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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story/설교문

새벽설교 I 이사야 66:1-14 I 높은뜻정의교회

by №1★↑♥ 2021. 8. 7.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아주 중요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과의 교제가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 삶에 중요한 것들이 여러 가지가 많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 모든 일을 통해서 우리에게 원하시고, 가까이 이끄시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이사야 66:1-14, 새벽설교

  돌아보면 여러 가지 인생의 문제가 많았잖아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기도할 수밖에 없게 되었던 그 모든 일의 문제 해결은 다 되었을 것입니다. 이젠 다 지나가고 결국 남은 것은, 하나님과 전보다 더 많이 가까워진 것? 하나님을 더 많이 알게 된 것? 조금 더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  조금 더 하나님의 아들딸들이 된 것. 그것이 결국 남는 것이고, 그것 가지고 사실 천국 가는 것이거든요. 이 땅에서도 하나님께 합당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원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소중히 했기 때문에 중요하게 여긴 것이 뭐냐? 성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저는 두 가지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는, 아주 전통적인 교회에서 자랐습니다. 그런데 사역은 아주 개혁적인 교회에서 사역을 했습니다. 전통적인 교회의 특징은 역시 성전을 중요시했습니다. 우리가 70-80년대에는 성전이 대단히 중요했고, 그래서 성전건축이 대단히 중요한 우선순위였습니다. 이제는 그렇지 않지요? 요즘에는 건물의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학교 건물을 빌려서 사용하기도 하고, 건물에 투자하는 대신에 보다 더 본질적인 신앙에 우선순위를 두자는 생각을 갖고 있는 교회도 많아졌습니다. 장단점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앞으로 극복해야 할 부분입니다. 점점 노년층이 많아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생업에서 은퇴하시게 되잖아요? 교회에 오셔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단 말입니다. 그래서 영락교회 같은 경우를 보면, 노인분들이 하루 종일 교회에서 보내세요. 교회에서 놀고먹고 모임하고 아주 행복하게 모든 시간을 교회에서 보내시거든요. 그럴 때는 교회의 건물이 참 부럽습니다. 

  그러나 건물이 없는 교회는 노인분들이 그럴 수가 없는 거지요. 왜냐하면 장소의 한계가 있다 보니 이것이 우리의 과제인데.. 그런 장점이 분명히 있더라고요. 저는 모교회에서 어떤 경험을 했냐? 성전이 굉장히 아름다운 교회였어요. 교회를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교회를 다들 사랑했습니다. 교회 도서관도 좋았고, 기도실이 24시간 개방되어 있어서 누구든지 언제든지 교회 와서 쉬고 공부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아이들이 학교 끝나고 집에 안가고 교회로 모였어요. 교회에 와서 교회 친구들과 같이 공부하고 집에 가고, 어른분들도 해외 출장을 가시기 전에 교회와서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공항으로 가서 출장을 가고, 귀국하시면 집으로 안 가시고 교회로 오셔서, 잘 다녀왔습니다. 기도하고 집으로 가시고.. 유대인들이 회당을 중심적으로 생활을 하거든요. 유대인들은 세계 어느 곳에 모여 살든지 회당부터 짓습니다. 회당 중심으로 집을 짓고 살았어요. 회당으로 모이고, 회당에서 말씀을 보고, 말씀 중심적으로 회당 중심적으로 그렇게 살았는데 생각해보니까 저의 모교회 생활이 그랬던 것 같아요. 교회 중심이었습니다. 집보다 교회를 더 좋아했으니까요. 이렇게 회당 중심으로, 성전을 중심으로 교제하는 것이 조금은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사야 66장에서 마지막까지 말씀하시는 것이 뭐냐? 역시 하나님은 본질을 원하세요. 그래서 지금 이스라엘은 여전히 성전이 중요한데. 그러다 보니까, 점점 신앙생활이 형식적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더 제사가 중시가 되고, 형식이 중시되고, 그리고 이 성전에 연루된 많은 권력이 있거든요. 권력이 있고, 특권이 있고, 이방인과 외국인들은 소외되기 마련이고 본질적인 것들을 많이 놓쳐버리는 경우들이 있었기 때문에 성전이 도대체 뭐냐? 문제 제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사실 온천하가 하나님의 피조물이잖아요? 그리고 하나님은 시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어요. 자신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집을 지으면 하나님이 거기 와서 쉬신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실 때, '내가 그 집이 필요하겠냐? 내가 정말 시공간에 한정이 되는 그런 존재더냐? 너희와 관계에 있어서는 건물이 더 중하지 않다.' 지금 문제 제기를 1절 말씀을 통해서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더 원하시는 것은 뭐냐? 2절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역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심령의 가난함이었습니다. 팔복.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가난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난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고파하고 목말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해서 채워지지 않으면 못 살겠는.. 그게 영적인 건강함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이 새벽에 하나님을 배고파하고, 목마르게 하는 그 일들은 표면상으로는 우리를 힘들게 하는 어떤 고난이고 고통일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을 목말라 하고 배고파하게 되고, 하나님 아니면 내가 못 살겠다고 하는 그런 상태는 정말 하나님이 주고 싶어하시는 일이시거든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것입니다. 건물 말고 나에게 대해서 정말 배고파하고 목말라 하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예루살렘 성전 공동체를 향한 이 말씀이 굉장히 도전적인 것은? 지금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마치고 귀한 했잖아요? 성전건축보다 중요한 것이 지금 없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성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사실 충격 아니었을까요?

  우리도 이 말씀에 비추어서 생각해보기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봉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기도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우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나는 그걸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얼마나 놀라시겠어요? 오늘 새벽에 기도하실 때 그런 도전을 만나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과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 내가 잘 돼야 한다 등등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형식주의로 흐를 수 있거든요.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 본질을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심령의 가난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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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이게 뭐냐 하면? 이스라엘의 전체 상황도 상황이지만, 오늘의 본문 가운데서도 보는 것은 이스라엘의 두 부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정말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있었고, 하나는 정말 성전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두 부류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64-65장을 봤을 때, 하나님의 심판이 등장했습니다. 그때에는 항상 두 부류가 등장했었는데,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두 부류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그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도전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 원하는 것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구하십시오.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거기까지 가야 합니다. 기도는 나로 시작해서 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끝나는 것이 기도입니다. 나로 시작해서 나로 끝나면 그것은 아직 기도가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가 항상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그래서 우리 믿음의 시작과 기도의 시작은 내가 원하는 것으로 시작을 하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완성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으로 시키기 되어 있어요. 

  그래서 지금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은 성전이 중요하고, 제사가 중요하고, 그래서 짐승을 잡는 것이 중요한데 하나님 보실 때는 3절 이하에 보면, '야~ 그건 살인하는 것과 비슷하다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다.' 하나님 볼 때는, 이스라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너무 헛되게 보이는 거예요.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마음이 가난해지는 것이라'라고 그렇게 역설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관계 맺을 때, 그 마음이 하나님과 합하면 조화를 이루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만남이 임재가 느껴지고 달콤하단 말이에요. 언제나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우리와 하나님이 차이가 있을 때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충돌이 있어요. 그래서 힘들어요. 기도가 힘들고, 내가 원하는 게 다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기도가 겉도는 것과 같고 한 시간 기도했는데도 하나님을 못 만난 것 같고..' 사실 그런 교제가 되게 중요한 교제예요. 그러면서 맞추어가게 되니까요.

  오늘 66장에서는 두 부류의 사람이 나타나고 또 하나님과 다른 마음이 부딪히는 충돌이 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때, 일어나는 일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3-5절은 이의 제기를 하는 거예요. '너희가 중요하다고 생가하는 것, 나에게 있어서는 중요하지 않다.' 한번 되짚어 보기 원합니다. 3절 '소를 잡아 죽이는 것..'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시 기에는 '.. 살인함과 다름이 없이 하고..' 스스럼없이 짐승들을 잡아 죽이는 것이지요. 사실은 짐승을 잡아 죽일 때 내 죄를 전가하고, 내 대신 죽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비참하게 생각해야 하거든요. '내가 이렇게 비참하게 죽어야 하는데, 나 대신 이 짐승이 죽는구나!' 거기에서 사실은, 내가 간접적인 죽음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짐승을 잡는 데 있어서 그런 가책이 없는 거예요. 그냥 다 잡았습니다. '.. 어린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하며..' 개는 아주 하찮케 여기는 짐승이었습니다. '..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 하고..' 아주 부정한 예물을 드리는 것과 귀한 예물을 드리는 것과 마음의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역시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마음의 중심입니다. 우상을 찬송함과 전혀 다름없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제사를 가증하게 생각하신다는 거지요.

 

  계속해서 4절입니다. '나 또한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듣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며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라 하시니라'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응답을 구하는 어떤 것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더 이상 내 목전에서 악을 행하지 마라. 그리고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계속 선택하는 것을 중단하라. 내가 원하는 제사는 그런 제사다." 지금 본질을 또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은 그대로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어요. 하나님이 말해도 듣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기도라는 것은 말씀을 들으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너희가 듣지도 않고, 맹목적으로 너희들이 원하는 것만을 구하고 있는데.. 내가 원하는 것은, 내 말을 좀 들어라.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는 일을 중단하라." 삶의 변화에 사실은 우리가 원하는 응답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하고요. 그걸 하나님과 마음을 맞추지 못할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임하게 하리니..'는 것은 저주라기보다는 자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듣지도 않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는 길로 계속 가면 무서워하는 것이 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경고를 지금 하나님께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원하시겠어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 얼마나 주시고 싶겠어요? 그런데 기뻐하지 않는 길로 자꾸만 간단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결국 이사야 66장까지 오면서 원하는 대로 주기도 했어요. 하나님 자신의 뜻을 굽히기도 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가 없는 이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마지막까지 수정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기도한다고 했을 때, 어떤 문제 해결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나왔다고 했을 때 중요한 응답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부분을 중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원하시는 것을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그 길로 접어드는 것, 그 안에 내가 이미 예비해놓은 것이 많다. 그래서 나오는 것이 출산 이미지입니다. 

 

  오늘은 두 가지 이미지를 가지고 66장이 전개되고 있는데, 하나는 성전 이미지, 하나는 출산 이미지입니다. 여러분, 출산은 예나 지금이나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고대 이스라엘에는 특별히 출산을 하다 죽는 산모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때 중요한 사람이 산파입니다. 그 시대에는 의사도 흔치 않았기 때문에 산파가 굉장히 존중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산파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성전의 이미지가 끝나고 산파의 이미지가 나오는데 7절입니다. '7 시온은 진통을 하기 전에 해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아를 낳았으니 8 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이며 이러한 일을 본 자가 누구이냐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한 순간에 태어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진통하는 즉시 그 아들을 순산하였도다 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아이를 갖도록 하였은즉 해산하게 하지 아니하겠느냐 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해산하게 하는 이인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 하시니라' 지금 이스라엘이 사실 원하는 건, 생명을 잉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건 내가 한다. 너희가 해야 할 일은, 내가 원하는 길로 들어서는 거다. 그것만 하면 고통 없이 해산하는 것은 내가 알아서 다 해주마."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계속해서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핀트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 준비가 되어 있으세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계속 불순종으로 가고, 계속 비본질로 가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본질로 온다면 성전, 껍데기 말고 정말 나를 배고파하고 목말라하는 진정한 관계성 안으로 들어온다면 해산 없이 그대로 순산하는 거와 같이 은혜와 복은 그냥 임하게 될 것이다. 그 사실을 호소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삶의 변화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문제가 없으십니다. 우리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우리는 기도로 바꾸려고 하는데,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을 기도로 바꿀게 아닌 거죠. 하나님은 완전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주려고 하십니다. 변화가 되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아닌 우리 자신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호소하고 계십니다. 성전 이미지와 산파 이미지. 두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전. 나한테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개인에게 주신 말씀을 이렇게 들어보기 원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관계 맺는 데 있어서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틀리다면 내가 바꾸어야지 하나님을 바꿀게 아니지요. 오늘 기도할 때에도 내가 기도해서 하나님을 조정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을 바꾸겠다. 하늘 보좌를 움직이겠다. 그게 아니고 바꾸어야 할 부분은 나라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의 기도가 그렇게 좀 더 성숙한 데까지로 나아가기 원합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내 자녀의 변화입니다. 내 직장의 변화입니다." 좋습니다. 그렇게 시작하세요. 그런데 마지막 도달점은 "그래서 하나님이 저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걸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응답할 때, 해산하는 수고 없이 아이가 태어남과 같은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 음성을 우리가 이 새벽에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실 때, 이스라엘이 바로 나라고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이런 한심한 족속들 같으니라고.." 이러시면 성경을 잘 못 보는 것입니다. "내가 이 모습이구나!" 그렇게 말씀을 보셔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점점 부각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원하는 것은, 사실 많은 본질을 잃어버리는 것에서 돌이켜 변화되어야 할 분은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더 원하시는 것에 초점이 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바꾸려 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내가 더 갈망하게 되어야 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스라엘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시고,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통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를 원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은혜받는 길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그것을 안타까이 호소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에게 주시는 음성으로 듣습니다. 하나님 저희는 어디서 길을 잃어버렸습니까? 저는 어디서 본질을 잃어버렸습니까?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께 원하는 것이 있어서 이 자리에 나왔지만 하나님, 정작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바는 무엇입니까? 그것을 묻고 응답받을 수 있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고,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삶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일들을 중단하시는 응답이 있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중에 기도하게 하시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들어서는 것부터 시작하게 될 때, 해산하는 여인이 고통 없이 순산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가 이미 우리에게 임하여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의 영혼을 깨워주시고 바른 길로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로 행하는 오늘 하루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 길로 행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많은 은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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