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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story/설교문

새벽기도 설교문 I 이사야 66장 1-14절

by №1★↑♥ 2021. 8. 10.

  오늘 66장에서는 특별히 시온, 예루살렘의 회복을 넘어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에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 약속에 대한 말씀이다. 그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이사야 66:1-14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하나님은 65장에 이미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고 바로 그곳에 이때까지 표현했던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 남은 자, 나의 종, 택한 자들이 다시 돌아올 것에 대한 소망의 메시지를 던져주었습니다.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의 마음속에는 이미 예루살렘 성이 훼파되었고, 성전도 완전히 폐허가 된 모습을 기억하는데 하나님께서 다시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가 이루어졌던 것처럼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겠다는 은혜를 베풀어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들이 성전이 없으니까 '하나님도 떠났고, 우리는 정체성도 없고 우리는 정말 아무 소망이 없구나!'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시지요. "성전 안에 나를 가둬두지 말고 이 모든 피조세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크심,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바라볼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1절의 내용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거든요.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얼마나 크신 분이신가?를 아는 것에 따라 두려워하기도 하고 염려하기도 하는 정도가 천지차이가 나는 거예요. 사실 우리는 성전 안에만 갇혀 있는 하나님으로 믿고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전을 벗어나게 되면 세상 사람처럼 똑같이 생활하다가 가끔 여기에 와서 우리의 힘들어하는 한 주간의 일을 위로해주시는 그런 하나님으로, 때로는 푸념하듯이 나의 기도들이 튀어나오는데.. 들어만 주십시오. 이때까지 경험해보니까 그렇게 크게 역사하신 적도 없는 것 같고 다른 사람들 모르는데 적어도 저한테는 그렇게 크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지 않으셨으니까.. 그냥 제 이야기만 들어주시는 것으로만 만족하겠습니다. 그냥 제 마음만 좀 추스러 주십시오. 그럼 제가 알아서 힘을 내어서 열심히 해결하겠습니다.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믿는가? 그게 하루하루 삶이 지속될수록 찾아나가고, 경험해야 될 하나님인 줄 믿습니다. 크신 하나님을 만나면 만날 수록 우리가 갖고 있는 문제는 점점 작아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크신 하나님을 우리가 알면 알수록..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 가운데서 일어나는 일들.. 또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은혜와 섭리 가운데 반드시 선한 일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는 믿음의 소망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절에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전 우주적인 창조주 하나님의 면면을 나타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그렇게 화려하게 지었던 성전을 짓고 나서도 솔로몬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왕상 8:27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 오리이까' 솔로몬 조차도 자신이 만든 이 성전 안에 하나님이 갇혀 계실 분이라는 사실을 처음에 성전을 완성했으나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헤아려주시고, 간절히 구하는 기도를 들어주시옵소서. 예수님께서도 성전이 뭐하는 곳인가? '이곳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건물로서의 성전의 기능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으로 바라보면서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가지고 신앙을 가지고 집중하도록 하는 장소이고, 건물로써의 기능이지.. 그 자체에 하나님이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시다는 말씀입니다.    

 

  2절에 하나님께서 이이서 말씀하십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우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 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자신이 얼마나 큰 하나님이신가를 다시 보라는 것입니다. 창조주라는 사실을 다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우주 만물을 지으셨다는 것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이것을 지었기 때문에 너희가 생겼다. 그러니까, 우리 존재를 가능케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존재하게 해주셨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이 삶을 살아가야 되리 목적과 방향도 제공해주시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 입장에서는 주님은 창조주시고, 우리는 피조물인데요. 이 피조물이 특별히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께 매달리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지도 않는 것에 대한 애타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떤 자들을 돌보시나? 뒤에 나오지요? '..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돌보시는가? 자신의 이 죄악을 깨닫고, 내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천지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그 창조주께 돌아가려고 하는 피조물로써의 반응을 보이지 않는 자들이 회개함으로 돌이킬 때, 그들이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겠다는 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돌볼 것이다." 약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에서도 동일한 이야기를 합니다. 시편 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그러나 우리가 읽었던 본문 3절에서도 드러나듯이 얼마나 가능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지금 외형적으로는 소를 잡아 번제를 드리고, 여러 가지 제사를 드리는 것에 대해서 아주 가증한 예배라고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마음은 하나님께로 멀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 없다고 한탄하시면서 내가 찾는 자들은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오셔서 천국복음, 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한 말씀을 선포하시면서 산상수훈의 말씀에 어떤 자들이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을 받느냐?라고 했을 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말하고 있고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는 자들은 어떤 자입니까? 자신들 안에서 답을 찾을 수 없다. 스스로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고 하나님께만 온전한 소망을 두는 그런 자들이 바로 천국,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데, 왜 주님께서 내 삶을 통치하셔야 합니까? 그냥 때로 힘들 때, 의논하는 상태, 상담자 내지는 내 계획을 이루어 나가기 위해서 고문이나 이사로 모시지 내가 뭐하려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을 살겠냐? 오로지 내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는 자, 이 죄에 대한 심각성을 깨닫고 정말로 나는 구제 불능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자만이 온전히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자들, 마음이 가난한 자들 애통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 아니면 안 된다라고 하는 간절함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이런 자들을 내가 돌보리라. 하나님을 소망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하나님의 말씀 앞에 두렵고 떨림을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돌보시겠다고 말씀하시고  4절 말씀에 그렇지 않는 자들, 3절 말씀과 같이 헛된 예배를 드리고 외식적인 삶을 살고, 겉으로는 뭔가 모양을 갖춘 듯 하나 속으로는 전혀 하나님을 향한 갈망함이나, 주님 아니면 안 됩니다라는 간절함이 없이 예배의 행위를 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나 또한 그들에게 유혹을 택하여 주며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임하게 하리니' 심판이 그들에게 임하게 된다. 심판의 선포를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시 5절 말씀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들아 그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르시되 너희 형제가 너희를 미워하며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쫓아내며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영광을 나타내사 너희 기쁨을 우리에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라 하였으나 그들은 수치를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두 그룹으로 분류하시지요. 나의 택한자들, 남은 자들, 나의 종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떠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주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을 향해서는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6절 말씀에 그러한 심판의 엄중함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지요. '떠드는 소리가 성읍에서부터 들려 오며 목소리가 성전에서부터 들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원수에게 보응하시는 목소리로다'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떱니다. 왜? 하나님의 거룩하심 때문에 떨고, 자신들의 연약함. 죄악성 때문에 떨고요. 하나님의 임재 앞에 떨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은 심판하는 자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서 그들은 곧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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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하나님께서는 7-14절까지 시온,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역사적으로도 이루어진 일입니다. 바벨론으로 끌려갔고, 그 이후에 페르시아 제국이 일어나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셔서 70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다시 그들을 고국으로 돌아오게 할 뿐 아니라, 성전을 다시 짓고 시온의 완전한 회복을 이루어주셨음을 우리가 알지요. 그 완전한 성취에 대한 약속을 지금 7-14절까지 예언의 말씀으로 하고 있습니다. 7-8절, '7 시온은 진통을 하기 전에 해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아를 낳았으니 8 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이며 이러한 일을 본 자가 누구이냐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한 순간에 태어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진통하는 즉시 그 아들을 순산하였도다'

  시온의 회복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데 '헤산하는 고통이 없을 것이다.' 또는 '진통하는 즉시 순산하였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여기서 히브리의 묘미가 중요한데, 영어 성경을 보면 이걸 현재형으로 표현하면서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지만.. 우리 한글 성경은 '남아 낳았다. 순산하였다'라는 과거형을 쓰고 있거든요. 왜냐하면, 히브리어는 미래형하고, 과거형이 외형적으로는 동일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냐? '하나님이 할 것이다.'가 '하나님이 하였다.'라고도 번역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즉 바로 이루어졌다는 표현도 언어적인 의미로서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계획'하심이 믿음으로 받는 자들에게는 이미 되었다는 선언이 되는 것이지요. 아직 시온이 회복이 안되었거든요? 그런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아를 낳았다고 지금 표현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표현. 시온이 진통하는 즉시 아들을 순산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고, 순산하였다. 이미 하나님이 작정하신 사건은 이미 이루어진 과거의 사건, 현재의 사건이 된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면 이 뜻이 뭔가? 시온이 어떻게 고통을 당하기 전에 애를 낳았다. 진통하는 즉시 남아를 낳았다는 뜻이 뭔가? 첫번재는, 시온의 회복이 해산하는 수고는 어미가 아이를 낳을 때에 시간과 고통, 수고의 노력이 있지요. 근데 그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회복이 수고 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이 노력해서 시온이 회복되었습니까? 그게 아니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고레스 왕이 칙령을 내립니다. 돈도 지원해줍니다. 이스라엘을 돌아가게 하고 성전 짓는 일까지도 하게 한다는 것이지요.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시온의 회복의 수고 없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신다. 시온이 해산하는 수고를 하지 않고, 하나님이 직접 하신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의미는 해산하는 고통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에 하와에게 내려졌던 심판. '너희가 이제 이것을 먹었은즉 해산하는 수고를 겪게 될 것이다.'라고 분명한 죄의 대한 심판으로써 해산의 고통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없어질 것이라는 것은? 이 죄로 말미암아 인해 주어진 심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다시 역전시키겠다. 회복시켜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로 인한 심판이 이제는 중단이 되고, 하나님께서 지금 이미 65장에서 '새 하늘과 새 땅' 재 창조를 말씀하시는데, 거기에서 태어나게 될  앞으로의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전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내려졌던 죄로부터 단절이 되어서 이제는 죄의 자식들이 아니고, 의의 자녀들로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게 될 것이라는 놀라운 약속을 여기서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계속해서 9절에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여호와께 이르시되 내가 아이를 갖게 하였은 즉 해산하게 하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은 생명의 주관자이시고 하나님은 지금 이렇게 하시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해산하게 하는 이인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 하시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처음부터 선택하셨고, 그들이 자격이 있어서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다른 민족보다 오히려 수가 적고 연약했기 때문에 선택을 했는데요. 하나님은 끝까지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돼라.'의 관계를 신실하게 이행하시기 위해서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10-14절까지는 이제, 시온이 회복되었을 때에 우리가 누리게 되는 축복. 여기서 반복되는 단어가 10절 '기뻐하라 즐거워하라 기뻐하라.' 기쁨이 있고요. 11절의 '위로하고 만족' 12절 '평강' 그 다음에그다음에 '영광이 넘치게 된다.' 13절에 '위로, 위로, 위로' 그리고 14절에 다시 '기쁨'이 있고, 마지막 부분에는 '원수들을 향해서는 진노'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이뤄지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어떤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기쁨의 최고. 인간이 받을 수 있는 모든 위로함의 가장 큰 위로. 그리고 더 이상 뭔가를 다시 원할 것이 없는 만족. 그다음에 평강. 그다음에 영광. 또다시 위로. 또다시 기쁨.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실 때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평안할 지어다.' 샬롬. 또 한 번 샬롬을 말씀하시는 내용을 보면서 반드시 그리스도를 통한 완전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회복. 화평을 이루는 샬롬의 은혜를 우리에게 허락하실 것을 말씀하셨고, 또 그렇게 성취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럼 시온, 예루살렘희 회복.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백성들이 고레스의 칙령으로 인해서 다시 돌아오게 되는 은혜, 역사적인 사건을 의미하는 것인가? 여기에서 끝나는 것인가? 그게 아니지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오셔서 시온의 회복, 예루살렘 성의 회복의 의미를 다시 말씀해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현재 우리가 살고 교회의 회복이기도 하고요. 또 계시록에 그리고 있는 새 예루살렘이 새 하늘과 새 땅에 창조되고, 하늘로부터 내려오고 있는데 교회의 완성된 에수 그리스도의 신부의 이미지로 이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1-2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사용했던 65장, 66장의 이미지들을 계시록 마지막 장에 또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아까 시온은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는 근원이신데, 사람이 노력해서 만든 것이 아니고 '하늘에서부터 내려온다'는 것은 하나님의 재창조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구체적으로 뭐냐? 어린 양의 신부라고 계시록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계 21:9-10 '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그러니까, 천국에 가면 성이 있고 금은보화로 된 도시가 있다기보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지금으로 말하면 아직 완성되지 못한 하나님의 교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주님의 완전한 통치를 이루게 되었을 때에 완전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완성된 하나님의 교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자들의 모임이 교회인데. 이것이 얼마나 거룩한 공동체로 나아가야 되는가? 에 대한 심각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계시록의 그림이 그리스도와 신부 된 교회가 어린양의 혼인잔치에서 만나는 것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이 내용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오늘날 그러면 거룩한 신부로써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다른 것 없이 주님과 깊이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그분의 순결하심과 그분의 거룩하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인간이 이 땅에서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십자가 앞에서 계속 통회 자복하고 상한 심령으로 찢겨진 연약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와서 부르짖는 것 밖에 없다고 봐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그분과 깊이 동행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의 주인이 되시는 변화된 모습으로 서서히 성화의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을 정리하자면, 역사적으로 회복된 시온. 예루살렘을 기억하면서 실제로 이 말씀이 문자적으로도 이루어졌고. 영적으로는 우리 교회를 위한 회복의 말씀이다. 이렇게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크심을 온전히 바라보고,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피조물이다.'라는 인식속에서 그 나라가 어떤 곳인지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이 되신 모습으로 살아가기 시작할 때에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말씀은 완성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계시록까지 연결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된 신부로써의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어 가기 위하여 주님과 깊이 동행하기를 소망해야 할 것입니다. 아니 그런 마음의 소원을 주신 성령님을 의지하면서 순간순간 예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삶을 살아가도록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복된 삶을 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

  오늘 말씀 붙들고 같이 기도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말씀하시는 대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이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고백한다면 우리는 이미 새로운 피조물인줄 믿습니다. 그것을 믿으시고 오늘 그리스도의 통치가 우리의 삶 가운데서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위하여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이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볼 것이다.' 말씀하십니다. 십자가가 이래서 파워풀한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 모든 답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나 의지 많이 의지하지 마세요. 너무 많이 사람 의지하지 마세요. 우리는 깨어질 수 그릇에 불과합니다. 깨졌다고 또 비난하지 마세요. 그냥 십자가 앞에 나오면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반드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아무리 깨진 마음이라도, 상한 마음이라도 주님께 나아오면 주님께서 그 삶을 붙드시고, 통치하시기 시작할 때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로써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 되심을 인정하고 창조주 되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바라보면서 예배드리는 능력이 일어날 때, 하나님의 거룩한 신부의 모습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부의 모습으로 교회의 영광을 우리가 함께 경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이 자리가 바로 그 자리 아닙니까? 오늘 우리가 어떤 상황 가운데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으로 나와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그 놀라운 사랑의 은혜 가운데 다시 주님의 은혜를 붙드십시오. 그리고 소망하십시오. 우리가 절망할 때 십자가 바라보면 소망이 생깁니다. 우리가 힘들 때 십자가 바라보면 위로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 답이 없을 때 십자가를 보면 답이 주어집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시고요. 계시록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 공동체를 향한 주님의 말씀인 줄 믿습니다. 오늘 이 시간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경험할 수 있도록 주님 도와주십시오. 이미 새로운 피조물인데, 피조물의 은혜를, 기쁨과 평강과 은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주님 도와주십시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는 믿음을 주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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