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가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가장 신경을 써서 집요하게 조밀하게 설정한 기록들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잘 알려진 부분인데, 알려진 만큼 의미가 드러나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12제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장로들, 바리새인, 서기관 등.. 소히 당시 종교 권력자들을 만나면서 왔습니다. 그리고 앞선 본문에서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을 만났습니다. 바로 그 사람들의 전체적인 스케치가 자신들은 본다고 하지만, 제대로 못 보는 맹인과 같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맹인은 주님에 의해서 눈이 떠지면서 길에 앉았다가 예수님이 걸어가시는 그 길을 따라가게 됩니다. 길이라는 것은, 삶의 방식이고 삶의 가치를 말합니다. 보지 못하던 맹인은 눈을 뜨고 매일 구걸을 하던 삶에서 인생이 바뀌면서 주님이 걸어가시는 그 길을 따라가게 됩니다.
송태근 목사 I 마가복음 11장 1-10 I 주가 쓰시려면
오늘 본문에서 마가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지만, 이 청중들 속에 그 맹인도 포함되어 있을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여리고로부터 출발하여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이 불과 얼마 남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지금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루살렘은 종교의 권력이 녹아져 있는.. 본래의 도시가 기능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변질되어 있는 도성이었습니다. 그 예루살렘으로 주님이 지금 올라가신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 올라간다고 표현했냐 하면? 여리고라는 도시는 바다 수면에서 250-20이 낮은 곳에 위치해 있는 저지대의 동네, 그 여리고에서 주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과 있는데.. 사전마다 차이가 있지만.. 예루살렘이 거의 해발 790~850m 위에 있는 높이입니다. 그러니까, 여리고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를 합치면 거의 1000m 높이에 있는 도시를 향해서 가고 있었기 때문에 성경은 올라간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어디에 도착을 했냐? 1절입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주님이 지금 어디에 도착을 해 있냐하면, 감람산 근처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라는 동네에 도착을 했어요. 우선 성경에서 '벧'은 '집'을 말하고, '베들레헴', '~레헴'은, '떡'이에요. 그러니까, '베들레헴 = 떡의 집'이라는 의미가 있어요. 마찬가지로 '벧바게 = 바게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무슨 집이냐? 아직 익지 않은 무화과 열매의 집이라는 뜻이에요. 오늘 본문의 다음 사건을 보면, 익지 않은 무화과나무 사건이 절묘하게 이어서 등장하는데 그 의미를 담은 동네 이름이 '벧바게', '무화과나무열매가 아직 익지 않은 동네..' 그런데, '베다니'는 뭐냐? '다니=슬픔'. '슬픔의 동네' 나중에 이 동네의 이름이 바뀌는데 '노래의 집'으로 바뀝니다. '슬픔의 집'에서 '노래의 집'으로 바뀌어요. 그래서 '베다니'하면 두 가지 의미를 함께 갖고 있어요. '슬픔의 집', '노래의 집'
'베다니'하면, 생각나는 인물 있으신가요? 마르다와 마리아가 살던 집이 있는 동네예요. 이 집은 예수님의 사역의 거점지가 될 만큼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주님은 늘 이 슬픔의 집에서 잠시 잠깐 쉬곤 했습니다. 또 머물곤 했습니다. 아마 이 집이 예수님께서는 가장 편했던 곳 같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집을 자주 찾으시고, 자주 머무셨던 거겠죠? 그리고 그 남매들은 가난하고 어렵지만.. 예수님을 극진히 모시는 역할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집에 남매들을 통해서 주님은 상당한 사역의 위로를 받았던 것 같아요.
드디어 예수님이 감람산 근처 이 두 지역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제자 둘을 보냅니다. 둘을 보냈다는 것은, 최소한의 증인의 수입니다. 2절입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아마 벧바게 어딘가에 나귀 새끼가 묶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놀랍게도 이 모습이 구약성경에 그대로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런 걸음 하나는? 사실 하나님의 주권과 계획을 단 한 번도 비껴간 적이 없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살았던 삶의 흔적이나 또 그분이 청중들을 향해 쏟아내신 언어들을 보면,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계획된 발언이었습니다. 그것이 주님이 일생을 살아냈던 중요한 비밀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특별히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은?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주인의 뜻대로 그 주인의 계획에 맞추어 살아가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나귀는 예수님에 의해서 호출이 되는데.. 어떤 대화를 주고받느냐? 2절입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그 나귀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는데, 무조건 끌고 오라니요? 오히려 상식적인 사람은, 제자들입니다. 3-8절입니다. '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8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함께 읽은 부분을 성경 전체를 놓고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스가랴서 9장 9절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여기 스가랴 선지자 후에 메시아가 왕으로 오실 그림을 먼저 보여주었는데, 두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니..' 나귀를 타시는 모습이라고 설명합니다. 나귀는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두 가지 유대적 개념을 먼저 이해하고 본문을 보셔야 합니다. 유대 역사 학자인 요세푸스라는 사람이 나귀에 대세 설명하기를.. 나귀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적어도 세 가지 상징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섬김, 봉사' 그리고 '짐을 지는 짐승'
오늘 여기 스가랴 선지나는 뭐라고 합니까?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이 말이 무슨 말일까요? 유대인들은 나라도 빼앗기고 공격도 당하면서 많은 전쟁을 치러왔습니다. 그들에게 전쟁을 하는 몇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적지에서 사신을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에는 두 종류의 징슴을 탑니다. "내가 당신들과 전쟁을 하겠소."라는 의지를 담아 사신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러 갈 때는.. 반드시 키가 큰 종마를 탑니다. 위용스런 말을 타고 적진을 향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당신들과 전쟁할 의사가 없고, 당신들과 화친하고 싶습니다."라는 낮은 마음으로 적진을 향해 갈 때는 반드시 나귀를 타고 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내려오는 전통입니다.
자, 그런데 예수님이 지금 나귀를 타고 입성한다. 이것은 어쩌면 유대인들의 기대하는 그림은 절대 아닙니다. 지금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은 예루살렘 입성을 굉장히 오해했어요. 그오해의 흔적을 보실까요? 슥 14:4-5상, '4 그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 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 산은 그 한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5상 그 산 골짜기는 아셀까지 이를지라..' 예루살렘 가까이, 감람산이 있는데 예수님이 지금 근처에 와 있습니다. 그런데 감ㄻ산에서 보면, 스가랴 선지자의 기록을 보니까.. 바로 요 '동서로 갈라져 끝나는 지점'이 베다니와 벧바게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드디어 스가랴 선지자가 약속하고 예언한대로 벰바게, 베다니에 서서 그 지역에서 나귀를 부르러 제자를 보내신 거예요.
그리고 그 나귀는 스가랴 9장 9절에 소개된 대로, '아무도 타보지 않은..' 작은 나귀.. 잘 보면, 이것이 무려 예수님이 오실 때로부터 계산을 해보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 무려 520년 전 예언에요. 그러니까, 짐승 하나를 부르는데로 즉흥적으로 나귀를 찾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선지자의 예견한 그림대로 정확하게 그 일을 이루고 계신 거예요. 여러분, 신앙생활을 해오시면서 어르신들이 "다~ 주의 뜻이야!" 이런 말 들어보셨나요? 어려서는 그 말이 잘 이해가 안 되었는데.. 어줍지 않은 세월을 살아오다 보니.. 그 말이 이제는 조금씩 이해가 돼요. 단 하나도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은 만남, 간섭하시지 않는 고통, 간섭하지 않는 슬픔이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부정하면서도 결국 주의 뜻이라는 고백을 하지 않게끔 발견하게 됩니다. 520년 전 스가랴를 통해서 예루살렘 근처에서 벌어질 나귀의 사건을 정확하게 구체적으로 예언을 해놨어요. 그리고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구원의 정점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입니다. 8절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이게 전형적인 왕의 입성을, 백성들이 사모하고 기대하고 그려내는 장면. 사실 이러한 그림은 예수님이 의도했던 그림은 아닙니다. 게다가 더욱 결정적인 것은? 9절입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호산나 호산나'는 이런 뜻,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 이것은 당시에서 굉장히 위험한 금기 발언입니다.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이것은 로마 정부 입장에서 굉장히 금지되어 있는 사고고 발언입니다. "로마의 철권 통치 아래서 신음하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자유를 허락해 주소서." 그 결정적인 힌트가, "오는 다윗의 나라여.." 이스라엘 모든 백성의 소원이 다윗 나라의 회복에 있었어요. 지금 이들은 로마의 밑에서 종교적으로도 절망적이었고, 경제적으로도 소망이 없었던 시대. 그러니까, 이것은 무엇을 반영하냐? 지금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예수님은 적어도 무리들의 시작에는 비틀리게 이해되고 있는 거예요. 이것은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벌어지는 오해와 착각입니다. 얼마나 많은 교회가 예수님을 누구로 만나고 있을까요?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기대하며, 만나고 있으십니까?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해주는 부귀영화를 보장하는 알라딘의 지니와 같은 존재로 바라보지 않습니까? 마가복음 19장 41-44절입니다.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여러분, 예수님이 예루살렘 가까이 오셨을 때 마가가 생략한 부분을 누가는 기록하고 있어요.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신 예수님. 이유가 뭐냐? "예루살렘 성아 네가 오늘 참된 평화를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예수님의 평화는 뭐냐? 로마의 정권을 뒤집어엎어 자신들을 압제하던 로마로부터의 해방과 물리적 풍요를 가져다주는 것이 그들의 기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평화를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죽으러 들어오시고 계시단 말이에요. 그래서 '겸손하여 나귀를 타셨다.'라고 했어요. 그렇게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십니다. 영문 밖에서 제물이 되어, 우리의 구원을 거기에서 이루십니다. 그래서 항상 예수님의 일생 속에는 자신의 죽음을 전제한 감추어진 발언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결론 겸 세 가지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첫번째, 우리는 두 제자를 벧바게로 보내시면서 "주가 쓰시겠다 하라."며 처음으로 자기 신분을 밝히십니다. 마가복음 11장 3절,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여기서 예수님이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주'임을 밝히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구원의 문제에 대한 자기의 주 되심을 선포하는 최초의 장면, 여러분 구원이라는 것은? "내가 구원을 줄까? 필요해?" 협의해서 이루어졌나요? 우리에게 임한 구원은 주님의 주권이 출발이고 끝입니다. 그분의 주권에서 의해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주권사상은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 굉장히 중요. 주권사상이 분명해야 우리 전 인생 속에서 제대로 된 믿음이 생성이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이 되지 않으면, 믿음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고난이 임해도 슬픔이 임해도 하나님의 주권, 그분의 주인 되심을 믿는 것.. 고난이 임해도 슬픔이 임해도 하나님의 주권, 그분의 주인 되심을 믿는 것.. 지금 당하는 슬픔과 고난 어려운 자리가 하나님이 나에게 맡긴 자리라는 주권의식이 있을 때 우리는 제대로 된 순종을 할 수가 있어요. 그것이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속에서 나타나지요. 만약에 그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에 대한 주권의식이 예수님께 없었다고 한다면.. 그 죽음이 잔을 끝까지 치워달라고 기도했을 거에요. 그러나 그 기도는 "내 원대로 마옵시고 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신앙. 헤르만 바빙크라는 유명한 신학자의 가장 중요한 사상이 '하나님의 주권사상'인데, 여러분 하나님의 주권 사상이 있을 때, 참된 용서가 시작됩니다. 원수 갚은 것은 하나님께 맡긴다. 주권 사상이 없을 때, 내가 하려고 해요. 그래서 피의 복수가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인류역사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의 모든 문제는 신앙하느냐, 불신앙 하느냐의 싸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뿌리는 하나님에 대한 주권사상에서 비롯됩니다. 사도 바울도 감옥에 갇혀 사형 언도를 받고 있지만.. 그 감옥에서 유명한 구절을 남기지 않습니까?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그 앞에서 무슨 이야기가 있습니까? '의로우신 재판장이여'. "억울해~ "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살아가면서 얼마나 억울한 일이 많습니까? 그때마다 하나하나 신경 쓰고 반응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는 수밖에 없어요. 요셉이 하나님의 주권에 제대로 눈 뜨면서 형들을 제대로 용서할 수 있었어요. "형님들~ 나를 이곳에 보내신 이는 당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두 번째, 하나님은 세밀한 것도 계획하시고 주장하시며 간섭하십니다. 이게 사실 주권사상에 뿌리 내린 부수적인 항목입니다. 무심히 흘려버릴 수 있는 나귀 새끼도 이미 예언 속에 하나님의 구속을 위해서 부름바다고 있지 않습니까?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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