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태근 목사 I 야고보서 강해 7 I 야고보서 2장 1-7절 I 차별의 죄 I 야고보서 강해(07) I 설교문
차별의 죄
- 삼일교회 송태근 목사 -
오늘은 차별의 문제에 대해서 다루려고 합니다. 차별을 죄까지로 규정할 수 있나? 글쎄요. 그래서 제가 검색을 좀 해보았어요. 종류를 헤아려 보니까, 우리 삶 전체가 차별이에요. 크게는 남녀 차별이 있어요. 그리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더 나아가서 한국사람들이 하기 싫어하고, 불편해하는 허드렛일을 외국 노동자들의 싼 노동값을 지불하고 그들은 코리안 드림으로 이 땅에 와서 허드렛일을 다 합니다. 그들이 지금 빠져나가면 산업이 마비될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 땅에 와서 구타, 매질, 욕설을 듣습니다. 이런 차별도 있지요. 뿐만 아니에요. 노숙인들.. 또 외모차별, 또 출신지. 경상도냐? 전라도냐?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도 고향 출신 문제가 굉장히 심각합니다. 담임목사가 경상도 출신이면 부교역자들은 호남출신들 안 뽑고.. 참 수준 이하의 이야기지요. 직장 안에서는 여성들이 겪는 워킹맘의 차별, 여자들이 일터에서 일을 하다가 임신을 하면 얼마나 축복된 일입니까? 하지만, 그때부터는 여성들은 눈치를 봐야 해요. 차별이지요. 그것뿐이겠어요? 시설도 차별을 받아요. 혐오시설. 뭘 혐오시설이라 하는지 아시죠? 장애인 학교가 들어선다거나 어떤 사회복지와 연관된 사회적 약자를 돕는 시설이 들어서면 가차 없이 혐오시설이라고 하지요. GNP 3만 불이 되면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중에서도 장애인들이 이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가혹한 환경을 맞이할 수밖에 없어요.
몇 차례 걸쳐 이야기를 드려서 아시겠지만? 저는 첫 사역지가 장애인 교회였어요. 어쩌다 보니 그들과 13년 같이 목회를 젊은 날에 했어요. 본래는 교역자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먹고 잘 때가 없어서 사찰로 들어간 거예요. 청소하는 사람으로 들어갔어요. 그러다가 승진을 해서 교역자가 되었어요. 조크예요. 교회 안에서 승진이 어딨어요? 방학 때 앞을 보지 못하는 목사님을 모시고 심방을 다녀야 해요. 대학생이 있는데, 겨울에 남산 터널 앞에서 재수 없다고 버스를 안 태워주니까 아침에 흰 지팡이 집고 선글라스 낀 사람들 보면 "재수 없다"라고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택시를 탈 수밖에 없어요. 택시도 안 서요. 그냥 한 없이 지나가는 거예요. 섰다가도 창문을 내리고 선글라스 끼고 흰 지팡이 집고 있으면 그냥 가요. 그런데 한 번은, 침을 뱉고 가더라고요. 사람한테 사람이. 제가 그런 일들을 몇 번 겪은 다음에 돌멩이를 들고 있었어요. 이번에 그냥 지나가면 봐라.. 터널을 빠져나가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던졌어요. 차가 뒤로 다시 오더라고요. 심방 가다 말고 길거리에 엉켜 붙어서 파출소로 가게 되었어요. "왜 그랬냐?" 묻는 거예요. "왜 사람한테 침을 뱉냐? 안태워주면 됐지, 왜 사람한테 욕을 하냐?" 그래도 돌을 던지면 되냐고.. 돌은 던져도 되고 사람한테 침을 뱉으면 안 된다고.. 돌도 사실은 던지면 안 되지요. 저는 이걸 20대에 너무 혹독하게 겪었어요. 이 사회가 아직도 미개하구나.. 인종차별.. 우리나라보다 조금 더 잘 사는 나라 가서 싸늘한 차별을 겪어 보셨을 거예요. 기가 막히게 교묘한데 기분 나빠요.
저는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를 2년 쉬고 자퇴를 했어요. 남의 집 살이를 오랫동안 한 적이 있어요. 저녁에 주인집에 들어가서 밥을 먹어야 해요. 얼마나 낯설고 불편합니까? 그래도 먹어야 하니까 들어가서 구석에 껴서 밥을 먹어요. 그런데 그 집에 동갑내기 여학생이 하나 있었어요. 외동딸이나 얼마나 귀했겠어요? 집안에서도 할머니가 저녁때만 되면 제 앞에 있는 반찬을 자꾸 그 여자애한테 밀어 넣는 거예요. 그러면 얼마나 기분이 안 좋고, 서글펐겠어요? 그런 기억들이 드문드문 올라와요. 차별이지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는데 정말 퍼지게 맞은 기억이 한 번 나요. 그때는 거리마다 골목마다 나환자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어요. 망태 같은 거 메고 밥 얻으려고.. 대문마다 그런 거지들이 밥을 동냥하느라 서 있어요. 그때 제가 한 5살 때니까 뭘 알겠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퇴근하시다가 거지가 밥을 얻으러 왔는데 인사 안 한 걸 봤어요. 누가 거지한테 인사를 해요. 안 하잖아요? 그랬더니 밥을 주신다음에 저를 광에다 데리고 가서 엄청 때렸어요. "어린 노무 자식이 사람 차별한다."라고.. 거지가 와도 인사를 해야지. 다섯 살짜리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런데 그게 너무 기억이 나요.
그런데 오늘 성경은 이 차별의 문제가 무슨 인격이나 성품이나 인품의 문제가 아니라 정확하게 죄라고 이야기합니다. 나아가서는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일이라고 까지 이야기합니다. 조금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닐까?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오늘 우리는 그 부분을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접근해 볼 필요가 있는데 1절을 보겠습니다. '내 형제들아..' 이 호칭으로 봐서 대상은, 당연히 잘 믿든 못 믿든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발언하는 거예요. '..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이 말의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 '영광의 주'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를 알아야 해요. 지금부터 짧게 영광의 주에 대해서 설명을 드릴 건데 이 개념을 정확히 알아야 차별이 왜 무서운 죄 인지를 접근하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은 만유의 주재자가 되시는 만물의 주인이세요. 이 천지 만물은 그분이 오너십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그분이 모든 것을 비워 내시고 이 죄인의 형상을 입고 이 땅으로 낮아지셨어요. 이유는 하나예요.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만들기 위해서 낮아지셨데요.' 그러면 이거는? 누구의 계획이고, 누구의 마음이고 누구의 뜻인가 하면? 고린도후서 4:4-6, 4 그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이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우리는 원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어요. 그리고 그 하나님의 형상이 가장 온건하게 드러난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나를 본 자는.." 누구를 보았데요?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하세요. 그러면 지난주, 그 지난주에 제가 여러분들에게 이런 말씀을 드렸던 거 기억하시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엇으로 다시 나게 하셨습니까? 진리의 말씀으로..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생명을 잉태하듯이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새로 나게 하셨어요. 새 생명을 주셨어요. 뭘로? 진리의 말씀으로 그러면 우리 안에는 이미 진리의 말씀이라는 DNA가 심어진 거예요. 그러면 우리의 전 인생을 통해서 어떤 모습이 나와야 할까요? 진리의 말씀에 해당하는 모습이 나와야 정상이에요. 그 진리의 말씀은 하나님의 속성을 말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아들은 누구를 닮는 게 정상이에요? 아버지를 담는 게 정상이에요. 진리로 낳았으면 아버지를 닮고, 하나님을 닮는 것이 정상이에요. 그런데 우리 안에는 두 본성이 싸워요. 새로운 DNA를 가지고 태어났는데 남아 있던 옛 육의 본성이 아직도 우리 속에 죄성이 남아 있어요. 이 두 본성이 충돌을 하는 거예요. 여러분, 오늘 이 고린도후서 4장을 마저 읽어볼게요. 고린도후서 4:4b, ..그리스도의 영광이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이 그리스도에게 그대로 반영이 되었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거듭난 생명이라면? 우리 안에는 과연 누구의 형상이 반영이 되어야 할까요? 그리스도의 형상이 그대로 반영이 되어야 해요. 그게 뭐예요? '영광'이에요. 그런데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서 자기를 비워내시고, 우리를 부요케 하기 위해서 자기를 가난하게 만드셨어요. 이게 누구의 형상이에요? 그리스도의 형상이요, 그리스도의 속성이에요. 그리고 영광의 예수예요. 이게 영광의 개념이에요. 우리가 생각하는 영광의 개념 하고는 사뭇 다르지요? 우리는 칭송을 받고.. 물론 이것도 영광의 개념이긴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독교의 영광은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그런 세속적인 원리의 영광이 아니라 자기를 비워내고, 남을 부요케 하는 것이 누구의 영광이냐? 그리스도의 영광이에요. 고린도후서 4: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논리를 잘 보세요.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누구에게 주었다고 하죠? 우리에게 주었데요. 그러면 자연히 우리에게 누구의 영광의 광채가 반영이 되어야 할까요? 그리스도의 영광이 광채가 반영이 되어야 해요. 그런데 그 그리스도의 영광은 어떤 것이라 했죠? 자기의 영광을 비워내서 낮아짐으로 우리를 부요케 만드는 가치예요. 그게 성경에서 말하는 '영광의 주'라고 표현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2절을 한번 볼까요? 야고보가 당시 일상에서 있었던 실 예를 하나 듭니다. '2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4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여기서 두 단어를 눈여겨보세요. 이런 당시 일상에서 회당 안에서, 교회 안에서 만날 수 있었던 흔한 풍경을 예로 들면서 4절의 이런 질문을 끌어냅니다.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이 문제를 풀어야 해요. 여기서 '차별'이라는 단어와 '판단'이라는 단어가 등장을 해요. 우선 이 차별이라는 뜻은? 야고보서 1장 6절에서 등장하고 설명되었던 의심이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예요. 이상하죠? 의심이 곧 차별이라는 단어와 같아요. 야고보서 1: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물결 같으니
이 글을 누가 썼죠? 야고보요. 이 설명할 때 야고보의 성장 배경을 설명을 드렸어요. 그는 갈릴리 출신이에요. 갈릴리 바닷가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풍랑을 익숙하게 보고 자랐고 풍랑이 왜 일어나는지 바다의 물리적 생리를 잘 알고 있던 사람이에요. 그래서 이런 설명드렸던 거 기억나죠? 서로를 향하여 당기던지 서로를 부딪히던지 두 힘이 맞부딪히거나 두 힘이 각자 당기면 물리력이 발생해서 풍랑이 되거나, 파도가 만들어집니다. 이걸 여기서 '의심'이라고 했어요. 그러면, '차별'은 뭔가요? 왜 '의심'이라는 단어가 '차별'이라는 단어를 같은 단어로 썼을까요?
자기 이상으로는 명분상으로는 알아요. 사람을 똑같이 대해야 함을 알아요. 그런데 내 안에 또 한편에 내추럴한 본성은 남루한 자가 들어왔고, 화려한 자가 들어왔어요. 그러면 화려한 자에게는 허리를 굽히면서 앞자리로 안내해요. 먼저 앉은 사람에게 자리를 이동을 요청하면서까지 앞으로 안내합니다. 그리고 남루한 자가 들어오면 인사도 안 하고 서 있든지 나가든지 알아서 하게 된다는 거예요. 우리 교회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의 인성 속에 내추럴한 본성. 이 두 마음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차별이라는 말이 의심이라는 말과 동의어를 사용하는 것은? 두 힘이 안에서 작용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야고보서는 이 말을 '나뉜 충성'이라고 까지 해요.
그러면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우리가 왜 야고보 사도가 '차별'이라는 주제를 끌어들이면서 뒤에 '판단'이라는 단어까지 끌고 왔을까요? 여러분, 차별을 하면 무엇을 근거로 하죠? 판단을 근거로 차별을 해요. 내가 판단을 근거로 차별을 해요. 외모로 판단을 해요. 그리고 마치 자기가 판단을 하는 직책을 가진 자처럼 그렇게 판단하는 일을 합니다. 여기에 두 가지 스테이지가 소개되었어요. 판단하는 직책을 가진 자처럼. 그리고 판단하는 직책을 가진 자로써는 판단하는 일을 해요. 이 결과로 무엇이 만들어지냐? 차별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이것이 왜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죄냐?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가장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분이 누굽니까? 그리스도와 하나님이세요. 세상의 이치라는 것은 다 가변적이고 변해요. 5년 전 자기 썼던 댓글을 하나 읽어 보세요. 10년 전 달았던 악플을 하나 읽어보세요. 이런 제목도 있죠? '그땐 틀렸는데 지금은 맞아.' 이게 세상의 이치예요. 세상은 늘 바뀌고 변해요. 저도 그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늘 우리는 표면적인 것만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리고 그 속에 깊게 뿌리 했던 것들이 세월을 걸쳐서 서서히 자라 오르면서 그 실체를 보면서 '내가 마음이 너무 앞섰구나!' 이런 후회를 쏟아낼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유일하게 모든 인생 사에 대해서 판단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밖에 없어요. 그리고 이 모든 세상의 이치를 가장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분도 한 분 밖에 없어요. 판단할 자도 한분이요, 판단자도 한 분 이세요. 그러면 뒤집어 봅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계속 판단하는 자리에 있어서 계속 차별을 만들어 낸다면 누구를 대신하겠다는 의도입니까? 그렇지요? 하나님을 대신하겠다는 의도예요. 여러분, 하나님을 대신하겠다는 의도만큼 무서운 죄가 있나요? 하나님을 대신하겠다는 모든 삶의 의도와 시도는 우상숭배입니다. 악한 것이고, 죄예요. 그러니까 차별이라는 것은 어떤 그리스도인의 인격의 문제도, 품성의 문제도 아니에요. 이건 정확하게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행동이에요. 그래서 차별은 죄인 거예요. 주인도 이 땅에 오신 가장 중요한 이유가 헬라인이나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막힌 담을 예수의 죽음으로 헐어내기 위해서 오셨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사회는 방금 대표적인 몇 개의 아이콘만 찍어내도 얼마나 많은 차별로 가득 차 있고, 우리 한국 민족을 무슨 민족이라 하죠? 한 민족이라고 해요. 한이 많아서 한 민족이에요. 물론 언어의 유희지만.. 그래서 곳곳에 차별에 근거해서 잉태되고 있는 시한폭탄 같은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사회가 분노로 들끓는 사회 아닙니까? 불특정 다수를 향해서 차를 돌진하고, 흉기를 휘두르고.. 얼마나 끔찍해요. 점점 소시오 패스와 사이코 패스가 많이 양산되지 않습니까? 왕따. 이것은 어떤 범죄가 일어났을 때 개인의 차원으로만 내 몰아서는 안 돼요. 이건 구조의 문조가 공동체의 문제로 공감성을 가지고 우리는 그 문제와 인간을 바라보아야 해요.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도 그러한 일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해야겠어요? 남녀의 차별이 가장 많이 벌어지는 현장이 사실은 교회 아닌가요? 예수님은 그 일을 위해서 어떻게 영광스럽게 되셨냐 하면, 모든 것의 주재가 되시고 주인이 되시는 그분이 십자가를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지셨어요. 그래서 우리를 부요케 하셨다고요. 그렇다면 그 부요를 입은 우리는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제 삶의 나눔과 낮아짐으로 떠나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한국교회가 이것을 성도들 각자가 삶의 자리에서부터 회복해 내야 하는 겁니다.
지금부터 제가 보여드리는 영상은 부분적으로는 실화고, 부분적으로는 각색이에요. 그러나 페북에서 보신 분들이 많을 거예요. 워낙 감동적인 충격을 주고, 오늘날 화석화 되어가는 생명을 잃어버린 한국교회에 울리는 경종이 크기 때문에 함께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이런 기도를 하면 어떨까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 속에 구분을 갖고 있고, 차별화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모든 막힌 담을 허물고자 오셨습니다. 지금은 우리 성도와 한국교회가 은과 금을 걷어내고 주님이 이미 낮아지심으로 부요케 하신 은혜를 나누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 언어를 통해서, 희생을 통해서 우리는 얼마나 낮은 자들을 향하여 따뜻한 시선을 보내고 갖고 있을까요? 캠퍼스에서, 가정에서, 일상의 삶과 특별히 일터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과 몸이 불편하고, 삶이 누추한 분들을 향한 우리의 시선. 마음가짐을 한 번 돌아보십시다. 오늘 주신 말씀을 붙들고 이런 기도 하십시다. 내 안의 담을 먼저 헐기 원합니다. 벌거벗고 수치스러웠던 내 인생을 가려주시기 위해서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그 수치를 가려주셨듯이 오늘 우리가 결론처럼 본 영상이 사실인지 각색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 중요한 메시지를 기억하십시다. 많은 세월 예수를 어떻게 믿어왔는지.. 자기 열심과 의의 근거된 종교생활은 아닙니까? 돌아보십시다. 이 기도의 제목을 놓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