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철 목사 설교문 I 길을 아는 것과 그 길을 걷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I 열왕기하 5장 1-19절
다시 듣는 이재철 목사 설교, 열왕기하 5장 1-19절 설교, 믿음이 입증되고 있습니까?, 길을 아는 것과 그 길을 걷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믿음은 신실이며 신실은 증명된다, 열왕기하 5장 설교
믿음이 입증되고 있습니까?
- 이재철 목사 -
'믿음'이라는 이 단어를 헬라어로 '피스티스'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말은, '믿음'이라는 단어도 있고, '신실'이라는 단어도 있는데 믿음을 가리키는 헬라어 '피스티스'는 믿음과 신실이라는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헬라말에는 믿음이라는 말과 신실이라는 말이 구별되지 않습니다. 헬라말로 믿음은 곧 신실입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으시다가 믿음이라는 단어를 만나시죠? 그 믿음이라는 단어의 뜻을 더 정확히 이해하시려면, 믿음이라는 단어를 신실이라는 대체 해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22절입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이 말씀 얼마나 좋습니까? 믿고 구하면 다 받는다. 그래서 기도회 시간에 단골 성경구절입니다. "주님 내가 믿고 구했으니 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평생 예수를 믿으면서 여러분들이 믿고 구하는 것을 다 받으셨습니까? 만약에 이 자리에서 누구든지 "나는 평생 예수 믿으면서 믿고 구하는 것 다 받았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거짓말하는 사람입니다. 믿고 구하는 것에서 '믿음'을 '신실'로 바꾸어 보겠습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신실하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신실한 사람이 헛것을 구하겠습니까? 신실한 사람이 무의미한 세상의 것을 구하겠습니까? 신실한 사람이 욕망의 것을 구하겠습니까? 신실한 사람은 더 신실한 삶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너희들이 더 신실한 삶을 위해서 기도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리라." 신실하신 주님께서 그런 기도는 다 응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으면 신실하게 살게 되어 있습니다. 무엇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어제까지는 내가 등한시 하던 하나님의 말씀을 좇는 사람이 됩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내가 세상의 것을 붙잡고 내 인생을 허망하게 허공에 흩날려 버렸는데, 오늘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나의 시간을 영혼으로 건져 올리는 신실한 삶을 삽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바르게 믿으면 그 사람의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헬라어 명사는 '피스티스'인데, '믿다'는 동사는 헬라어는 '피스티오'입니다. 이 '피스티오'는 바로 입증하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믿음 그 자체로서 스스로 입증됩니다.
여러분들은 자각하지 못해도 다른 사람은 여러분의 믿음을 다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저 권사님이 정말 존경 받을 만한 참된 권사님이신가? 아닌가 다 아시죠? 저 장로님은 교회에서만 교회에서만 장로님이시고, 일터나 가정에서는 전혀 장로님답지 않다는 거 다 아시죠? 어떻게 아시나요? 믿음은 입증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똑같은 논리로 다른 사람들이 다 여러분들의 믿음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왜? 여러분의 언행, 일상사가 여러분들의 믿음을 입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실한 삶으로 입증되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이 세상의 부귀영화, 잠시 누리다가 공동묘지에서 흙먼지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영원한 생명, 영원한 나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이 세상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땅에서부터 그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는 사람이라면? 매일매일 그 삶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신실한 삶으로 입증되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토대 위에서 오늘의 본문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열왕기하 5:1,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 환자더라
여러분 생각을 해 보십시다. 이 존귀한 아람 나라의 나아만 장군이 한센병에 안 걸렸으면 하나님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나아만이 걸린 한센병은 저주였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나아만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여러분, 혹시 저주 받은 것 같은 인생을 사시는 분이 있습니까? 저주의 파멸 속에 갇혀서 끝이 보이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 상황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소망을 가지십시오. 반드시 그 터널은 끝이 납니다.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날이 여러분들께 다가가고 있습니다.
2절 말씀입니다. 열왕기하 5:2상,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으매..
이스라엘 땅에서 노략질만 한 것이 아니라, 아람 도적떼들이 히브리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 잡았습니다. 노예 삼은 것입니다. 사로 잡힌 소녀가 어떻게 되었냐?
열왕기하 5:2하, ...그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 들더니
도적떼들이 자기네들이 잡아온 히브리 어린 소녀를 나아만의 아내에게 팔았습니다. 그래서 이 소녀는 나아만 아내의 몸 종이 되어서 수종 들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나아만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3절입니다. 열왕기하 5:3,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마님, 우리 주인이 이스라엘 땅 사마리아의 선지자 앞에 가시면 좋겠습니다." 우리나라 말로는 선지자로 번역이 되어 있지만, 히브리 원문에는 '선지자'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하 나비' 그러니까, 정확하게 번역하면 '사마리아 땅에 있는 그 선지자' 앞에 가시면 좋겠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선지자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엘리사 시대의 사람들은 그 많은 선지자들과 구별해서 엘리사를 부를 때는, 엘리사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엘리사는 워낙 큰 사람이기 때문에 정관사를 붙여서 '그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인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그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가시면 참 좋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열왕기하 5:3 하,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열왕기하 5:9,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나아만은 지금 한센병 병자 아닙니까? 온몸의 살이 썩어 문드러지고 있습니다. 심각하지요? 그런데도 나아만은 병자의 행색으로 엘리사의 집으로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아람 나라의 제 2인자, 군대장관의 위용을 가지고 엘리사를 찾아갔습니다.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가니까 군대장관을 가리키는 휘황찬란한 깃발이 휘날렸겠지요? 그런 모습으로 엘리사에게 찾아갔습니다. "네가 한번 나를 고쳐보지."
열왕기하 5:10,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그렇게 위용을 갖추고 갔는데, 엘리사는 문 밖으로 나와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집 사람을 보내어서 나아만에게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 그러면 네 살이 깨끗해질 것이다." 요단 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는 것은? 요단 강 물속에 들어가 손으로 일곱 번 문지르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려가서 한 번 씻고, 올라와서 몸 다 닦고 다시 내려가서 또 씻고.. 이렇게 일곱 번 반복하라는 것입니다.
11절입니다. 열왕기하 5:11상,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 이르되..
그 말을 듣고 나아만이 대노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올랐습니다. 왜, 나아만이 대노 했을까요? 두 가지 이유에서 입니다. 첫째. 11절을 다시 읽습니다. 열왕기하 5: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 이르되 내 생각에는..
나아만이 대노한 첫 번째 이유는? 자기 생각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나아만은 어떻게 생각했는가? 열왕기하 5:11중,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내가 이렇게 병거와 마병을 거느리고 위용을 갖추고 온 내게 와 서서.. 열왕기하 5:11하,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자기의 썩어 들어가는 몸 위에 손을 흔들어서 고칠 거라고 생각했다는 거예요. 지금 나아만은 무슨 생각을 한 거냐? 무당을 생각한 거예요. 여러분, 왜 엘리사가 집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을까요? 왜 나아만 장군에게 코빼기도 안 보여주고 "일곱 번씻으라." 했을까요? 왜 나아만의 생각처럼 신을 부르고, 손을 흔드는 현란한 몸 집으로 나아만을 낫게 하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하면 할수록 자기의 영험함이 드러나게 될 뿐,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무당 굿하는 거 보신 적 있으십니까? 실제로 봤건, 미디어를 통해 봤건.. 돈을 많이 받는 무당일수록 그 몸집이 현란합니다. 작두도 타잖아요? 그게 뭘 의미할까요? "나는 이렇게 영험해!" 그러니까, 돈 더 내야 해요. 무당이 귀신 부르는 거 보셨습니까? 그것이 연기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귀신 들려서 굿을 하는 무당들이 귀신을 부르는 것을 보면, 정상적으로 우리와 이야기하다가 귀신이 몸이 임하면 눈에 흰자가 더 많아져요. 그게 뭘 보여주는 겁니까? 내가 귀신을 소유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표정을 보면? 굿하러 간 사람은 그 무당에게 절대 신뢰를 보여줍니다. 현란할수록 무당을 더 신뢰하는 겁니다. 만약에 엘리사가 그렇게 했더라면, 나아만은 엘리사가 자기를 고쳐주었다고 생각하지 하나님이 고쳐주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코빼기도 보여주지 않고, 다른 사람을 시켜서 "일곱 번 목욕하라." 왜?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거든요. 그걸 나아만이 알게 해 준 겁니다.
열왕기하 5:15, 나아만이.. / 어떤 나아만이죠? 깨끗하게 치유된 나아만입니다. 그러니까, 그 이전과 전혀 달라진 나아만이..
열왕기하 5:15상, 나아만이 모든 군대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의 앞에 서서..
여러분 처음에 엘리사를 찾으러 갈 때, 군대를 데리고 가지 않았습니까? 그때 나아만은 되게 교만한 자세로 서 있지 않았을까요? "엘리사, 선지자라는 너 한 번 나와서 나 고쳐봐." 그런데 엘리사는 나가지도 않았지요? 지금은 몸이 깨끗해지고 도로 와서 엘리사 앞에 섰는데, 얼마나 겸손하게 서 있었을까요?
여러분, 우리의 평소 자세는? 문둥병에 걸려서 교만한 나아만입니까? 아니면, 치유를 받은 겸손한 나아만입니까? 열왕기하 5:15중, ..그의 앞에서 서서 이르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 안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참 신이 없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왜? 내가 만났으니까.. 그분이 나를 터치해 주셨으니까.. 그분이 나를 치유해 주셨으니까.. 그래서 나는 이제 그분만 참 신임을 내가 확신합니다. 열왕기하 5:15하, ..청하건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하니
예물이 도대체 얼마입니까? 은 사억 이천만 원, 금 64억 칠천만 원. 의복 열 벌. 이것만 받으면 엘리사 자손 대대로 편안하게 살지 않겠습니까? 열왕기하 5:16, 이르되 내가 섬기는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 앞에서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라..
"내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말하노니 하나님 앞에서 내가 그거 받지 않을 거예요." 왜? 그중의 일부라도 내가 받으면, 내가 한 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 하신 일인데, 내가 예물을 받으면.. 하나님의 공로를 내가 도적질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열왕기하 5:16하, ..나아만이 받으라고 강권하되 그가 거절하니라
나아만이 받으라고 강권하지만, 엘리사가 사양합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나아만이 받으라고 강권하므로 엘리사가 어쩔 수 없이 받았더라.' 보통 소설은 이렇게 이어지죠? 그런데 강권합니다. "이것 좀 받아주세요. 일부라도 받아주세요." 강권합니다. 그러나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너를 낫게 하신 분은 내가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열왕기하 5:17, 나아만이 이르되 그러면 청하건대 노새 두 마리에 실을 흙을 당신의 종에게 주소서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물과 다른 희생제사를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노새 두 마리에 이스라엘 땅의 흙을 실어달라는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만 참 신인 줄 이상, 내가 아람에 돌아가서도 하나님에게만 희생제사와 번제를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왕이면 이스라엘에서 가져간 흙으로 제단을 쌓아서 그 위에서 제사를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5:18, 오직 한 가지 일이 있사오니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용서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곧 내 주인께서 림몬의 신당에 들어가 거기서 경배하며 그가 내 손을 의지하시매 내가 림몬의 신당에서 몸을 굽힐 때에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용서하시기를 원하나이다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한 가지 간청을 합니다. "나는 이제 하나님만 신인 줄 확실히 압니다. 그런데, 우리 아람 나라의 왕은 림몬 신당에 들어가서 림몬 신상에 경배하면서 그 신상을 경배하는데, 내가 군대장관이기 때문에 연로한 왕이 그 신상 앞에 절하고 경배할 때, 내가 부축하고 나도 같이해야 합니다. 내가 앞으로 절을 하더라도 저것은 돌멩이 일 뿐이요 죽은 우상 일 뿐이요, 참 신은 오직 여호와 일 뿐을 내가 알고서 할 테니까 내 마음을 이해하시고,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당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얘기는 엘리사 당신에게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주시기를 간구해 주십시오." 이 이야기입니다.
열왕기하 5:19, 엘리사가 이르되 너는 평안히 가라 하니라..
'평안히 가라' 이 말이, 히브리 원문에 '샬롬'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샬롬이란? 평안, 평화라는 말이죠? 인사말이기도 하고, 평안을 비는 덕담이기도 합니다. 이 문장으로 보면, 나아만 장군이 아람 나라로 돌아가서 자기 직책상 어쩔 수 없이 왕을 부축해서 림몬 신상 앞에 절하는 것을 엘리사가 묵인해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아람 나라는, 하나님을 믿는 나라가 아닙니다. 지금 나아만 장군은 한센병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는데, 아람 나라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나아만 한 사람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유일한 신자인 나아만이 아람 나라로 돼돌아가서 신앙을 지키려고 하면 얼마나 어려운 점이 많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모든 에로점을 엘리사가 예견하고 그를 포용해 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바르게 만난 엘리사가, 저 나아만이 언젠가는 그와 같은 상황을 스스로 탈피할 것을 믿었기 때문에 묵인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람 나라로 돼돌아간 나아만은 이 이후에 어떻게 살았을까요? 계속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제 2인자의 권력과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서 죽을 때까지 왕을 부축하고 림몬의 우상 앞에 절하며 살았을까요? 바로 오늘 본문 다음 장인 열왕기하 6장입니다. 열왕기하 6:8-9, 8 그때에 아람 왕이 이스라엘과 더불어 싸우며 그의 신복들과 의논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아무 데 아무데 진을 치리라 하였더니 9 하나님의 사람 이스라엘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은 삼가 아무 곳으로 지나가지 마소서 아람 사람이 그 곳으로 나오나이다 하는지라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납니다. 역사적으로 계속 많은 전투를 거쳤거든요. 그런데 이 본문에 보니까, 아람 왕이 이스라엘과 싸워.. 아람 왕이 나왔지요?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아람 왕의 전략을 알고, 이스라엘 왕에게 알렸습니다. 이스라엘 왕 나왔지요? 엘리사 나왔지요? 아람 왕 나왔지요? 그럼 누가 나와야 하죠? 나아만 나와야 하는데, '아람왕이 이스라엘과 더불어 싸우며..' 누구와 의논해야 합니까? 당연히 군대장관 나아만과 의논해야 합니다. 그런데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 아람 왕이 이스라엘과 더불어 싸우며 그의 신복들과 의논하여 이르기를..'
앞에 나와 있는 나아만이 이때까지 군대장관을 했으면, 그의 이름이 반드시 나왔어야 하는데 그의 이름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니까, 아람 왕이 나아만이 빠진 신복들과 의논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 열왕기하 6장 8절과 9절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나아만이 아람 나라로 돌아가서 매일 왕을 부축하고 림몬 신상 앞에서 경배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으로는 "하나님 제 마음 아시죠? 저건 돌 덩어리입니다. 저는 하나님만 믿습니다." 그렇게 살지 않았겠습니까? 하루 이틀 지나고, 일주일 이주일 지나니까, 하나님을 만난 나아만의 속에서 자기 삶의 대한 회의가 일어났습니다. '내가 이러고도 부귀영화를 누려야 해? 아니야, 나에게는 이 세상의 부귀영화, 우상에게 절하고 누리는 부귀영화보다 나를 고쳐주신 하나님이 더 크고 중요하신 분이야." 나아만이 스스로 군대장관 직을 벗어던졌음을 의미합니다. 나아만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군대장관 직을 스스로 던짐으로써, 하나님을 믿는 자신의 믿음이 참인 것을 스스로 입증했습니다.
나아만이 미련 없이 차 버린 것을,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붙들려고 집착하는 미신의 소유자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지금 무엇을 붙들고 있습니까? 림몬 신당의 그 신상과 같은 우상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을 구원하시고, 여러분을 치유해 주신 하나님입니까? 성경의 위인들을 보십시오.
전부다 하나님을 만난 궁극성, 그 강렬함. 정체성 때문에 하나님께 모든 것을 던지는 삶으로 그들의 믿음을 스스로 입증한 사람들 아닙니까? 여러분,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까? 헌금이 많이 나오는 교회 입니까? 내가 헌금을 많이 하면, 내가 어떻게 살든 상관 없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돈의 걸신이 들린 걸인으로 생각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천하 만물이 다 하나님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돈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말씀 앞에 신실한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의 일상. 삶의 예배를 요구하십니다. 예배당이 큰 교회가 좋은 교회 입니까? 야곱은 허허벌판에서 하나님을 만난 뒤에 그곳을 가리켜서 '벧엘'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디든지 하나님이 계시면 그곳이 예배당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지으셨기에, 이 우주 만물이 하나님이 임재해 계시는 하나님의 예배당입니다. 그 예배당 앞에 아무리 크게 예배당을 짓는 들.. 바티칸 성당과 같이 크고 화려한 들 당할 수 있겠습니까? 교인수이 많은 것이 좋은 교회입니까? 여러분, 절대로 오해하지 마십시오. 대한민국 교회는 교인 수가 가장 많을 때부터, 그 순간부터 타락했습니다. 머리수가 많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좋은 교회는, 그 교회를 이루고 있는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신실한 삶으로 자신의 믿음이 참된 믿음임을 입증하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입니다.
오늘 밤부터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 "주님, 지금 이 자리에 머리 숙인 분들이 나아만이 되게 해 주십시오. 육신과 영혼이 썩어 문드러지던 나아만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순종으로 깨끗하게 치유 받은 나아만이 되게 해 주십시오. 우상에 머리 숙인 대가로 아람 제 2인자로 부귀 영화를 누리는 나아만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을 하나님 앞에 입증 하기 위해 세상의 우상과 부귀 영화를 배설물처럼 내 던진 신실한 나아만이 되게 해주십시오. 그리하여 지금 머리 숙인 분들의 모임인 교회로 인해 이 세상이 밝아지고 맑아지는 역사가 지금 이 순간, 이 밤 부터 시작되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