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태근 목사 I 야고보서 강해 2 I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음 I 야고보서 1장 12-18절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음
- 송태근 목사 -
우리가 어제는 '시험을 기쁘게 여기라' 기쁘게 여겨야 하는 이유는, 시험에는 인내를 이루는 온전함이 두 영역이 있기 때문이에요. 인내를 감당해야 하는 그 자체가 있어요. 그것을 온전히 이루어야 해요. 운동으로 말하면, 훈련을 잘 소화해야 하는 온전함이 있어요. 그것을 감당할 때는 너무 힘들어요.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왜 겪어야 하는지도 모르게.. 그런데 그것을 하루하루 버티고 겪다 보면 저 먼 끝에 나도 생각지 못했고 기대하지 못했던 어떤 놀라운 하나님의 목적하신 선물이 놓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을 이미 시험을 통해서 설정하신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선물이었어요. 정작, 겪고 있거나, 겪는 중에는 그것을 알까요? 모를까요? 이렇게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데는 두 영역이 있기 때문에 시험이 올 때는 기쁘게 여기라. 기뻐해야 될 분명한 이유가 있다.
오늘은 그 연장선상에서 생각을 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야고보서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여기서 복이라는 개념은,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의 입장에서는 매우 친숙하고 익숙한 개념이고 단어예요.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이 팔 복을 설명하시면서 이 복이라는 개념을 굉장히 자주 사용하셨고, 새롭게 정의하셨어요. 야고보 입장에서는 이 복을 항상 마음에 담고 그의 서신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마카리우스' 그 복을 다시 설명하고 있어요. 여기서 말하는 복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현세적인 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복을 말하는 거예요. 야고보서 1:12, ...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야고보 사도가 상급에 해당하는 면류관이라는 개념을 동원했어요. 이 면류관이라는 것은? 당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개념이 하나 있어요. 운동 경주가 끝나고 우승자에게 생화로 엮은 월계수 관을 씌어주었어요. 그런데 그 면류관이 몇일이나 갈까요? 이것이 살아있는 식물을 엮어서 만든 우승이자, 상징이에요. 참 기쁘지요? 감동스러운 일인데, 그것이 얼마나 갈까요? 글쎄~ 길어야 보름 갈까요? 여기서 생명의 면류관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렇게 한시적이고, 일시적인 면류관의 상대 개념을 말하는 거예요. 주께서 장차 이 시련의 저 끝에 우리에게 씌워줄 그 면류관은 그렇게 한시적이고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성격을 가진 면류관임을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하는 거예요.
이 생명의 면류관에 대한 약속을 받은 교회가 있죠? 계시록에 보면, 일곱 교회가 등장을 하는데 혹시 아세요? 유일하게 책망이 없었던 두 교회가 있었어요. 빌라델비아 교회와 서머나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의 이름을 따르는 교회가 굉장히 많아요. 한국에도 더러 있고, 미국에 굉장히 많아요. 하지만, 서머나 교회로 이름 붙인 교회는 그리 흔치 않아요. 왜 그런가 하면 이유가 있어요. 서머나 교회는 '쓰다'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서머나 교회는 성경기자가 칭찬하기를 '내가 네 환란과 궁핍을 아노니' 특별히 서머나 교회는 지독한 환란과 궁핍에 처해 있었어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이 생명의 면류관에 대한 유일한 약속이 주어졌던 교회가 서머나 교회였어요. 왜 그랬을까요? 거기에 '궁핍'이라는 말은 '절대 궁핍'이고, '환란'이라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짓 눌려진 상태'를 말해요. 찌그러진 상태. 얼마나 힘들까요? 왜 이렇게 힘들었을까요? 서머나 도시자체가 굉장히 부유한 도시였어요. 그 도시가 부유했던 이유가 있어요.
그 당시는 도시 국가들마다 로마 황제의 신전을 유치하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을 했어요. 그 로마 황제를 섬길 수 있고, 숭배할 수 있는 신전을 유치해야 로마 황제를 더 숭상하고 숭배하기 때문이 아니라 거기에 엄청난 경제적 후원이 따르기 때문이에요. 그런 경제적인 이익 때문에 로마 황제를 숭상할 수 있는 신전 유치에 혈안이 되어 있었어요. 그걸 제일 먼저 따 낸 도시가 서머나예요. 서머나 도시는 그러니까 로마의 시대를 가장 잘 반영한 도시예요. 그러한 중앙 정부의 엄청난 경제적 지원을 힘입어서 돈과 사람과 경제가 흥청망청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상대적으로 그 세파의 흐름에 따를 수 없었던 그리스도인들은 지독한 어려움에 상대적으로 던져질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성경 기자가 서머나 교회를 향해서 '내가 네 환란과 궁핍을 아노니 죽도록 충성하라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있으리라' 여기서 유명한 '폴리캅'이라는 역사 속 주교를 기억하실 거에요. "기꺼이 한 시간의 고통을 감내하고 80년 동안 자기를 사랑했던 부인할 수 없다."는 유명한 고백을 남기고 화형을 당했던 분 역시 서머나 교회 출신이에요.
이렇게 그 시련과 환란을 잘 견디어 낸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의 면류관. 한시적이고, 일시적인 면류관이 아니라 영원한 면류관이 담보되고 약속이 되어 있다는 거예요. 왜 그러면 영원한 면류관이라는 개념이 무엇인지는 조금 있다가 살펴보기로 하고 다음을 보겠습니다. 야고보서 1: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2절 말씀과 조금 배치가 되지요? 분명히 12절에서는 '시험을 참는 자는..' 그래놓고, 13절에서는 '사람이 시험 받을 때는 내가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않는다'이 두 구절은 서로 대치되는 것이 아니고 앞에 시험과 뒤의 시험과 달라요. 앞의 시험은 말 그대로 테스트예요. 연단의 개념이에요. 그런데 13절의 '시험'은 말 그대로 '유혹'이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유혹하지 않으세요. 유혹이라는 말은, 정확하게 어디서 파생된 개념이냐 하면 낚시꾼들이 고기를 잡기 위해서 낚시 바늘 끝에 거는 미끼라는 뜻이에요. 도처에 이런 미끼가 덫을 놓고 우는 사자와 같이, 때로는 광명한 천사와 같이 성도들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래서 이 덫에 걸리는 결과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해요. 외부적인 요인과 내부적인 요인. 외부적 요인은 방금 말씀드린 대로 도처에 걸려들 미끼가 이 세상에 항상 가득해요. 왜냐하면, 이 세상은 틀 자체가 기본적으로 타락한 곳이기 때문에 그래요. 타락한 구조에서 토해내는 모든 것들이 늘 우리를 무너트리려는 것들로 가득하기 때문에 그래요. 문제는 우리 속에 내부적 요인도 있어요. 그게 뭐냐? 죄성.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죄성.
죄는 어원적으로 지치지 않는 열망이에요. 죄를 향한 지치지 않는 열망. 그래서 우리는 성경 전체에서 대표적인 두 인물을 예로 들 수가 있어요. 다윗과 같은 경우는 나라가 가장 태평성대를 이룰 때 여유로워져서 전쟁 중인데도 전쟁터에 있지 않고 늦게까지 잠을 자고 일어나 옥상에 바람을 쐬러 갔다가 목욕하는 여인 하나를 보게 됩니다. 옥상을 거닐다가 그 광경을 본 것도 죄가 아니에요. 저도 시대 돌아다니다 보면 못 볼꼴 많이 봅니다. 그 자체가 나쁜 게 아니에요.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목욕하는 여인을 보고 다윗이 알아보라고 명령'을 해요. 알아보니, 가장 충성스러운 부하 중에 우리야라는 장군의 아내라는 거예요. 그런데 죄는 우리 마음속에 한번 자리 잡으면.. 죄는 끝장을 봐요. 죄라는 건 절대 중도포기란 말이 없어요. 그 여인을 데리고 왔는데 레위기 율법대로 부정한 기간이었어요. 여자들이 한 달에 한 번씩 갖는 부정한 기간이었어요. 그런데 다윗이 그 여인을 돌려보내지 않고 그 부정한 기간을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범죄를 저질러요. 이게 죄가 갖는 무서운 집요함이에요. 특별히 성적인 죄는 더 그래요. 그래서 넘어져요. 그리고 그가 썼던 시 중에 하나가 시편 51편인데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으며 내 모친이 죄악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근본이 죄 덩어리임을 토해내면서 중요한 고백을 하지요. '내가 하나님의 목전 앞에서 범죄 하였나이다' 그러니까 옥상을 거닐 때에는 그 인식이 멀어져 있었어요. 항상 우리 신자들이 놓치지 말아야 하는 인식은 신전의식이에요. 하나님 앞에서 사는 그리스도인. 코람데오라고 하지요.
여기에 해당하는 가장 적합한 샘플이 요셉이에요. 요셉하면, 두 단어를 기억할 수 있어요. 비록 종으로 끌려갔지만, 보디말의 아내가 한 번 유혹을 한 게 아니에요. 날마다 종용했다고 했어요. 한 참 피 끓는 나이의 요셉에게 날마다 유혹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요셉이 뭐라고 하냐? '내가 어찌 하나님께 범죄하리이까' 중요한 이야기에요. 어쩌면 이렇게 다윗과 경우의 샘플일까요? 그러고는 두 번째 단어가 뭐냐? '함께 있지 아니함이라' 그래서 성적인 죄는 어떤 죄도 그렇지만 맞서서 이길 죄는 없어요. 피해야 해요. 피하시기 바라요.
그래서 어떤 군대는 휴가, 외박 나가는 군사들을 향해 앞 만 보고 달려라. 좌우를 보지 말고. 길을 가다 보면 우리의 눈과 마음을 빼앗는 수많은 유혹들이 얼마나 많아요. 이 경제 구조와 문화 자체가 이상하게 눈과 마음을 자극하여 팔아먹는 것들이 얼마나 많아요? 자동차 선전하는 데 왜 아름다운 자매들이 벗고 나와야 해요? 난 이해를 못 하겠어요. 어느 회사에서 다 입혀서 나오면 더 잘 팔릴 것 같은데.. 이게 한 예지만 모든 경제의 구조가 그런 인간의 단말마 적인 자극을 통해서 장사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야고보서 1:14-15,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여러분 결국 이 끝이 무엇입니까? 사망입니다. 사망의 반대 개념이 뭔가요? 생명이지요. 시련을 잘 견디는 자는 생명의 면류관을 얻어요. 여기서 말하는 사망은 생물학적인 개념으로 숨이 멎고 소멸하는 것과 같은 사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여기서 말하는 사망은 하나님과 반대되는 모든 삶의 형태와 패턴을 말하는 거예요. 죄를 토해내고, 죄를 쏟아내고, 음란과 사욕과 거짓과 살인과 위협과 이 모든 것이 무슨 패턴인가요? 사망의 패턴이에요. 공격하고, 무너트리려 하고 악을 쓰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전부 무슨 냄새인가요? 사망의 냄새요. 생명의 면류관 영원한 면류관은 생명의 냄새를 내게 되어 있어요. 거룩과 의와 자비와 양선과 온유와 절제와 사랑과.. 이게 생명의 면류관이에요. 이 두 반대개념을 일부러 성경 기자가 대비시켜 내는 거예요. 문제는 늘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양자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한다는 거예요.
여러분 독일 출신의 유대인 철학자 '아르헨트'라는 사람이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전범자 중 하나인 '아히만'을 잡아서 재판하고 심문하는 과정에서 보고서를 낸 적이 있어요.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 요지는 이거예요. 세상 사람들은 전범자 아히만의 기록을 봐서 성격 파탄자이거나, 인격 장애자이거나, 무지막지한 흉악범일 것을 기대했는데 그런데 정작 심문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그는 너무나 뜻밖의 인물이었어요. 상냥하고 친절하고 이웃집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자상한 아저씨에 불과했데요. 그러한 사람의 내면에 인간의 생명과 존엄에 대해서 무자비한 역사적 만행이 나왔다는 것이 도무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었음을 보았던 거예요.
혹시 여러분 '공범'이라는 영화 보셨나요? 공소시효가 몇일 남지 않은 유괴범이 있었어요. 그 사람의 목소리가 공소시효를 며칠 앞두고 라디오를 통해서 노출이 돼요. 며칠 안에 그 범인을 잡아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어느 아름다운 자매가 그 목소리를 듣다 보니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인데 아버지 목소리임을 알고 기겁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 아버지는 20년 가까이 그렇게 착하고, 선하고 평범한 삶을 사는 아버지였기 때문에 더 믿을 수가 없었겠지요. 그래서 공소시효가 지난 시간에 맞추어서 아버지가 딸에게 "다 너를 사랑해서 그랬다."는 말을 해요. 그런데 라디오에 노출된 아버지의 음성은 너무나도 끔찍하고도 무서운 음성이었어요. 인간의 내면에는 항상 이 둘 양자가 공존을 해요. 악과 선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오늘도 우리는 사망의 냄새를 낼 것인가? 생명의 면류관을 향해서 오늘도 우리가 이 하루를 잘 감당할 것인가? 성경 기자는 이렇게 단호하게 해답을 남겨놓고 있어요. 야고보서 1:16-18,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라 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신자가 그 사망의 냄새와 생명의 냄새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 밖에 없어요. 말씀을 구하며 하나님 앞에 철저히 매일매일 은혜를 구하여 무릎 꿇는 거예요. 시편 119:9-11, 9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다 10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11 내가 주께 범죄 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여러분, 이 과업은 매일 매일 우리의 일상 속에 하루를 시작하면서 계속 평생을 싸워야 할 문제예요. 그래서 야고보는 어제의 본문을 통하여 "너희가 지혜가 부족하거든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거기서 두 가지를 이야기해요.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해요. 그리고 구하는 것은 기도하는 것을 말하지요. 오늘도 우리는 사망의 냄새와 생명의 냄새 사이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삶을 경주할 것인가? 하나님은 시험하지 않습니다. 시험당하지도 않습니다. 문제는 외부적인 미끼에 우리 안에 죄를 향한 지치지 않는 열망이 걸려들 뿐입니다. 이것을 방지하는 길은 딱히 없어요.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매일매일 심어져야 해요. 그래서 순간 죄가 건들어질 때 우리 마음속에 말씀이 삐져나오고, 터져 나와야 해요. 계속해서.. 강력하게 그 말씀이 우리의 삶을 보호하고 견디게 하고 버티게 하는 힘과 동력이 되어야 해요. 믿습니까?
오늘 이 새벽에도 주시는 말씀 붙들고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