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 목사 I 야고보서 1장 13-18절 I 우리가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이유 I 설교문
우리가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이유
- 이재훈 목사 -
북극에 사는 에스키모인들이 어떻게 늑대를 잡는지에 대해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에스키모인들은 날카로운 칼에 피를 흠뻑 묻힌 다음 그것을 얼립니다. 그리고 날카로운 칼날이 위를 향할 수 있도록 얼어붙은 땅에 칼을 심어놓습니다. 그러면 어디선가 피 냄새를 맡은 늑대들이 찾아와서 칼 날을 핥게 됩니다. 얼어서 무감각해진 혓바닥은 급기야 피 묻은 칼날 위에 얼었던 부분이 녹고난 칼날까지도 핥게 되고, 그 칼날에 상처를 입은 줄도 모르고 거기서 흘러나오는 피로 인해 계속해서 칼 끝을 계속해서 핥게 된다고 합니다. 자신의 피까지 흘리면서 피에 도취된 늑대는 죽음에 이를 때까지 피를 흘리기까지 그 일을 반복하다 죽어간다고 합니다.
또 어느 나라의 도축장에서 소를 죽이는 법에 대한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낯선 환경에 들어선 소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소들의 마음을 최대한 안정시키기 위해서 그들이 만족할 만한 평안한 환경을 만들어 준다고 합니다. 소들을 트럭에 실어 이동할 때뿐 아니라, 이동하는 통로에도 어미 소들이 비벼 되는 촉감의 장치들을 만들어 놓고 그 부드러움에 젖어 들어 자신들이 수없이 다니던 가축우리를 다니는 듯한 느낌을 경험하게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는 가운데 자신의 발굽이 땅에 닿지 않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도살당한다고 합니다.
'삶은 개구리 증후군'이에 대해서 들어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냄비 속에 개구리를 넣고 서서히 온도를 올라가는 동안 물이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인지도 인식하지 못한 채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지요. 갑자기 뜨거운 물이 되면 뛰쳐나가려 하겠지만 자신이 느끼지 못하는 정도로 천천히 물 온도가 올라가는 동안 거기에 도취되어 죽어간다는 거지요.
이 세 가지 이야기는 인간들이 생물을 속임으로써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그 존재들이 죽음에 이른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죽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실상은 인간 자신이 유혹에 의하여 죽음에 이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죽음에 이르는 유혹은 돌발적이고 충격적인 사건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매우 점진적인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는 속임 당하는 일이 반드시 있습니다. 모든 유혹에는 속임수가 있습니다. 이 늑대와 소 그리고 개구리가 죽음에 이르는 것처럼 인간 자신도 유혹에 빠질 때는 반드시 속임수에 넘어 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에 야고보가 이렇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속지 마십시오. 유혹에 숨어 있는 거짓에 속지 마십시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혹의 위력을 우리는 결코 과소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내게 닥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방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사람들도 한순간의 유혹에 넘어지는 것은, 엄청난 일들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유혹의 늪에 점점 빠져드는 과정이 있었음을 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무너트린 직후에 유혹이 다가왔다면 능히 이겨냈을 거예요. 하지만, 아무도 다윗을 무너트릴 수 없는 막강한 군사력, 경제력을 가지고 평안하게 되었을 그때에 다윗은 유혹에 넘어졌던 것이에요. 히스기야 왕도 아사 왕도 마찬 가지였어요. 평안이 지속되어 아무 문제가 없다고 여겨질 때,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 많을 때, 고난이 없을 때, 내 삶이 견고하게 세워져 있다고 느껴질 때 유혹이 시작되는 겁니다.
아무리 견고한 성이라도 그 성 내부에 배신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 성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견고해 보일지라도 우리의 내면에 배신의 씨앗이 단 하나라도 있다면 우리의 삶은 유혹에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사람들은 유혹에 넘어졌을 때 즉각적으로 책임을 전가할 대상을 찾습니다. 다른 사람일 수 있고, 사탄일 수 있고 심지어는 우연한 상황에 책임을 전가하기도 하고, 급기야 하나님에게 까지 책임을 전가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최초의 타락사건 이후에 하나님께서 추긍하실 때 그들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3:12, 아담이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라고 제게 주신 그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제게 주어서 제가 먹었습니다."
여자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 여자를 누가 주셨나요?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여자를 주신 하나님 책임 아닌가요? 다른 사람 책임, 하나님 책임으로 떠 넘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책임의 전가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내면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이 죄를 범해놓고, 하나님께서 유혹 거리를 다 없애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신다면 제가 유혹에 빠질 거리를 다 없애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 라며 하나님께 책임을 떠 넘기기도 하는 거지요. 바로 아담의 모습이에요. 여자는 어땠나요? 창세기 3:13하,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먹었습니다."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 실과를 따 먹은 사건은? 우연히 아닙니다. 실수가 아닙니다. 깊은 밤, 배가 고파서 나무 열매를 하나 먹었더니 금지된 열매였다. 그게 아니에요. 창세기 3장의 타락의 사건은 충분할 정도로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요. 그 나무 열매를 보니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지라. 그것은 그 열매를 오랫동안 응시했고, 생각했고, 묵상했기 때문에 그렇게 보였던 것이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유혹에 넘어간 거예요. 사탄의 꾐에 넘어간 것이고, 자신의 자유 의지로 선택하여 넘어진 거예요. 유혹은 단 한 번의 사건이 아닌 일련의 과정이에요. 작은 것으로 시작하여 점점 자라나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에 하나님이 유혹의 원천이 아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악한 의도로 유혹하시는 분이 아니다. 모든 유혹의 책임을 하나님께 결코 전가할 수 없다고 합니다. 야고보서 1:13, 누구든지 시험을 당할 때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고 있다"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친히 누구를 시험하지도 않으십니다.
이 시험은 유혹으로써의 시험입니다. 지난주 12절까지의 시험은, 우리를 연단하시는 test or trial의 시험이고, 오늘 13절 이하에서는 우리를 무너트리는 유혹, temptation으로의 시험을 말씀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누구도 유혹하지 않으시고, 또 유혹받지도 않으시는 분이다. 우리가 유혹받는 것은, 오직 우리 안에 있는 악한 욕심이 유혹에 이끌려 미혹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14-15, 14 각 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유혹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15 욕심이 잉태해 죄를 낳고 죄가 자라 사망을 낳습니다.
이 말씀에는 유혹의 사이클이 나옵니다. 유혹이 어떤 단계로 진행되는지를 설명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아담과 하와가 최초의 타락 사건에도 일련의 과정이 있고 시간이 있고 생각이 있고 묵상이 있고 판단이 있고 자신의 결정이라는 과정이 있었던 것처럼 유혹은 한순간에 휩싸이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거예요. 어떤 상황이나 다른 사람이나 심지어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할 수 없는 자기 안에서 판단하고 느끼고 경검하고 결정하는 과정이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것은 또 다른 단계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고 합니다.
여기에 세 단계가 나옵니다. 유혹의 Life Cycle 첫 번째 단계는, 미혹의 단계입니다. 우리 내면의 욕심이 외부의 유혹을 만나게 된다는 거예요. 미혹이라는 원래의 뜻은 낚시 바늘에 있는 미끼를 물고기가 물었을 때의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예요. 물고기를 미끼를 보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에요. 배가 고프니까 먹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거예요. 욕구 자체는 죄가 아니에요. 그 방향이 잘 못된 것이 죄죠.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배고픔의 욕구, 성적인 욕구, 다스리고자 하는 욕구 등을 주셨어요. 그 욕구를 통해 인간이 번성하고, 존재하고, 문화를 창조하고 인간이 세상을 통치하실 수 있도록 하셨어요. 욕구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잘못된 방향이 문제인 거예요. 어떤 종교에서는 욕구 자체가 잘 못된 것이기 때문에 욕구를 없애야 한다 말하기도 해요. 그런데 문제는 이 모든 욕구를 없애려면, 또 다른 욕구가 있어야 하는데 그 욕구를 어떻게 없앨 수 있냐는 거예요. 그 욕구가 잘못된 방향을 가질 때 문제예요. 잘못된 방향을 가진다는 것은 외부의 유혹거리에 반응하고 거기에 이끌려 그 미끼를 무는 것 미혹의 단계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거예요.
유혹의 단계에 들어서는 두 번째 단계는, 잉태의 단계예요. 잉태라는 것은? 욕심이 유혹을 만나 결합하여 죄를 낳게 되는 것이에요. 암수가 만나 잉태하는 과정처럼 표현하고 있어요. 잉태라는 것은? 품는 기간이 있다는 거지요? 자라나는 기간이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낳는 결과가 있다는 거예요. 죄는 하루아침에 땅으로 떨어진 것이 아니에요. 인간의 악한 욕심이 유혹을 만나 결합하여 낳아진 거예요. 그리고 그 죄는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낳아진 죄는 반드시 성장하게 되고, 사망에 이르기까지 자라게 됩니다. 외부의 어떤 개입이 주어져 있지 않으면 반드시 이 죄는 자라나서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수 없이 많은 유혹에 빠져 죄를 낳고 사망에 이르고 있지만, 하나님의 일반 은혜로써 때로는 법과 제도 윤리와 같은 많은 것들을 통해서 이것을 억제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그 죄를 따라가는 자는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이 미혹과 잉태와 성장의 단계에 이르는 유혹의 사이클에 빠져들면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헤어 나오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예요. 물고기가 미끼를 물게 되면 자기 힘으로 이것을 끊고 나오기가 너무나 힘든 것처럼.. 미혹자체에 들어가지 말아야 해요. 그런데 이 미혹에 잘 빠지는 사람이 누구인가? 일반적인 진리로 바라볼 때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이 올바르게 확립되지 않은 사람들이 미혹에 빠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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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사람들도 미혹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올바로 깨닫고 있지 못할 때 유혹에 넘어가게 됩니다. 지난주 말씀 9-10절에서 가난한 자는 자신의 높은 위치를 자랑하고, 부자는 자신의 낮은 위치를 자랑하라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재물에 두지 말라 것입니다. 사회적 위치나 환경에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복음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넘어가고 시험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지요. 최초의 타락에서 여자가 뱀에 왜 속임을 당했습니까?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뱀의 말은 다 거짓말이에요. 여자는 사람으로서 뱀을 통치할 수 있는 권세를 가졌지만 마치 뱀이 코치해 주는 것처럼 그렇게 여인에게 다가왔을 때 여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잊어버리고 뱀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죠. 거짓에 속게 된 것입니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할 때 우리는 수많은 세상의 음성에 숨어 있는 사단의 속임수에 넘어가게 됩니다.
구약에 대표적으로 쉽게 미혹에 넘어간 사람이 에서입니다. 이삭의 아들로 동생 야곱으로부터 속임을 받아 아픔이 있는, 분노에 가득한 그런 사람이지요. 지금의 이슬람국가의 대부분 나라가 에서의 후예, 에돔 족속 아닌가요? 그들의 마음에 한 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야곱의 문제는 야곱의 문제이지만 에서의 문제는 어디서 나왔느냐? 배고픔을 참지 못하는 매우 충적인 그리고 육체적인 들 사람으로 자라났지요. 왜 그가 들의 사냥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묘사될까요?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였어요. 아버지 이삭이 에서가 사냥해 온 고기만 있으면 에서를 더 이뻐했기에 에서는 아버지의 사냥을 받기 위해 들로 들로 나가 사냥을 해서 고기를 가져다 드린 거예요. 그럴 때마다 에서를 더욱 예뻐하시고 사랑해 주었으니 에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기 위한 노력으로 열심히 사냥을 했고, 들에 익숙한 사람이 된 거예요. 심지어 그 아버지 이삭은 에서를 추억할 때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면서 "너를 축복하기 위해 사냥해서 고기를 가져오라."라고 하지요. 이삭은 에서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가 잡아온 고기를 사랑한 것이에요. 그러므로 고기를 사랑하는 아버지의 의해서 그 아들은 매우 육체적인 인간으로 바뀌고 있었던 거예요. 이삭 역시 아버지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고, 공급자가 되어야 할 자가 소비자가 되어 아들을 이용하는 거예요. 뒷받침이 되어야 할 아버지가 이용하는 아버지가 됨으로써 그 아버지의 문제가 그 아들에게 그대로 이어진 거예요. 그러므로 그 가정의 불행이 정체성의 위기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어요.
예수님께서 광야의 유혹을 어떻게 이길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이기에 그냥 이길 수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지요. 예수님이 신적인 존재로만 이 땅에 존재했다면 40일 금식해도 배고픔을 느끼고, 광야에서의 시간을 힘들어할 이유가 없지 않겠어요? 완전한 인간으로서 그분은 광야의 유혹을 견딘 거예요. 우리와 같이 동일한 유혹을 받으시며 이기시는 모델이 되기 위하여 인간으로서 광야를 경험하신 거예요. 그런데 인간으로서 유혹을 받으실 때에 신적인 능력을 이용하면서 쉽게 유혹을 이기도록 속삭인 거예요. 예수님은 능히 돌을 빵으로 만들어 먹으실 수 있는 분이었지만 거절하시지요. 성전 꼭대기에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도록 천사들이 보호해 주실 수 있는 분이지만 그 유혹도 거절하십니다. 산 꼭대기에 올라 사단과 협조하며 한 팀이 되면 천하만국의 통치권을 주겠다는 거짓에도 넘어가지 않으셨어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유혹의 세 가지 본질이에요. '이생의 자랑,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이라는 세 가지 유혹의 본질을 이기셨는데 어떻게 이기셨냐? 그것은 아버지와 깊은 관계였어요. 예수님이 이 유혹을 당하시기 전에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 위에 올라오실 때에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어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 이 아버지 하나님의 음성이 예수님이 인간으로서의 모든 유혹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었던 거예요. 말씀으로 이기셨지요? 말씀을 인용하여 이길 수 있는 내면의 능력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아버지의 음성이었어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기뻐하시는 자라는 그 정체성이 예수님이 유혹을 이길 수 있던 기반이 되었던 거예요.
역으로 자신의 정체성이 올바로 확립되지 않은 사람들은 이 미혹의 단계에 넘어지는 일들이 많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추천한 영화를 보면, 수많은 범죄들 문제를 보면 대부분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에요. 실제적인 통계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심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사람조차도 유혹에 넘어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을 확실하게 확인하지 못할 때 그리고 그 아버지 하나님과 깊은 관계 속에 있지 못할 때 우리는 유혹에 빠집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 아버지께서만 주실 수 있는 것들을 이 세상으로부터,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채우려고 하는 것이 바로 유혹의 출발점이에요. 그래서 미끼가 보이는 거예요. 미끼를 물지 않아도 아버지께서 주시는 선한 선물들이 준비되어 있는데 그 미끼에 넘어감으로써 유혹의 삶이 시작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받으신 유혹의 본질은 스스로 돌을 빵으로 만들면 아버지의 공급하심을 끊고 스스로 공급자가 되라는 거예요. 천사들을 동원해 아버지의 능력을 이용해서, 아버지의 보호하심을 의지 않고 스스로 보호자가 되라는 유혹이었어요. 사단과 한 팀이 되어 스스로 영광을 받으라는 것은? 아버지께 돌려 드려야 할 영광을 스스로 차지하라는 것이었어요. 모든 유혹의 근본이 아버지와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에 있었어요. 예수님은 그것을 이겨내신 거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그 음성 때문이었어요. 오늘 우리가 어떻게 유혹을 물리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정체성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유혹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17, 온갖 좋은 선물과 온전한 은사는 위로부터 오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옵니다. 그분에게는 변함도,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빛들의 아버지시며, 온갖 좋은 선물과 온전한 은사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께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신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유혹이 왜 그렇게 강하고 끈질긴가요? 예수님을 잘 믿고 성실하게 살면 살 수록 유혹이 점점 사라져야 하는데 또 다른 유혹이 왜 다가옵니까? 그것은 궁극적인 대상이 우리만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아버지의 나라를 공격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영광을 가로채고, 아버지의 통치를 가로막는 것이 사도 바울의 목적이기 때문에 우선은 우리를 무너트리며 아버지와의 관계를 무너트림으로 불순종의 자녀들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아버지의 나라를 무너트리려는 것이 사단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빛들의 아버지이십니다. 이 세상의 빛이 없으면 생물이 살아갈 수가 없지요.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빛은 태양빛인데 그 태양 자체도 빛 자체는 아니에요. 빛의 발광체일 뿐입니다. 그러나 가장 강력학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빛, 그 빛을 통해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지요. 빛이 없는 곳에서 살아가게 되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빛을 통해 식물도 광합성 작용을 하고, 인간도 필요한 영양분들을 합성하게 되지요. 골다공증에 걸린 분도 강한 햇빛을 받아야 비타민 D가 형성된다고 하지요? 우울증에 걸린 분도 햇빛을 많이 쬐고 걸어야 한다고 하죠? 우리가 살아는 호흡하고 살아가는 모든 것들이 빛으로부터 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러나 빛들의 아버지이시고, 태양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간접적인 빛을 통해서도 생명을 보존할 수 있어요. 왜 그렇습니까? 진정한 완전한 빛 자체를 우리가 만나면 우리가 죽습니다. 그러기에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빛을 주시는 거예요.
우리의 육적인 삶, 생태계에도 그러한 데 영적인 생태계는 어떠할까요? 빛이신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임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조금도 어두움이 있을 수 없다는 거예요. 칠흑 같이 어두운 어둠도 하나님은 보시고, 어떤 어둠도 하나님께는 어둠일 수 없어요.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유혹에 빠지는 것은? 나 만 알고 아무도 모른다는 착각 때문입니다. 속임수입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신 분이기 때문에.. 요한일서에서 하나님이 빛이라는 것은? 그 빛이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어 드리고 고백하고 자백하게 회개함으로써만 우리가 아버지와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선물을 주십니다. 은사는 다른 사람을 도우라고 주시는 거예요. 우리가 미혹에 빠져 죄와 사망을 낳느냐 아니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좋은 선물과 은사로 생명의 길을 사느냐?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시는 가장 좋은 선물 중에 최고의 선물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다시 거듭나게 하시는 거죠. 우리를 재 창조하시는 것이죠. 야고보서 1:18, 그분은 우리를 창조하신 것 가운데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그분의 뜻에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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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기 욕심에 미혹되어 죄의 사망을 낳지만, 우리 아버지께서는 진리의 말씀으로 복음으로 우리를 낳으시고 다시 태어나게 하십니다.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의 뜻은? 처음 창조에서는 만물을 다 만들어 놓으시고, 인간을 제일 마지막으로 만드셨지만 새 창조에서는 인간을 처음으로 회복하시고, 만물을 회복하시는 방식으로 만물을 구속하시려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하시고, 다시 태어나게 하시어 새 하늘과 새 땅의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옛사람을 정산하고 새 생명으로 살아갈 수 있고, 그 새 생명은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니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은 거듭남의 선물이요,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갈 수 있는 새 창조의 선물인 것입니다. 이 새 생명으로 살아가는 아버지와의 자녀들은 아버지와의 깊은 관계 속에서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 음성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은 유혹을 물리칠 수가 있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유혹에 빠져 있다는 증거는 이러한 아버지와의 관계. 곧 기도가 끊어져 있다는 상태. 하나님 아버지와의 깊은 관계가 끊어져 있다면 틀림없이 유혹거리가 나타나 미혹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살아가며, 아버지의 돌보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유혹 거리가 나타나도 거기에 눈길을 돌리지 않아요. 왜? 아버지가 주시는 좋은 선물이 보이기 때문에.. 값진 선물이 보이기 때문에..
어린 자녀들은 천 원짜리와 수표가 구분이 안 되잖아요. 내가 아는 것이 큰돈이라 여기죠. 조금 자라게 되면 가치를 부여하는 것처럼 온갖 좋은 선물을 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아는 사람은 미혹되지 않습니다. 어느 책에서 읽었는데, 값비싼 도자기가 있었는 그 집 아이가 손이 빠지지 않는 거예요. 할 수 없이 엄청나게 비싼 도자기를 깨트릴 수밖에 없었는데, 동전 하나를 움켜쥐고 있었다고 해요. 그 동전을 놓지 않으려고 손을 움켜쥐었으니 손이 빠질 수 없었던 거지요. 동전을 놓으면 빠질 것을.. 동전 하나 때문에 엄청나게 값비싼 보물을 깨트려야 했다는 거예요. 바로 이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요? 아버지께서 주시는 좋은 선물을 세상의 미혹과 바꾸어 버리는 우리들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아버지와의 깊은 관계 속에서 그 좋은 선물을 누리며 살아가게 되기를..
그 삶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사람은 모든 사람이 쓰러지는 미혹에서도 절대로 쓰러지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아버지와의 깊은 관계 속에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의 모든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은혜와 능력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어려운 시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