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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story/송태근목사

설교문 I 신명기(13) I신명기 4:32-40 I 율법을 주신 이유는? I 송태근 목사

by №1★↑♥ 2023. 3. 10.

2012년 11월 23일 / 금새벽 / 신명기(13) / 신명기 4:32-40 / 율법을 주신 이유는? / 송태근 목사 / 삼일교회. 이 글을 누가 쓰고 있나? 모세라는 선지자가 썼지요. 선지자들의 역할을 이해하면 좀 더 입체적인 이해가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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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13) I 신명기 4:32-40 I 율법을 주신 이유는? 

- 삼일교회 송태근 목사 -

우리는 흔히 선지자라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미리 전하는 예언자 정도로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기능이 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하면, 히브리 말로 '나비'라고 합니다. 이 속에는 세 가지 개념이 녹아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미리 전한다는 차원의 에언. 앞에 되어 질 일들을 미리 보고 영험한 도사들처럼 앞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미리 전합니다. 그래서 경고를 주고, 준비케 합니다.
  2. 신접한 자. 무당 세계에도 세습무가 있고, 강신 무가 있습니다. 강신 무가 훨씬 영험하지요. 세습무는 집안의 내려을 따라서 무당이 되고, 그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목회에도 세습 목사가 있습니다. 목회 현자에도 어느 날 갑자기 불 받아서 신학교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의미지만.. '신접한 자'라는 것은 귀신이 붙었다. 신이 임했다는 의미보다는 하나님의 영이 그를 붙들었다. 하나님의 영이 그를 제압했다는 의미입니다. 선지자 중에는 그런 종류가 있습니다. 그런 데 이 의미 속에 선지자라는 말속에 신접한 자라는 하나님이 영이 임해서 자기가 마음대로 못합니다. 그래서 평생 하나님이 시키는 일, 하나님이 부탁하는 일. 그런데 이스라엘 선지자 중에 거짓 선지자가 있습니다. 거의 이런 선지나는 어디서 나요? 자기 집안의 전통과 관심을 따라 나오는 거짓 선지자들이 역사 속에 사고를 치고 어려움을 줍니다. 특별히 미가서라는 책을 보면,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이 굉장히 많이 나오는 것을 봅니다. 이런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유익을 따라서 말을 하고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미가 선지자가 무슨 말을 하냐 하면, '이에 물면 평강을 외치고, 물 것을 주지 않으면 저주를 부르짖으나' 그 말은 무슨 의미냐? 먹을 것을 주면 '야 너 복 받을 거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반드시 복을 주실 거예요.' 평강을 외치는 거예요. 그런데 뭔가 갖다 주지 않으면, "그래 가지고 자식들이 복 받겠어? 그러니까, 사업이 안 되는 거지.." 이런 일들이 그 시대에도 있었다는 거예요. 
  3. 거품을 물고 땅바닥에 흙먼지가 되어 뒹굴다는 뜻이 있어요. 의미 자체가 처절하죠? 선지자라는 의미 중에 이런 개념이 왜 있을까? 가만히 묵상을 해보면 넉넉히 이해가 됩니다. 선지자는 특별히 예레미야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20세 때에 강권적으로 임합니다. 아주 내성적인 사람이지요. 청중 앞에 세워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성향을 가진 데다 말을 잘 못해요. 게다가 그는 아나돗 출신입니다. 유배지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그런 것에 비하면 정권 다툼에 패배한 결과로 유배된 집안의 후손입니다. 그러니까, 어릴 적부터 삶에 콤플렉스가 많았겠지요? 그러다 어느 날 길 가다가 사고 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임해요. 그런데 그 메시지가 사람을 세워주고 평강을 외치고 밤바람 같은 메시지를 주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중앙 정부 권력자들에게 가서 저주의 메시지를 퍼부어야 하는 거예요. 시만과 파괴와 저주의 메시지를.. 이왕이면 좋은 소리 하는 게 낫지 그런 저주와 심판과 허무는 메시지를 맡았다고 하면 누가 좋아하겠어요? 그런데 그 길을 가야 해요. 그래서 예레미야는 울면서 평생 그 메시지를 전합니다. 백성들의 최를 보며 울고, 메시지의 아픔 때문에 울고 이게 예레미야의 운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를 일컬어 눈물의 선지자라 부르게 된 거예요. '나비'라는 의미 속에 제일 중요한 기능은, '땅바닥에 흙먼지가 되어 뒹굴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시대 앞에 몸부림친다는 그 말이이에요. 어느 정도로? 흙이 나인지, 내가 흙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하나님 편에 서서 평생 그렇게 몸부림치는 게 선지자다.

이것은 오늘날 목회자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에게만 주어진 숙제인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다 이 시대 앞에 부름 받은 그리스도. 몸 된 교회의 한 지체로써 그런 선지자적 기능을 가지고 살아야 해요. 왜냐하면, 그것이 오늘날 교회가 부름 받은 사명이기 때문이에요. 교회라는 것은 건물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교회입니다. 그러면 그 기능을 나하고 상관없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아요.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삶의 기능 속에 반드시 이런 모세와 엘리야와 엘리사와 같은 선지자적 삶의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는 과제를 고민해야 합니다. 동의하세요? 이것이 오늘 깜깜하고, 파탄을 만난 세상 앞에 파선된 배와 같은 인생들 앞에 여러분들이 회복해야 할 삶의 기능이에요. 그런데 불행한 것은 이와 같은 선시자적 기능이 거의 사라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귀에도, 마음에도 좋은 소리 듣기만을 굉장히 익숙해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축복을 선언하고, 평강을 선언하는 것이 기독교의 궁극적인 하나님의 목적이지만 분명한 것은, 성경의 일정한 툴을 잘 보세요. 하나님이 평강을 회복하고 축복을 빌 때는 언제나 먼저 헐고, 부수고, 다시 세우는 과정을 반드시 거칩니다. 꽃이 하나 피어나는 데도 수많은 바람과 흔들려야 뿌리가 쭉쭉 밑으로 내려가고 줄기가 튼튼해져서 꽃을 피워내는 겁니다. 그런 흔들리는 바람 없이 꽃이 피어나는 걸 보셨습니까? 아니에요. 하나님이 인생과 역사를 다루는 방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모세가 그런 심정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32절입니다.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자, 이건 사실상 모세라는 선지자가 마치 선지자가 갖고 있는 세 번째 기능처럼 몸부림치면서 이제 곧 가나안에 들어가.. 나는 건너가지 못하는 이 비련의 현장 앞에서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민족이 주의 말씀을 직접 경험했느냐? 어느 민족이 하나님의 손의 그렇게 신실히 붙들려서 이 땅에서 저 땅끝까지 인도받았느냐?" 그것을 선지자적 입장에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다음 볼까요? 그러면 왜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을 끔찍이 아끼고 사랑하셨을까? 35절입니다.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한 가지 꼼꼼하게 묵상이 필요한 대목이 있습니다. 우상이 뭔가? 우상은 명동 성당 앞에 마리아 상이 서 있다. 가만히 보면, 그 앞에 사람들이 오가다가 천주교 신자들이 무릎을 꿇고 묵주를 돌리면서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런 어떤 형상 앞에 빌고 기도하는 것들을 우리는 우상이라고 합니까? 넓은 의미에서 우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우상은? 내용과 목적을 자기가 정하고 종교적 형식을 빌려서 자기의 필요한 것을 구하는 태도. 그렇다면, 우리가 심지어 하나님도 그런 식으로 접근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우리가 믿는 예수님, 하나님도.. 물론 그분이 우상은 아니지만, 우리가 그분을 우상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상이라는 것은, 어떤 형상으로 만들어 놓고 빈다는 것보다 더 깊은 개념입니다. 내용과 목적을 자기가 설정합니다. 그래서 종교적인 형식을 빌려서 자기의 필요를 우선적 가치로 구하는 모든 태도가 사실은 우상입니다.

그래서 오늘 35절에 보니까, '이것을 내게 나타내심은' 하나님이 그렇게 끔찍이 불 가운데서도 나타내시고,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인도하시는 섬세한 경륜을 드러내신 것의 목적이 여기에 있어요. '이것을 내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그 외에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게 무슨 얘기인가요 이 끝이 뜻 밖에도 37절에 있어요. 왜 이런 걸 그렇게 알려주시려고 애를 쓰신 걸까? 3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을..' 어떻게 하신 고로? '.. 사랑하신 고로 그 후손인 너를 택하시고 큰 권능으로 친히 인도하사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며

여러분, 하나님이 이렇게 제 2 계명을 구체적으로 이래저래 설명하면서 '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 이것을 그렇게 백성들에게 가르치려고 했던 것은 내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 아버지인 줄 아느냐 이것을 가르치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눈 어둡고, 귀먹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이 아버지이신 줄을 깨닫지 못하는 거예요. 얼마나 불쌍히 사는 건가요? 그러면서 자꾸 다른 아버지 찾아다니는 거예요. 급할 때마다..

가끔가다 우리가 그런 궤도 이탈을 일상 속에서 할 때가 있어요. 위기가 올 때, 아픔이 쓰나미처럼 몰려올 때.. 지금까지 하나님은 나에게 뭘 하시는 걸까? 이분이 아닌가? 우리의 진짜 아버지는 누구지? 그러니까, 하나님은 뜻 밖에도 그런 모든 인도와 경륜과 과정을 드러내시는 것은 첫 번째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함이다. 그 궁극적인 마음은? 내가 아버지다. 내가 너희들을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아느냐? 다른 신에게 절하는 것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은 그 본질적인 것이 내가 백성들을 얼마나 가슴 뜨겁게 사랑하는 아버지가 되는 줄 고백하시고, 가르쳐 주기 위해서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이 숨도 쉬지 말고, 잠도 자지 말고 기도하라는 표현이 아니고 나는 24시간 너를 향해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어요. 그리고 범사에 감사하라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너희를 그런 감사의 자리로까지 이끌어 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감사라는 말속에 담겨지는 단어 자체가, 그리스도의 죽음 전제한 감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사실은 그 얘기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한다. 

 

 

 

마지막으로 38절 한번 볼까요? '너보다 강대한 여러 민족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너를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네게 기업으로 주려 하심이 오늘과 같으니라' 이 기업은 하나님의 기업이다. 결국, 우리를 사랑하시고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등에 업어서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이고자 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사랑하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유산과 기업을 이 자녀들에게 공동이 소유로 물려주고 그것을 선물로 주기 위해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업을 물려받을 자녀들의 표정은 그렇게 무덤덤할 수가 없죠?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 우리에게 기업을 물려주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삶의 과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 기업을 물려받기 위해서는 기업을 물려받기 합당한 자로 서기 위해서 하나하나 배워야 하겠지요? 갑질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물려받은 기업을 제대로 잘 경영하려면 사람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공감, 예절 등등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배워야겠지요? 그걸 위해서 주신 것이 율법이에요. 그렇다면 그 율법이 의무고 억지일까요? 아닙니다. 그 율법을 지키라는 형식으로 주신 명령 속에서는 어마어마 한 속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40절입니다. '오늘 내가 네게 명령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리라' 여러분, 어떤가요? 바로 율법을 우리에게 주시고, 이것을 지키라. 이 모든 것은 너의 행복을 위해서 준비한 매뉴얼이다. 그러다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인 기업을 물려받을 자로써 성장하고 커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의무인가요? 사랑인가요? 율법의 궁극적인 목적은 의무가 아니라, 사랑해서 지키는 거예요. 왜? 그 매뉴얼은 순종해야만 우리가 기업 물려받을 자로써 커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아버지가 그 기업을 안심하고 물려줄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훈련 과정에 우리를 홀로 두지 않아요.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거기에 또 보혜사 성령도 보내셔서 늘 우리가 비틀거릴 때 붙잡아 주시고, 흔들거릴 때 같이 흔들어 주시고 언제나 우리와 길이 있어요. 여러분의 작은 신음소리도에도 보혜사 성령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지금 그 자리에 묵묵히 계세요. 절대 우리를 지옥 끝까지 가서 포기하는 법이 없어요. 믿습니까? 왜? 하나님이 기업을 물려주기 위해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의 제물로 나누어주시고 우리를 값 주어 산 바 된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 표현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 보람과 긍지와 행복한 확신을 가지고 주 앞에서 하루하루를 선물 받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되기를 위해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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