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story/송태근목사

송태근 목사 I 야고보서 강해 4 I 야고보서 1장 9-11절 I 부함과 가난함의 본질 I 야고보서 강해(04)

№1★↑♥ 2024. 4. 17. 00:00

부함과 가난함의 본질

- 송태근 목사 -

오늘은 야고보서 네 번째 시간인데요. 서론 빼면 세 번 진행했어요. 그런데 오늘의 진도가 11절까지입니다. 원래 11절까지가 첫 번째 단락입니다. 그래서 오늘 11절까지는 사실상 큰 문맥에서 2절부터 살펴보는 것이 맞습니다. 내용상. 오늘의 주제를 보면 '낮은 자'와 '부한 자'가 등장을 해요. 그래서 앞의 내용과 안 맞는듯한 느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정말 동떨어진 것인가? 아니면 어떤 연유에서 연결고리를 갖고 있나? 이걸 우선 보도록 하겠습니다. 9절입니다. '9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10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여기서 '낮은 자'와 '부한 자'를 대비시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낮은 쪽에는 '형제'라는 수식어가 있고, '부한 쪽'에는 수식어가 없어요. 그냥 '부한 자'입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두 번째로는, 낮은 형제도 자랑을 하라고 명령을 했어요. 그리고 부한 자도 자랑하라고 했어요. 이 자랑이 똑같은 수식이 되는데 이것 또한 무슨 연유일까? 이런 부분을 꼼꼼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어요. 

첫 번째, 오늘 야고보서 기자가 말하는 낮은 자는 누구일까? 야고보서가 말하는 '부한 자'는 누굴까? 이걸 규명해야 해요. 일반적으로 우리가 이러한 이해를 가지기 쉽습니다. 가난한 사람과 부자가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 문맥에서는 메인 메시지는 아니에요. 그래서 우리는 야고보 사도가 부한 자, 낮은 자를 어떤 비유를 통해서 설명하는 지를 잘 보아야 해요. 11절을 보시면,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아주 익숙한 시적인 표현이지요? 식물에 비유를 해서 이 내용을 설명한단 말이에요. 그러면 야고보 사도가 식물을 통해서 이 내용을 설명을 시도했다면, 자기의 원래 의도일까? 아니면 어디서 빌려온 표현일까?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서론을 기억해야 하는데 '야고보서의 저자'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입니다. 정통 유대인이에요. 짧은 5장에 걸친 책 속에 그래서 구약의 배경이 굉장히 많이 인용이 됩니다. 짧은 책 치고는 구약의 표현과 역사가 인용이 많이 되어 있어요. 대표적인 것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11절의 이 내용은 야고보 사도의 독창적인 표현이 아니에요. 놀랍게도 구약의 배경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던 야고보 사도의 구약의 어떤 선지자의 글을 인용한 거예요. 그래서 그 선지자의 글을 통해서 부한 자와 낮은 자의 개념을 설명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조금 더 접근해야 할 내용이 뭐냐? 그러면 도대체 원본이 어떤 책이냐? 그러면 자연스럽게 낮은 자가 누구인지? 부한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심판과 위로를 동시에 선포했던 선지자지요? 오늘의 40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사야 40: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이들은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냐? 바벨론 포로의 역사의 뜨거운 풀무 속에 던져져 있었어요. 고국을 떠나서..  지독한 고난 속에 있었어요. 이제 시기적으로 그 시간이 거의 다 가고 있어요. 그래서 이제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메시지를 주십니다. 이사야 40: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이 본문만 놓고 봐도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힌트로 얻을 수 있어요. 첫째, 고생의 때가 끝나가고 있고 그로 말미암이 죄 사함도 얻었어요. 징계를 충분히 받았다 그 말이죠. 그러고 나서 어떤 잘 못 때문에 지금 이스라엘 땅에서 살지 못하고 몽땅 뽑혀서 바벨론에 끌려온 포로 신세가 되고 말았어요. 그게 하나님의 가슴 아픈 징계의 방식이었어요. 이사야 40:3,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대로'라는 표현이 있죠? 이것은 보통 왕의 길을 말해요. 이 길을 통해서 누군가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왕이 오시는데 그 길을 하나님의 대로라고 합니다. 이거는 이중적인 암시가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메시아의 도래를 암시하고 있어요. 동시에 이 길은 누가 예비하시는 길이죠? 하나님의 대로.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길이에요. 누구의 구원을 위해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 왕의 길로 우리를 구원하실 진짜 왕이 오실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거예요. 이사야 40: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이것은 시적인 표현이기는 한데 이제 그 왕이 오시면 울뚝불뚝한 치솟은 험난한 산세와 같은 고역의 역사를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평안한 삶으로 진입하게 될 것을 암시하고 있는 시적인 표현이에요. 이사야 40: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선지자들이 이 위로의 메시지를 전했겠지만, 그 메시지는 선지자들의 말이 아니라 누구의 입이랍니까? 하나님의 입이라고 설명하고 있어요. 이사야 40:6,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6절에 낯익은 표현이 등장하네요? 그렇지요, 야고보 사도가 바로 이 부분을 인용한 거예요. 이것은 사실상 곧 역사의 지도에서 사라질.. 히브리 노예들이 풀려날 수밖에 없는 바벨론의 궁극적이 종말을 의미합니다. 그 바벨론의 종말을 풀의 꽃과 같다고 소개하고 있어요. 여러분, 세계를 한 때를 쥐락펴락했던 모든 열방들이 어떻게 사라지냐? 앗수르, 바벨론, 메대 바사, 그리스, 로마. 다 수백 년의 시대를 움켜쥐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사용되고는 용도폐기가 됩니다. 열흘 붉은 꽃이 없듯이 다 사라졌어요. 이 이사야서 40장은 그래서 우리 구원의 중요한 담론을 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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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사 사도가 바로 이 설명을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낮은 자는 누구고, 부한 자는 누구인가요? 낮은 자는 지금 비천하고 가난한 상태에 던져져 있는 히브리 백성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억압 받고 있고, 고통 속에 던져져 있는.. 끝날것 같지 않은 길고 멀고 험한 삶 가운데 짓눌려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상태를 성경에서 야고보 사도가 '낮은 자'로 표현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그들에게는 어떤 수식어가 붙어 있었죠? '형제'. 그런데 이 실상은 사실상 보기에는 비참한 것 같지만 하나님이 평가하실 때는 달라요. 9절을 볼까요?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그러면 높아지고, 자랑하는 건 뭘까요? 뭘 자랑하라는 말일까요? 어떻게 높아졌다는 말일까요? 아까 이사야서에서 왕의 대로로 구원자가 오신다. 그러면 지금 히브리 노예들은 어떤 상태에 있죠?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 음부의 권세와 같은 지독한 고난 속에 희망 없이 던져져 있었어요. 그들을 누가 높인다는 건가요? 오실 메시야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높이신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높이신 자는 누구인가요? 그들을 높이기 위해서 보좌에 앉으신 아들 하나님께서 낮고 천한 몸을 입으시고 이 땅으로 낮아지신 거예요. 그래서 비참한 몸이 되셨어요. 그런데 그 그리스도를 누가 높이셨죠? 하늘 보좌의 하나님이 높이셨어요. 그분의 높아지심 때문에 낮아지심과 높아지심 때문에 구원의 은혜에 묶이고 붙들려서 우리도 어떻게 되나요? 함께 생명을 얻고 높임을 경험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를 그렇게 구원하시고.. 그러니까 높인다는 말은, 우리를 사망과 음침한 골짜기에서 건져 올리시고 구원하신다는 말이고, 이렇게 하신 분이 누구냐? 하나님이요. 그래서 여기서 '자랑하라'는 말은 히브리 개념에 세 가지 표현이 동의어로 쓰이는데 '기뻐하라', '자랑하라', '즐거워하라' 같은 개념이에요. 

우리가 가지고 있든, 빈털터리이든 그분께 우리의 기쁨이 꽂히면 가지고 있는 것과 빈털터리의 개념이 무의미하게 되요. 이걸 넘어서는 관점으로 우리의 인생의 시각이 바뀌게 됩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큰 의미가 없어진다고요. 우리가 흔히하는 수식어처럼 정말 그리스도로 충분하고 복음으로 충분한 고백이 내 안에 있다면.. 그래서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기뻐하는 것으로 우리의 인생의 관점이 꽂히면 면 내가 얼마를 가지고 있고, 얼마를 높은가, 빈털터리인가?가 큰 의미가 없어지고 경계선이 사실 별거 아니고 우리의 인식 속에 새로워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히브리 노예들이 어떻게 낮은 자가 되었습니까? 이런 상태에 빠졌다는 거예요. 단순히 비참한 상태에 빠졌다는 것이 아니라 그걸 넘어서 흔히 정말 주님 밖에는 답이 없군요. 정말 주님 밖에는 반석이 될 분이 없군요! 이 고백을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고 나서야 터치게 되었어요. 

왜 그랬을까요? 이들은 지난 세월 동안 고국에 있을 때 단 한번도 하나님을 진심으로, 마음과 뜻과 진심을 다해서 섬겼던 적이 없어요. 그것을 대표적으로 알 수 있는 하나님의 계명 중 가장 메타포가 뭐냐?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문제가 무너져 있었어요. 안식일은 원래 날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날 하나님이 인생을 복주시기 위해서 설정하셨어요. 그런데 인간의 무한대의 욕망과 끝모를 탐욕이 안식일을 깨기 시작합니다. 겉으로는 지켜요. 그날 아무것도 안해요. 많은 규율들을 만들어서.. 그런데 밑으로는 사회적 약자들을 동원해서 종들을 동원해서 논의 논리를 일을 시키고, 땅을 갈게하고, 농사를 짓게 합니다. 쉬지를 못하게 하는 거예요. 사회에 안식이 사라지니까 점점 팍팍해지고, 피폐해지기 시작합니다.

땅이 쉬지를 못한다는 건 누가 쉬지 못한다는 건가요? 인간이 쉬지 못한다는 거예요. 안식이 사라진 거예요. 인류의 문제는 안식이 깨지면, 안식이 사라집니다. 인류의 길고 먼 여정은 이 참된 안식을 찾아 떠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를 가리켜 뭐라고 하시죠?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다." 내가 안식이다라는 거예요. 안식일에 땅을 쉬지 못하게 만드니까 인간이 쉬지 못하지요. 인간에게 어떤 일이 부작용으로 일어나느냐? 무한경쟁이 되고, 끝모를 탐욕이 일어나고 욕망과 쟁취와 탈취가 벌어지는 거예요. 그런 세상과 사회가 되고 말았어요.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두고 보시기에 걱정이 되었지요. 그래서 바벨론이라는 나라를 키워서 쳐들어 가게 하시고, 몽땅 이스라엘을 바벨론 땅으로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어떤 일이 벌어지죠? 원없이 일하게 되요. 이런 더러운 아이러니가 어디있어요?

과거에는 수고를 해서 자기가 먹고 살았지만, 이제는 남을 위해서 죽도록 고생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어요. 그러니까 시편  137편에 보면,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에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 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하는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해서 시온의 노래 중 하나로 자기를 위해 노래 하게 하는도다. ' 시온의 노래는 누구를 향한 노래여야 하냐? 야훼 하나님을 향한 노래여야 하는데, 그들을 사로잡은 자들이 그 하나님에 대한 경배의 노래로 자기들을 위해 노래하도록 요청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버드나무에다가 수금을 걸어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이 강변이 유진 피터슨이 쓴 시편에 보면 관사에 따라서 이 강이 다른 강이 됩니다. 자연의 강이 아니라, 관계수로예요. 그 태양이 지글거려 언제나 간조한 땅에 물이 없어요. 그러니까 물길을 만들어요. 이걸 다 누가했단 말일까요? 히브리 노예들이 끌려와서 한 거예요. 이 시편만큼 또 눈물겨운 시가 어디 있나요? 그러면서 그들의 DNA가 뼛 속 깊이 바뀌어지는 거예요. '우리가 잘 못 살았구나! 오~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대신 그렇게 쉬지 못하던 이스라엘 땅은 어떻게 되었나요? 70년 동안 안식하잖아요? 사람이 있어야 농사를 짓지요. 하나님의 역사 경영 방식이에요. 안 지킨 역사 만큼 하나님이 다 계산하셔서 70년을 그 땅에 안식을 주세요. 그 만큼 성경에 안식이라는 주제는 인간의 본질적인 주제요, 큰 주제에요. 결국 이 땅의 혼란도 사람에게 쉼이 없어서 그래요. 안식이 없어서 그래요. 그래서 그들은 바벨론 강변에 앉아서 버드나무에 하나님을 노래하는 악기를 걸어놓고 거기서 웁니다. 울었다는 건 무슨 말일까요? 이 문제의 답이 하나님께만 있음을 처절한 고백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뭐예요? 낮아짐이에요. 그럼 이게 복입니까? 저주입니까? 복이지요.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면 상대적으로 여기서 '부한 자'로 명칭된 이들은 누구입니까? 바벨론을 총칭하는 세상의 가치를 의미해요. 바벨론은 그 시대의 절대 국가였어요. 앗수르, 로마. 항상 바벨론으로 통칭되는 이 나라의 이름이 갖는 의미는 세상에 주권과 세상의 통치를 움켜쥐고 자기 인생의 주인을 자기로 삼는 삶의 방식과 사고 가치를 갖고 있는 총칭이 바벨론이예요. 그런 사람들을 성경에서는 '부한 자'로 표현을 하는 거예요. 자기 인생을 자기가 주인 삼는.. 돈이면 다 되는 거예요. 내가 세상 권력의 정점에 있으면 영원할 것 같고, 나를 안위해줄 것 같은데.. 이게 세상이 살아가는 방식 아닌가요? 그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자랑입니다. 명예가 자랑이고 높음이 자랑이고, 많은 분량이 자랑이잖아요? 왜 교회가 그런 걸 흉내냅니까? 그래서 여러분 10절을 잘 보세요.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여기서 자랑은 뭔가요? 진짜 자랑하라는 말이에요? 그들의 자랑은 하나의 말놀이에요. 언어 유희에요. 그들은 정말 그걸 자랑하고 살았어요. 그런데 그것이 들의 풀 같고, 풀의 꽃처럼 떨어지더라는 거예요. 영원한 것이 아님을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당시 원론으로 돌아와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궁극적인 목적지가 어디였습니까? 4절입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함을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함이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가장 중요한 목적은 온전하게 구비하여 부족함이 없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의도요, 목적이에요. 그러면 온전하고, 구비하여, 부족함이 없게 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이것은 어떤 윤리성, 도덕성을 포함하지만 가장 중요한 핵심 가치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내가 초가에 사나, 궁궐에 사나 상관 없이 오직 주만이 내 구주가 되시고, 내 주인이 되시며, 주만이 해결이시며 주만이 주제가 되시며 주만이 왕이 되신다는 고백을 할 수 있는 낮아진 자. 

그러니까, 여기서 낮다, 부하다는 것은? 물질적인 개념이 아니라 그 성도의 영적인 상태를 기준으로 하는 말이에요. 돈이 아무리 많아도 가난한 사람이 있어요. "주님 이것이 나를 지켜주지 않습니다. 나에게 주신 이 명예가 나를 지켜주지 않습니다. 주님이 나의 바위가 되십니다. 산성이 되십니다." 이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예요.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데 끝까지 자기 힘으로 살려는 시도와 의도를 내려놓지 않는 자. 부자로 사는 거예요. 

하나님은 제물이 많은 자를 정죄한 적이 없어요. 거기에 대한 어떤 인식을 갖고 있느냐를 물었을 뿐이지.. 솔로몬에게도 얼마나 많은 재물을 하나님이 주셨습니까? 물질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에요. 오늘 부하다, 낮다는 그걸 기준으로 하는 말이 아니에요. 어느 상황 속에서 우리의 고백이 그분으로 충분한가?라는 고백을 흔들리지 않게 하는가? 이것이 야고보 사도가 말하고 싶었던 2절부터 쭉~ 설명해 내려오던 전체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주제는 뜬금없이 등장하는 주제가 아니빈다. 가치관을 얘기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향한 삶의 방식을 얘기하는 거예요. 믿습니까? 우리는 이 낮음과 부함 속에 인생이라는 길을 열어요. 이 길에는 어떤 상황이 있는가 보십시오. 2절,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하라

누구를 기쁘게 하라는 말일까요? 그 하나님. 이 시험이 우리를 검증한다 그 말이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이라는 풀무의 역사에 짓눌려 지지 않았다면 하나님을 향하여 그들이 그분으로만 인생에 답을 찾았을까요? 우리가 의지하고 있던 그 모든 것들이 거품 같은 것이구나! 여러분 바벨론의 날씨와 이기는 두 가지로 설명을 합니다. 지글 거리는 태양, 항상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 태양과 바람이 맞부딪히면 어떻게 되죠? 모든 걸 다 말려버립니다. 그걸 11절에 이렇게 소개하고 있어요.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여러분, 여기서 모양이라는 것은? 세모적 표현인데 얼굴을 의미해요. 얼굴은 사람을 상징하는 가장 외적인 현장이 아닙니까? 그게 다 말라버리는 거예요. 여기에는 야고보 사도가 의미하는 종말론적 대 변혁의 암시가 녹아져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비록 이 땅에서 히브리 노예들처럼 비천하고 낮고, 항상 억압되고 초라하게 사는 것 같지만 그 날. D-Day가 오면, 모든 것들이 갈아엎어지고 대 변혁의 종말론적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을 암시하는 거예요. 그 길까지 우리에게는 수 많은 시험, 여러 환난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거예요. 기독교는 예수 믿으면 그 모든 장애들을 일시에 제거한다든지.. 그런 것이 없어진다는 약속을 하지 않았어요. 그 길을 어떻게 걸을 것인지에 대한 지혜를 하나님께 구하라는 말이 그래서 나오는 거예요. 우리 지난 주 '후히'라는 개념을 배웠지요? 무슨 뜻이죠? 열을 달랬는데 열 둘, 열 다섯을 준다는 분함없는 그것 밖에는 할 일이 없는 아버지처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태도를 마랗는 거예요.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데 어떤 태도로? 그것 밖에 할 일이 없는 분처럼..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신다 그 말이에요. 믿습니까? 그 하나님께 이 험로를 걸어갈 인생을 날마다 구하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하고 축복합니다. 

 

 

 

 

 

 

 

 

 

방금 올려드린 찬양처럼, 오늘 주신 말씀처럼 영광의 주님, 만왕의 왕 곧 예비하신 길로 오실 것입니다. 그 때까지 우리는 이 신앙의 경주와 보혈의 공로를 의잫여 붙드려 인내를 가지고 이 길을 걷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지혜입니다. 그 지혜를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합니다. 그 하나님께 메달릴 때 우리는 항상 낮은 자가 되어줄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 이 문제도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저 사건도 주님의 자비가 필요합니다. 늘 한나처럼 마리아처럼 비천한 여인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할 때 그 영원한 하나님이 반드시 경랑의 역사속에서도 들으시고 높이시리라 확신합니다. 우리 주여 한번 부르고 함께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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