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4장 1-14절
1.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을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2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 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 때 4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에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서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7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지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교 그가 생구를 네게 주었으리라 11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한복음 4장 1-14절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는 길은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가는 직통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베뢰아 지역으로 돌아서 가던지 아니면 배를 타고 갔습니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역사 배경이 있습니다. 유대는 남북으로 약 120마일 정도 길게 뻗은 작은 나라입니다. 남쪽에 유대가 있고 북쪽에 갈리리가 있으며 그 중간에 사마리아가 있습니다. 사마리아는 남북이 나누어질 때 북이스라엘의 수도였습니다. 그러나다가 B.C 722년에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한 후에 앗수르의 혼혈 정책으로 유대의 순수성을 상실하였습니다.
남유다는 B.C 586년에 바빌론의 침략으로 끝나고 맙니다. 그들은 70년간 바빌론의 포로가 되었지만 순수한 유대 혈통을 지켜 종족을 보존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순수한 혈통을 상실한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이라며 사마리아 사람들과는 서로 내왕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그렇다치고 땅까지 더랍다고 사마리아 땅을 밟지 않았습니다. 그들 사이에 맺힌 골은 깊을 대로 깊었습니다. 이 깊은 골에 우리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오늘 본문 5,6절을 보세요. '사마리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신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수가라는 동네에 도착하였습니다. 이곳은 옛날 야곱이 사랑하는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또 그곳에는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우물이 있었습니다. 이 우물은 야곱이 판 우물로 깊이가 30M나 됩니다. 이 우물은 수 세기를 내려오면서 많은 사람의 갈증을 풀어주었습니다. 예수님은 피곤하여 야곱의 우물 곁에 도착하시자 '그대로'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때가 6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섯시 이것은 유대식 시간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로마식 시간으로 기록되기에.. 여기서의 6시가 오전인지 오후인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먹을 사기 위해 10여리 떨어진 수가성 동네로 갔으므로 혼자 계셨습니다. 이때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그 당시 여자들은 떼를 지어 물을 길으러 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혼자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이 점에서 이 여자는 분명 문제가 있는 여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 여인이 물을 길으러 우물에 도착했을 대, 우물가에 한 분이 앉아 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여자에게 다가와 말씀하셨습니다. 7절입니다.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 물을 들은 여자는 물을 주겠다, 줄 수 없다고 말하지 않고 즉시 이렇게 반응합니다. 9절입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이 여자의 대답 속에 마음이 꼬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 여자와 대화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닙니다. 당시 여자는 인구조사의 대상도 되지 않을 정도로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유대 남자들은 아침에 일어나 세 가지를 감사했는데, 첫 째는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하고, 둘째는 여자로 나지 않을 것을 감사하고, 셋째는 죄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길에서 딸을 만나도 아는 체를 하지 않았고, 랍비들은 여자들을 보지 않기 위해 피해다니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런 사회에서 유대 남자가 여자에게, 그것도 동네 여자들조차도 함께하기를 꺼리는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말을 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요즘 소통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소통은 그 자리로 내려가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모두가 꺼리는 땅에 오셔서 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시고 그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도움을 청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예수님은 영원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또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이시고, 생명의 근원이셨습니다(요1:1-4). 예수님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셨습니다(골1:15). 예수님은 영광스럽고 영원하십니다(요17:5).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신 거룩한 분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여기에는 십자가의 처절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아시고도 육신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여기에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양쪽에 항아리를 매달도록 만든 지게를 지고 물을 날랐습니다. 그 중 왼쪽 항아리는 금이 가 있었습니다. 우물에서 물을 가득 채워 출불하지만, 집에 오면 그 항아리의 물은 늘 반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왼쪽 항아리가 주인에게 너무 미안해서 이렇게 요청합니다. "주인님, 나 때문에 항상 같은 일을 두 배로 하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나를 버리고 새것으로 쓰세요." 주인이 금 간 항아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네가 금이 갔다는 것을 안단다. 하지만 너를 바꾸지 않을 거야. 그동안 우리가 지나온 우물에서 집까지의 길 양쪽을 바라보아라. 오른쪽 길섶은 아무 생명도 없이 황무하지만, 왼쪽 길 섶에는 아름다운 꽃과 풀이 무성하게 자라지 않았니? 비록 너는 금 간 항아리이지만, 너로 인해 많은 생명이 아름다운을 얻었구나"
이 부족함이 세상을 풍요롭게 했던 것입니다. 다 높아만 지려는 이 세상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주님의 모습. 이 예수님의 낮아심이 이 세상을 구원하는 힘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 낮은 자리로 내려갈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주님과 같이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만드는 저와 여러본 모두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아마도 이 여인은 남편이 죽은 후, 소위 당시 이스라엘에 존재한 <수혼법>(신2:5-10)에 따라 그녀를 죽은 남편의 형제나 친족들이 아내로 삼아 후사를 잇는 책임을 져야 했으나 아마도 그 형제들이 줄줄이 세상을 떠난 그런 상황의 여인이 아니었을까 추정합니다. 그러니 이 불행한 여인의 정신적 고독과 방황은 상상 이상의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남편을 다섯이나 잡아 먹은 여자'라고 소문난 이 여인, 그래서 자기 동네에서 '재수 없는 여인'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여인의 마음의 상처를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녀는 철저하게 소외된 인간이었고 마을 사람들에게 기피 대상 제 1호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자는 목이 말라 매일매일 대낮에, 아무도 없을 때 이렇게 물을 길으러 와야 했습니다. 10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기 '하나님의 선물'은 생수를 의미합니다. '네게 물을 좀 달라하는 이'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성육신하신 예수님입니다. '셍수'는 성경에서 영혼의 갈증을 해결하여 주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생수는 예수님 자신입니다. '구한다'는 것은 적극적으로 찾는다, 배운다, 기도한다, 관심을 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생수를 구하는 모든 이에게 생수를 주십니다.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의 참된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반문 합니다. 11-12절입니다.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아마 이 여자는 물을 길으러 올 때마다 조상인 야곱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야곱은 위대한 믿음의 조상입니다. 이 물은 깊이가 30m요, 물의 깊이도 5m나 된다고 하니 좋은 우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이 여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3-14절입니다.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히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야곱의 우물이 아무리 좋은 물이라고 할지라도 마실 때 뿐이지 마시고 나면 또 다시 목이 마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므로 더는 목마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샘을 당신께로 나아오는 사람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낭 이 여인은 자신들의 존재 안에서 생명이 솟구치는 행복을 경험했습니다.
인간은 영의 존재이므로 세속의 목마름 이상의 영혼의 목마름이 있습니다 .이 영혼의 목마름은 세속의 것으로 채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라고 했습니다. 요즈음 얼마나 먹을 것이 많고 마실 것이 많습니까? 인간의 기갈은 양식과 물이 없는 기갈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해서 오는 영혼의 기갈입니다. 왜 그럴까요? 예레미야 2장 13절을 보십시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생수의 근원인 하나님을 떠나 다른 데 우물을 팠습니다. 다른 우물은 각종 우상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절을 했습니다. 그래도 만족함이 없었습니다. 우상은 터진 웅덩이와 같아서 심령에 만족이 없습니다. 그들은 강대국에 우물을 팠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강대국에 멸망하였습니다. 세상의 어떤 웅덩이에서도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영생의 생수가 되십니다. 요한계시록 2장 16절입니다.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예수님을 믿고 성경 말씀에 순종하며 성령을 의지하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값없이 마시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세상의 것으로 목마름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목마르다고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목마르다고 바닷물을 마시면 마실수록 더 갈증이 나서 나중에는 죽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샘물은 우리의 영혼을 적시고 흘러넘쳐서 만족하고 깨끗합니다.
삶에 대한 고독과 사랑의 갈증은 그 유명한 배우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공통의 문제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내면에 고독과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예수님을 만날 때 더는 목마르지 않고 영원한 기쁨과 소망이 넘치게 됩니다. 예수님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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