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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story/송태근목사

송태근 목사 I 야고보서 강해 10 I 야고보서 3장 1-6절 I 혀의 두 가지 위력 I 야고보서 강해(10) I 설교문

by №1★↑♥ 2024. 5. 4.

혀의 두 가지 위력

- 송태근 목사 -

오늘은 '혀의 두 가지 위력'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언어 문제지요? 언어, 말. 같은 개념인데 한국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소리에 대한 순위를 매겨 놓았더라고요. 10위가 알람소리. 군대 기상나팔소리. 그리고 여러 소리가 있는 데 1위가 뭐냐? 손톱으로 칠판 긁는 소리. 그런데 소리하고 말은 또 틀려요.

젊은 부부가 듣기 싫은 말이 뭘까 하니? "아기 언제 가져?" 제일 듣기 싫다고 해요. 남자들이 제일 듣기 싫은 소리가 뭘까요? "경제권은 가진 거야?" 그리고 공통적으로 싫은 소리, "언제 돈 모아서 집 살래?" 그 말 자체는 별 문제가 없지만.. 적절하냐의 의미겠죠? 같은 말이라도.. 제 주변에도 평생 저를 만나면 가르치는 사람이 있어요. 그분을 가만히 보면 습관이에요. 듣고 보면 틀린 말 하나도 없는데 기분이 나빠요. 덕분에 많이 배워요. 저렇게 늙어서는 안 되겠다. 참 말이 어려워요. 그래서 오늘 혀의 이야기는 단순히 인간의 품성과 말의 문제일까? 그리고 이 말이라는 주제가 성경에서 갑자기 나온 주제인가? 그렇지 않아요. 야고보는 1장을 쓸 때부터 언어의 문제를 이미 암시하고 있었어요. 야고보서 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뭐라고 하죠? 성숙이라고 해요. 그래서 어떻게 했다는 거죠 야고보서 1: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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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타락한 우리를 하나님께서 뭘로 낳으셨다고 했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았다. 그래서 우리 속에는 진리의 말씀의 DNA가 심어졌어요. 그래서 우리가 정상적으로 하나님의 의로 거듭난 존재라면? 이제 우리 안에서 그 DNA 다운 닮은 꼴이 나와야 됩니다. 삶으로부터.. 당연하겠지요? 야고보서 1: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여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여기서 '재갈'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입체적으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혀에 재갈을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은? 뭐든 결론이 헛것이라고 할 만큼 심각성을 가지고 야고보는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사도 베드로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베드로전서 2:21,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그러니까, 베드로는 예수님과 3년 동안 동고동락하면서 예수님의 참된 모습을 보고 한 말이에요. 이 말은 이미 이사야 53장에서 예언되었던 성취를 눈으로 목격하고 그 사실을 기록한 거예요. 그러면, 야고보는 누구의 형제입니까? 예수님의 형제예요. 최소한 예수님과 30년 가까이 삶을 공유하고 지근거리에서 예수님의 품격과 언어를 집적 목격하고 체험한 자에요. 그 야고보가 지금 이 글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쓰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 야고보서 3장 1절로 갈게요. '내 형제들아..' 

이 글을 읽어야 될 첫 번째 독자가 '내 형제들아..'라고 하는 것으로 봐서, 교회 공동체를 향하고 있는 거예요. 대상이 불신자들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말 성경은 '내 형제들아..'로 시작을 하고 있지만, 헬라어 성경을 보면 부정문이 앞에 나와요. '이렇게 돼지 말라 내 형제들아..'라고 시작한단 말이에요. 부정문이 앞에 나올 때는 강력한 강조법인 동시에 어떤 의미가 있냐? 지금 일어나고 있거나, 지금 그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을 당장 그만두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부터 하는 말은 사실상? 지금 첫 번째 청중이요, 독자인 교회 공동체 안에서 발생하고 있는 어떤 일을 말하는 거예요. 어떤 일일까? 계속해서 1절입니다. '..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여러분 여기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어요. 언어 문제에서 제일 경계로 삼아야 할 대상이 누구냐? '말씀을 가르치는 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 당연하지요? 많이 맡았으니 책임을 많이 겪는 것도 정상이에요. 그러니까 삼가 더욱 조심해야 해요.

사도 바울이 후배 디모데에게 유언 같은 글 속에 남겼던 유명한 말씀이 있지요?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여기서 '옳게 분별한다'는 것은? 로마시대의 전쟁 때 쓰던 토목공사용 언어예요. 길을 내 되 바로 내라는 거예요. '오르도토메오' 그 길을 바로 못 내고, 이상하게 내면 그 길을 따라 걷던 모든 이들이 다 위험을 겪거나 죽어요. 길 내는 사람은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무한대의 책임을 가진 이가 말씀을 가르치는 선생인 거예요.

그들도 당연히 경계하고, 주의해야겠지만.. 이 당시에는 여러분 직분이 모호했어요. 오늘날처럼 명확한 직분이 없었어요. 사도들 혹은 개인적으로 가르침을 받았던 이들이 말씀을 가르치다 보니 이런 현상이 자연스럽게 일어났어요. 성도님 중에 '내 생각에는 아닌 거 같은데? 내가 경험한 거랑 좀 다른데?' 가르치는 이들을 폄훼하거나, 깎아내리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해요. 그런데 이들이 거기서 가르치는 자들에 대해 공격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적인 모임에서 자꾸 주관적인 깨달은 이야기를 자꾸 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면 교회 안에 어떤 일이 벌어지냐 하면, 가르침의 이중적인 혼선이 벌어져요. 그러면 둘 중 하나예요. 목사를 갈던지 자기가 떠나든지. 교회 안에서 성경에 근거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만은 같아야 해요. 이 부분에 대한 혼선이 일어나서는 안 돼요. 그러다 보니까, 지금 야고보 사도가 이 글을 쓰는 첫 번째 독자의 공동체, 교회에서 혼란과 위기가 발생한 거예요. 와해의 위험에 있었어요. 이게 전부 말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어요. 그래서 이것을 강력하게 경고를 하는데..

더 나아가서 인류의 첫 번째 타락의 증거가 뭘까요? 언어에서부터 에요. 창세기 3:12,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아담이 범죄하고 나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질문 앞에 타락한 심성을 가지고 꺼내놓은 자기표현이에요. 두 가지를 이야기하죠? "너 왜 그랬냐?"라고 하니까, 아담이 "나와 함께 하신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내게 주었다." 이것은 사실 여자에게 죄를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 뭐라 하죠? '하나님이 주셔서..' 진짜 아담 속내의 타깃은 누구예요? 하나님에 대한 책임 전가예요. 이것이 인류의 죄. 이중적인 죄가 벌어지죠. 아내에게 책임을 전가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거예요. 아담이.. 

여러분 원래 아담이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하와를 처음 보았을 때의 반응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보다 아내를 한 몸으로 고백할 수 있는 표현이 또 있을까요?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이야기는 뭐죠?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한 여자 그가, 그 여자가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 책임을 떠 넘깁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남자를 만드실 때에는 고린도전서 16: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전부 여성들도 남자처럼 터프해지라는 건가요? 아니지요. 이것은 히브리 사람들의 개념을 이해해야 해요. 고린도전서 속에서 나타난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분파, 분열의 문제였어요. 그 상태를 사도 바울이 보면서 "너희가 틀렸다." 말하지 않고, "어리구나!". 여러분 어리다의 반대가 뭐예요? 성숙이에요. 히브리 사람들은 성숙하다는 걸? 남자답다고 해요. 생물학적인 남자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당시의 여자는 수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온전한 성장과 성숙의 개념을 총 집합한 개념이 '남자다워졌다.'라고 하는 거예요. 남자만 인구 계수를 할 때 남자만을 세었어요. 이 말은 성숙해지라 그 말이에요. 

그러면 그 성숙의 가장 대표적인 모양으로 이 땅에 오신 둘째 아담이 있죠? 그리스도. 그래서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놀랍게도 인간의 거짓과 모함과 불평, 부당함 앞에서 그들을 욕하지 않고 책임을 전부 움켜쥐고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저들을 용서해 달라."라고 그리스도로써 온전한 성숙의 문제를 보여주셨어요. 둘째 아담은 어떻게 했냐? 책임을 졌어요. 책임을 질만해서 진 게 아니에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런데 첫째 아담은 그 책임을 떠 넘겼어요. 하나님에게.. 이게 전부 뭘로 시작해서 뭘로 완성이 되죠? 언어의 타락으로 시작해서, 언어의 승리로 완성이 됩니다. 잠잠히 그 입을 열지 아니하며 십자가 위의 마지막 자리에서조차 용서해 달라는 사랑으로 품어내며 승리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언어 문제는?  단순히 인간의 인격의 문제라든지, 품성의 문제정도의 가벼운 주제가 아닙니다. 

 

 

 

 

보통 젊은 부부가 유학을 가면, 남편이 공부를 하지요. 여자들은 대체적으로 가정과 남편을 위해서 자기 꿈을 접어요. 충분히 공부할 수 있는 실력이 있지만 둘 다 공부하기에는 버거우니까 남자들을 공부를 시켜요. 장래 희망을 위해서.. 그러면 보통 남편들은 와이프 장학금으로 공부해요. 어린 자매들이 다리가 퉁퉁 붓도록 토스트를 굽고, 더듬거리는 영어로 토스트를 팔아요. 그리고 새벽같이 일어나서 접시 닦이를 하고.. 언어가 잘 안 되면 그런 것 밖에 할 게 없어요. 그렇게 가정을 책임져서 남편이 학위를 따지요. 귀국을 했습니다. 대기업에 취직도 하고 먹고살만해지니까 마음이 풀어지는 거예요. 부부 싸움이 일어났어요. 실제 있었던 일이에요. 부부 싸움을 안 한다는 건 거짓말이에요. 최수종 하희라나 가능할까? 그쪽은 조금 비정상이에요. ^^ 정상적인 부부라면 부부 싸움을 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도 금도가 있어요.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고요. 그만 형제가 아내한테 뭐라 했냐? "너 같은 건 이제 필요 없어." 정말 잔인한 말이지요. 여기서 여자는 영혼이 빠져나가는 경험을 하는 거예요. 존재의 자리. 이제는 너무 무의미하더라는 거예요. 결국 그 끝이 불행하게 되었어요. 말 한마디로 한 자매의 일상이 황폐화시킨 거예요.

말이 이렇게 무서워요. 말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파괴력이 있고, 영향력이 있어요. 그래서 말이 갖는 방향성이 굉장히 중요해요. 이것을 야고보 사도가 두 가지로 설명을 해요. 야고보서 3:3,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EBS 다큐프라임 '가축' 동영상 참고. 어느 학자가 이 본문 때문에 말을 연구한 리포트가 있더라고요. 방금 본 영상을 보면..

이 사람이 말의 재갈을 만지면서 말 앞에 서 있나요? 옆에 서 있나요? 재갈을 물릴 때는 앞에 서면 위험하데요. 앞에 서면 말의 입이 열리면서 악력이 무시무시하데요. 손가락이 절단 날 정도로..  그리고 말이 앞 발을 들어서 사람의 가슴이나 등짝을 내리찍으면 으스러진다고 해요. 그러니까, 절대 앞에 서면 안 되고 저렇게 옆에 서야 하는데.. 말의 이는 앞 뉘와 어금 니 사이에 공간이 있는데 그 공간을 치극이라고 해요. 그 공간에다가 재갈을 물리는 거예요. 그 공간이 있기 때문에 음식을 먹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줄을 귀의 뒤 쪽으로 해서 재갈을 물린 곳에 연결을 하는데 두 가지를 조심해야 한다고 해요. 너무  꽉! 조이면 옆 면이 쓸리고, 헐어서 말들이 괴롭다는 거예요. 너무 헐겁게 메도 재갈 하고 말머리가 따로 논다는 거예요. 이게 따로 놀아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는 거지요. 

말은 어느 방향으로 뛰냐 하면, 자기 고개가 돌아간 방향으로 달리는 습성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결국 말에다가 재갈을 물리는 것도 그 고개 방향을 사람이 달릴 수 있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위해서 재갈을 물리는 거예요. 그런데 말의 신체 부위 중에서 제일 강력한 파워가 나오는 부위가 어디일 것 같습니까? 보통 다리라고 오해를 합니다. 그게 아니라, 목이라고 해요. 말 목을 한번 보세요. 목의 힘은, 말 전체의 몸무게를 떠 받칠 정도의 강력한 힘을 갖고 있데요. 그런데 그 목이 고개 방향에 따라서.. 즉, 말머리의 입에 물린 재갈에 따라서 마음대로 방향을 튼다는 거예요. 그 어마어마한 크기의 말이 그 간단한 재갈에 연결된 고삐를 쥔 사람이 튼 방향에 따라서 달려간다는 거예요. 이거는 첫째, 제어 능력과 방향성 때문이에요. 그게 언어가 갖는 위력이에요.

 

두 번째, 배의 키를 보세요. 어느 배든지 저런 키가 다 있어요. 저 키를 돌리는 방향에 따라서 배 방향이 어떤 크기이든지 상관없이 이 크기의 방향에 따라서 항해가 가능해지는 거예요. 선장의 원하는 목적지 대로.. 이게 전부 언어에서 온다는 거예요. 언어의 위력이 그렇게 무서운 거예요. 야고보서 3:5,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오래전에 등산 객이 버리고 담배 불씨 하나가 태백산 준령을 다 태웠어요. 그래서 거의 한 달 탄 적이 있어요. 수 십 년 수 백 년 자란 나무들이 순식간에 재가 되어 버렸어요. 캘리포니아 같은 데는 산불이 한번 나면 끄지를 못해요. 워낙 산불 규모가 크니까 한 달 동안 타는 거예요. 이후에 발화지점에 가서 조사를 해보면 바람에 나뭇가지들이 부딪혀서 스파크가 일어나면서 산불이 되기도 하는 거예요. 날씨가 건조하다 보니까.. 작은 것에 불과한데.. 마치 혀처럼 그 파괴력은 어마무시합니다. 이 말이 갖는 파괴력이에요. 우리 주변에 보면, 결국 그 말이 다 지금 무너졌어요. 글자도 다 무너졌어요. 여러분 중학생이 주고받는 짧은 문자와 단어들은 거의 암호 해독 수준이에요. 무슨 말인지 몰라요. 

저는 이쯤 해서 한 가지 제안한 것이 있어요. 이것은 단순히 교회의 문제만이 아니라 국가의 문제이기도 하고, 직장 공동체의 문제이기도 하고, 가정의 문제이기도 해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한 번 여쭤볼게요. 이런 말의 실수가 역경일 때 많이 일어날 것 같으세요? 순탄할 때 만이 일어날 것 같습니까? 순탄할 때 많이 일어나요. 그리고 먼 사람보다는 익숙한 사람에게 많이 일어나요. 여러분 배우자나 친한 사이의 사람과의 말의 패턴을 가만히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제가 우리 삼일교회에 6년 전에 부임을 해보니까 자꾸 디스를 하더라고요. 저를 디스 하는 건 아닌데, 자기네들끼리 언어로 디스를 하더라고요. 여러분 이거 버리셔야 해요. 사적인 자리이건, 공개적인 자리이건 누군가를 폄하하고, 디스 하는 것은 마귀적 스타일이에요. 이걸 버려야 해요. 우리는 하나님의 포에마, 창작품, 하나님의 걸작품이에요. 우리를 창조하신 후에 보시기에 그냥 좋았다가 아니에요. 심히 좋았던 사람들이 옆에 앉아 있는 분들이에요. 그런데 왜 거기다 대고 디스를 합니까? 이거 버려야 해요. 공동체를 은연중에 가치 없는 자해형이에요. 이거 꼭 결심하셔야 해요!

게다가 젊은 부부들은 신혼 생활에서부터 서로에게 언어를 품격 있게 갖는 훈련을 해야 해요. "너 같은 거 필요 없어!" 인격 살인 수준의 언어예요. 이런 일이 쉬운 사람에게 일어난다고요. 익숙한 사람에게 일어나요. 우리에게 과연 쉬운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엄마들의 자녀들에 대한 악담에 가까운 욕설. 여러분, 출애굽기에 보면 무서운 얘기가 하나 있어요. 그 땅을 하나님이 주셨으니 너희가 들어가기만 하면 약속을 따라 너희가 반드시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만 들어갔어요. 나머지 열명은 안 됩니다. 못 합니다. 못 들어갑니다. 그 말대로 되었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하나님께서 내 귀에 들린 대로.. 뭘 들었다는 건가요? 언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시행하리라.' 우리의 그런 성격적이지 않은 품격 떨어지는 모든 언어를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말은, 리스닝하고 계시다는 게 아니라 카운트하고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이 언어의 문제가 단순히 인격의 문제를 넘어서서 그리스도인이면.. 진리의 말씀으로 탄생된 거듭난 존재라면.. 반드시 이것이 나와야 하는 열매라는 것을 강조하는 거예요. 이것은 반대로 결론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경고하고 겁주기 위한 제안이 아니고, 그만큼 언어라는 것은? 영향력이 있고 방향성이 어떠냐에 따라서 선한 영향력을 줄 수도 있고 산을 태울 수 있는 파괴력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을 살려내는 도구로 삼으라는 긍정적인 차원에서의 권고를 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의 언어는? 우리의 언어는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까? 그리스도라는 생명에 뿌리를 내려야 해요. 그러면, 당연히 거기서 거듭난 생명들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안에서 세상을 살려내고 인간을 따뜻하게 만들어내는 승리의 언어. 이것은 단순히 긍정적인 언어 수준의 정도가 아니라.. 내가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가? 야고보서 3: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사탄의 세계라는 말이에요. 방향을 잘못 잡은 혀는 사탄의 세계라. 헬라어도 '게헨나'. 히브리어로 '흰 놈의 골짜기' 거기서는 꺼지지 않는 불이 하루 종일 피올라요. 거기에 들어갈 것을 성경 기자가 경고하고 있어요. 오늘 우리의 언어가 또 한 주간 속에서도 말씀이라는 거울 앞에서 생명의 뿌리를 둔, 세상을 살려내는 언어인가? 세상을 파괴하고, 자기 조차 게헨나 쪽으로 끌고 가는 언어인가를 돌아보는 진지한 이 한주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정결한 마음 주시옵소서.'

 

오늘 주시는 말씀처럼 그리스도인의 가장 건강한 표지는 언어입니다. 언어는 시작이고 끝입니다. 살리는 언어로 살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생명에 뿌리 두고, 세상을 치유하는 언어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함께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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