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역개정] 요한복음 8장 1-20절
1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2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3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4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5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8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9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9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10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에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가시니라 11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12 예수에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이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한다 하나 13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에 대하여 말하는 자가 없더라 14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서 가르치시니 15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1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19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20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요한복음 8장 1-20절
이제 초막절이 끝났습니다. 사람들은 왔던 곳으로 돌아갑니다. 7장 53절부터 8장 1절을 보세요. '7:53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8:1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예수님은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감람산에 가신 이유는 숙소가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습관에 따라 기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방문하실 때에는 감람산을 기도처소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자 하루 일을 마치고 조용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2절입니다.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돌아오시니 백성이 다 나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여기에 '아침에'로 번역된 원어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는 '새벽에'로 번역되었습니다. 즉 미명의 이른 아침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른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자 하는 열의가 있으셨습니다. 백성 역시 예수님을 기다렸다는 듯이 예수님께로 모여들었으며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가르침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때에 바리새인들의 방해가 시작되었습니다. 3절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당시 율법에 조예가 깊은 서기관들은 거의 바리새인들이 맡고 있었는데 사도 요한이 바리새인들이라고만 말하지 않고 서기관들을 굳이 언급한 이유는 이들이 율법에 정통하다고 자부한 자들임을 알려주고자 함이었습니다. 율법에 정통하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율법에 능력을 시험하고자 율법을 어긴 여자, 즉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갔습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잘못 해석하도록 유도하여 예수님을 붙잡기 원했던 것입니다. 4절입니다.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선생이여'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선생은 반드시 질문자에게 답을 해줄 의무가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런 호칭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선생이신 예수님께 어려운 문제를 질문하여 위기로 몰아넣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이 말했습니다.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바리새인들이 말을 이어갔습니다. 5절입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십계명 중 제 7계명 '간음하지 말라'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결혼의 거룩함을 어기지 말라'입니다. 율법은 이를 어겼을 경우에는 남자든 여자든 모두 돌로 쳐 죽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신 22:13-30).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듣고 싶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어기고 병든 사람을 고쳐주었기에 간음한 여인을 율법에 따라 돌로 치라고 말씀하신다면 그동안 가르치셨던 사랑의 정신에 위배될 것이고 반대로 돌로 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면 율법을 어기게 될 것이기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넘어뜨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의도를 다음 구절이 밝히고 있습니다. 6절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을 땅에 쓰시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으로 인해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진 것에 대한 불만으로 어떤 식으로든지 예수님을 깎아내리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제 즉답하지 않으시고 몸을 굽혀 땅에 무언가를 쓰셨겠습니까? 당황스러운 질문에 어떻게 답할지를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어리석은 계획을 다 아시고 그들이 스스로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성찰할 시간을 주셨던 것입니다.
뭐라고 쓰셨을까요? 하나님께서 간음죄 뿐 아니라 어떤 하나님의 계명도 어기면 죽을죄라고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은 하나님만 섬기지 않는 것, 우상숭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것, 안식일에 일하는 것,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말, 탐심 모두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십계명 중 하나만 어겨도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이 계명들을 쓰지 않으셨을까요? 7절을 보세요.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하시고'
그들이 '묻기를 마지아니하는지라'는 계속해서 답을 재촉하였다는 뜻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보기에는 선생이 대답하지 않고 몸을 굽혀 땅에 무언가를 쓰면서 딴청을 피우고 있으니 빨리 답하라고 재촉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일어나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구약시대에 한 갓난아이의 진짜 엄마가 누구인지를 밝혀낸 솔로몬의 명판결이 있다면 신약시대에는 바리새인들이 기소한 간음한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역사에 길이 남을 명판 절입니다. 8절을 보세요.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예수님께서 또 한 번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언가를 쓰셨습니다. 이번에는 바리새인들이 조용하듯 재촉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번에도 바리새인들과 현장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성찰의 시간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성찰의 기회를 주실 때 어떻게 행동합니까? 예수님의 기다림은 우리에게는 성찰의 기회를 주시는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주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 누리시기 바랍니다. 계속해서 9절입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님께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언가를 쓰실 때에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꼈습니다. 어느 누구도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칠만한 자격이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한 셈입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주님 안에서 거듭나지 않고 의인인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를 정죄할 수 있는 온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 정죄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10절입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서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떠나가고 오직 여인만 남았을 때 여자에게 물었습니다.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그러자 여인이 대답하였습니다. 11절입니다.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여인은 "없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그냥 집에 돌아가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만이 죄가 없으시므로 간음한 여인을 모세의 율법에 따라 돌을 던질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여인이 죄를 지었지만,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의 장면으로 사건이 종료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보세요.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죄를 정죄하지 않으셨지만 그 여인이 무죄하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여인이 죄를 지었으나 여인을 정죄하지 않고 용서를 해주셨지만 여인에게 앞으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로 살아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여인이 이후에 어떤 삶을 살았겠습니까? 그때부터 새 생명을 얻은 사람, 죄 사함을 받은 사람으로서 살아갔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과연 나는 어떤 모습일까?" 이런 생각을.. 바리새인일까? 아니면 죄짓고 잡혀온 여인일까? 둘 다 겠죠? 그러데 우리는 주로 이 여인의 입장에서 생각합니다. 내가 죄를 지었지만 우리 주님이 용서해주셨다.. 그러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의 모습이 바리새인일 때도 많아요. 다른 사람들의 죄와 허물을 보면서 우리도 너무 쉽게 정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사람들은 날카로운 분별력, 비판력을 가졌기에 심판하게 된다는 주장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비판하는 능력과 심판은 전혀 다릅니다. 분별력에 자기를 향한 분노와 남을 향한 미움, 자기 성찰의 부족이 만나면 남을 심판하게 됩니다. 반면, 분별력에 자기에 대한 이해와 남을 향한 사랑과 자기 성찰의 깊이가 더해지면, 심판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 이릅니다. 이 길 정상에서 십자가를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의 길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처럼 율법으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저희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용서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용서받은 자로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죄를 범하지 않으며 살기 원합니다. 하지만 스스로 죄를 이길 수 없사오니 주님 안에서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의지하며 죄를 이기게 하시옵소서. 세상이 죄를 합리화하지 않게 하시고, 또 다른 사람들의 죄를 보며 바리새인들처럼 정죄하지 않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주셔서 우리도 주님의 뒤를 따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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