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태근 목사 I 야고보서 강해 5 I 야고보서 1장 12-18절 I 무대 뒤 I 야고보서 강해 (05) I 설교문
무대 뒤
- 송태근 목사 -
여러분, 방송국에 가면 세트가 항상 있습니다. 거기는 스크린에 드러나는 곳이 비치고 보여지는 곳이지요. 그 무대는 보통 방송국에서는 세트장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데 때로는 침실도 되고, 강의실도 되고, 마당도 되고 여러 가지 삶의 이야기들에 따라서 변합니다. 그 현장을 늘 우리가 스크린으로 봐요. 그런데 혹시 무대 뒤켠으로 보신 적이 있나요? 저는 고정적으로 방송 녹화를 하다 보니까 무대 앞까지 나가기까지 무대 뒤에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보내는 시간이 꽤 돼요. 무대 뒤는 조금 컴컴하고 앞에 밝은 조명을 위해서 무시무시한 시커먼 전깃줄이 천지사방에 깔려 있고, 뿐만 아니라 카메라 맨들이 뒤에 대기해 있고 출연진들이 긴장을 하면 마실 물을 준비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작가들이 써놓은 대본을 계속 들추어 가면서 외웁니다. 그리고 그 대본에 따라서 스토리를 만들어 나가는 거지요.
오늘은 이 야고보서 기자가 담고 싶은 이야기가 삶의 현장의 이야기보다는 삶의 뒤편의 이야기입니다. 마치 무대 뒤에 현장처럼.. 무대 뒤의 현장에 따라서 앞에 모습들이 드러나는 거거든요. 마찬가지로 오늘 이야기는 우리 삶이 왜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막후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굉장히 근본적인 주제일 수 있고, 또 하나님의 원형의 계획을 우리가 만나볼 수 있는 시간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본문 12절의 말씀을 보기 원합니다. 12절,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두 가지를 이야기했지만, 결국은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뭐냐 하면? 시험을 참는 것은, 그 시험 속에서도 인내를 가졌다는 거지요? 참았다 그러니까.. 인내 끝에 얻는 것이 복이랍니다. 그런 자는 복이 있데요. 그리고 그 이야기를 조금 다르게 이야기합니다. 시련을 견디어낸 자는 마지막에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문장을 조금 분석을 해보면..
시험을 견디는 자에게 뭐가 주어진다고요? 복이 있데요. 시련을 견디는 자는 뭐가 주어지죠? 생명의 면류관이요. 그러면 무엇과 무엇이 같다는 건가요? 복과 생명의 면류관이 같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이야기와 짝을 이루는 구절이 있습니다. 4절입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히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도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해요. 이것도 인내를 견디는 것, 인내하는 거지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냐?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고 한데요. 그러면 전부 인내 끝에 주어지는 결과를 지금까지 이야기했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되는 겁니다. 야고보서 강해를 시작하면서 제가 자주 드렸던 설명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창조하실 때에는 반드시 목적지를 설정해요. 4절은 그 길의 목적지입니다. 인내의 목적지입니다. 그 목적지의 내용을 보니까,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고 우리를 설정하셨어요. 그리고 12절에서는 그 이야기를 이렇게 했어요. 그 시험을 참는 자에게는 복이 주어지고, 그 시련을 견디는 자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진다는 거예요. 다 같은 이야기 같은데 여기에는 차이가 있어요. 우선 우리를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는 것은 일차적인 목적지예요. 그러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겠지요? 결국 인내서 우리의 성품 제대로 만드시는 게 목적지라면 조금 따분하고 갑갑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게 다냐? 이런 생각을 하면 어떨까요?
공부를 하는 데 학위 자체를 목적으로 공부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걸 위해서 공부하는 사람이 몇이 될까요? 그 너머 졸업장 너머, 학위 너머 더 어마어마 한 유익이 있다는 걸 알기에 학위를 따고, 졸업장을 따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어느 분이 이렇게 설명을 했어요.
시련, 시험 인내라는 개념들은 현재의 성품을 온전하게 하는 것과만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어떤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 소피로우스 -
하나님이 4절에서 인내의 끝에 얻어질 목적을 온전하고, 구비하여 부족함이 없게 만드는 것이 목적지라고 했어요. 그런데 이게 다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소피로우스의 말에 의하면, 온전하게 하는 것과만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어떤 뭘 받을 수 있다?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 성품을 온전케 하는 것을 넘어서 더 놀라운 뭐가 있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오늘 12절에서는 뭐라고 설명했죠? 복, 또는 생명의 면류관이라 소개를 한 거예요.
초등학교를 입학을 했어요. 그러면 제일 먼저 뭘 배울까요? 자음, 모음을 배워요. 그래서 글자 만드는 법을 배우고, 글자 읽는 법을 배웠어요. 그리고 글자를 읽는 법을 알면 단어를 배워요. 단어를 연결시키기 위해서 문법을 배우고 숙어를 익혀야 됩니다. 그리고 나서 독해력을 키워요. 독해를 하게 될 줄 알면 그 글 안에 내용과 가치와 세계와 의미로 들어가요. 그러니까, 우리가 그렇듯이 졸업장이나 학위를 따는 것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온전하게 만들고 성품을 다듬어서 조금도 흠이 없는 존재로 만들고자 하는 것은? 그 자체에 목적이 끝나는 게 아니에요. 그 너머에 뭐가 있어요. 성경은 그것을 '하늘의 기업을 상속받을 자, 하늘의 경영에 동참할 자'로 우리를 불러주신다는 얘기예요. 오늘 야고보서 기자가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그거를 12절에서는 '복'이라고 설명을 했고, '생명의 면류관'이라고 설명을 한 거예요.
그러면, 그다음 단계로 들어가서 왜 그걸 복이라고 설명했을까요? 시험을 참고 견디는 것이 왜 복이에요? 우리가 참고, 우리가 견딘 거 아니에요? 그러면 이렇게 설명해야 맞지 않겠어요? 장하다. 잘했다. 수고했다. 그런데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 복이라는 말은 '마카리우스'라는 단어를 썼던데, 그 말이 갖는 함의된 의미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나누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라는 뜻입니다. 그게 복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상식적으로 시험을 참는 과정 자체가 내 노력에 근거가 있다는 건가요? 하나님이 어떤 결과를 주셨다는 걸까요? 하나님이 결과를 주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을 복이라고 설명하고 있어요. 복이라는 것은? 정확하게 내게 근거가 없다는 거예요. 내게 출처가 없다는 거예요. 그 말이 너무 지극히 당연한 것이 우리가 참고 짖이겨 죽었던 자거든요? 그러기에 그 결과는 하나님이 은혜로 주셨던 것이기 때문에 '마카리우스' 즉, 복이라고 설명을 한 겁니다. 여러분, 이 말은 왜 중요하냐? 누가복음 10:23,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여기도 '복', '마카리우스'를 써요. 그 눈이 볼 수 있는 눈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내게 입혔다 그 말이에요. 내게 근거나 원인이 있는 게 아니고.. 우리 교회에 저녁 예배가 있어요. 지휘하시는 분들과 식사를 했어요. 식사하면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왔는데 그중에 음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어요. "가끔 찬양대에 음치가 잡입하는 경우가 있다."라고 해요. 왜냐하면, 한 사람이 아쉬우니까 오디션 없이 신청하면 받는데 그러다 보니 가끔가다가 천하무적의 음치가 걸리는 경우가 있고, 음치 때문에 고생을 하시더라고요. 그러면서 한 이야기를 하셨는데 깜짝 놀랐어요. 제가 생각하기에 음치는 단순히 음악적 재능이 없어서 음치가 전혀 아니더라고요. 한 네 가지 특징이 있는데 첫 번째가 뭐냐? 음치는 소리를 듣지 못해서 음치가 된다고 해요. 회로에 들을 수 없는 DNA가 없데요. 그 소리를 못 들으니까 제대로 된 소리를 못 낸다는 거예요. 두 번째 특징이 뭐냐? 소리를 못 들으니까 자기 소리를 크게 내요. 세 번째, 음치 치고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 없데요. 마지막 네 번째, 성실하데요. 빠지는 법이 없데요. 지휘자들이 고생을 많이 한다는 거예요. 제가 그 소리에 너무 은혜를 받았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다는 게 얼마나 복인가요? 오늘 누가복음 10장에서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사실.. 그래서 인내 자체가 복이에요. 그 말은, 그 인내 자체가 우리 쪽에 근거나 원인이나 출처가 있지 않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하는 거예요. 12절을 다시 보실까요? '.. 복이 있나니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그 복은 누구에게 주는 거냐? 어떤 조건, 자격 요건이 아니라 성경에서는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그러니까, 이 복은 근복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게다가 시험이라는 말이 13절에도 등장을 하는데 '13 사람이 시험을 벋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이 하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여러분, 시험이라는 것은 항상 중립적이에요.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은 기본적으로 이미 죄가 들어와서 타락한 세상이기 때문에 모든 메커니즘 자체가.. 경향 자체가 뒤틀려져 있고 타락이 전제로 깔려 있어요. 그래서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피할 수 없는 게 필연적으로 시험입니다. 세상이 울퉁불퉁하기 때문에.. 그래서 2절에도 보면 야고보 기자가 이렇게 이야기했죠?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그러니까, 우리가 걷는 길에 시험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있어요. 그래서 시험은 중립적으로 봐야 해요. 문제는 여기에서 우리에게 선택의 결단이 매일 요구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택함을 입은 자들은 이 시험이 연단이 되어서 시련으로 나타나요. 그래서 12절에 보시면, '..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시험이 뭘로 바뀌었어요? 시련으로 바뀌었어요.
어느 재벌이 그런 말을 했더군요.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뭘 알고 한 얘기 같아요.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은 시험을 뭘로 끌고 가냐? 연단과 시련으로 끌고 가요. 그리고 그 시련 끝에는 뭐가 주어지냐? 복과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진다는 거예요. 그런데 반대로 여기 시험이 있는데 한쪽은 우리 속에 있는 죄가 촉발이 되어서 그걸 어디로 끌고 가냐? 유혹으로 끌고 가요. temptation. 이 유혹이 결국 우리를 사망과 영원히 미끄러지는 구덩이로 헤어 나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 이 두 갈래 길이 늘 우리 앞에 상존해 있어요. 이 결단은 매일 우리가 요구받고 있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야고보 기자가 조금 더 실천적으로 설명합니다. 15절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여러분, 잉태. 출산. 그다음에 사망. 이건 누구의 일생을 그대로 빌려서 설명한 걸까요? 인간의 일생을 그대로 빌려서 설명한 거예요. 우리는 누구나 잉태가 되어야 해요. 그리고 생명을 얻기까지 출산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리고 장성하겠지요? 마지막 끝은 사망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뭘로 대비시켰냐? 죄. 15절을 다시 보세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출산해요. 죄가 자라면 그 끝은 뭐죠? 사망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이 가는 경로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여러분, 죄는 우리 인간 속에 죄가 인간과 매치가 돼요. 우리가 아이를 갖게 되어도 남자 혼자, 여자 혼자 아이를 잉태할 수 없어요. 남자와 여자의 만남이 이루어져야 해요. 과거에 우리는 죄와 만났던 존재예요. 그래서 뭐를 잉태했었냐? 죄를 잉태했었어요. 그리고 그 죄를 출산합니다. 출산된 죄는 자라요. 성장합니다. 그리고 그 끝은 뭐죠? 죽어요. 왜 이 카테고리를 빌려서 야고보가 설명하고 싶었던 거냐? 근본적인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거예요. 18절입니다.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여기도 보니까, '낳았다.'는 표현이 나오지요. 여러분 낳기 전에는 반드시 무언가 잉태되어야 하죠? 우리는 뭘로 잉태됐나요? 진리의 말씀으로 잉태돼요. 죽었던 영혼에 우리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어느 날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고 진리의 말씀이 들어온 거예요. 죽었던 땅에서 열매가 나요. 그 한 알의 밀알이 사망의 땅에 떨어져 썩어 죽어서 열매를 내듯이.. 그분이 누구세요?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얘기해요. 그분이 우리 속에 찾아오셔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와 연결이 돼요. 그러면 우리에게는 뭐가 잉태되었습니까? 진리로 생명이 잉태되어요. 잉태되면 자연적인 그다음 경로가 뭐냐? 생명이 출산되어야 해요. 그래서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었습니까? 거듭난 존재가 되었어요.
한밤 중 이스라엘 최고의 지성.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왔어요. 하는 말 들어보니까,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 그러니까, "아! 내가 다시 어떻게 모태에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말귀를 못 알아들은 거예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하는데.. 그래서 훗날 니고데모를 어디서 만나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과정에서 아리마대 요셉과 시신을 담대히 달라고 찾아온 사람이 누구냐? 니고데모예요. 그 과정에서 니고데모는 그 진리의 말씀으로 태어난 거예요. 거듭난 존재가 되었어요. 태어나면 그다음에 어떻게 되어야 하냐?
"아가의 건강은, 엄마의 기쁨이래요." 서울 분유. 이런 광고가 오래오래 전에 있었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말씀으로 출산케 하셨으면 그다음은 여러분은 어떻게 되어야 하죠? 자라야 해요. 언제까지? 어른이 되기까지.. 어른이 되었으니까 끝! 아니라. 그 어른이 감당할 수 있는 인생을 폭넓게 섬기고 사랑하고, 살아가야 해요. 자라는 게 목적이 아니에요. 똑같은 이치예요. 그래서 오늘 18절 보니까,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그러면 그다음으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삶이 뭐냐? 지금까지 설명한 것처럼 인내라는 견디어야 하는 과정을 통해서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는 삶의 숙제가 남았다고요. 그러면 인내라는 말이 뭐냐? 원문의 뜻대로 설명하자면 이런 거예요. 우리 인간은, 이 우주의 법칙과 원리를 따라서 중력의 법칙이라는 원리로 살아갈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위로부터 짓눌려요. 밑에서 끌어당겨요. 중력의 법칙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인내는 중력의 법칙을 떠 받치고 거슬러요. 마치 하늘을 뚫고 하늘을 오르는 열망처럼.. 그래서 골로새서 기자가 뭐라고 했냐? '위엣것을 찾으라.' 밑으로 내려가는 것, 죄로 내려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에요. 그런데 거듭나는 순간부터 이제 우리는 하늘의 질서, 하늘의 원리로 이 짓누르는 삶의 무게를 뚫고 위를 향하는 열망을 담아서 삶의 원리를 뒤집고 바꿔야 해요.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버티는 힘이에요. 그 자리에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거예요. 계속 힘을 주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너희는 서서'라는 말은? 버텨내는 힘을 얘기합니다. 적군이 밀려올 때 성도들이 같이 스크럼을 짜고 물러서지 아니하고 버티는 힘을 얘기하는 거예요. 왜 그 인내를 복되다고 말씀하셨냐? 그 과정 속에서 우리를 함께 하시고, 우리와 동행하시고 인도하시고, 역사하는 분이 하나님이시오. 그 하나님의 힘으로부터 근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근거가 뭐죠? 사랑하심. 사랑이 근거예요. 우리가 매일 무너지고 넘어지고, 깨질 수 있어요. 그럴지라도 영원한 좌절로 실패로 갈 수 없는 것은? 우리를 그 자리에서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높고 높은 보좌에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첫 열매로 보내신 거예요. 그러기에 우리도 그 열매에 이어서 계속 자라고 태어나야 될 열매로 부르고 있다 그 말이에요. 그 이야기를 18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우리는 목적지를 가는 이 길 로정에서 여러 가지 시험이라는 삶의 현장을 만나요. 그러나 오늘 마치 세트장, 무대 뒤에 하나님의 스토리가 담아져 있는 대본의 이야기처럼 우리를 왜 창조하셨고, 우리를 어떻게 경영하실 것이며 우리가 과연 그 목적지까지 갈 수 있는가? 말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18절에서부터 담겨 있는 거예요. 믿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를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는 것은 일차적인 목적지예요. 이 목적이 완성이 되면 그 너머 하나님이 우리에게 동역할 하나님의 새로운 프로젝트, 하늘의 경영을 위해서 우리를 동역자로 초대하시는 경이로움의 생명의 면류관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뭘 의미하냐 하면? 우리가 인내할 수 있는 새로운 동기가 되어주신다는 거예요. 이것이 단순히 온전한 성품을 가진 자로 만들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너머를 봐야 해요. 그 너머에 '아! 우리가 견뎌야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구나!' 단순히 참고 견디고 인내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길이 얼마나 짠하고 눈물겨운 길이겠습니까? 그렇지 않단 말이에요. 그 너머, 우리를 그 영원한 하나님의 경영. 하늘의 유업을 이을 상속자로 구비시키고 준비케 하신다는 이야기를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 경영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머릿돌이 되어서 기초석을 놓으셨기 때문에 이건 중간에 부도나거나 중단될 그런 사업이 아니에요. 구원사업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가 머릿돌이 되어 시작한 공사이기 때문에 공사 중에는 별의별 흠과 연약함이 보이는 듯할지라도.. 그 하나님의 영원불변한 고집스러움과 영원한 사랑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마지막 피니시 라인까지 동행하신다는 약속을 이 말씀 속에 담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야고보서라는 책은? 무조건 행동하라! 순종하라! 가 아니라, 오히려 더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은혜를 동시에 담아내고 있는 책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씀 붙들고 이 한주도 펼쳐지는 한 주도 무너지지 말고, 주 앞에서 묶여 승리하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함께 서신 채로 기도합니다. 찬양의 고백처럼, 주신 말씀처럼 주 사랑이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나는 갈 수 없는 곳이고, 인내할 수 없는 삶의 자리 일지라도 그 사랑이 반드시 우리를 목적지까지 역사하시고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만이 내 마음과 아픔 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고백처럼 우리에게 찾아와 어루만져 주십니다. 무너져 왔지만, 주저앉아 울고 싶지만 그럴 수조차 없는 처지에 놓인 젊은이들과 성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무대 뒤에서 우리의 행복을 준비하시는 하나님.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려고 우리를 복되게 하시는 그 하나님을 우리가 믿습니다. 오늘 그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맡기고 또 한주를 시작합시다. 주여 한번 부르짖고 가지고 나온 삶의 모든 고단한 사연과 기도의 제목을 풀어놓고 주여 한 번 부른 다음에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