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
03. 망중한 I 누가복음 21 37-38절
사탄의 인간 연구
< 순전한 기독교>의 저자 C.S루이스가 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악마학교의 교장이었던 '스크루테이프(Screwtape)'가 영국에 파견된 제자 악마 '웜우드(Wormwood)'에게 젊은 지식인을 무신론자에게 머물게 하는 방법을 31통의 편지에 써서 보내는 것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책의 서문에서 루이스는 악마에 대해 생각할 때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오류 두 가지를 지적했습니다. 하나는 악마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악마의 존재를 믿되 불건전하게 지나친 관심을 쏟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루이스의 책에서 사탄이 인간을 연구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사탄처럼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합니다. 누가복음 22:3,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누가복음은 이 같은 유다의 행동을 사탄에게 사로잡힌 행동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사탄이 역사하는 순간은 무궁무진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과신해서 안 되는 이유입니다. 유대에게 돈은 사탄이 들어가 살기 좋은 환경이었고,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에게는 허세 혹은 교만이었습니다.
어제만이 아니라, 오늘도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중보 역할을 하던 대제사장들과 성경 말씀을 풀고 해석하는 서기관들이 계속해서 예수를 죽이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성경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를 무너뜨릴 수 있는 구절을 찾으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죽이려는 연구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요일은 고난주간 동안 눈에 띌만한 사건이 없었던 하루이지만, 태풍의 눈에 들어선 것과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조용하였지만, 음모는 진행되어 있었고 배신은 꿈틀대고 있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압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역시 아름다운 수요일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비록 짧은 기록이지만, 그 내용이 참 아름답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 험난하고 위험스러운 세상을 이기며 살 수 있는지를 배우게 되는 부분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37-38을 다시 보세요. '37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38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
예수님이 죽음을 앞두고 압박감을 이기는 방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본문 말씀에서 드러난 것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라톤 결승점까지 포기하지 않고 달려가 결승점을 지났을 때 모든 진이 빠져 주저앉는 그런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아름다움은 이처럼 마지막까지 최선의 경주를 다하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위기를 만났을 때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상심을 유지하고 매일을 살아갈 수 있는 것, 죽음의 순간까지 원래 모습을 잃어버리지 않고, 호들갑을 떨지 않고 설 수 있는 것, 그런 모습이 중요합니다.
영국의 웨슬리 목사님에게 하나 여인이 질문하기를 '오늘 밤에 예수님이 오셔서 세상에 종말이 온다면,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겠습니까?' 이 질문에 웨슬리가 뭐라고 대답을 했을까요? "오늘 밤에 종말이 온다 할지라도, 나는 약속을 지킬 것이고, 계획된 대로 할 것이고, 약속대로 심방할 것이고, 친한 친구와 저녁을 먹을 것이며, 형제들과 만나 사랑의 교제를 할 것이고, 나는 내 경건의 규칙대로 밤 10시에 잠에 들 것이고, 그다음 날 아침에 천국에 영광 중에 들어갈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망중한
수요일을 생각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두 번째는 감람원에서 하신 예수님의 '쉼'입니다. 감람원은 주님이 목숨을 걸고 기도하셨던 겟세마네 동산을 말합니다. 거기서 주님은 하나님과 깊은 만남과 교제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감람원은 주님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였던 것입니다.
불란서의 철학자이면서 에세지 작가이신 '피에로 쌍소'란 사람이 쓴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라는 책입니다. 저자는 그 책에서 우리에게 아침마다 떠오르는 햇살을 바라보는 감동을 아느냐고 묻습니다. 저자는 우리에게 저녁마다 어두움을 맞이하는 행복을 아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저자는 연못의 어두운 물과 밤이 뒤섞일 때 그것을 느긋하게 들여다보면서 조금씩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내는 밤의 얼굴을 최근에 목격해 본 적이 있느냐고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그는 현대 속도문화의 가장 큰 비극이 있다면, '안식의 상실'이라고 지적합니다. 반대로 "현대문화의 구원이 있다면, 안식을 회복하는 데 있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안식의 필요성과 의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 가운데는 "안식, 휴가"하면, 팔자 좋은 소리 한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나에게 무슨 안식의 여유가 있겠느냐고, 그런데 안식이라는 것은 단순히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요, 마음의 문제입니다. 오랜 시간을 가져야만 안식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랜 시간을 가져도 안식하지 못할 수가 있고, 짤막한 시간을 가져도 그 질적인 시간 속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안식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안식의 정체는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무엇을 얻으시는지에 대한 의문이 풀립니다. 한 마디로 주님은 '쉼'을 얻으셨던 것입니다. 계속 나아갈 수 있었던 힘의 근원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장 35절입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얼마나 바쁘고 피곤한 하루였는지요?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 이튿날 새벽 오히려 미명에 일어나 기도하신 것입니다. 전날 너무나 바쁘셨기 때문에 그 이튿날은 늦게까지 안식을 취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셨다는 말입니다. 전날의 바쁨과 피곤을 오히려 기도로 극복하신 것입니다. 이토록 바쁜 하루를 지내고 나서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님은 일어나 기도하시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에 있어서 기도는 무엇이었을까요? 만약 기도를 의무로 생각했다면 이렇게 의무를 수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있어서 기도는 특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예수님에게 있어서 기도는 안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기도하시면서 쉬시기도 하시고, 기도하면서 새로운 힘을 얻고 기도하면서 지나간 하루의 스트레스를 극복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예수님도 간성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도 스트레스를 우리처럼 경험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스트레스가 뭡니까? 요즘 우리가 스트레스 현대인들을 가장 괴롭히는 병이 이 스트레스입니다. 누군가가 스트레스를 정의하기를 스트레스는 감당하기 어려운 자극에 의해서 내 몸과 마음의 균형이 깨진 상태다. 아주 잘 정의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내 몸이 내 마음을 따르지 못해요. 그래서 나는 허우적거립니다. 이것이 스트레스요. 그래서 예수님이 스트레스를 어떻게 극복하느냐?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기도가 스트레스의 처방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는 기도하시면서 쉬신 것입니다. 자, 여러분 아무리 피곤해도 즐거운 일하면 그 피곤이 극복이 됩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기도는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이었기에.. 어떤 분에게 있어서 예배는 아주 즐거운 일일 수 있습니다. 예배드리고 나면 새 힘이 나요? 안 나요? 예배에 오면 쉼이 있죠. 그래서 어떤 분은 벌써 깊은 잠에 들어가셨습니다. 예배는 안식일 수가 있습니다. 기도도 안식일 수 있습니다. 자,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은 새 힘을 얻은 거예요. 새 힘을 얻으신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지나간 날 바쁘게 보냈어요. 바쁘게 보낸 그 피곤한 하루 잠자리에 들면서 이런 생각을 했을 거예요. 내일 아침 일어나 아버지 하고 교제해야지.
그분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의 바쁨을 핑계하지 않고 그분에게 나아갈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작은 문제나 큰 문제나 우리를 도우시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시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문제는 그분이 바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바쁨을 핑계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실 바쁘기로 따진다면 하나님보다 더 바쁘신 분이 있을까요?) 부디 바쁨이라는 장애를 극복하고 주께 기도로 나아오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실 기도의 깊이는 노동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깊이가 깊어지면 깊어져갈수록 기도는 어느 순간 '쉼'으로 바뀝니다. 하나님이 만지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 쉼은 새로운 힘으로 변화됩니다. 극심한 고민 가운데서 기도를 시작하였던 예수님이 매우 담대함으로 죽음을 향하여 걸어갈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안에서의 쉼은 새로운 힘을 얻게 하는 통로인 것입니다.
수요일, 고난주간으로 분류된 일주일 중 상대적으로 눈에 띄는 사역이 보이지 않던 날에, 주님은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사람들을 하루종일 가르치시고, 밤에는 감람원에서 깊이 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일종의 행복한 잔치, 말씀 사경회와 이어지는 개인적인 안식이었습니다. "가르치면서, 그리고 기도하면서 쉼을 얻다." 주님이 고난 앞에서 하신 방법입니다. 사실 크리스천이 잃어버린 영성의 내용입니다.
'A.W 토져'라는 신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열심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범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과오는 하나님의 일에 너무 바빠 하나님과의 교제를 게을리하는 일이다." 예컨대 교회의 사역을 열심히 하는 것은 아주 좋은 일에요. 그런데 그 일이 너무 바빠서 하나님과 이 교제의 시간이 없다. 그렇다면 우린 매우 중요한 것을 망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토져 박사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등한히 여기는 사람들은 조만간 하나님의 일에 대한 의욕조차 잃어버리고 시험에 들을 가능성이 많다." 만약 하나님과의 교제를 게을리한다면 그 교제에서 얻어지는 충만함 그 안식 그 마음속의 평안 이것 없이는 하나님의 일을 계속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곧 우리는 그 일의 의욕을 잃어버릴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를 위하여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도에 필요한 일정한 시간과 장소를 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어느 대 어느 곳에서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집중적인 대면을 위하여 다른 사람들이나 부적절한 사건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 조용한 시간과 조용한 장소를 확보하는 것은 기도를 실현하는 첫걸음입니다. 그래야 한 번으로 끝나는 충동적인 기도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선배들은 이런 시간을 가르쳐 Q.T(Quit Time), 경건의 시간, 더 오랜 옛날에는 Morning Watch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에는 새벽기도의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할 수 만 있다면 모든 일이 시작되기 전 새벽에 교회에 나와 기도로 하나님을 만나고 하루를 시작한다면 더없이 좋을 것입니다. 직장 출근이나 신체적인 조건으로 불가능하다면 오전 조금 늦게 집이나 직장에서 경건의 시간을 가지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잘 아는 사업가는 아침 일찍 교통에 방해받지 않는 이른 시간에 출근하여 아침 운동을 하고 직원들이 도착하기 전 자신의 사무실에서 매일 Q.T를 한다고 합니다. 아마 예수님도 유사한 계획으로 기도를 준비하고 실천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수요일의 기도
기도하는 것이 쉼이고, 말씀이 음식이며 예배가 쾌락입니다. 다른 방법으로 쉼을 찾지 않게 하옵소서. 시대가 어두워질수록 열심히 공부하게 하시고 열심히 기도하게 하옵소서. 성경을 펼 때 주님의 음성이 들리게 하시고, 책을 읽을 때 어디에나 계신 주님의 지혜를 깨닫게 하옵소서. 홀로 당신 앞에 서서 침묵하며 기도할 때 당신을 만나게 하시고, 그 영적인 깊이에 들어서게 하옵소서. 오로지 주님으로 기대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묵상행동
오늘은 말씀을 읽고 경건 서적을 읽는 것으로 치열하게 하루를 사시고 저녁에는 예배하러 교회로 가십시오. 그리고 말씀과 기도 가운데 임하시는 쉼을 누리십시오.
2020-04-10 서부교회 고난주간 온라인 저녁기도회 셋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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