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story/송태근목사

설교문 I 사도행전 강해(33) I 사도행전 18:1-11 I 경륜 I 송태근목사

№1★↑♥ 2023. 3. 9. 13:39
2014년 3월 9일 / 주일 낮 예배 / 설교문 / 사도행전 강해(33) / 사도행전 18:1-11 / 경륜 / 송태근목사. 바울은 고린도에 도착을 했습니다.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아시아로 가려고 했으나 뱃머리를 돌려서 처음으로 도착한 곳이 빌립보입니다. 그곳에서 귀신 들린 여종을 고쳤다는 이유로 고발을 당하고, 매를 맞고 죽을 뻔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쫓겨서 간 곳이 데살로니가입니다. 거기에서 복음을 훼방하는 유대인들에 의해서 고용된 불량배들에 의해서 또 죽을 뻔합니다. 그리고 쫓겨서 간 곳이 베뢰아입니다. 베뢰아 사람들 자체는 신사적인데, 데살로니가 깡패들이 거기까지 쫓아와서 복음 전하는 것을 훼방합니다. 그리고 또 밀려서 간 곳이 아덴이라는 도시입니다. 거기서 그만 수많은 우상의 신전을 보면서, 사도 바울이 변론을 하는 바람에 소요가 일어났고 거기에서도 쫓겨났고 그래서 도착한 곳이 고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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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8:1-11 / 경륜

- 삼일교회 송태근목사 - 

 

 

 

이 행로를 보면, 두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한 번도 계획하고 의도해서 간 장소가 없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가는 데마다 고난과 어려움이 있었다는 거예요. 예기치 않은 일들이 일어나요. 그렇게 도착한 곳이 고린도인데, 그곳에는 그를 지지하거나 돕는 자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당시의 고린도는 무역항이다 보니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곳이었어요. 학자들의 기록에 의하면 인구가 70만. 어마어마한 대도시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돈이 잘 돌았어요. 부자예요. 돈 많으면 뭐 하게 되는지 아세요? 죄짓게 됩니다. 그래서 굉장히 타락하고 부패한 동시의 상징이었습니다. 심지어 '코린티안'하면, 음란의 상징으로 불리던 도시였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 도시적 색깔이 교만했어요. 부, 타락 그리고 교만. 왜? 하나님이 하필 이런 도시에 사도 바울을 떠밀어 놓으셨을까요? 바울 본인의 입장에서도 이해가 안 되었을 거예요. 10절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이 서중에 누가 많았어요? '내 백성이 많다.'는 말은 '나의 택한 백성이 많다'는 뜻이에요. 지금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많다는 말이 아니고, 앞으로 복음을 듣고 돌아올 영혼이 많다는 뜻이에요. 이러 점을 보면, 믿음의 사람들이 부딪히는 고난 가운데서 반드시 바라봐야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볼 줄 알아야 하는 거예요. 2절입니다.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아굴라'는 '디아스포라'에요. 유대 땅에서 난 사람이 아니고, 부모의 유량 생활 속에서 본도라는 로마 제국하에 편입된 본도에서 태어난 사람. 그러니까, 그의 일생 자체가 부모도 고난의 역사 속에 고향 땅에 살지 못하고 떠밀린 세월을 살았겠지만 그 휘하에서 태어난 자녀들의 삶도 상당히 고단했을 것. 그런데 이 사람이 누구랑 결혼을 했냐? 2절 하반 절, '.. 그 아내 브리스길라', '브리스길라'라는 이름은 로마 상류층 집안의 딸입니다. 귀족 혈통이라는 거예요. 로마 상류층 집안의 딸과 고단한 인생을 살았던 아굴라가 결혼을 하게 된 것, 그런데 이 부부가 아주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렇게 되어 있어요.

"떠나라"라고 명령한 것에는 두 가지 배경이 있습니다. 글라우디오 황제의 재임 시기가 A.D 41~45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지 얼마 안 된 직후에 재임한 황제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 당시에 무슨 소문이 있었냐 하면, 유대 땅에 크리스토스라고 하는 사람이.. '죽었다가 부활했데..'라는 소문이 유대인들에 의해서 로마 땅에 사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파가 된 것. 이것이 당시에 광장한 이슈가 되었어요.

또 이 소문에 반대하는 그룹이 생겼어요. "아니야~ 그럴 수가 있냐? 그것은 예수쟁이들이 만들어 낸 말일 거야~ 그 제자들이 너무 흠모한 나머지 신화화 시키 걸 거야~" 반대하는 무리가 생겼어요. 그리고 이 복음은, 이 소식은 로마 시내를 점점점 크게 번져가기 시작했어요. 이로 인해서 시끄러워졌어요. 그래서 글라우디오가 엄청 신경을 쓰고 있었어요. 스토니우스라는 학자의 기록에 의하면,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선동을 받아 계속 소동을 일으킴으로 그들은 로마에서 자취를 감취게 되었습니다. 이 당시 로마에는 황제에게 예외 법이 하나 있었어요. 로마의 황제는 모든 법률로부터 자유하다. 법률로부터 자유한 존재가 사람입니까? 신입니까? 신입니다. 그래서 일어나기 시작한 운동이 황제숭배사상입니다.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는 거예요. 적어도 그 시대의 황제는 신적인 존재였어요. 그래서 로마의 모든 통치는 황제의 보좌로부터 시작됩니다. 거기서부터 심판과 통치와 영광이 나오는 거예요. 이게 로마 황제가 갔는 보좌의 엄위함이에요. 그래서 모든 사람이 만나면, "가이사가 주인이십니다."라는 인사를 하곤 했는데 이때 유독 그리스도를 따라는 그리스도인들만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주인이십니다."

 

 

 

항복하지 않고 시대에 저항하는 이런 사람들에게는 지독한 구조적 족쇄를 만들어서 살지를 못하도록 만들었어요. 예를 들면, 일반인들에게는 1% 이율로 돈을 빌려준다면, 황제 숭배 사상에 동의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10~15%의 이자 또는 세금을 매기는 거예요. 그리고 매매를 못하도록.. 길드 가입 자체를 막는 거예요. 살 수가 있을까요? 그러다가 예수의 부활 사건으로 온 시내가 시끄러워지니까 그것이 빌미가 되어 "이 참에 로마 시내에 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유대 시민들을 내쫓아라!" 그래서 한 푼도  못 가지고 나가게 내쫓았습니다. 그때에 아굴라가 쫓겨났는데, 그 아내도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다 보니 로마인임에도 불구하고 같이 쫓겨난 거예요. 그래서 그들이 온 데가 어디냐? 고린도예요. 바울도 아덴에서 쫓겨 가서 오게 된 곳이 고린도예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그런 사연으로 쫓겨오게 되었는데, 거기가 고린도예요. 쫓겨올 때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요? '하나님을 따르는 대가일까?' 그런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쫓겨오다 보니 바울은 당자아 먹고 살길이 막막했을 거예요. 후원도 끊겼어요. 그런데 다행히도 바울에게는 기술이 하나 있었어요. 천막 만드는 기술.

바울은, 가말리엘 문화에서 공부한 대 학자예요. 대학에서 가르치는 석학과 같은 인텔리가 천한 직업에 해당하는 텐트 메이커라는 기술을 왜 배웠을까요 랍비 문화의 불문율에 의하면, 랍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나서 돈을 받지 않도록 되어 있어요. 그래서 혹시라도 생계의 위협이 닥칠 것을 대비해서 반드시 전문 기술 하나를 배우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그 시기가 온 거예요. 그러다 보니 자연히 텐트 만드는 곳을 찾았겠지요? 하나님은 이 세 사람을 여기서 만나게 하셨을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아무리 사소한 만남이라 할지라도.. 절대 우연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어요. 거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기억해야 해요. 그래서 누구와의 만남에서도 사소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행전 18:24-26, '24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25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26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

여러분 아볼로는 수사학을 전공한 사람으로 성경에 능통한 사람이에요. 오늘로 치면 신학교 교수님이에요. 그런데 그가 제한적 지식.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어요. 이 사람을 누가 불러다가 '아굴라'가 불러다가.. 평신도예요. 삼일교회 집사님이 교수님을 불러놓고 "교수님~ 여기까지만 알고 계시는데, 사실 이 부분은 이런 또 다른 영역이 있습니다."라고 좀 더 정확히 가르친 거예요. 26절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지식은 어디서 왔을까? 바울이 가르친 거예요. 이 세 사람이 한 집에서 텐트를 만들었어요. 그러면서 짬짬이 뭐 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 오늘 식으로 제자훈련을 시킨 거예요. 매일 밤마다 풀어주는 하나님의 말씀이 새로운 경지를 열어 준 거예요. 나중에는 누구를 가르치냐? 아볼로를 가르쳐요. 성경에 능통한 자를 가르쳐요. 바울의 가르침을 통해서 이루어진 일이에요. 그리고 고린도전서 16:19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여러분 고린도교회가 누구의 집에서 시작이 되나요? 바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에서 시작이 돼요. 

절망의 끝에서 만난 만남이었지만, 이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은 고린도교회를 세우셨어요. 왜? 그 성중에 나의 택한 백성이 많기 때문에 이들은 쫓겨날 때는 몰랐을 거예요. 절망으로 몰아칠 때는, 이 고난의 의미를 몰랐을 거예요.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들의 절망 끝에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감추어 놓으신 거예요. 후에 로마서 16:3-4 '3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4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로마서 기자가 성경을 마감하면서 브리스길리와 아굴라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나요?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 목까지도 내놓을 수 있었던 나의 신실한 동역자였다.' 그러니까 이들에 의해서 고린도교회가 시작이 될 수 있었던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본문의 흐름을 종합해 보면. 몇 가지로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사람은 끝났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끝낼 때까지는 끝이 아닙니다. 믿습니까? 우리는 어떤 고난과 환란과 역경과 비바람 속에서도 하나님의 경륜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지도록 훈련이 되어져야 합니다. 거기 끝에 분명 하나님의 경륜이 있겠지.. 그분의 선하심과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의 속성을 우리가 믿어야 되는 거예요. 특별히 요셉과 같은 경우 어땠나? 젊은 날에는 역경으로 그의 인생이 구렁텅이로 빠질 때마다 이해할 수 없었어요. 국무총리가 되어서도 그 의미를 몰랐어요. 형들이 기근을 피해 양식을 구하러 내려와서 자기 무릎 앞에 조아렸을 때에야 하나님의 빅피처가 보여지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당신들보다 나를 앞서 보내셨나이다." 그제서야 자기가 재수가 없어서 팔려 온 것이 아니고, 운명이 기구해서 팔려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의식을 하게 된 겁니다. 비록 그 보냄의 과정이 꽃길이 아니었지만.. 밧줄에 묶여서 온 고통의 그림이었지만.. 이 그림의 끝에 기근과 가난의 때를 대비하여 가족들의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신들보다 나를 먼저 앞서 보내셨나이다. 요셉의 인생의 절정은 국무총리가 된 데 있지 않습니다. 그 하나님의 그림이 펼쳐진 순간이에요.

더 이상 아기 울음 때문에 아기 모세를 키울 수가 없는 상황.. 울음이 담장을 넘어 새어 나가면 바로의 명령에 의해 다 살해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어머니는 결단을 하고 갈대 바구니를 만들어 모세를 나일강 물에 떠나보냅니다. 젊을 때는 자기 인생의 계획이 많고 이것도 저것도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아요. 그런데 나이 먹어가면서 사회의 벽 앞에 부딪히고 자신의 한계에 부딪히면 부딪힐수록 자신의 꿈이 부서지고 꺾여요. 그러면서 뭘 배울까요?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이 복된 것임을 배우기 시작해요. 그때부터 내 꿈이 하나님의 꿈이 격렬하게 충돌하게 돼요. 그러면서 그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경륜적 시각으로 눈을 열어가는 연습을 하게 됩니다. 정말 때로는 내 손을 떠난 일들이 너무나 많아요. 의도하지 아니한 일들이 벌어지고,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지고..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인생을 '허무, 모순, 불확실'로 규정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이 솔로몬이 정의한 인생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제일 집중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내가 어떤 환경을 맞이하는가?'가 아니라 내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경륜을 바라보는 눈을 열 수 있는가? 이 명제 앞에 다시 한번 여러분들이 온 인생을 설득당하고, 하나님의 이끌림 앞에 붙들려서 새날을 열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 주가 보이신 생명의 길 ♬

오늘 주신 말씀을 붙듭시다. 무엇이 여러분들을 짓 누르고 있습니까? 거기가 끝이라고 생각했습니까? 여기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습니까? 여러분들의 마음을 답답하게 하는 것들, 여러분들을 붙들고 늘어지는 것도.. 이 모든 것들을 다시 한번 하나님의 경륜적 시각으로 눈을 열어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달라서 반드시 그 끝에 하나님의 선을 감추어 두셨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하나님의 선을 이루어가게 되는 줄 믿습니다. 우리여 주여 한번 크게 부르짖고 기도하겠습니다. 

 

 

 

2014년03월09일/주일낮예배/사도행전 강해(33)/행18:1-4/"경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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