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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story

[책] 성경과 팬데믹 I 하나님, 우리의 유일한 위로와 피난처 - 김지찬 -

by №1★↑♥ 2021. 3. 4.

성경과 팬더믹I하나님, 우리의 유일한 위로와 피난처

 

서론 '코로나19 팬데믹과 한국교회'

코로나19 전염병의 대유행

2020년 코로나 19 팬데믹으로 인해 겪고 있는 한국교회의 모습은 이전에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입니다. 일제 강압 시대와 한국 전쟁, 기근 가운데서도 교회 문을 닫지 않았던 한국 교회는 코로나19로 인해 때론 자발적으로, 때론 당국의 행정조치로 예배를 대면으로드리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를 경험하면서 당혹해하고 충격을 받고 있습니다....

 

 

 

카뮈의 소설 '페스트'의 인기와 오해

이런 코로나19 팬데믹 상에서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의 1974년 소설인 '페스트'가 갑자기 서점에서 많이 팔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코로나 19 팬데믹이 만들어대는 다양한 정치 재앙과 사회 재앙의 현상을 경험하면서 이 소설을 다시 읽고 싶어졌으 것입니다...

그런데 카뮈의 '페스트'를 통해 오늘날 코로나 19 팬데믹에 적용하는 사람들의 견해에는 일종의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페스트에 등장하는 파늘루 신부의 견해를 오늘날 교회의 견해와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카뮈가 '페스트'라는 소설에 등장시킨 파늘루 신부의 묘사는 정통 교회의 전염병 대처 방식이나 주류 견해와는 맞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뮈의 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신부의 설교와 정통 교회의 메시지를 일치시킵니다. 파늘루 신부는 로마가톨릭 사제이므로 개신교와 상관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둘 다 같은 기독교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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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파늘루 신부의 페스트에 대한 견해는 무엇일까요?

'오랑'이란 도시에 페스트가 창궐하자 파늘루 신부는 페스트는 하나님이 보낸 재앙이며, 오랑 시의 사람들은 이 재앙을 받아 마땅하다고 지적합니다. 재앙의 이유는 오랑 시 사람들이 저지른 죄 때문인데, 하나님을 자주 찾아보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죄라고 질타하니다. 고통은 죄로 오염된 인간으르 정화시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한다고 주장하면서 역병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회개의 기회로 알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침묵하며 죽음마저 받아들이라고 설교합니다. 

 

"여러 형제들, 여러분은 불행을 겪고 계십니다. 여러 형제들, 여러분은 그 불행을 겪어 마땅합니다. ...애굽 왕은 하느님의 영원한 뜻을 거역하였는지라 페스트가 그를 굴복시켰습니다. 태초부터 신의 재앙은 오만한 자들과 눈먼 자들과 그 발아래 꿇어 앉혔스니다. 이 점을 생각하시고 무릎을 꿇으시고... 너무나 오랫동안 이 세상은 악과 타협해왔습니다... 그렇습ㄴ다. 반성할 때가 온 것입니다."

 

 

 

 

 

  파늘루 신부의 설교를 들은 의사 리유는 집단적 징벌의 개념은 너무나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라고 느낍니다.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정황을 통해 현실을 잉해하는 의사 라유는 이는 단순한 위안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페스트의 원인에 대한 하나님의 진단은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문제의 해결책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의사 리유의 이런 해석은 정통 주류 교회의 전염병에 대한 대처를 약간은 극단적으로 해석한 결과입니다. 실제로 파늘루 신부의 태도는 충분히 성경적이지 않고, 정통 주류 교회의 견해를 대변하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카뮈를 언급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파늘루 신부의 견해가 정통 주류 교회의 전통적 해석이라고 주장합니다. 최근에 언론을 보면 카뮈를 언급하는 통속적 해석자들이 한 둘이 아닌데 마치 파늘루 신부의 견해가 정통 주류 교회의 해석인 것처럼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루터나 칼빈이나 베자 같은 종교개혁자들이 살던 시대에도 흑사병이라는 팬데믹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 때에도 흑사병은 하나님이 보낸 형벌이니까 피신하지 말고 당해야 한다며 주로 회개를 외치는 설교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극소수의 비주류 설교자들이었습니다. 루터나 칼빈이나 베자 같은 종교개혁자들은 이런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루터는 "우리는 치명적인 전염병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가?"라는 공개 서신에서 흑사병이 하나님이 보내신 형벌이라고 해도 우리의 죄에 대한 징계로 보내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시험하기 위해 보낸 테스트'라고 가르쳤습니다. 루터는 흑사병이 창궐한 도시 한복판에서 피신하지 않고 환자들을 영적으로 위로하는 목회 사역을 감당했지만, 전염병을 하나님의 형벌로 여기고 자가 격리하지 않은 채 형벌을 그냥 감당하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루터는 공개 서신에서 흑사병을 형벌로 받아들이고 회개하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회개란 단어를 세 번 사용하였는데 흑사병이 창궐할 때 이웃을 저버린 자가 회개하지 않으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지적할 때 한번, 나머지 두 번은 죽기 전에 회개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면서 예배와 성찬에 참석할 것을 권고할 때 두번 사용한 것이 전부입니다.루터흑사병의 팬데믹 앞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 것인지, 어떻게 이웃을 섬기며 살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었을 뿐 회개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성경도 전염병의 원인데 대한 진단보다는 문제 해결책에 더 관심을 가집니다. 루터도 마찬가지로 흑사병의 원인을 진단하기보다는 흑사병의 시대에 어떻게 죽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이것은 다른 종교개혁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파늘루 신부의 견해를 정통 주류 교회의 전통적 해석이라고 오해합니다. 이것은 교정되어야 할 심각한 오해입니다. 

 

  한편 카뮈는 물론 그의 '페스트'를 읽은 많은 독자들은 의사 베르나르 리유가 가장 종교적인 사람이라고 봅니다. 페스트와의 싸움에서 매일같이 환자와 씨름하는 고통 가운데서 왜 자신이 나서야 하는지 고뇌하면서 답을 멀리서 찾지 않고 일상성 속에서 찾았다는 것입니다. 가까운 공장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기계톱 소리와 일상의 노동 가운데 구원이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페스트에 맞서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이다."라고 말한 데 진정한 종교성이 있다고 봅니다. 카뮈는 의사 리유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합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인정해야 할 것이면 명백하게 인정해, 드디어 쓸데없는 두려움의 그림자를 쫓아버린 다음 적정한 대책을 세우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페스트가 멎을 것이다... 저 매일매일의 노동, 바로 거기에 확신이 담겨 있는 것이었다. 그 나머지는 무의미한 실오라기와 동작에 얽매여 있을 뿐이다. 거기서 멎을 수 없는 일이었다. 중요한 것은 저마다 자기가 맡은 직책을 충실히 수행해 나가는 일이었다."

 

  그러나 정통 주류 교회는 카뮈의 통속적 해석자들이 생각하는 것 만큼 그렇게 괴물스럽지 않습니다. "페스트 시대의 종교는 여느 때의 종교일 수 없다."고 카뮈가 말했다면서 일부 현대인들이 함부로 교회에 대해 말하지만, 페스트 시대를 수 없이 겪어낸 정통 주류 교회는 이런 비난을 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일부 극단적인 비주류 교회나 사이비 종파들이 그런 비난을 받을 만한 말과 행동을 한 것은 부인하기 어렵지만, 이런 소수의 그룹을 정통 주류 교회 전체와 동일시하는 것은 특수한 경우에만 참인 것을 일반적인 경우에도 참이라고 가정하는 오류, 즉 '급한 일반화의 오류'입니다.

  어찌되었든 카뮈의 '페스트'는 겉으로 전염병의 유행을 다루고 있지만, 실제로는 사회악의 팬데믹을 다룬다는 점에서 그렇게 쉽게 해석해서는 안 되는 소설입니다. 실제로 파늘루 신부는 말만 하고 페스트의 도시 오랑을 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페스트가 창구러한 병원을 지키며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도롭니다. 페스트에 걸려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믿음대로 의사를 부르지 않고 죽어갔습니다. 파늘루 신부는 "우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해야 할지 모르니다."라고 고백합니다.

 

  페스트에 걸려 죽어가는 어린아이를 놓고 신부와 의사는 의미심장한 대화를 나눕니다.

"의사: 이 애는 적어도 아무 죄가 없습니다. 당신도 그것을 알고 계실 거에요. 

 신부: 정말 우리 힘에는 도가 넘치는 일이니 반항심도 생길 만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의사: 나는 사랑잉라는 것에 대해서 달리 생각하고 있어요. 어린애들 마저도 주리를 틀도록 창조해놓은 세상이라면

        나는죽어도 거부하겠습니다...

        우리는 신성 모독이나 기도를 초월해서, 우리를 한데 묶어주고 있는 그 무엇을 위해서 함께 일하고 있어요. 

 신부: 그럼요. 당신도 역시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일하고 계시거든요.

 의사: 인간의 구원이란 나에게는 너무나 거창한 말입니다. 나는 그렇게까지 원대한 포부는 갖지 않습니다. 

         내게 관심이 잇는 것은 인간의 건강입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건강이지요."

 

  겉으로 보면 신부와 의사는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신부는 초월적 관심을 대표하는 반면에 의사는 내재적 관점을 대표합니다. 신부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해야 할지 모른다면서 환자들을 영적으로 돌보는 일에 헌신합니다. 의사 리유는 페스트의 팬데믹 안에서 인간 존재의 근원적 부조리를 경험하면서 초월적 관점으로 사태를 보지 않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간적 자원을 동원하여 병과 까웁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초월적 관점과 내재적 관점 중에 하나를 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초월적 관점과 내재적 관점의 조화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세계보건기구가 정의한 건강, 즉 "질병이나 병약함이 없는 것만이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완전히 안녕한 상태"를 누릴 수 있습니다. 딸다서 카뮈뿐 아니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마치 의사 리유의 태도만이 최선이라고 보는 것은 적절하지도, 지혜롭지도 않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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