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I 사도행전 강해(26) I 사도행전 15:22-29 I 성도의 멍에와 원리 I 송태근목사
2014년 01월 19일 / 주일낮예배 / 사도행전 강해(26) / 행 15:22-29 / "성도의 멍에와 원리" / 삼일교회 / 송태근목사 / 설교문 /사도행전은 전체 28장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4장까지의 주된 내용은, 어떻게 복음이 전 유럽에 포맷이 되었는가? 에 대한 기초적인 부분이 다루어졌다면 오늘 본문이 속해 있는 15-28장까지는 그 기초된 교회 지역마다 어떻게 신학적으로 내용을 갖추었는가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래서 오늘부터는 신학적인 주제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중신은 안디옥교회입니다.
사도행전 15:22-29 I 성도의 멍에와 원리
- 삼일교회 송태근목사 -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된 복음이 온 땅에 퍼져서 최초로 이방 땅에 세워진 교회이면서 지금까지도 이 안디옥 교회의 이상적인 모습을 꿈꾸는 교회가 많을 정도로 역동성과 생명력이 있었던 교회입니다. 안디옥 교회의 특징은, 생명력이 있었고, 예수 안 믿는 사람들에 의해서 최초로 "야~ 저 사람들은 정말 그리스도인이야"라고 불렸어요. 게다가 더 중요한 분기점은 이방 땅에 세워진 이방인의 첫 교회로써, 최초의 선교사를 파송했다는 점입니다.
안디옥 교회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세계 기독교의 역사 속에 2000년 동안 지나왔던 흐름들을 보면 일관된 사이클이 있습니다. 3단계로 흘러가는데, 첫 번째는 복음이 심어지고 전해질 때 핍박이 일어납니다. 핍박기입니다. 이것은 어디에도 복음이 던져지는 곳마다 비껴간 적이 없어요. 이 땅에도 복음이 들어올 때에 무서운 핍박과 고난이 있었어요. 이 기독교는 그 시기를 반드시 거쳐 가게 되어 있어요. 어느 나라 어느 기독교의 역사를 보아도 이 패턴을 비껴 나갈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핍박기에 나타나는 공통점이 뭐냐 하면, 핍박기에는 절대 분열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단의 발현이 없고 오히려 똘똘 뭉친다는 점입니다. 글래서 한국교회가 가장 강력했던 시기를 꼽자면, 복음이 들어와서 요 50년 간입니다. 공산 치하를 겪고, 일제 강점기를 겪어내면서 한국교회는 고난과 핍박 속에서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 시기를 지나면, 두 번째 맞이하는 패턴이 부흥기입니다. 한국교회는 일관되게 이 패턴을 따랐습니다. 경제 발전과 잘살아 보자는 국가적 명제와 맞물려서 한국교회가 엄청나게 급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말하자면,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가 70~80년 대입니다. 기독교의 모든 역사가 똑같습니다. 부흥기가 있습니다. 부흥기에 나타나는 특징은, 이당이 나타나고 이질적인 복음이 교회 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이질적인 복음이란? 교회의 세속화를 말합니다. 반드시 이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이 과정을 거치고 있어요. 그리고 나타난 세 번째 결과가 뭐냐 하면, 분열과 분쟁이 벌어집니다. 안디옥 교회도 결국은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지만 완전한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 기독교 역사가 비껴가지 않았던 패턴을 지금 안디옥 교회도 지독스럽게 겪기 시작합니다.
예루살렘교회에 어떤 보고가 들어왔냐 하면, 이방 땅에도 교회가 세워지고 이방인도 성령을 받기 시작하고 이방인들도 에수를 믿더라는 말도 안 되는 보고가 들어온 거예요. 이 시대의 정통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는 문제를 이 정도로 생각했어요. 개, 돼지, 소들이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거예요. 그거보다 심하게 생각을 했어요. 그러니까, 그런 보고를 들었을 때 믿을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에이~ 소문이겠지.. 설마 그런 일이 있을라고?" 그런데 소문이 너무 구체적이에요. "그럼, 확인하러 가자."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에서 몇몇 성경 지도자들이 검증을 위해서 안디옥 교회까지 내려온 거예요. 그 대목이 오늘 15장입니다. 행 15: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무슨 내용인가 보니, 와서 보니까 사실이에요. 충격적이지요. 어떻게 세상에 이런 일이 가능할까? 그런데 뭔가 미심쩍어요. 그래서 이 유대인들은, 예루살렘교회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에요. 플러스알파 복음을 가르치는 거예요. "여러분 눈으로 보니 성령이 임하고 구원의 역사가 있고,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를 우리가 목도한 바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구원은 오직 십자가의 은혜와 믿음으로만 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조상 중에 모세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지도자가 가르친 율법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율법의 핵심이 할례라는 게 있습니다. 정말 여러분들에게 성령이 임하고, 여러분들에게 나타난 구원의 역사가 완성되려면 바로 우리 민족이 전부 행했던 할례를 여러분들도 받아야 구원이 완성됩니다."라고 가르치기 시작한 거예요.
이때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서 오직 구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백과 은혜로만 받는다고 알고 믿고 그렇게 이해하고 있던 교인들은 대혼란이 일어난 거예요. "누구 말이 맞아? 어쩐지 그 바울 말도 어눌하고 머리털 좀 숫자가 적은 데다가 말하는 게 더듬더듬하고 좀 의심쩍더라니 안전한 게 좋으니, 이 분들이 본부교회에서 와서 가르치는데 헛소리 하려고? 말하는 거 보니까.. 이분들 말이 좀 안전한 것 같아.. 그러니까 우리가 할례를 받자.." 혼란이 일어난 거예요.
이 광경을 앞서 도착해서 이 교회를 세우는 데 공을 세우고 가르쳤던 사도들이 기가 막힌 거예요. "사랑하는 안디옥 교회 성도들 정신 차리십시오. 이 분들의 말을 믿지 마십시오. 우리가 가르친 복음이 진짜 복음입니다."
자, 이 양자 사이에 큰 논쟁이 벌어진 거예요. 예루살렘에 와서 플러스알파 복음을 가르치는 사람들과 바울과 바나바가 격렬한 신학 논쟁이 벌어진 거예요. 고스란히 피해가 누구에게 갔을까요? 성도들에게 간 거예요. 누구 말에 장단을 쳐야 하는지 모르겠는 거예요. 잘, 그러면 어떡할까요? 다수결로 할까요? 구원과 진리의 문제를 다수결로 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안을 내놓습니다. 3절을 보세요.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거기서 결론이 안 나니까 여러분이 이렇게 합시다. 다수결로 할 수 없는 문제니까, 지도자 몇 사람이 본부교회에 가서 본부교회에 가서 이 문제를 해결해 오십시오. 우리 성도들의 입장에서는 누구 말을 신뢰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몇 사람들을 바나바와 바울이 함께 예루살렘 본부 교회로 가서 검증을 받도록 파송이 됩니다.
여러분 이런 의미에서 교단이 하는 일이 마땅치 않은 일도 많이 있지만.. 교단의 중요성이 여기 있는 거예요. 개교회가 신학적으로, 신앙적으로 혼란이 일어날 때.. 정말 중요한 게 뭐냐 하면 그것을 검증해 줄 수 있는 공인 상위기관이 있어야 해요. 그런데 아무 데도 속해 있지 않으면.. 엉뚱한 소리를 가르쳐도 성도들의 입장에서 처음 듣는 얘기니까.. 성도들의 입장에서 처음 듣는 얘기니까.. '어! 그런가 보다..' 그래서 시골에 가면 지금도 그런 교회가 있어요. '우리 교회는 사랑의 교회가 속한 교단의 교회입니다.' 그런 게 있어요. 그러니까, 안심하고 우리 교회 오셔서 신앙생활 하라 그 말이에요.
이렇게 상위 부교회에 보냄을 보냅니다. 4-5절, '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5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앞을 잠깐 보세요. 이제까지는 뭐 별로 이해하는 데 어려움 없지요? 본부 교회 와서 지도자들 앞에서 안건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중에 예수 믿는 바리새파 출신 사람 하나가 일어나더니 "듣고 보니 유대인들이 가르치는 거 맞네! 성령님의 은혜와 십자가의 복음으로만 구원을 얻을까? 우리가 받는 것처럼 그들도 할례를 받아야 구원이 완성되는 거지, 그들이 가르치는 게 맞네!" 불을 끄러 왔는데, 더 혼란이 가중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안디옥 교회에서 일어났던 불씨가 본부 교회에 더 확전이 일어난 거예요. 6절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무슨 말이냐 하면, 사도행전 15장이 우리 기독교회사 적으로 중요한 게 뭐냐 하면, 최초의 종교회의가 열립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구원에 있어서 도대체 플러스알파가 맞냐?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 게 맞냐? 이것은 매우 중요한 신학의 문제가 되기 때문에 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예루살렘교회가 종교회의를 소집한 거예요. 그래서 지도자들이 다 와서 큰 논쟁이 일어났어요. 안디옥 교회에서 일어났던 논쟁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거예요. 이러한 논쟁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7-9절입니다. '7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9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자, 이제 앞을 보세요. 막, 격렬하게 논쟁이 일어나니까.. 베드로 다 듣고 슬며시 일어나 입을 엽니다. 베드로가 변하긴 변했어요. 옛날 같았으면 제일 먼저 일어났을 텐데.. 다 떠드는 거 듣고 일어납니다. 그도 퇴장할 때쯤 나이가 되어서 무르익은 거지요. "여러분 저도 과거에는 여러분들처럼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편견이 어디서 무너졌는지 아십니까? 고넬료 이방인 백부장의 집에서 성령이 임하고 그들이 구원받는 것을 보면서 제 편견도 무너졌습니다." 자기 경험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9절을 잘 보세요.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뭐가 없게 하심을? '.. 차별이 없게 하셨습니다'
자 저를 보세요. 여러분 질문 하나 할게요. 쉬어갈 겸~ 세상적인 단어 개념으로 믿음의 반대말이 뭡니까? 불신이지요. 세상적 개념으로 이 짝이 맞아요. 그런데 성경은 믿음의 반대를 불신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엡 2:8-9,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내 안에서 만들어진 겁니까? 외부에서 들어온 겁니까? 그렇지요?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은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그러면 누가 주신 거예요? 그러면 이 믿음은 내가 생성한 거예요? 누군가 나에게 주신 건가요? 누군가 나에게 주신 거예요. 그래서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못 하지 못하게 하시려고? 그러면 믿음의 반대 개념은 뭘까요? '행위' 자랑이에요. 행위라는 말도 틀린 말 아니에요.. 믿음의 반대 개념은 자랑이에요. 그런데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고' 믿습니까? 왜? 하나님이 나에게 선물로 주신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차별을 무너뜨렸어요.
베드로가 그 얘기합니다. "나도 이 진리를 깨닫기 전에는 우리는 선민이고, 택함 받았기 때문에 그리고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 민족이 구원을 얻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와 열어주시는 은혜를 통해서 믿음은 선물이라는 것을 알았고,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내 행위가 근거하지 않는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이방인들에게 멍에를 메우지 마십시오." 10-11절, '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베드로가 안디옥 교회에서 지펴졌던 이 구원의 문제의 중요한 신학적 문제를 예루살렘까지 끌고 와서 결국은 일단락 맺는 듯 보였습니다. 종지부가 찍히는 것과 같았어요. 그런데 이때에 가만히 뜸을 들이고 있던 사도 한 사람이 일어납니다. 누가 일어나느냐 하면, 13절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여기 나오는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이에요. 이 분이 실질적으로 예루살렘교회의 담임목사 격이에요. 최종적 권위를 가지고 있어요. 결정에 대해서 그런데 야고보가 그때에 "잠깐! 제가 마지막으로 한 말씀드리겠습니다."하고 일어난 겁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런 얘기를 시작합니다. 14절입니다.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이 시므온은 방금 발언한 베드로를 두고 한 말이에요.
"여러분~ 지금 베드로가 이방인에 대해서 한 이야기가 전부 맞습니다." 그리고 15절을 보세요.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16-18절 '16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7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자, 그러면 야고보가 일어나서 한 발언의 요지가 뭔가? "여러분 베드로가 우리 사이에 차별이 없다는 이 증언이 맞습니다. 그런데 이 증언은 예루살렘 교회의 마지막 지도자인 내 개인 소견도 아니고, 더더군다나 지금 막 발언을 끝낸 베드로의 개인소견도 아닙니다. 이 소견은 이미 구약으로부터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입니다."
마지막 최종 이 신학의 권위를 무슨 권위를 가지고 종지부를 찍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내 생각에는.." 중요하지 않아요. "어느 책에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여러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데.." 중요하지 않아요. 하나님 말씀에 최종적 권위입니다. 야고보가 결국은 그 구원이라는 대 신학의 주제의 논란을 하나님 말씀의 권위로 종지부를 찍고 있어요. 이제 이 문제는 일단락이 되었습니다. 오직 구원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십자가의 은혜로만 이루어집니다. 여지가 없게 되어 버렸어요. 자, 문제는 여기서 끝나면 참 쉽게 넘어갈 텐데.. 제가 어렵게 만드는 게 아니라 야고보가 이 흐름을 어렵게 만들어요. 19-20절, '19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20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지금까지 잘 나갔어요. 야고보가~ 담임목사로써 최종적으로 정리를 잘한 것 같아 보였어요. 그런데 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로 결론까지 맺어 주고는 20절에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안디옥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면 느낌이 어떤 느낌이에요? 도로 아미타불이 되는 것 같지 않나요? "할례도 필요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습니다."라고 해놓고서는 20절과 같이 말하면 이걸 지키라는 말 아닌가요? 그렇지요? 지키라는 말 아닌가요? 그럼, 지금까지 한 말이 무슨 내용인가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아주 중요한 내용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 부분을 설명을 드릴 텐데 20절 한 군데를 정확히 보겠습니다.
'다만 우상'입니까? '우상의 더러운 것'입니까? 여러분들에게 질문합니다. 믿는 성도들에게는 우상이 존재합니까? 안 합니까? 존재해요? 안 해요? 반응을 좀 합시다. 성도들에게 우상은 존재하지 않지요? 여기 부처를 갖다 놓아도 그건 우리에게 우상이 안 돼요. 왜? 우리는 이미 창조주 하나님이 유일하신 신이고 나의 구주이시며 아버지이심을 알아요. 그래서 더 이상 우상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요. 우상은 누구에게만 우상인가요? 그걸 신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에게만 우상이에요. 그런데 우리에게는 더 이상 우상이 아니지요. 자, 그런데 여기서 우상의 더러운 것입니다. 그때는 어떤 시장 문화가 있었느냐 하면? 시장에 유통되는 모든 고기는 먼저 어디에 드려졌던 고기인가요? 우상 제단에 드려졌다가 시장에 유통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시장에 유통되는 모든 고기는 일단, 우상에 바쳐졌던 고기예요. 그런데 그때에도 일부 경건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는 먹을 수 없어. 안 먹어!" 그렇게 별나게 굴었던 사람들이 있었어요. 자, 그러면 그 상황을 여러분들에게 던져 봅시다. 여러분들 우상에게 던져졌던 그 고기를 하나님이 주신 일용할 양식으로 기도하고 먹을 수 있나요? 없나요? 있지요~ 왜? 우리에겐 우상이 있다? 없다? 없으니까.. 이걸 우리가 아는 지식이에요. 우리가 나는 지식이 준 자유예요. 그런데 여기까지 알고 있으면 안 된다. 그 말이에요. 야고보가 하고 싶은 것은, 구원받는 원리가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들이 살아가는 원리를 얘기하고 싶은 거예요. 이건 구원의 조건으로 편지를 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그러면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온전히 구속받은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삶의 원리를 말하고 싶었던 거예요.
예를 들어볼까요? 주일날이 되어서 장로님들과 당회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간사님이 노크를 하시더니 접시에 빨간 떡을 들고 오셨어요. 옆집 가게가 오픈했는데, 방금 굿하고 이우재라고 돌린 떡인데 주셨는데, 드시겠어요? 그래서 굿 끝낸 고사떡을 놓고 "하나님 이게 웬 떡입니까? 감사합니다." 그리고 먹었어요. 그런데 문이 열려 있는 틈새로 이 전 과정을 등록한 지 얼마 안 된 새 신자가 봤어요. "어머나 세상에 뭐 이런 해개한 교회가 다 있냐? 그것도 담임목사라는 사람이 방금 굿 끝낸 후 온 고사떡을 그것도 다른 사람들이 아닌 장로님들과 기도를 하고 저걸 먹어? 이런 날라리 교회, 난 못 다니겠다."하고 다른 교회로 가버렸어요. 그 이야기를 제가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 그렇다면 먹지 말라는 거예요. 여러분 이것은 구원의 조건인가요? 삶에 적용을 해야 할 문제인가요? 적용해야 할 문제지요? 즉 이 얘기예요. 야고보가 '우상의 더러운 것'과 제물을 이야기합니다. 또 '음행'과 여기서 '음행'이라는 말은 '플레이오'라는 말을 썼는데, 근친상간에 해당하는 관계를 ㅁㄹ합니다. '목메어 죽은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를 하는 것이 옳습니다.' 여기 '목메어 죽은 것'은, 목메어 죽이면 피가 나올까요? 레위기에 보면, 피 채로 먹지 말라고 되어 있어요? 안 되어 있어요? 그 얘기예요. 같은 얘기예요.
"자, 이런 것들을 볼 때, 자유하니까.." 나는 할 수 있어. 그런데 신앙이 약한 자들이나 믿지 않는 자들이 볼 때, 걸려 넘어질 소지가 다분히 있어요? 없어요? 그럴 때에는, 사도 바울이 "죽을지언정 고기를 안 먹겠다."라고 했어요. 그렇다면 이 일이 이 모든 원리가 나의 자유 초점을 맞추라는 거예요? 약한 자나 믿지 않는 쪽에 초점을 맞추라는 건가요? 다시 한번 묻습니다. 담배 피우면 구원을 받나요? 못 받나요? 상관없어요. 구원의 문제와는 아무 상관없어요. 그런데 한국교회에서는 담배피냐? 안 피냐? 에 상표가 되어 있단 말이에요.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요? "야~ 교인이 되어서 담배를 피우냐?" 걸린단 말이에요. 넘어진단 말이에요. 들키지나 말던지.. 그런데 또 이렇게 알고 돌아가면 안 돼요. "아~ 안 들키고 피면 되겠구나?" 피지 말라는 거예요. 건강에도 안 좋은 걸 왜..
여러분 담배를 정말 하나님이 피어야 할 것으로 만들었다면 코 구멍을 위에다 뚫었지, 왜 아래로 뚫어 놓으셨겠어요?^^ 굴뚝이 위를 향했겠지요? 무슨 말인지 알아들으시겠죠? 담배는 구원의 문제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그런데 그 행위로 연약한 자들이 넘어지는 문제가 발생한다면 어느 쪽에 초점을 맞추라는 거예요? 연약한 자에게 초점을 맞추라는 거예요. 그 얘기를 갈라디아서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중요한 게 뭔가요? '오직 사랑'으로 뭐 하라는 건가요? '종노릇'하라 그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이제는 자유하는 종으로써 멍에를 메는 거예요.
오늘 야고보가 한 말은 구원의 근거로써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약한 자들이 넘어질 수 있다. 그 말이에요. 그래서 적어도 이 구속의 은혜를 입은 신앙을 고백하는 백성들이라면 약한 자들 쪽에 삶의 원리를 맞추고 살아야 된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겁니다. 아멘? 이 굵은 원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셨던 원리예요.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으로써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약한 자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를 건져내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그 그리스도 안에 구속함을 입은 백성들이라면 이 원리가 평생 사랑의 멍에가 되어서, 종의 멍에가 아니라, 사랑의 멍에가 되어서.. 정말 그리스도의 사랑의 멍에가 되어서 평생 이 길을 즐거운 순종 해야 된다 이거예요. 믿습니까? 오늘도 이 원리와 이 순종이 우리 모든 성도들의 일상에 구체적으로 적용되고 승리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나의 만족과 세상을 위해 가지려 했던..'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습니다. 그렇게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이 땅에 율법의 멍에를 메고,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것처럼.. 우리도 약한 자의 기준에서 사랑의 멍에를 메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종노릇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고집, 내 아집, 내 주장, 진리와 생명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면 다 내려놓아야 됩니다. 삶의 자리로 순종케 하여 주시옵소서.
2014년 01월 19일 / 주일낮예배 / 사도행전 강해(26) / 행 15:22-29 / "성도의 멍에와 원리" / 삼일교회 / 송태근목사 / 설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