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스펠 프로젝트

[ 신약1-2 ] 기뻐하라, 은혜를 입은자여 I 누가복음 1:26-38 I 이재훈 목사

by №1★↑♥ 2021. 5. 20.

누가복음 1:26-38

기뻐하라, 은혜를 입은 자여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기 위하여 오랫동안 준비하셨습니다. 어느 때에 어느 민족을 통하여, 어떤 가문을 통하여, 누구를 어머니로, 누구를 아버지를 보내실 지를 준비하셨습니다. 역사속의 많은 예언자를 통하여, 역사속의 많은 약속들을 통하여 그것을 말씀하셨고, 예언과 약속대로 이루셨습니다. 특별히 육신의 어머니가 될 여인을 찾는데 하나님께서는 매우 주목하여 찾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한 여인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다지 중요한 일을  맡지 않을 것 같은 여인, 나사렛에서 사는 가난하고 소외된 소녀였습니다. 그녀의 나이를 십대 중후반으로 학자들은 추정합니다. 어떤 세상적인 지위나 많은 경험이나 종교지도자도 아닌 나사렛의 소녀에게 하나님은 이 중요한 직무를 맡기셨습니다. 인생의 경험이 많다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인생의 경험이 많아질 수록 믿음에서 더 멀어질 위험이 많습니다. 좁은 길을 계속 선택하지 않으면 세상 속에서의 경험, 우리가 가진 지식, 재물 위치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하기 보다는 도리어 하나님과 더 멀어질 요인이 많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좁은 길로 걸어가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의 많은 경험으로 믿음에서 멀어질 많습니다. 도리어 세상을 잘 알지 못할 때, 하나님은 한 어린 아이 같은 소녀를 택하셔서 놀라운 하나님의 일을 이루셨습니다. 역사상 인류의 역사의 영적인 기여를 한 지도자는 대개 10세 전후에 회심을 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그 때부터 이미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받았습니다. 

 

 

  지난 40일 새벽기도회 때 성도 자녀 중 7살 된 딸이 40일을 완주했습니다. 얼마나 정리를 잘하는지, 담임목사를 위해서 기도한다는 아이가 얼마나 기특한지.. 40일이 끝나고서 로비에서 잠시 예언했습니다. "너는 틀림없이 온누리교회 권사님이 될 것이다." 그 아이가 온누리교회의 권사가 될 때 제가 살아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어린 나이의 순수한 마음에 세상적인 경험으로 말씀을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순수한 영혼으로 받아들이는 믿음, 그와 같은 영혼을 하나님께서는 찾으십니다. 마리아가 그런 영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육신의 예수님의 어머니를 찾으실 때 주목하시고, 찾으신 이유는 그 소명이 매우 위험하고 어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동정녀로써 아들을 출산하는 것이었습니다. 역사상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자연의 법칙과 이성을 뛰어 넘는, 동정녀로 잉태하여 자녀를 낳는 신비로운 역사에 자신을 내어 맡긴다는 것은 대담한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마리아는 정혼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 정혼이라는 것은 결혼과 약혼의 중간 상태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약혼'이라 되어 있는데 좀 아쉬운 번역입니다. '정혼'이라는 제 삼의 단어를 쓴 것은 결혼과 같은 법적인 보장을 사회로부터 받는 상태는 아니지만, 약혼과 같이 함께 살지는 않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는 그런 문화가 없습니다. 이 정혼이라는 관계가 있어야 하는 것은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동정녀에서 태어나셔야만 하시며, 동시에 법적인 보호를 받는 자녀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만일 약혼단계에서 태어나면 사생아가 되는 것이고 결혼단계에서 태어난다면 동정녀 탄생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두가지를 만족시키려면 정혼이라는 독특한 결혼제도가 있는 민족이어야 하는데 유대민족이 그랬습니다. 아니 정반대로 유대민족에 그러한 제도가 있었는가? 바로 예수님 때문에 그러한 제도가 생겨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정혼 관계에 있었던 요셉이 과연 이 사실을 받아들일 것인가?하는 것 또한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갈등했습니다. 마태복음에 요셉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의 탄생이야기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데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대상으로 기록되었기에, 남성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을 중심으로 그 스토리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갈등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을 보면, 점잖게 번역해서 '가만히 끊고자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일시적으로 끊었다는 것입니다. 상처를 받았고, 오해하여 믿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가 요셉에게 임한 이후에 받아들여서 마리아라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요셉이 받았던 갈등, 그로 인한 마리아의 갈등을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정혼한 상태에서는 자녀가 출생해서는 안되는 상태이기 때문에 사회로부터 받을 수 있는 공격, 돌에 맞아 죽을 수 있는 간음한 자와 같이 여겨질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출생이었기 때문입니다. 

 

역시 그 키는 요셉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이 그 신비한 비밀에 대해서 침묵하고 믿고 함께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야만 이 모든 것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마리아를 통해서 태어나게 될 예수님의 운명을 하나님께서는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그분은 고난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시고 부활하시는 메시야의 사명을 감당하시게 고통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자녀를 출산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시므온이 예언한대로 '칼이 그 마음을 찌른다.'는 표현처럼 그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누구나 육신의 어머니는 자녀가 건강하게 잘 자라기를 바라지 않습니까? 그런데 메시야의 어머니는 이제 장차 그 앞에 기다리고 있는 고통과 죽음을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 소명은 매우 감당하기 힘든 무거운 책임입니다. 놀랍게도 마리아는 그 부르심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예수님의 출생에 세가지 놀라운 사실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시는 사건이고 두번째는, 처녀가 아들을 낳은 사건이고, 세번째는 마리아가 그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받아 들였다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건의 주인공이 마리아입니다.

 

하나님께서 마리아를 통해서 놀라운 일을 행하실 때, 가브리에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이 가브리엘은 소식을 전하는 천사입니다. 싸우는 천사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미가엘입니다. 중요한 소식을 천사를 통해 하나님은 전하셨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어느날 마리아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복음 1:28,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기뻐하라 주께서 너와 함께하신다." 이 기쁨과 은혜라는 단어는 어원이 같습니다. 참된 기쁨은 은혜속에서 발견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왜 은혜를 입은자라 했을까요? 주께서 너와 함께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입은자라 할 때는, 아무런 짐도 지징 않고 편안하고 고통이 없고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살고 싶은대로 살 수 있는 것이 은혜라 생각할 수 있지만 마리아에게 주어진 은혜가 무엇입니까? 예수의 어머니가 되는 무거운 책임을 감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능히 감당할 수 있게 되는 데 주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입은자란? 주께서 주신 무거운 짐일지라도 주님께서 함께하시기에 그것을 능히 감당하는 인생. 그것이 은혜를 입은 자의 인생입니다. 그럼으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로만 카톨릭에서는 은혜를 입은 자라는 말을 '은혜로 충만하다.'고 잘못해석하여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공급해 주는 통로가 된다고 하여 마리아에게 기도하고, 마리아를 숭배하는 데 까지 나아가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은혜를 나누어주는 자가 아니라, 은혜를 입은 자이고 그 또한 한 사람의 성도로써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었을 뿐, 그가 은혜를 나누는 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리아는 이 천사의 말에 당황하며 깜짝놀랐다고 합니다. 우리 말은 '당황하여 깜짝놀랐다.'고 되어 있지만, 원문의 뉘앙스는 믿음의 여인인 마리아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전해주시는 인사에 대하여 경외심을 가지고 그 영혼이 깨어서 놀라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 인사법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기드온에게 인사할 때도, "큰 용사여, 주께서 너와 함께함이로다." 이러한 인사도 구약에서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인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가진 사람에게 주어지는 인사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사가 어찜인가?' 이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 그 하나님의 임재에 놀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믿음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에 날마다 놀라워합니다. 하나님은 임재하십니다. 우리가 말씀을 펴서 읽을 때, 기도할 때, 예배할 때 그리고 일상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은 임재하십니다. 믿음의 사람은 믿음의 눈을 들어 살아계신 하나님께 마음을 열 때 우리는 깨어서 놀랍게 됩니다. 날마다 큐티의 말씀 앞에 나아갈 때마다 그 말씀으로 놀라야 하는 것입니다. 놀라는 말씀으로 해석되어야 놀라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놀라야 말씀이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말씀이 깨달아져야 놀라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해석되지 않아도 그 말씀에 놀라야 그 말씀이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그 말이 그 말 같은데.. 다른 말입니다.^^ 말씀을 완벽하게 해석해야 내가 놀랄 것 같지만.. 왜 말씀이 깨달아지지 않는가? 그 말씀에 대한 경외심, 그 말씀에 대한 놀라움을 가지고 대하지 않기 때문에 놀라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다~ 아는 말씀이죠? 그러나 문자로 아는 것, 데이터로 아는 것, 글로 아는 것과 나의 마음이 그 말씀 앞에 경외심을 가지고 깨어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지 않았다면 그 말씀을 모르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지 않았다면 그 말씀을 모르는 것입니다. 늘~ 마스크를 써야하는 이 불안한 상황속에서도,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는 상황 속에서도, 부도의 위기에 내 몰리는 상황 속에서도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 앞에 놀라는 그 하나님의 말씀의 임재 앞에 내 영혼이 깨어나야 그제서야 믿음의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이 기록되어도, 내 지식과 경험으로 필터링 하는 것이 아니라, 내 경험과 지식을 내려놓고 말씀을 있는 그대로 놀람으로 받아들일 때 그 말씀이 해석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내가 말씀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해석하는 것이다. 내가 말씀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깨우치시는 것이다. 가끔,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는 분들을 보면 "내가 성경을 꿰뚫어야 겠다."하는데 좀 교만한 표현입니다. 역사 이후로 말씀을 꿰뚫은 사람은 없습니다. 말씀에 꿰뚫린 사람은 많습니다. "하나님, 제가 말씀에 꿰뚫린 사람 되게 하옵소서." 그게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꿰뚫려는 사람은 말씀을 내 머리로 풀어가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놀람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믿음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큐티를 펼 때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그 말씀에 임재하시는 하나님, 마치 마리아가 "이런 인사가 어찜인가?" 놀라워했던 그 영혼의 깨어남을 우리가 체험할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심지어 어느 순간에도 놀라야 합니까? 예레미야의 고백처럼 재난의 한 복판에서도, 멸망의 한 복판에서도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임재에 깨어 놀라워 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는 예루살렘이 완전히 폐허가 된 순간에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슬피 울며 노래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슬픔의 노래 한 복판에서 소망의 고백이 있습니다. 그것은 폐허가 되어버린 이 재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며 그의 영혼이 하나님의 임재에 놀라며 새로우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22-23, '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이 구절만 딱 떼어놓으면, 평화로운 고요한 어떤 리조트 같은 분위기 속에서 아침안개를 바라보며 '아침마다 새로우니'라고 고백한 것 같지만.. 예레미야가 창문을 열어놓고 바라보면 폐허가 되어 있는 예루살렘 도성, 도저히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한복판에서 이 고백을 했다는 것이 믿어집니까?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 순간에 뭔가를 느꼈다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지금은 폐허지만, 아침마다 새로우신 하나님이 성실하신 하나님이 이 예루살렘을 붙잡고 계시다. 뭔가 성령의 임재를 그가 음성을 들었기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우리가 사는 시대도 그렇지 않습니까? 뉴스를 보면, 경제도 위기라 하고, 모든 상황이 어렵습니다. 어디로 추락할지 모르는 이 세상의 뉴스만 들으면 희망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있으면 우리는 예레미야와 같은 이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십니다.' 일상 속에서 이 하나님의 임재에 놀라지 않는 사람은, 재난이 와도 놀라지 않습니다.  재난이 와도 놀라지 않는 사람은, 마지막 종말이 와도 놀라지 않습니다. 전문가들이 앞으로 더 어려운 시기가 올거라고 합니다. 전문가들은 확인을 했을 뿐, 성경에서는 이미 말세에 종말의 때에 극심한 환난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어쩌면 전염병의 재난은 그 시작의 시작도 아닐 지 모릅니다.  앞으로 더 감당하기 힘든 그러한 재난이 환란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정신 바짝차리지 않으면 그 재난과 함께 휩쓸려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상황 속에서 우리가 새롭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속에 깨어나지 않으면 마지막 종말의 환란 때에 우리가 깨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후에는 뭐가 있습니까? 심판이 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늘 이런 질문을 가졌습니다. "지옥은 고통스러운 곳이라는 데 지옥에 떨어지자 마자  그 사람이 회개하면 선한 사람이 될 텐데.. 그러면 선한 사람이 지옥에 계속 있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런 말이 안되는 듯한 질문을 계속 던졌습니다. 사실 목사가 되어서도 그 질문에 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시카고의 무디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님의 글에서 해답을 찾았습니다. 저와 같은 고민을 오랫동안 하셨던 것 같아요. 그분이 이렇게 설명합니다. "수 많은 재난과 재앙과 환란을 거치게 되면 모든 과정에서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결국 지옥에 간다. 지옥에 가는 사람, 지옥의 고통에 떨어져도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이요, 여전히 남탓 비난 원망 불평 속에 있을 것이다." 이런 재난을 통해서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은 더 큰 환란이 와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놀라지 않습니다. 그러면 거꾸로 우리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합니까? 아무런 일이 없는 평안 가운데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놀라는 사람은, 재난이 와도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살아요. 어떤 환란이 올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속에 거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으로 만든 찬양이 있습니다.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며" 이 찬양을 함께 부르고 말씀을 계속 나누기를 원합니다. 

 

천사는 계속해서 마리아가 낳을 이 아들의 신분과 역할을 설명합니다. 30-33절, '30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33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무서워마라' 엄청난 말입니다. 잉태되어 태어날 아들은 지극히 높은 아들이요 또한 다윗의 보좌에 앉아 영원히 다스리실 분이십니다. 구약의 수많은 예언들이 가르키고 있었던 그분입니다. 다니엘서에보면 역사상 수 많은 강대국들이 연이어 지배하여도 모든 나라가 무너지지만,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한 나라가 도래할 것이다. 바로 다윗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나라. 바로 그 주인공이 바로 마리아를 통해 태어난 아들입니다.

 

마리아는 이러한 말씀에 놀라워하며 다시 질문합니다. 눅 1: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제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질문입니다. 그러나 불신앙의 질문이 아니라, 믿음에서 나오는 수용적인 자세에서 나오는 질문입니다. 여기서 믿음의 중요한 두번째 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대하여 정직하게 질문합니다. 중세 안셀름이라는 신학자는 "믿음은 이해를 추구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믿는 사람은 앎을 추구합니다. 우리는 알아야 믿겠다고 하지만, 믿음있는 사람은 더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앎으로 더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 출발은 이해가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이해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해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믿기 때문에 이해를 추구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장은 마리아의 이야기부터 시작하지 않고 제사장 사가랴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사가랴는 나이 많아 아이를 낳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사가랴를 통해 아들을 줄 것을 약속하셨지만, 제사장 사가랴는 이 사실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어떻게 제게 이런 있을 줄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마리아의 의문과 비슷해 보입니다. 눅 1:18,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동일한 '어떻게'이지만, 사가랴의 어떻게는 불신앙의 질문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제가 어떻게 하면 할 수 있겠습니까?"의 어떻게 입니다. 제사장 사가랴는 믿지 못했지만, 어린 소녀에 불과했던 마리아는 믿었습니다. 신분이나 역할로 볼 때는 정반대여야 하는데.. 제사장 사가랴는 오랫동안 아들을 기다렸고, 마리아는 기다린 적이 없습니다. 제사장 사가랴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익히 알았던 사람이고, 마리아는 배워가는 과정 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믿었고, 사가랴는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에 더 알고자 하나님의 말씀을 더 배우는 것입니다. 더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알고자 하는 이 이해는 나의 지식이 많아짐으로써가 아니라 놀랍게도 성령의 임재하심,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임재하심으로 이 모든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천사가 마리아아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눅 1: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역사상 한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새로운 일이 너에게 일어날 것이다. 또한 천사는 마리아의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 복돋아주기 위해서 덧붙입니다. "보아라 너의 친적 엘리사벳도 아이도 나이 많아 아이를 가지지 못했지만, 임신한지 벌써 여섯 달이 되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전혀 없다." 구약의 역사 가운데 아이들을 낳지 못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잉태한 부부가 세 커플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엘가나와 한나, 그리고 사가랴와 엘리사벳. 세 가정의 공통점은 자녀를 낳을 수 없는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자녀를 낳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세 가정에 아이를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동정녀의 탄생이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역사속에서 이미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이 때 마리아에게 진정한 믿음이 견고케 됩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이렇게 응답합니다. 눅 1:38,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저는 주의 여종입니다. 주의 말씀대로 내게 임하기를 원합니다." 믿음의 세번째 중요한 원리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통로로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에 자신의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다 이해하지 못해도, 다 깨닫지 못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통로가 된다는 것에는 댓가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은혜입니다. 마리아가 치뤄야 했던 댓가는 매우 값진 것이었습니다. 주께서 함께하시기에 그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이것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아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실로 그러하나이다."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아멘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신약을 읽으시면서 예수님의 말씀 중에 붉은 색으로 예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요? 그 말씀 속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라고 할 때 "진실로"가 '아멘'입니다. 예수님은 아멘 아멘 그리고 그 다음 말을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진실로 진실로"라고 하신 것은 정말 더 중요한 것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 아멘을 마지막에 아멘을 붙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붙였지만, 우리는 뒤에 붙입니다. 주님의 말씀 앞에 "아멘!" 응답할 때, 그것은  이 말씀이 내게 진실로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아멘은 놀라운 능력의 통로입니다. 마음에 있는 입술로의 아멘에는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같이한 순종의 아멘은 그 말씀의 능력, 그 말씀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요 성령의 감동으로 된 말씀의 능력이기 때문에 성령의 능력이 나에게 임하시는 통로가 되는 아멘인 것입니다. 진정한 아멘은 능력의 통로가 되는 것은 입니다. 마리아가 그 아멘을 드렸습니다. 

 

중세의 교회에서는 스태인글라스를 많이 사용했습니다.그런데 마리아를 표현한 창문에는 색을 칠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리아는 맑고 투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었음을 그렇게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순간적인 충동을 느낀 것이 아닙니다. 어린 시절에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또 예수님을 잉태하고 탄생할 때만 믿음의 사람이 된게 아니라 그 이후의 삶도 믿음의 삶을 살아갑니다. 목자들이 와서 천사가 와서 전해준 소식을 전했을 때 마리아는 그 모든 말씀을 그 마음에 두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12살 때에 예루살렘의 성전에 올라가서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 알지 못하셨습니까?"라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을 그 마음에 두었기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향하여 나아갈 때에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한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 주간 설교 때 몇차례 말씀드렸지만, '패션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에서 예수님의 고난을 아주 실제적으로 묘사하지요. 그 영화 속의 마리아가 나올 때는 저는 묘사를 잘 못했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마리아 어머니가 너무 침착하게 비아돌로로사를 따라가는 거예요. 물론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육신의 어머니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만일 영화의 감독이 한국 감독이었다면 몇차례 예수를 향하여 뛰어드는 모습으로 묘사했을 것입니다. 로마 군병들에게  달려 들었을 것입니다. "이놈들아~ 나를 먼저 죽이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 그게 모성애 아닙니까? 그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잘못 묘사한게 아니라 정확하게 마리아를 묘사한 것이었습니다. 순종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번 메시아가 고난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순종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똑같은 말씀을 듣고도 귀로 흘려들었기 때문에 칼로 같이 싸우고 도망가고 두려워하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미리 말씀하셨고 마리아는 그 말씀에 두고 순종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 하셨는데, 사도행전 1:14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함께 전혀 기도에 힘썼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마지막 말씀까지 순종하여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충만함을 받은 여성 제자가 됩니다. 결론적으로 마리아를 볼 때, 하나님이 중요한 일을 맡기지 않을 것 같은 나사렛의 가난하고 소외된 소녀였지만,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그 마음의 순전한 믿음, 담대한 용기를 가진.. 주의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라고 받아들이는 그 믿음을 보시고 마리아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기뻐하라 은혜를 입은 자여"라고 부르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천사에게 이런 소식을 전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환영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고사하겠습니까? 어떤 은혜인지 알고 받겠습니다. 그러시겠습니까? 주의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주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에 내가 감당할 수 있음을 믿고, 순종하는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마리아를 택하셔서 오랜 약속을 이루신 하나님, 마라이의 순전한 믿음을 우리가 배우기를 원합니다. 

그 믿음대로 살아가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신약1-2 ] 기뻐하라, 은혜를 입은자여 I 누가복음 1:26-38 I 이재훈 목사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