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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story/송태근목사

송태근 목사 I 야고보서 강해 6 I 야고보서 1장 19-27절 I 세가지 명령 I 야고보서 강해(06)

by №1★↑♥ 2024. 4. 23.

세 가지 명령

- 삼일교회 송태근 목사 - 

오늘 야고보서 1장은 우선 18절을 한번 볼까요? 야고보서 1: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땅에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났어요. 뭘로 잉태하여 낳게 하여 잉태하였다고 하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는 새 생명으로 태어났어요. 생명이 태어나면 그걸로 끝나는 건가요? 그렇지 않지요. 그다음에는 필연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진리로 잉태되고, 진리로 태어난 만큼 무엇으로 자라야 할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라는 것이 우리의 본분입니다. 오늘은 그 얘기를 하는 겁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온전하고, 흠이 없이 구비하도록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중요한 목적이었어요. 그러면 오늘 그 얘기를 야고보 사도는 어떻게 풀어가고 있는지 유심히 보십시다. 19절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우리가 이 땅에 '진리'라는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통해 새 생명으로 태어났기에 우리의 본성은 하나님의 말씀의 본성으로 바뀌었어요. 그런데 여전히 우리의 옛사람은 희미한 기억과 흔적이 우리 속에 육의 본능으로 남아 있어요. 그러기에 항상 우리는 이 두 본성이 내면에서 충돌을 일으켜요. 새로 거듭났는데 여전히 우리 속에는 옛사람의 희미한 그림자가 아직도 자리 잡고 있어서 충돌을 일으켜서 우리의 성숙과 성장을 가로막습니다. 이 가로막는 것을 제어하고 통제하고 걷어내기 위해서 뭐가 필요하냐?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의 야고보 사도는 유독 자주 반복해서 많이 사용하는 단어 하나가 있어요. 21절입니다. '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3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25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온전한 율법이 뭔가요? 말씀이지요. 이 짧은 문단 안에 같은 단어가 반복되는 것은 사실 그렇게 좋은 문장은 아니에요. 그런데 어떨 때는 중요하기 때문에 문장의 형식과 질서를 뛰어넘는 필체와 기록들이 성경이 굉장히 많습니다. 이를 통해서 오늘의 본문은 세 가지 명령을 해요. 자라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 세 가지 명령이 나와요. 그리고 세 가지 명령 끝에 그러면 우리는 어떤 실천적인 삶을 살아야 될 것인가? 세 가지 실천 사항을 설명합니다. 세 가지 명령, 세 가지 실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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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19절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가 첫 번째예요. 본문을 얼핏 보면 네 말만 하지 말고, 상대방 말을 먼저 좀 들으라고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말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들으라. 그 뜻이에요. 그 이유는?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진리로 태어난 새 생명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가장 체질 상 맞는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사람이 어딘가 망가지면 외형적으로 제일 먼저 나타나는 증상이 뭘까요? 밥 맛이 똑 떨어집니다. 속이 들끓고 아픈데도 밥 맛이 당기는 사람은 거의 못 봤어요. 그러니까, 우리 영혼의 문제가 생기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성경에 대한 의욕과 허기가 싹 사라져요. 지금 내가 성경을 안 읽은 지가.. 말씀을 안 들은 지가 오래되었는 데도 전혀 허기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둘 중 하나입니다. 죽어 있거나 다른 것으로 포만감을 갖고 있거나.. 여러분은 어디에 해당이 됩니까? 정말 복이 뭐냐 하면? 때가 되면, 말씀에 대한 허기가 있어야 해요. 심령이 가난해져야 해요. 그래서 항상 말씀에 목말라 있어야 정상적인 영혼의 상태예요. 그래야 그 사람이 자라는 거예요. 왜? 우리는 진리의 말씀으로 새 생명을 얻었기 때문에.. 언제나 생명의 잉태라는 것은 혼자서 이루어지는 역사가 아니잖아요. 남자와 여자가 결합해야 생명이 태어나듯.. 죽은 우리 땅에 성령의 운동력이 말씀을 심었단 말이에요. 여기에서 꽃이 피고 새 생명으로 태어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땅은 이제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자라나게 되어 있는 거예요. 이게 원래 우리를 최초에 설계하신 하나님의 계획이었어요. 그런데 성경을 또 볼까요? 20절입니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여기서 '의'라는 것은 이런 거예요. 마태복음 3: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순간, 인침을 받아요. 그때는 신분이 바뀌는 거예요. 나의 어떤 공로 없이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칭해주시는 거예요. 이것은 칭함을 받을 만한 조건이 갖추어져서가 아니라 정확하게 일방적인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요, 구원의 역사예요. 신분을 바꾸어 놓았어요. "너는 내 아들이라."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자녀답게 만들어가는 성숙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오늘 야고보 기자가 1장 초반에 뭐라고 했냐? 온전하고, 구비하여 흠이 없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끌고 가는 의의 충만한 자리예요. 그 과정이 남았단 말이에요. 그 첫 번째 명령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라'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하나 있지요? 말씀을 먹는데, 성경에는 어디에도 이런 게 없어요. 말씀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또 어떻게 체계적으로 공부를 해야 제대로 할 수 있는지 방법론이 성경 어디에도 제시되어 있지 않아요. 왜 그랬을까요? 이왕이면 말씀이 중요하니 먹으라는 것을 강조해 놓으시고 방법론에 대해서 어떤 제안과 제시도 없단 말이에요. 

여러분 방법보다 중요한 것이 경청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과 정기적으로 만나도 상대에 대해서 마음을 열지 않고 수용하고자 하는 태도가 없으면 그 사람과 절대 가까워질 수 없어요. 유진 피터슨이 쓴 성경을 먹으라는 책이 있어요. 거기에 이런 에피소드 하나가 나와요. 할아버지의 손녀가 햇빛이 따스히 내리쬐는 정원에 있는 흔들 그네 의자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어요. 그 모습을 방 안에서 할아버지가 본 거예요. 손녀딸이 성경을 읽는 모습을 혼자 보기 아까워서 할머니를 불러서 얘기했더니, 할머니가 "쟤는 아직 글자도 몰라요." 얘는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예요? 어른들의 흉내를 내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성경을 백 날  읽고, 성경 공부를 백날 해도 그 말씀에 대한 경청하고자 하는 수용하고자 하는 자세가 없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그렇다면, 두번째로 19절입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이 의를 이루기 위해서 첫째는 말씀을 읽어야 하고 두 번째는 성내기를 더디 해야 한데요. 또 말하기를 더디 해야 한데요. 야고보서를 읽다 보면 어려운 것이 이런 거예요. 주제가 휙휙 바뀌어서 뜬금없는 주제들이 나오는 것처럼 보여요. 그런데 야고보서의 책 자체가 분량이 짧기 때문에 복잡한 설명과 부사적인 수사 어를 걷어내다 보니 다른 주제를 다루는 것처럼 보여질 뿐 일맥상통한 본질이 담겨 있습니다. 지금부터 듣는 문제를 위해서 왜 우리가 성내지 말아야 하는가가 하나님의 말씀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말을 많이 사람들은? 특징이 하나 있어요. 말을 많이 하는 친구를 만났을 때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들의 특징이 뭘까요? 말을 많이 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없다는 거예요. 요 관계적인 원리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원리가 담겨 있어요. 말이 많다는 건 뭐가 많다는 걸까요? 내 의견과 내 주장이 많다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어떤 일이 일어나냐? 정작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공부도 하는 데 정말 이 말씀에 담겨진 의미가 진짜 무슨 뜻인지를 수용하는 태도가 부족해진다 그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 한국교회 성도들이 기도를 참 열심히 하지요. 그런데 거의 기도가 원사이드 커뮤니케이션, 일방적이에요. 와서 쏟아놓고 자리에서 일어나요. "잠깐만, 내 말은 안 듣고 가니?"그러시면, "내일 또 올게요."하고 가는데 다음날 또 오면 또 그러는 거예요. 여러분 기도는 자기 일방적인 것이 아니에요. 제일 먼저 기도의 스텝은 듣는 기도에 익숙해야 해요. 하나님 존전 앞에 앉아서 그분의 마음을 읽고, 듣는 훈련을 해야 하는데 우리나라 성도들은 듣는 기도 훈련이 안되어 있어요. 신앙생활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거예요. 자기주장만 하고, 자기 말만 하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정작 사람사이에서도 나타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여지가 생기지 않는 거예요. 

두 번째, 분노의 사로잡힐 때 어떤 현상이 나타나냐? 청력이 마비가 됩니다. 여러분, 청력은 생물학적인 들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 안에 분노가 치밀어 오르면 소리가 안 들려요. 분노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는 말은, 공동체의 균형과 건강을 깨버린다는 말이에요. 왜? 일절 다른 소리가 안 들리기 때문에.. 그리고 유념해서 들어야 할 것 하나가, 분노와 죄는 굉장히 밀접한 친구 사이라는 거예요. 분노가 가득하면 그 열매가 거의 대부분 죄악을 흘러가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은 분노사회예요. 그게 더 무서운 게 불특정 다수를 향한 분노가 많은 거예요. 이건 사회 구조적인 문제와 환경적인 문제가 큽니다. 불특정 다수를 향해 흉기를 휘두르고, 차를 돌진시켜서 무고한 시민을 상하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아요. 이런 것은 공동체의 문제예요. 내가 피해 안 당했고, 내가 피해 안 입혔으니까 나 몰라라 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미투 운동도 우리 교회가 굉장히 반성해야 해요. 그런 일이 느껴지고, 보여질 때마다 우리는 침묵했고, 방관했어요. 함께 비명이라도 질러주지 않았어요. 심지어는 그 힘없는 자매들에게 위계질서의 권력을 이용해서 우리는 오히려 죄를 뒤집어 씌웠어요. 진짜 여성의 지위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대로 자유롭게 자리매김할 때 진정한 개혁이 오는 거예요. 지금 남성 사회에서 오랫동안 전통이라고, 관습이랍시면서 뿌리 박혀 있는 여성 하대 의식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더 악하고 저질입니다. 남자분들 군대 다 경험하셨죠? 여러분, 이거 사실 교회가 감당해야 할 시대의 과제인데 교회가 오히려 세상의 염려가 되어 있다 보니 세상이 이걸 뒤집어 놓는 거예요. 이게 다 분노로 작용해서 사회의 시한폭탄처럼 돌아다니고 있잖아요. 이걸 어떤 한 개인의 문제로만 보아서는 안 돼요. 그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의 공감대로 들어와야 해요. 그래야 이 문제가 실마리를 얻을 수가 있어요. 

그런데 야고보 기자는 인간의 분노는 조심해야 될 문제인데 어떤 은밀한 감정이 내재되어 있냐? 그 분노 속에는 차짓 잘난 체, 자기주장, 관용하지 못하는 태도, 완고함, 자기 의가 도사리가 있을 경우가 많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빗나간 분노는 곧 교만과 동일한 단어로 취급할 수 있어요. 소히 의로운 체하는 사람 가운데 이런 증상을 공동체 안에서 절제 없이 드러내는 경우가 많아요. 예수님도 적절하게 때로는 분노하셨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분노는 철저하게 계획된 분노였어요. 성전에서 상을 둘러엎으실 때도 채찍을 만드셔서 벼르고 있었어요. 그것은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분노였지 우발적으로 터진 분노가 아니란 말이에요.

또 하나, 우리 대부분은 우리가 성화의 과정에서 아직 거룩한 분노까지는 이를 수 없는 연약성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이 분노의 가장 큰 핵심은 귀를 닫게 만든다는 거예요. 자기 속에 북받쳐 오르는 어떠한 주장과 감정 때문에 그러면 사람들의 소리를 듣기 힘들다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음성을 그런 원리에서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성내기를 더디 하라는 두 번째 명령을 야고보 기자가 선포하고 있는 명령이예요. 

 

그리고 세번째로, 22절입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세 번째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는 거예요. 듣기만 하고 자기를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상한 예증을 하나 꺼내 듭니다. 23절 '23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이게 좀 이상하지요? 그리고 이 본문은 오늘날 개념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1세기 시대의 거울의 상태와 용도를 잘 이해해야 이 말이 갖는 의미를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요즘 남자고 여자고 거울을 참 많이 보는 것 같아요. 그런데 1세기 때에는 요즘과 같은 거울이 아니에요. 그때 거울은 청동을 밀어서 거울삼아 이용을 했어요. 그러면 아무리 닦아도 그것은 희미하게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거울을 볼 때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했어요. 그러면 거울을 왜 보았을까요? 옷매무새나, 옷에 뭐가 묻지는 않았는지와 같은 실용적인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거울을 이용했어요. 그런데 얼굴에 뭐가 묻었어요. 그러면 그걸 닦아야 할 거 아니에요. 그래서 23절을 다시 보세요.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여기서 '생긴 얼굴'은 창조 때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피조물의 원형을 말해요. 그 원형의 모습이 죄로 인해 망가졌잖아요? 그런데 그 후에 하난임이 주신 수여된 말씀을 통해서, 말씀을 거울삼아 우리 자신을 살피는 거예요. 그러면 그걸 닦아야 해요. 즉,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고 들은 거 아니에요? 그런데 읽고 묵상하고 공부를 하고 나서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아요. 삶을 고칠 생각을 하지 않고 또 그대로 살아요.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24절을 다시 한번 읽어볼까요?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25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여기서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까지를 말해요. 그리스도의 복음이야 말로 온전한 율법이에요. 적어도 그리스도의 온전한 자유의 복음으로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것을 반드시 뭐하여야 하는 자여야 한다? 실행하는 자. 거울을 봤는데 뭐가 묻은 걸 봤으면 닦아야겠구나! 해놓고 잊어버린다는 거예요. 그대로 안 살더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 구체적인 세 가지 삶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제는 세 가지 실천입니다.

 

 

 

 

 

지금까지는 세 가지 명령에 대해서 살펴보았어요.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 두번째는, 성내기를 더디하라. 성내기를 더디 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기 위해서입니다. 세 번째는, 듣기만 하지 말고 실천하라! 이 세 가지 명령이 있었어요. 그러면 구체적으로 그 삶의 표지는 어떠해야 하는가? 이 과제가 우리에게 남겨졌단 말이에요.  

26절입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혀에 뭐를 물리라? 재갈을 물리라. 

혀가 뭐 하는 기관인가요? 언어의 통로지요. 언어는 그 사람의 가치, 세계관, 관점 그러고 삶의 모든 걸 언어에 담아냅니다. 이사야 6장에 보면 웃시야 왕이 52년을 통치하고 죽어요. 솔로몬 이후 52년 동안 가장 부강한 시대를 구가했던 역사였어요. 그 절대 권력이 무너진 거예요. 그때 궁궐 안 팎으로 부정적인 소리와 절망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때 그 백성들을 대표하는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 들어가지요. 같은 심정과 무너지는 마음으로 어깨를 늘어트리고 하나님 앞에 "이제 어떡합니까?" 그때 하나님이 첫 번째로 보여준 그림이 뭐예요? 하늘 보좌에 하나님이 앉아계시는데 그 입으신 옷자락이 지상의 성전까지 드리워져 있어요. 그 보좌는 세 가지 담아진 상징이에요. 통치, 경영, 심판입니다. 그게 지상까지 드리워졌다는 것은? 여전히 하나님은 모든 백성들이 신음하고 절망하고 부정적인 불신의 소리를 쏟아내는 이 때에도 살아계셔서 통치하시고 경영하시고, 심판하신다는 것을 이사야에게 보여주시는 거예요. 그러자 이사야의 신음같은 첫 마디가 뭐에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라."  왜 입술입니까? 입술이라는 것은? 언어의 통로예요. 언어는 그 시대의 가치와 그 시대의 모든 사고방식을 담아내는 기관이에요. 백성들이 입으로 범죄 했다는 거예요. 하나님에 대해서, 시대에 대해서.. 이사야도 예외 없어요. 그러자 천사의 화젓가락을 통해서 입술에 죄 사함을 허락해 주십니다. 그러고 나서 죄 많은 세상을 향하여 이사야를 보내지 않습니까? 이게 혀예요.

혀에 재갈을 왜 물릴까요? 재갈이라는 것은 주인의 의도대로 이 짐승을 드라이브하겠다는 의지가 재갈에 담겨 있어요. 그런 의미입니다. 우리의 언어. 언어가 얼마나 무서운가 하면, 한 영혼을 살리기도 하지만 바로 죽이기도 합니다. 이 언어는 너무너무 소중합니다. 그 사람의 언어는 곧 그 사람의 인격이에요. 그리거에 우리는 흉내라도 욕이나 상스러운 표현 하지 말아야 해요.

 

두 번째 27절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두 번째, 실천사항이 뭔가요?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는 거예요. 이웃 사랑을 말하는 거예요. 여러분, 야고보 사도가 이 글을 쓰고 이 글을 읽었던 청중은 전부 나그네였어요. 디아스포라니까.. 전부 핍박과 고난에 내몰렸던 험난한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고아도, 과부도 많았어요. 그리고 그들은 기본적으로 나그네요. 그러면, 성경에서 고아, 과부, 나그네 이 세 종류의 사람은 특별히 하나님의 애정의 대상이었어요. 그래서 심지어는 가난한 자에게 꾸어주는 것은 내가 너에게 꾸어주는 것이라 하실 정도로 그들을 하나님께서 특별히 생각하셨어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세 종류의 인생은 누군가의 도움과 누군가의 긍휼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사람들이에요. 이건 과거 우리의 모습을 상징해요.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그리스도의 긍휼과 그리스도의 도움 없이는 죽을 수밖에 없었던, 기반이 없었던 인생 아닌가요? 그분이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찾아오셔서 나를 구원하시고 나를 구제해 주신 겁니다. 그러니까, 기독교가 갖는 구제라는 성격은 여타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구제와 근본적으로 차원이 틀려요. 그런 구제는 사실 휴머니즘 적인 차원의 구제요.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성도로써 해야 하는 구제는 윤리와 도덕적인 관점과 휴머니즘 적인 차원에서의 구제가 아니에요. 그것은 구원받은 자로써 복음을 선포하는 거예요.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것을 확대해 나가는 순종을 성경은 구제라고 합니다.

여러분, 생각을 해보세요. 우리가 흔히 쓰는 사자성어 중에, '부전자전'이라는 말이 있어요. 아버지는 아들을 낳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게 되어 있습니다. 아까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았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어떤 형상으로 자라는 것이 정상일까요? 부전자전이 나타나야 하지 않을까요? 아버지의 품성으로 자라는 게 맞는 거예요. 그러면 그 아버지의 품성이 여기서 실천사항으로 요구하고 있는 하나님의 품성이라 그 말이에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아보는 아버지의 마음. 그게 당연히 아들들, 자녀들에게서 드러나야 하는 거예요. 이것은 단순히 구제가 아니라 이 땅의 그리스도의 구원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내고 선포하고 실천하는.. 다시 말해서 하니님의 품성을 확대해 나가는 순종이라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구제는.. 이웃사랑은? 교회의 본성이에요. 선교만큼이나 중요한 교회의 DNA가 되어야 해요.

 

마지막으로 또, 27절하, '..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과거 제 친구 하나가 면목동 쪽에 집이 있어서 자주 놀러 갔어요. 그 동네에 어마어마하게 큰 연탄 공장이 있었어요. 어린 시절이니까 거기에 가서 놀았어요. 연탄가루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으니까 안 묻히려고 조심해요. 그런데 여러분 그 공간은 전부 연탄가루가 날아다니기 때문에 아무리 조심을 해도 어딘가는 묻어나고.. 더 중요한 것은 공기 안에 연탄가루가 돌아다니기 때문에 거기서 놀다 나오면 콧구멍이 새까매져요. 어쩔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오염이 가득한 기본적으로 뒤틀려 있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보혈의 피를 힘 입어 경건한 사람으로 버텨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몰라요. 기본이 죄악 세상인데.. 기본이 고난 많은 땅인데.. 그래서 이걸 어떻게 버텨내는 거죠? 하나님의 말씀으로 매일 씻어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잡초가 되고 가만히 있으면 전부 썩고 부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버틴다는 것은 가만히 서 있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매일 나를 씻어내는 격렬한 싸움이 벌어져야 해요. 

세 가지 실천사항. 첫째 혀에 뭐를 물리라? 재갈을 물리아. 두 번째,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사랑하라. 그들을 돌보라. 세 번째는 뭐예요? 자기 개인적인 경건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매일 씻어내야 해요. 이 세 가지 순종과 명령이 여러분들에게 한 주간 동안도 깊은 묵상과 순종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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