서 야이로의 집까지의 거리가 얼마인지는 말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이 행렬은 상당히 분초를 다투는 길 위에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의 시각에서 이 상황을 봐야 하냐면, 야이로의 시각에서 속이 새카맣게 타 들어가는 누구일까요? 그렇습니다. 야이로입니다. 그런 중에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다른 복음서에 의하면, "누가 내 옷을 만졌냐?" 찾으십니다.
이 광경을 야이로가 볼 때 속이 어떻겠어요? "이 양반이 지금 장난하나?" 그런 맘 아닐까요? 성경으로 읽기 전에 상식선에 보자면 그런 마음 들지 않을까요? 제가 야이로라면, 화가 치밀어 올랐을 것 같습니다. "뭐 하자는 거야, 지금!" 물론 12해를 혈루병을 앓던 여인이 상황도 여인의 상황도 절박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신기하게도 야이로의 딸이 몇 살인지 아십니까? 12살입니다. 그리고 이 여인이 겪은 고통의 세월도 12년. 그러면 야이로의 딸의 12년과 이 여인의 겪은 12년의 세월은 동시성. 그런데 한 아이는 12년 동안 어떤 삶을 살았을까? 금이야~ 옥이야~ 최고로 찬란한 순간을 매일매일 사랑하는 아빠에 의해서 누렸을 것입니다. 한편 유대 땅 어느 곳에서는 비정기적으로 피를 흘려가면서 저주받은 자로 보낸 12녀. 이 여인은 지금 이렇게 돌아다닐 수 있는 신분이 아닙니다. 율법에 의하면 저주의 대상, 부정한 여인입니다. 그런데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청중 속에서 끼어들어서 특별히 예수님의 옷을 만졌다는 것은 자기의 부정과 자기의 더러움을 전가시키는 행위입니다. 이 양자 간에는 어떤 연결고리를 갖고 있습니다.
오늘은, 길로 중에 발생한 사건을 통해서 갖는 야이로의 상태에 초점을 주기 원합니다. 야이로는 굉장히 화가 났을 것 같아요. 그럼에도 어떻게 합니까? 지금 뭐라고 재촉했다가, 안 가시면 안 되니까.. 예수님이 지금의 상황을 정리하실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어렵게 모시고 가는 길에 '치우라'라고 할 수도 없었을 테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인이 고쳐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길을 시작합니다. 23절입니다. '예수께서 그 관리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그런데 그대로 마가복음 5장을 보실까요? 마가복음 5장 32-35절입니다.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3333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35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그냥 그렇게 지체하다가 다시 길을 재촉해서 목적지인 회당장의 집으로 진행하고 있는데.. 길 도중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 하나가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서 터져 나온 소식은? 실낱 같은 희망마저도 산산이 조각 나는 불행한 소식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주인님, 더 이상 선생님 괴롭게 하지 마십시오. 방금 당신 딸이 숨을 거두었습니다." 회당장은 얼마나 기가 막힐까요? 그 길에서 지체만 하지 않았어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마가복음 5장 36절입니다.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지만 하라 하시고'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문제는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시점이 키 포인트입니다.
- 회당장이 처음 예수를 만나러 왔을 때 했다?
- "나랑 같이 가자." 길 떠날 때 하셨다?
- 길에서 여인을 만나 지체할 때 하셨다?
1~3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말을 하신 시점은,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실낱같은 희망마저 산산이 조각이 난 시점에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한 가지 생각을 걸러낼 중요한 초점이 하나 있습니다. 야이로, 아버지에게 남은 것이 무엇일까? 이 말을 믿는 수밖에 없다. 바로 여기에 초점이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런데 이 아버지에게는 이 예수님의 시점에서 희망이 모조리 사라진 시점에서 남겨진 거라곤 예수님이 하신 말씀만 남겨진 상황. 바로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에게 발전시키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야이로의 믿음은 3 단계로 검증이 됩니다. 희미한 믿음이지만,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이것도 믿음입니다. 두 번째, 예수님이 어떠한 목적과 의도성을 가지고 해프닝을 벌이면서 지체되었지만, 그때도 야이로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길을 가다가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건 뭔가? 끝나 버린 것입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남겨진 거라고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 결과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야이로의 믿음은 이렇게 발전을 해간 겁니까? 발전을 시킨 걸까요?
우리는 신앙이라는 길을 가면서, 처음 믿음 붙들고 그것만 우려먹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청년 때 장난 아니었어.. 내가 언제 적 봉사할 때 장난 아니었어.. 그걸 미국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So What? 믿음은 계속 전진해야 하고, 발전해야 하고, 커져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커 가야 되고, 깊어가야 하는 믿음의 기초가 무엇이어야 하냐?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야이로를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시는 관점이자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이 시대에 부흥을 기대하고, 참된 성장을 다시 요구하는 시대적 절실함 앞에서 우리가 시선을 맞추어야 할 부흥의 핵심입니다. 말씀이 기초되지 않는 부흥은 거품입니다. 어떤 사연이 발생하고 일이 발생하면 더 사라져 버립니다. 그런 거품은 빨리 없어지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 믿음은 어떤가요? 우리는 누군가? 땅 끝을 향해서 걸어가는 신앙인의 순례길에 서 있습니다. 과연 우리의 믿음은 깊어가고, 자라 가고, 풍성해지고 있습니까? 정말 여러분, 말씀으로만 충분하다는 고백만 하는 사람입니까? 그 실제를 사는 사람입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걸 중간에서 12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사건을 오해서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죽은 자나 숨 쉬고 있는 자나 예수님의 기준에서는 큰 의미가 없어요. 도착해 보니 예수님 앞에는 생명은 떠나고 흙덩이가 되어 있는 조그만 시선이 누워있습니다. 한 소녀의 죽음 앞에 시끄러운.. 바께 드러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 물리치고 예수님이 '달리다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아침에 이 말씀을 야이로의 시각에서 조명해 보면서 이 말씀을 함께 경청하고 있는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 하나입니다. 말씀의 기초에서 그 믿음이 더욱 깊어지고 풍성해지고 자라고 있는가? 야이로의 믿음도 3단계를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이 아침에 기도할 때, 첫 째 내 믿음을 주 앞에서 점검해 보는 시간을 갖고, 오늘 우리의 순례길에서 제일 필요한 것은 어떤 현상, 기적,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 붙들게 하옵소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