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11:11-12,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01. 월요일, 풍선 불기를 멈추라 I 막 11장 11-18절
무화과 저주 사건
일요일,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화려하고 웅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주님은 사람들의 환호를 뒤로 하고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며 우셨습니다(눅 20:41). 그곳은 더 이상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예루살렘 성을 나와 인근 베다니로 가신 이유입니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 예루살렘으로 향하셨습니다. 예수님 일행은 베다니에서 아침을 먹지 못한 채 나오셨습니다. 그러나 잎사귀가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발견합니다.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막 11:13) '무엇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무엇이 없는 무화과나무'
막 11: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우리가 이 사건을 무심코 지나칠 수 없는 이유는, '무화가의 때가 아님이라'는 기록 때문입니다. 그것을 주님이 몰랐던 것입니까? F.F Bruce의 <The Hard Saying of Jesus>란 책에 의하면, 보통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무화과 열매를 일 년에 세 번 수확하는데, 6월, 8월 그리고 12월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열매룰 구한 시기는 약 4월 초순 정도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무화과가 열리는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원래 무화과는 아니지만, 열매가 열리기 6주 전 즈음 잎사귀가 무성하게 된 후에 작은 열매가 열리는데, 이것을 '라크쉬'라고 부릅니다. 나그네들이 주로 그 열매를 따먹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관심을 끌었던 그 나무는 잎사귀가 있는 나무.. 여기에서 '잎사귀가 있는'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에쿠샨 휠라'인데요. 그대로 번역하면, '잎을 가진(having leaves)'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잎이 무성하다'입니다. 그런데 그다음에 나오는 말씀이 문제입니다. '..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유월절 이전 3월 말 경에는 아직 잎이랄 것이 없습니다. 그때는 가지가 연해지고 '잎들이 막 돋는 때' 예요. 다른 무화과나무들은 가지가 막 연해지고 잎이 막 돋아나고 있는 때인데, 오직 예외적으로 이 무화과나무만이 잎이 무성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주목을 끌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아직 대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무화과나무는 그 특성상 잎사귀가 있으면 이미 열매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무화과나무의 아주 독특성입니다. 그러기에 비록 무화과 철이 아니라 하더라도 잎이 무성했다면, 무화가가 있다고 짐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문제는 그 나무가 잎만 무성했지 과일이 없었다는 데에 있어요. 14절입니다.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예수님은 열매를 얻을 수 없었기에 저주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저주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분명히 무화과나무가 잘못한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풍성한 잎사귀와 모습 때문에 누군가 오해항 무화과가 열린 것처럼 보인 것에 대해 주님은 문제를 삼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애꿎은 무화과나무가 본보기가 된 것입니다. 어떤 메시지입니까?
이어 나오는 15-19절을 보시면 소우 성전 청결 사건이 나옵니다. 그리고 20절부터 다시 이 무화과나무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구조적으로 보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 이야기가 성전청결 이야기를 샌드위치처럼 싸고 있어요.. 왜, 마가복음은 이 성전청결의 이야기를..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이유가 성전청결 사건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상징적 분노입니다. 여하튼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예수님의 상징적인 분노는 무엇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예루살렘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무엇이 있는 것처럼 포장한' 바리새인, 제사장, 서기관 등을 향하신 것이었습니다.
무엇이 있는 것처럼
'무엇이 있는 것처럼' 이같이 부풀리는 오해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만든 '무엇이 있는 것처럼'의 도구는 성전이었습니다. 성전을 기막히게 지어 사람들을 미혹한 것입니다. 그것이 헤롯이 성전을 지은 이유였습니다. 마카비 혁명으로 세워진 하스모니안 왕조가 무너지자 로마는 정통 유대인이 아닌 이두메(에돔) 족속 출신인 헤롯을 왕으로 세웁니다.. 처음부터 자신의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던 헤롯이 했던 여러 일들 중에 대표적인 것이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지은 것입니다. 무려 1천 명의 제사장과 2만 명이 동원된 대 역사였습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제사장들이 함께 참여했다는 점입니다. 그들 역시 건물의 크기와 과시하는 것에 동의했던 것입니다. 헤롯의 의도와 목적은 간과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지어진 성전의 대리석 하나의 높이가 평균 90-120 센티미터나 되었는데, 제자들의 반응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 위용이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막 13:1 새 번역, '예수께서 성전을 떠나가실 때에, 제자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돌입니까! 얼마나 굉장한 건물들입니까!"'이 같은 반응은 성전에 쓰인 어떤 돌 하나의 길이가 무려 12미터이며 무게가 100톤이나 되는 것이 있었다고 전승으로 전해지는 그 돌을 보고 한 말인지도 모릅니다. 여하튼 주님의 제자들까지 감탄할만한 엄청난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거기에 거하실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성공한 것입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기도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바꿨습니다. 결국 그곳은 하나님이 거할 수 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저주가 그것을 말합니다. 막 1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헤롯의 성전은 그 지은 동기부터 순수하지 않았지만, 제자들의 반응에서 보듯이 성전 건물의 위용만으로 하나님이 거하실 것 같은 착각에 빠뜨린 것입니다. 오늘날 성전의 위기도 거기에 있습니다.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과 내부 시설을 가지고 신앙을 말하려는 태도입니다. 하나님과 영적 교제인 기도와 삶을 통하여 신앙을 고백하고 증언하지 않고 말입니다.
돌아가신 고 옥한흠 목사님께서 한국교회의 '세 가지가 비어있다' 삼허현상을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허수(虛數)입니다. 그것은 숫자를 부풀리는 것입니다. 둘째는 허세(虛勢)입니다. 허세란 실속은 없으면서도 있는 척하는 것이니다. 교회는 더욱더 화려해가고 건물은 커져 가지만 실제 모든 성도들의 삶은 점점 빈곤해져 가고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허상(虛像)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 아니고 자신의 야망을 신앙으로 포장하여 살아가고 있는 한국교회의 모습은 아닌지.. 허수(虛數), 허세(虛勢), 허상(虛像) 이 세 가지가 한국교회 그리고 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까?
더 큰 문제는 다른 사람들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마더 속게 된다는 점이니다. 예를 들어 자신과 비교도 되지 않는 황소를 흉내 내며 바람을 집어넣다가 배가 터져 죽은 이솝우화 <개구리와 황소> 이야기처럼 될 가능성이 열립니다. 자신을 잃는 것입니다. 심지어 영혼마저 과장되어 터질 수 있습니다. 잠언 기자는 이것을 엄중히 경고하였습니다. 잠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왜 교만은 패망에 이르는 것입니까? 거기서 헛된 영광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 치명적인 원죄의 시각도 자신을 부풀리는 것으로 상징될 수 있는 뱀의 유혹이었습니다.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말도 안 되는 속삭임에 넘어간 것입니다. 자신을 부풀리는 것의 결과입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적인 파괴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사탄의 유래로 인용되기도 하는 구절인, 하나님의 바벨론 심판을 결정하신 이사야의 기록은 이같이 이해를 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사 13:12-15,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맡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끝은 없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부풀리는 오류에 빠지기 시작하면 끝없이 계속됩니다. 터질 때까지, 상상할 수 없는 존재가 될 때까지 말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터져야 결국 끝난다는 것입니다.
끝나기 전에
이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그 늪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외형적 과시의 문제를 언급하셨습니다. 더구나 그 지적의 방향이 정확하게 자신들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 가르침이 옳았음에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놓칠 수 없었습니다. 기득권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터질 때까지, 상상할 수 없는 존재가 될 때까지 부풀려집니다. 결국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합니다. 막 11: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 일러라' 이 엄청난 위험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은 무리하게 죄 없는 무화과나무를 예로 드신 것입니다.
제 힘을 믿고 마음을 당당하게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부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스스로를 귀하게 보고 높이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존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스스로를 뽐내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만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언제나 스스로를 남보다 낫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월감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자부심과 자존심이 있어야 하고 때로는 자만심과 우월감도 필요할지 모릅니다. 문제는 이런 것들이 지나쳐서, 내게 자신감과 자부심과 자존심이 있는 만큼 남들에게도 자신감과 자부심 자존심이 있는데, 남을 무시하는 일이 벌어지면 공동체 구성원 사이에 갈등이 생겨나고 마침내는 그 공동체가 깨져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묵상 퍼포먼스
터지기 일보 직전까지 불다가 풍성이 빵빵해진 상태에서 멈춥니다. 이같이 멈추는 것이 옳습니다. 안 그러면 터집니다. 이처럼 신앙은 멈추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직시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멈추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원래로 돌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바로 힘을 빼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바람을 다 빼고 난 후의 풍성은 쭈글쭈글해져서 무엇인가 잃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풍선은 이제 터질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진실이니다. 이것이 생명입니다. 이렇게 살아도 됩니다. 이것을 잠언 기자는 겸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겸손이 곧 존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풀린 풍선이 존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교정해야 할 인식의 오류 중의 하나입니다.
신앙도 여백이 필요합니다. 신앙의 여백은 내가 다 나서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다릴 줄 아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것을 허락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내 손을 떠난 이 빈 공간은 바로 하나님이 전적으로 일하시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공간을 인정하고 기다리다며 바라보는 것. 이런 '신앙의 여백'이 필요합니다. 잠 18:12,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우리가 존귀하게 되는 것은 바람을 불어넣어 크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존귀하게 하실 때입니다. 사실 우리는 지금 이대로 존귀한 존재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묵상 행동
자신을 과장하고 부풀렸던 것들을 교정하십시오. 가능하면 지우십시오. 할 수만 있다면 사과하십시오. 자동차 바퀴가 사막, 모래에 빠져 꼼짝달싹 못하게 될 때 벗어나는 방법이 있다. 타이어의 바람을 살짝 빼내고서 가속 페달을 밟으면 쉽게 빠져나올 수 있다. 경제위기도 욕심의 바람을 조금씩 빼면 벗어날 수 있다. 자신의 사치와 향락만 생각하고 빡빡하게 살면 자기뿐만 아니라 나라의 살림도 어려워진다. 나누고 베풀어야 다 함께 살 수 있다.
어떤 농부는 콩을 심을 때 한 알은 하늘의 새를 위해, 또 한 알은 땅속의 벌레를 위해, 나머지 한 알은 사람이 먹기 위해 심는다고 합니다. 새싹도 나무도, 사람의 세포도 나뉘어야 생명과 성장이 있다. 나뉠 줄 모르면 썩고 정체한다. 경제위기보다 더 무서운 것은 내 안의 욕심의 바람이 가득 차 나눌 줄 모르는 데 있다. 이제 바람을 빼고 가진 것을 조금씩 나누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나눔이라는 것은 참 역설적인 것이다. 남에게 많이 나눠줄수록 자신도 많이 가질 수 있다. 사실 뭐든 풍요롭다 보면 남한테 많이 줄 수는 있지, 하지만 많이 나눠주다 보면 생기는 게 또 풍요로움이다. 이것은 단순히 돈 얘기가 아니다. 네가 살아가는 동안 무슨 일에서나 느낄 수 있는 일입니다. 나누면 줄지 않고 더 많아집니다. 바닥이 나지 않고 더 채워집니다. 그것이 나눔의 역설이며 나눔의 신비입니다. 게다가 보너스까지 얻게 됩니다. 넘치는 감사와 기쁨, 마음의 행복과 평화, 풍요로움과 따뜻함, 주변과의 관계 회복 등등등,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아디아베네의 모노바즈 왕은 나라에 흉년이 들자 자신의 창고를 열어 가난하고 주린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모든 재물을 팔아 어려운 백성들에게 베풀었다. 그가 아낌없이 나누는 것을 알게 된 그의 형제들이 안타까운 마음과 답답한 심정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네의 조상들이 많은 재물을 모았고 자네가 그 재물 위에 또 다른 재물을 잘 보탰는데 이제는 조상과 자네의 재산을 모두 흩어버리는구먼.." 그 말을 들은 모노바즈 왕은 당당하게 답했다. "나의 조상은 땅에 재물을 쌓았지만 나는 하늘에 재물을 쌓았고, 나의 조상은 사람의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 쌓았지만 나는 사람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쌓았다. 나의 조상은 이윤이 없는 곳에 맡겼지만 나는 이윤이 있는 곳에 맡겼으며 나의 조상은 사라질 땅을 위하여 쌓았지만 나는 장차 올 나라를 위하여 보화를 쌓았다."
그는 하나님이 갚아주시고 칭찬할 진정한 곳이 어디인지를 알고 자신의 재물을 쌓았던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땅에 자신을 위한 재물을 쌓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고 권하신다.
2020-04-06 서부교회 고난주간 온라인 저녁기도회 첫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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