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태근 목사 I 야고보서 강해 3 I 야고보서 1장 5-8절 I 두 마음 I 야고보서 강해(03)
두 마음
- 송태근 목사 -
야고보서를 읽다 보면 이런 느낌이 자연스럽게 들어야 합니다. 왜 야고보 사도는 이 말했다, 저 말했다 주제가 불분명할까? 예를 들어 오늘의 본문을 보면 뜬금없이 '지혜로움'이라는 단어가 등장을 하는 것 같아요. 구조를 보면 지혜 이야기를 하다가 낮은 형제 구한자로 주제가 갑자기 바뀌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들으면서 본문을 유심히 묵상하다 보면 주제가 전부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이 되어 있구나! 치밀한 논리 전개의 형식을 가지고 있음을 금방 눈치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의 본문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그랬어요. 여기서 첫 번째 강조하는 게 뭐냐 하면, 부족한 거예요. 뭐가 부족하냐? 지혜가.. 이 말은 왜 했을까? 4절 때문에 한 거예요.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를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지난 시간번 서론 시간에 세 가지 접근을 먼저 했었어요. 우리가 길을 가노라면 먼저 목적지가 결정되어야 해요. 그렇지요? 그러면 당연히 어느 길로 갈 것인가에 대한 길의 선택이 있어야 해요. 길이 선택이 되면, 그 길에 지형을 살펴야 해요. 방지턱이 어디쯤 있는지 비포장인지 아스팔트인지.. 지난 시간에 서론 겸 공부한 내용이에요. 그렇다면, 오늘 그 길을 가는 데 2절에 보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네요?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난다.' 이것은 어느 인생이나 비껴갈 수 없는 길이에요. 지나야 될 광야도 나오고, 넘어야 되는 산도 나오고, 건너야 할 강이 갑자기 등장하기도 합니다. 그 길을 가려면 필요한 게 지혜라는 거예요.
그런데 지혜는 두 단계로 이해를 해야 해요. 예를 들어서, 성경을 읽다가 큐티를 통해 개인적으로 묵상을 하다가 이렇게 설교 시간에 말씀을 듣다가 깨달아요. '그렇구나! 그렇게 살아야겠구나! 그게 맞는 길이구나! 내가 틀린 생각을 가지고 있었구나!' 여기까지는 지식입니까? 지혜입니까? 지식이에요. 그러면 이 지시길 지혜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네, 들은 지식의 말씀을 결론되어진 손에 붙들린 말씀을 지혜가 되려면 삶의 자리로까지 녹여내야 해요. 여기까지 가야 그 지식이 지혜가 됩니다. 그래서 지혜라 함은? 첫째, 하나님의 말씀의 통찰력을 통해 깨닫는 과정과 삶으로까지 녹여내는 과정을 지혜라고 합니다. 잠언서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여기서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는 것은? '아! 나 말씀 듣기 싫어! 나 그 말씀 필요 없어.' 그 말이 아니라, 지식은 있는데 말씀을 들은 깨달음도 있고, 내 이성 속에 쌓아진 정보도 있는데 그것이 삶으로까지 순종되어지지 않는 태도를 총 망라해서 훈계와 지혜를 멸시한다고 표현한 거예요. 잠언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지혜란 뭡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리까지 가는 거예요. 여호와를 경외하게 되면 그 지식이 지혜로운 삶의 자리로까지 순종되어지는 과정을 여호와를 경외하는 과정을 통해서 나타난다 그 말이에요. 그래서 여기 보면, 무엇이 명철이라고 하나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 그것은 깨닫거나 이성적인 터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안다'는 말은 히브리적인 개념으로 '경험'을 말하는 거예요. 히브리서 공부를 할 때, 5장에 보면 '너희가 때가 오래되었으므로 마땅히 선생이 되었는데 아직도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이는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그게 알지 못한다 그 말이에요. 말씀을 들은 말씀도 있고, 깨달은 말씀도 있는데 그 말씀대로 살아내지 못한 경험이 없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말씀을 모른다는 거예요. 경외함이 삶 속에 한 번도 없었던 거예요. 눈물 흘리고, 감탄하며 깨달은 적은 있는데 그 지식의 말씀을 끌어서 내 삶의 자리로까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과정을 통해 살아낸 경험이 없는 거예요. 결론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이다? 모르는 것이다? 모르는 것이다. 믿습니까? 이게 지혜예요.
그런데 조금 더 나아가봅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누구에게 구하라?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여러분, 요즘 우리는 IT 공간 속에 직간접적으로 노출되어 있어요. 나이 불문하고 내가 IT를 알던 모르던 IT를 떠나 살 수 없어요. 예를 들면, 스마트폰을 하나 사면 제일 먼저 뭐 하죠? 초기 설정을 합니다. 그러면 세팅한 대로 움직이도록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초기 설정을 해 놓으셨어요. 그 설정은 굉장히 중요한 원리예요. 그런데 타락한 인간이 거기서 떠나 있기 때문에 오작동이 나서 인생 자체가 뒤죽박죽, 뒤 틀려져 있는 거예요. 그러기에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초기 설정 값이 뭐냐 하면,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시다. 사실은 하나님은 주시는 것 이상이지요. 그런데 그 주시는 것 이상이 하나님 안에 가장 베이직 한 질서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시라는 거예요. 여러분, 이 원리를 잊어버리지 마세요. 특별히 창세기 내용을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이 땅에 왜 빚으셨는가? 복 주기 위해서 빚었다고 선언하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원칙은 주시는 분이에요. 그런데 이것이 가장 중요한 창조주와 피조물의 초기 설정의 관계예요.
그런데 그 하나님께 뭘 구하라고 합니까? '지혜를 구하라.' 이 지혜는 험한 인생길을 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걸 잘 아시고 구하라는 것이에요. 계속해서 5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누구에게? 모든 사람에게.. 첫 번째, 하나님은 이 지혜를 누구에게 주세요? 모든 사람에게.. 여기서 모든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사람을 총칭하는 표현이에요. 이 말은 곧 나에게도 대상이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인간은 어떤 마음 가짐을 갖고 오해를 품죠? 하나님은 나만 따돌리는 것 같아. 하나님은 나에게만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왜 나만 가지고 그래? 이런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어요. 아니에요. 첫째, 하나님은 주시는 하나님이신데 모든 사람에게 주세요. 그 안에는 당연히 저와 여러분, 나까지가 아니라 내가 포함이 돼요. 이 중요한 영적인 질서를 그대로 믿으십니까? 이 우주 천지에 나 하나가 존재했었어도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실 수 있는 사랑의 하나님이세요. 여러분 그 사실을 믿습니까?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라는 말은 몇 중에 나 하나라는 말이 아니라 그 대상이 당연히 내가 된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그 하나님이 어떻게 주세요? '후히 주시고..' 이 개념이 가장 중심 된 개념이면서도 어려운 부분이에요. 후히 주신다는 말은 어감상 이렇게 들리기 쉬워요. 내가 10을 달라고 했는데 하나님이 12-13을 주셨다고 이해하기 쉬워요. 물론, 하나님의 보편적인 품성 속에는 그런 요소가 당연히 있어요. 그런데 적어도 이 본문은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이 말이 갖는 의미는 오히려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은 심플하시다는 말이에요. 이 말은, 오로지 그 일에만 몰두하는 것. 즉, 아무런 할 일도 없는 것처럼..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가 어떤 필요가 생겨서.. 그 필요는 당연히 지혜를 구하는 필요니까 정당한 필요예요. 그걸 하나님도 알아요. 우리가 구할 때 마치 어떤 태도를 구하고 있냐? 이 번역에는 '후히 주신다'라고 했는데, 이 말은 단순하다, 심플하다는 거예요. 마치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향해서 그 일 밖에는 하실 일이 없는 것과 같은 태도를 갖고 계시다는 거예요. 여러분 자녀의 입장에 서보고, 부모의 입장에 서보면 이 관계를 이해하기가 조금 더 쉬워요. 자녀가 필요가 생겨서 어떤 문제에 절실해 있고, 부모는 그거를 충분히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과 여력과 마음이 있어요. 그런데 자녀가 타이밍을 잘 맞추어서 "아버지 저 이거 필요한데 이것 좀 도와주세요."라고 하면, 아버지는 어떤 태도를 갖고 있다고요? 마치 그 일 밖에 할 일이 없는 것처럼.. '오! 그래 내가 도와줄게." 이런 하나님이시라는 거예요. 이해가 되나요? 그게 여기서는 '후히주 신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거예요. 육신의 부모는 뭘 좀 해주면.. '내 노후는 책임져 줄까?' 계산도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그렇지 않고, 우리가 정당한 것을 구할 때.. 특별히 험한 길을 위한 지혜를 구할 때 단순한 태도를 갖고 계신다고요. 계산 없이.. 그냥 우리와 마음이 하나라고요. 그래서 여기서 '후하다'라는 말은 가장 이타적인 태도를 말하는 거예요.
이거를 예수님의 설명을 들으면 조금 더 이해가 되려나요? 마태복음 6:22-24, 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우리 몸에는 몸을 가늠하는 중요한 기관이 눈이에요. 그런데 가끔 눈이 고장이 나면 착시 현상이 생겨요. 그러면 그런 시선이 고장이 나면 누가 고생을 해요? 몸이 고생을 해요. 가다가 부딪치기도 하고, 계단에서 헛디뎌 뒹굴기도 하고 몸이 깨어지고 부서지고 고생을 해요. 눈이 망가지면 인생이 그렇게 고생하게 된다는 그 말이에요. 그러니까 눈과 몸은 뭡니까? 하나예요. 분리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본문을 잘 보세요.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여기서 '후하다'라는 말이 '성하다'라는 말과 같은 개념이에요. 성하면 시선에 의해서 정확하게 일치하게 보이면, 심플하게 보이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건강해질 것이요. 또 '눈이 나쁘다'는 말은 대상이 여러 개로 보인다는 말이에요. 여러 개로 보이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얼마나 그 인생이 고단하겠느냐 그 말이에요. 이게 목표물인 것 같기도 하고, 왔다 갔다 하다 보면 시간이 낭비되고, 인생이 피곤해지고 늘 뒤죽박죽 되는 거예요. 마태복음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우리의 착시 현상이 뭐예요? 주인이 두 개처럼 보이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을 믿어야 하지만, 물질도 우리의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있어. 이렇게 자꾸 목표물이 여러 개로 보이는 거예요. 그건 뭐가 고장이 난 거지요? 눈이 고장이 난 거예요. 시선이 고장 난 거예요. 그러니까 가다가 부딪히기도 하고 헛디디기도 하고 뒹굴기도 하고 인생이 경랑 속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야고보 사도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얘기했어요. 6절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여러분 5절에 보면,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했어요. 하나님이 꾸짖어요? 여기서 꾸짖다는 말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잘 못된 사고와 태도를 말해요. 즉 이런 거예요. '하나님은 왜 나에게 일시불로 주지 않으시고 월부 끊어주듯이 찔끔찔끔 생색내실까? 왜 하나님은 나한테 인색하실까? 하여간 나한테는 공짜가 없으셔. 꼭 대가를 치르게 하셔.'와 같이 별의별 상상을 하나님에 대해서 다 해요.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이 어떻게 보여요? 나만 꾸짖는 것처럼 보여요. 그러니까 이 꾸짖다는 것은 하나님이 실제로 그렇다는 건가요? 인간이 그렇게 생각을 한단 말인가요? 인간이 그렇게 하나님을 오해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오해와 요용을 갖고 있다는 거예요. 그 마음이 뭐예요? 의심을 하는 마음이에요. 의심하는 마음을 8절에서 '두 마음을 품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거예요.
그런데 야고보가 이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자연의 어떤 풍경을 슬쩍 끼워 넣습니다. 6절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것은 마치 '..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여러분 지금 야고보서는 누가 쓰고 있나요?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가 쓰고 있어요. 같은 배에서 태어났지요? 물론 DNA는 달라요. 예수님은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났고, 야고보는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났어요. 어쨌든 한 배에서 태어난 형제예요. 그런데 주로 이 둘이 어린 시절을 어디서 보냈나요? 갈릴리에서 보냈어요. 갈릴리는 바다라고도 불리는 호수를 끼고 있어요. 그러니까, 야고보의 입장에서 어릴 적 그의 배경과 인식에서 갈릴리 바다를 지울 수 없어요. 글을 쓰다가 어릴 적 풍경 하나가 머릿속에 떠오른 거예요. 저는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면 치솟은 산세 밖에 기억이 없어요. 태백산맥 줄기 끝에 경상북도 영주 장수면 반구리 아주 골짜기예요. 거기 태백산 줄기이기 때문에 산세가 굉장히 험하고 거칠어요. 그래서 경상도 사람들이 말도 거칠고 그래요. 매너도 별로 없고 물론 안 그런 사람도 있어요. 마치 야고보가 어릴 적 그 풍광이 떠오른 거예요. 바다에서 매일 파도가 치는 걸 보고 자랐지요.
여러분 파열과 파고는 두 물리력을 충돌할 때 일어나는 원칙이에요. 창조의 질서 속의 원리예요. 그러니까 두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표리가 부동하거나 이중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주인을 둘로 삼는다 그 말이에요. 양쪽에다가 힘을 실어요. 그러면 이 가운데에서 찢어지거나, 파열이 일어나거나 파도가 일어날 수밖에 없어요. 부딪치니까 그런 사람을 성경에서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닷물결 같으니라고 했어요. 그러면 이 파도는 하나님이 일으키거나 만든 파도일까요? 인간이 만들어 낸 파도일까요? 인간이 만들어 낸 파도예요. 한쪽을 놓으면 이 파도가 가라앉는데 그걸 놓지 못하는 거예요. 두 힘이 부딪히니까 찢어지거나 파열음을 내거나 파고가 높아질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걸 해결하는 방법은 한쪽을 놓는 방법 밖에 없어요. 그런데 절대 하나님의 일정하고도 심플한 사랑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아요. 그러면 고집과 고집이 부딪히면 누가 이겨요? 고집 센 사람이 이겨요. 인간은 고집부려봐야 80-90 부리다 가는 거예요. 하나님은 어느 정도 고집을 부리시는 분이세요? 영원하신 하나님. 그 고집은 영원이에요. 이건 빨리 포기하고 내려놓을 때 이 풍랑은 가라앉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욕망이 눈이 가리어지고, 눈이 고장 나서 이 둘 다 붙들 것 같으면 살 것 같아요. 하나님도 포기하는 건 아닌데 이것도 있어야 해! 이것도 의지해야 해! 그러다 보니까 파열음이 생기거나 파도가 칩니다. 인생이 맨날 뒤죽박죽 해요. 이것을 성경은 8절에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정함이 없다는 말은? 고요함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인생길은 돌멩이가 있느냐? 웅덩이가 있느냐? 가시덤불이 있느냐와 같이 길의 상태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런 길로 점철되어 있을지라도 그 길과 상관없이 고요히 갈 수 있는 방법 하나는? 하나님에게 올인을 해서 그분 등에 업혀 가면 돼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그 등 뒤에서 바둥대는 거죠. 내려달라고.. 등에 업혀 이 길을 계속 가면 위험할 것 같다고.. 어떻게 당신만 믿냐고 해서 백도 찾아보고, 자기 힘도 써보고.. 돈도 모아 보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정상에도 올라가 보지만 그게 어느 날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될 때 비명이 나오는 거지요. 결국 여러분 오늘 이 야고보서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인생의 지혜가 뭘까요? 첫째, 이 파도를 잠잠케 하기 위해서는 두 물리력의 충돌을 막아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 내가 양손에 쥐고 있던 것 하나를 내려놓아야 해요. 내려놓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할 수밖에 없는데.. 방법은 이 길 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가끔 하나님이 우리를 사방에서 막아놓으세요. 광야에 세워서 하늘만 바라보도록 사방에서 막아 놓으세요. 그나마 그래야 인간이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기 때문에.. 그제야 "하나님 살려주세요. 주님만 붙들겠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토해낼 수 있는 가장 고상한 지혜입니다. 그걸 지혜라고 하는 거예요. 그걸 누구에게 구하라?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서 마치 그것밖에는 할 일이 없는 분처럼 오늘도 문틈 새로 여러분들
그걸 누구에게 구하라 하나님께 구하라. 그 하나님은 마치 그것밖에 할 일이 없는 분처럼 오늘도 문 틈새로 여러분들의 고민을 들여다보시고, 여러분들의 절망을 들여다보시고 눈물을 들여다보세요. 지금도 그렇게 후한 태도와 우리를 향한 일정한 태도와 성실함을 가지고 하나님은 기다리신다는 거예요. 믿습니까? 오늘도 이 말씀, 이 원리가 또 새로운 두 번째의 기회인 새해를 주신 하나님께 일상을 살아가는 데 중요한 기초가 되고 고백이 되고 경외함으로 녹아지는 순종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렇게 함께 기도하기 원합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여전히 수많은 시험, 환란, 분노입니다. 이 길을 가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한데 그 지혜란? 지식을 넘어 순종에로까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에게 늘 부족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 구하라. 그 하나님은 기본 원칙이 우리에게 주시기 원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모든 사람에게, 바로 나에게 어떻게 주시죠? 후히. 심플하게, 마치 그것밖에 할 일이 없는 분처럼 그렇게 주십니다. 우리에게 그런 열렬한 태도를 갖고 계세요. 그 아버지께 구하라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사뭇 오해하는 것처럼 꾸짖는 하나님이 결코 아니세요. 무엇이 내 마음속에 영혼의 사실을 만들어 냅니까? 착시 현상을 일어냅니까? 두 마음을 품을 때 인생은 파열음과 파고가 높을 수밖에 없어요. 많이 내려놔야 해요. 계속 붙들고 있다가는 죽습니다. 오늘 이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경외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라고 말합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 붙들고, 멀리 선교지에 가 있는 우리 대원들 위해서, 또 새 날을 주신 하나님께 한 주간 살아갈 삶의 자질구레한 일상들을 내려놓고 주여 한 번 부른다음 통성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