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story/송태근목사

송태근 목사 I 야고보서 강해 8 I 야고보서 2장 14-18절 I 네 믿음을 보여 봐! I 야고보서 강해 (08) I 설교문

by №1★↑♥ 2024. 4. 27.

네 믿음을 보여 봐!

- 송태근 목사 - 

믿음을 어떻게 보이나요? 첫 14절에 보시면,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여기는 '행함'보다는 영어 번역에는 'Action', '행동하는 것'으로 번역하는 것이 좀 더 좋을 듯해요. 그래서 '.. 무슨 유익이 있으리오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여기에 두 가지 질문이 있지요? 첫째는, 무슨 유익이 있느냐? 두번째는, 그 믿음이 자기를 구원할 수 있겠느냐? 그래서 이 내용을 장로교에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신 분들의 입장에서는 불편할 수 있어요. 어떤 관점이냐? 구원을 얻는데도 행동이 필요한가? 어떤 조건이 전제되어야 하는가? 이 이야기는 행동의 강조점을 두기 위해서 기록한 의도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여기서 '거짓 선지자들'이라는 말은? 종교적으로는 더없이 완벽한 사람들을 얘기합니다. 성경도 달달달 외우고, 잘 가르치고 또 종교적인 규칙과 부칙도 잘 지키는 자로 율법에 능통한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 7: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너무 상식적인 얘기 같은데, 그들의 열매로 뭘 안다고 되어 있냐? 그들을 안다. 그러면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초점이 열매입니까? 그들입니까? 강조하고 싶은 초점이 열매를 맺느냐? 열매가 있느냐, 없느냐? 그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누구인지를 열매로 검증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아주 쉬운 예증을 하나 꺼냅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가 맺히는 법이 있겠느냐? 또,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있을 수 없는 이야기죠? 그렇듯이 신앙생활을 십수 년 해도 열매와 삶의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왜 열매를 못 맺고, 왜 변화가 없느냐? 여기에 방점이 있는 게 아니고.. 그러면 그 믿음을 의심해 보아야 한다는 거예요. 그게 진짜 믿음일까? 

우리는 야고보서 1장에서부터 무슨 이야기가 흐러오는지를 알아야 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말씀으로 낳으셨다고 했죠? 그러면 당연히 우리의 전 삶에 종합적인 열매에서 어떤 열매가 맺혀야 정상일까요? 그 진리에 따른 삶의 결과와 열매가 맺히는 것이 정상적인 나무예요. 그런데 그게 안 맺힌다면 그 나무가 가짜구나! 의심할 수도 있다는 얘기예요. 그러니까, 야고보 사도의 진짜 강조하고 싶은 것은? 행위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참 믿음이 뭐냐. 당신의 믿음이 참 믿음이냐? 참 믿음이라면 당연히 그 믿음은 진리의 말씀으로 태어난 믿음일 것이고, 그 근거로 삶의 변화와 삶의 열매가 당연히 맺어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거예요. 보통 야고보서 하면, 행함을 강조한다. 아니에요. 행함은 어떤 의미에서 저절로 혹은 자연스럽게 맺어져야 함을 거꾸로 설명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7: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당연하지요. 사람들이 배나무하고 사과 나무를 구분을 잘 못한데요. 처음에는 비슷하게 생겨서 그런데 한눈에 배 나무, 사과나무를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때가 되면 열매가 맺히겠지요? 배가 열리는 것을 보고 배 나무임을 알 수 있는 거지요. 열매를 보고 배 나무와 사과나무를 확인해요. 그러니까, 야고보 사도가 진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진짜 믿음인가? 가짜 믿음인가? 양의 탈을 쓴 거짓 선지자들인가? 그것을 구분하자는 거예요. 그 당시에는 헬레니즘 문화의 시대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의식구조 한 복판에 이원론적 생활양식이 매우 자연스러웠어요. 그래서 고백과 삶이 충분히 다를 수 있었어요. 이것이 신앙의 많은 병패를 가져왔어요. 그래서 헬레니즘에서 말하는 진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조금 달라요. 헬레니즘에서 진리는? 눈에 보는 것, 사실, 현상이 진리예요. 그 뿌리를 생각하지 못한다고요. 그러니까, "아, 예 형제님.." 그러면 좋은 신자예요. 그런데 속은 이리 일 수 있고, 늑대일 수 있다는 거라는 거예요.

 

 

반응형

 

 

15절입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이게 정말 평범한 말이 아닙니다. 보통 일반 사도들은 서신을 쓸때는 남, 녀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을 통틀어서 형제라고 씁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알아들어요. 그 안에 어느 범주 까자를 포함하는 대상인지를 대충 압니다. 그런데 가끔 가다가 야고보처럼 형제와 자매를 구분해서 자매를 밝히는 경우가 있어요. 여기에는 시대 상 때문에 그래요. 무엇 때문에 여자의 상 때문에 그래요. 특별히 여성의 지위에 대한 시대상 때문에 자매라는 신분과 자리매김을 의도적으로 구분합니다. 그 당시 여성의 지위는 오늘을 사는 21세기와 같이 이해하면 안 돼요. 굉장히 비천했을 뿐 아니라 그 시대의 지위 조차가 없었어요. 그래서 만약에 그 시대를 살던 여성들이 남편을 잃게 되면, 정말 의존할 길이 없는 존재가 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런 여성들은 대개 가난해요. 그중에서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경제적인 궁핍을 각오하고 따라나서는 길이었어요. 하도 로마 제국 아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가하는 시세템 적인 핍박이 너무 심했기 때문에 가난을 각오해야 했어요. 게다가 그 시대정신이 여성들의 자리매김과 지위에 대해서는 존재 가치를 인정하지 않던 시대예요. 그러다 보니까, 그 여인들은 생활정도가 아니라 생계 정도가 아니라 생존 자체가 어려운 여인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그래서 여기 야고보 사도가 '만일 형제나 자매가..'에서 자매란? 아무도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들을 포함하고 있는 거예요. 

또, '헐벗고'는? 이런 뜻입니다. 옷 한벌로 지내는 사람이거나 그 외벌 하나가 없어서 속옷만 입고 사는 사람들이 비일비재했어요. 오늘 같은 식의 속옷은 아니었으니까.. 이렇게 가난한.. 생계의 기로에 서 있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 여기서 일용할 양식이란? 하루 먹을 양식이 없다는 단순한 양식이 아니라, 그들의 개념에서는 '오늘의 양식'이라는 말도 되지만, '미래의 양식'이라는 말도 됩니다. 히브리어에는 시제의 구분이 없어요. 그래서 오늘은 내일도 됩니다. 예수님이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실 때의 메인 아이디어가 뭡니까? 일용할 양식이에요. 그 일용할 양식은 내일의 양식도 됩니다. 그러면 성경 전체에 걸쳐서 내일의 양식이 있었을 때가 있었나요? 출애굽 때요. 안식일 전날에는 반드시 내일의 양식까지 거둬야 했어요. 그래서 내일의 양식이 오늘 내렸어요. 그 이해가 가능했던 것은? 오늘이나 내일의 시제가 같기 때문에... 그러면 내일은 어느 날의 양식이었냐? 안식일의 양식입니다. 안식일의 주제와 안식일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바로 내일의 양식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양식조차 없다'는 것은? 은유적으로 이렇게 풀어서 말할 수 있어요. 희망이 없는.. 여러분 가깝게는 우리 주변을 보세요. '헐벗고 오늘의 양식이 없다'에서 '현재 분사'를 의미해요. 그 말은, 이 상태가 지속되고 반복되고 있다는 거예요. 그것이 지금 우리 주변에 늘 가까이서 만나는 정처 없이 살아가는 분들의 전형적인 모습이에요. 그들을 돌아보라는 거예요. 교회 공동체의 과제입니다. 준엄한 시대적 명령이고, 성경의 가장 소중한 하나님의 가치였어요. 그러니까, 15절 한 절을 간단히 들으면 안돼요. 

 

 

 

​ ​

 

 

16절,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 표현 자체도 2천 년 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그 시대에는 어떤 용래로 쓰였는가에 대한 이해를 가져야 정확히 알 수 있는데, '평안히 가라'는 말은 마치 무슨 인사와 복을  빌어주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이런 뜻입니다. '우리의 대화는 여기까지입니다. 평안히 가십시오." 그러니까, 굉장히 비열하고 냉소적인 표현입니다. 그런데 그 뒤의 이야기를 잘 들어보세요. '..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잘 보세요. "당신 하고 나하고는 여기까지 인 것 같습니다. 가서 덥게 하시고, 배부르게 하십시오." 그러면 이 사람이 지금 그 사람의 필요를 구체적으로 알고 있다는 말인가요? 모른단 말인가요? 알고 있음도 필요를 채워주지 않고, "당신하고 나하고는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내가  당신을 위해서 기도 많이 해줄게요." 이런 뜻입니다. 종교의 껍데기로 포장하는 거예요. "내가 당신의 허기를 위해서 기도할게요. 당신과 나는 여기까지입니다." 교회가 이런 행동을 해서는 안 되겠지요? 공동체의 책임이에요. 이 부분에 대해서 너무너무 예수님의 마음을 담아 나눌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오늘 낮에 못다 한 이야기는 오늘 저녁에 누가복음 11장에 한 밤중에 찾아온 친구의 이야기가 풀어질 겁니다. 거기에 진짜 결론이 있어요. 오늘 저녁에 다 나오시기 바랍니다. 결론은 오늘 밤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복음 앞에'

"하나님, 우리 교회와 한국교회가 행함의 열매가 있는 복음 앞에 다시 돌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특별히 우리 주변에 눈에 느끼게 하시고, 보이게 하시는 미래가 없는 인생들을 향하여 귀 닫고, 눈 감고, 입 닫지 아니하도록 순종케 하여 주시옵소서. 

지금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 하심이 머리 숙여 경배하는 사랑하는 우리 삼일의 모든 성도들과 해외, 군에 멀리 출타해 있는 가족들 그리고 복중에 생명들까지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