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방을 멈추어야 하는 이유
- 와싱톤중앙교회 류응렬 목사 -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그토록 많이 강조하지만 우리가 잘 지키지 못하는 것 중 하나가 험담하고, 비방하는 일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일을 가지고 심각하게 말씀하십니다. "비난하지 말라, 비판하지 말라, 네가 하는 그 비판 그대로 내가 너를 심판하리라." 엄청나게 무서운 말씀을 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하는 것이 험담과 비난인 것 같습니다.
인터넷상에서 인신공격, 허위 사실 유포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격을 당하고 있습니까? 때로는 유명인들 가운데 우울증, 공황장애, 심지어 자살로 목숨을 끊는 일들도 일어나곤 합니다. '찌라시, 위험한 소문'이라는 영화를 기억하십니까? 무명의 한 여배우를 키우기 위해서 한 감독이 참으로 궂은일 마다하지 아니하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제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유명배우가 되기 시작하는 그즈음에 거대한 스캔들이 하나 터지게 됩니다. 근거도 없고, 실체도 없는 찌라시 한 줄 때문에 결국에는 여배우가 목숨을 잃게 되는 안타까운 스토리입니다. 찌라시 하나로 말미암아 사람이 죽는 현상. 매니저는 그 소문의 유포자를 찾기 위해서 끝까지 찾기 위해서 달려가는 내용의 영화입니다. 악플과 잘못된 소문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생명이 사라지고 있는 이런 시대, 비방이라는 것은 이 만큼 위험하고도 무서운 일입니다.
인터넷상뿐만이 아닙니다. 20-40대 사람들을 대상으로 남들을 험담하고 뒷담화에 대해 연구한 조사가 있습니다. 34%나 되는 사람이 하루에 삼분 정도 남에 대한 비방 험담을 한다고 합니다. 26% 정도는 하루에 한 시간 정도 뒷 담화 하는데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심지어 한두 시간이나 하는 사람도 18%나 된다고 합니다. 하루에 80%나 많은 사람이 뒷담화로 다른 사람에 대한 비방과 험담하는 일로 시간을 보낸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비난의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은 내가 하는 비방을 상대방이 모를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역사가 지나온 시간을 지나다 보면 다 알려지기 마련입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라는 말은 그냥 생겨난 말이 아닌 거죠.
악의적인 말이라는 것은? 한 사람에게 씻을 수 없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도 하고 결국에는 한 영혼을 무너트리기도 합니다. 사탄이 하는 일이 바로 이런 일입니다. 말을 통해서 사람을 이간질시키고, 결국에는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전략이 사탄이 말을 통해서 하는 전략입니다. 잠언 20:19,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 slandering, 중상모략하는 사람, 비방하는 사람은 사귀지 말라고 합니다. 탈무드에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합니다. 살인을 하는 것은, 한 사람을 죽이는 일이지만, 험담하는 일은 세 사람을 죽이는 일이다. 험담하는 사람, 그리고 듣고도 반대하지 아니하고 가만히 듣고 있는 사람, 그리고 험담의 대상이 되는 사람. 모두를 무너트리고 죽이는 것이라는 거예요. 이런 사람을 향해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비난하지 말라. 험담하지 말라. 그대로 너도 심판을 받게 되리라."
제가 성도 여러분들께 꼭 그렇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인 다운 품격과 언어의 품격을 가진 사람들. 상대방을 해하고, 상대방을 험담하는 데 시간을 보낸다면 우리 주님을 위한 예의도 아니지만 그 짧은 생을 보낼 순 없는 거지요. 입을 열어 마음껏 말하지 못할 시간도, 그를 만나지 못할 시간도 다가올 수 있는데 아직 말할 수 있을 때에 험담이 아니라 축복하고 그를 만날 수 있는 건강과 눈이 있을 때 그를 세워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해야 할 삶일 것입니다.
제가 목회자들에게 하는 부탁이 늘 있습니다. 불평과 원망이 나올 때 우리가 늘 해야 하는 대상은 두 분입니다. 주님께로 가져가서 주님께 긍휼을 달라고 기도할 것이고, 다른 하나를 꼭 해야 한다면..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중한 마음으로 그에게 찾아가서 진실한 마음으로 그에게 들려주는 것만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성경의 원리입니다. 비방한다는 것. 사도 바울도 이를 아주 심각하게 말씀합니다. 디모데서후서 3: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마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말세가 될 때, 세상의 끝이 다가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세상 사람들이 자기 사랑하고, 돈 사랑하고, 자랑, 교만, 비방하고, 부모 거역, 감사하지 아니하고, 거룩하지 아니하며.. 비방하고 교만하고.. 교만과 자기 자랑과 비방은 같이 가는 거예요. 사도 바울처럼 비방을 많이 들은 사람이 있을까요? 율법을 무너트리고, 성전을 훼파하는 사람이라고.. 심지어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냐?"라고, 돈을 사랑한다고 참 근거 없는 많은 비난, 중상모략을 당했던 사람이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드렸는데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도 험담을 당했다면 이것이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보편사'라고 할 것입니다.
이런 공동체를 향해서 오늘 야고보가 들려주는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비방하지 말라." 오늘 우리가 비방하지 말아야 할 세 가지 부탁을 이야기합니다.
1. 우리는 한 형제이기 때문이다.
한 형제이기 때문에 비방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 이 말씀을 믿지 않는 이들을 향해서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공동체가 된 형제, 자매 자들을 향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야고보서 4:11,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자라. 율법을 비방하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카탈랄레오'라는 단어입니다. 그냥 뒷담화 정도가 아니라, 그를 향해 중상하고 모략하고, 아주 심각하게 말하는 것을 두고 '카탈랄레오'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비방하지 말라'의 '말라'를 헬라어로 '매'라는 단어를 사용을 했는데, 이 단어는 아주 강한 명령을 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절대로 비방하지 말라.' 왜 그럴까요? 우리가 형제이기 때문에 자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가 되었다면, 일절 비방이 아니라 사랑하고 섬기는 것만이 우리가 해야 될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사탄의 다른 이름 중 하나가 마귀입니다. 마귀라는 단어가 본래 '디아볼로스'입니다. 본래의 의미가 '중상모략하는 사람, 훼방하는 사람, 이간질하는 사람'이에요. 마귀가 하는 일이 그런 거예요. 우리가 험담하고 비방할 때 바로 하나님의 영이 아니라 마귀의 영에 지배당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강력하게 말을 하고 있을까요? 우리에게는 세상과 다른 가치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형제요, 자매이기 때문에 비방하지 마라. 세상과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세상은 이런 거리들을 발견하면 차갑게 비난하고, 사람을 끌어내리지만 그러나 가족이라면 그를 품고, 나의 아픔으로 여기며 세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친구가 발견되는 곳은? 어려운 시기죠 전쟁터에서 진짜 친구가 확인이 되는 것처럼 당시 야고보 시대 때는 이런 친구가 절실할 때였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도 하고, 목베임을 당해 죽기도 하고, 고난의 시절에 누가 서로를 세울 수 있겠습니까? 한 형제자매답게 그리스도의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라는 말씀입니다. 비방할 만한 일이 없어서가 아닌 거죠. 다 연약하고 부족하기 때문에 사랑이 사람을 세우기 때문입니다.
고사 성어 중에 '관포지교'라는 말이 있지요. 관중이와 포숙이의 이야기입니다. 어릴 때부터 같이 자라난 관중과 포숙. 관중과 포숙이 함께 장사를 했을 때 관중은 늘 많은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사람들이 은근이 포숙에게 이를 알렸을 때 늘 포숙이가 했던 말입니다. "관중은 나보다 더 집안이 가난하기 때문에 좀 더 많이 가져가는 게 당연한 일이다." 관중이 벼슬이나 세 번이 올라갔지만 모두 실패했을 때 사람들이 그를 "무능하다."라고 할 때 포숙은 "자네는 참 좋은 재주를 가지고 있지만 시대를 잘 못 만남으로 말미암아 그랬을 뿐이라네." 관중이 전쟁에 세 번이나 나가서 모두 도망쳐 왔을 때 사람들은 그를 "비겁자"라고 비난할 때 포숙이 했던 말입니다. "관중이는 늙은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에 어머니를 생각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노라." 이를 두고 관중이 했던 말입니다. '生我者父母, 知我者鮑叔也(생아자부모, 지아자포숙야)' - 나를 낳아주신 분은 부모님이나, 나를 알아주는 사람은 포숙이라. 이런 사람이 아름다운 세상,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 내는 겁니다. 차가운 세상이 아니라, 따스한 마음으로 사람을 품고 세울 때 그로 말미암아 사람이 변화되고 온전한 사람으로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의 이 사랑, 서로를 향해 품는 따스한 배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그의 상황에서 이해해 주는 넓은 마음을 가짐으로 말마임아 이 땅에서 천국을 이루어가기를 바랍니다.
2. 비방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방한다는 것은 단순히 사람을 뒷담화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 율법을 어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야고보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야고보서 4:1,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형제를 비난하는 것이 율법을 비방하는 것이라고까지 강하게 이야기하는 이유가 뭘까요? 형제를 비방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 율법을 것으로 하나님께 적대적인 일이라는 겁니다. 성경에 보면, 그만큼 하나님이 비방하는 일에 대해서 강력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19:16, 너는 네 백성 중에 돌아다니며 사람을 비방하지 말며
비방하는 사람의 특징을 잘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이야기를 퍼트리고 조그마한 말 하나에서 눈덩이처럼 번져가는 것을 우리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시편의 말씀에서도 똑같은 부탁이 있습니다. 시편 101:5, 자기의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로다
그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하고, 내가 용납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얼마나 하나님께서 비방하는 사람을 증오하시고, 경계하시는 지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잠언서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잠언 10:18, 미움을 감추는 자는 거짓된 입술을 가진 자요 중상하는 자는 미련한 자이니라
중상하는 자는 미련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성경에서 미련하다는 것은? 배움이 적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내 마음속에 성령이 없는 사람. 한 마디로 말해서 구원에서 떨어진 사람을 두고 미련한 자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구약뿐만이 아니지요. 바울이 특히나 비방하는 일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말씀을 해요. 로마서 말씀을 보면, 비방하는 사람에게 하는 무서운 경고가 있어요. 그들은 그 마음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 비방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 주의 영이 우리 마음속에 있으면 비방할 수가 없는 거지요. 주님이 그토록 원수 된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 그 영이 우리 속에 머문다면 비방하는 마음이 편치는 않겠지요? 그리고 말세가 되어서 수근수근하는 사람. 상대방을 헐뜯는 사람. 하나님이 이들을 미워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성경은 비난을 하지 말라고 구약, 신약, 바울, 야고보, 예수님.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을까요? 그만큼 인간 세상에 비난하는 일이 많다는 것이지요. 사도마저도 비방을 들었는데 그러지 말라는 겁니다. 너희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형제로, 자매로 부름 받은 너희는 천국 공동체 품격답게 살아내라는 것입니다. 비방하지 말라.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 연약한 존재죠. 실수할 수 있고, 허물이 많은 존재라는 것. 그러기에 누구에게나 다 발견되는 부족함을 가지고 비난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위해서 기도하고, 세워주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지금 하려는 말씀이 뭘까요? 형제자매를 비난하지 않는 것이 단순한 예의범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율법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잘못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고 있을까요? 율법을 주신 이유가 뭘까요? 우리가 다 부족하기 때문에 율법 앞에서 나의 허물을 바라보고,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내 죄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 율법의 기능입니다. 우리를 주님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 초등교사라고 이야기하고 있지요? 그 율법으로 내 자신을 봐야 하는데, 율법의 날카로운 눈으로 상대방을 해하고, 상대방을 폄하하는 것. 율법을 대항하는 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야고보가 우리에게 이것을 묻고 있어요. 자네는 하나님을 정말 믿는가? 살아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면 비방하지 말라.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일이라.
3. 비방은 하나님을 대신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우리가 비방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비방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리에 내가 앉겠다는 거예요. 비판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야고보서 4:11-12, 11 네가 만일 율법을 파난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12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판단하는 일은, 하나님 만이 하시는 일인데 네가 누구이기에 판단하는가? '판단하다'는 헬라어는 '크리노'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크리노'라는 단어는 단순한 평가 정도가 아니라, 한 사람을 끌어내리고 한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재판하는 일, 판단하는 일에 대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 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하나님이 하시는 일. 사사기를 영어로 'judge'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재판을 사사를 세우고, 하나님을 대신해서 재판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솔로몬이 무엇을 구했습니까? "네가 원하는 것을 구하라.", "저에게 지혜를 주셔서 백성들을 잘 재판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소서." 내가 왕이지만 마음껏 재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재판을 내가 대신하기에 하나님의 지혜를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민수기 12장에 보면, 이 재판과 판단의 문제를 두고 중요한 스토리가 나옵니다. 모세가 구스 여인을 아내로 취했을 때 미리암이 그를 비방할 때의 일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모세가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셨다고 나와 있어요.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냐? "너희가 어찌하여 나의 종 모세를 비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미리암은 그 즉시로 나병에 걸립니다.
죄의 본질이란 무엇인가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사람이 대신하려는 것. 하나님의 자리에 서서 내가 재판하고, 판단하려는 것. 그것이 인간이 처음부터 했던 범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산 중앙에 있는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지요? 인간은 자기 자신대로 판단합니다. 먹어도 될 것이라고.. 먹은 다음에 일어난 일이 무엇이죠? 바로 판단하는 일입니다. "당신이 주신 저 여자 때문에 내가 먹었노라."라고 여자를 판단하고, 하나님을 비방하고.. 형이 동생을 때려죽이고도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냐? 고 거짓말하면서 판단하고.. 인류 역사가 죄악의 물결로 말미암아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이 인간 역사의 흐름입니다. 이를 향해서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부탁하노니 핀단 하지 말라.' 그것은, 하나님 만이 하시는 일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비판하지 말아야 할 이유들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형제요, 자매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율법을 어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중요한 것.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라고, 하나님만이 판단하는 것이라고... 그것을 무시할 때 나오는 반응이 판단이라는 무서운 병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런 일을 만날 일이 왜 없겠습니까? 비방하는 것을 참기가 도무지 어려운 일이 왜 없겠습니까? 그럴 때에 우리 신앙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성경에 많은 말씀을 하고 있지만 중요한 세 가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남의 허물을 볼 때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보라. '타산지석'이라는 말이 있죠? 다른 사람의 허물을 바라볼 때 내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6:41,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형제 눈 속에 있는 티.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이러한 티가 있기 마련입니다. 형제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어찌하여 네 눈 속의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가? 설교를 들으면서도 "이 설교는 저 집사님이 들어야 되는데.."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 계시지 않습니까?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오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는 사람뿐 아니라 설교자들도 마찬 가지예요. 때로는 저 사람이 이 설교를 들어야 하는데.. 제가 설교를 가르칠 때 "누구 들으라는 마음으로 절대로 설교하지 마세요. 우리가 설교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대언자의 역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할 뿐입니다. 상대방의 과오를 바라볼 때 내 자신의 과오로 바라보는 것. 내가 바르게 설 때 그것이 상대방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되는 겁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섬겼던 교회의 담임 목사님께서 주일학교 전도사님으로 섬겨달라고 부탁을 해요. 저는 주일학교는 문턱도 못 가본 사람이기 때문에 도저히 섬길 자신이 없지만 목사님이 말씀하시니 순종하는 마음으로 "예"라고 말씀을 드리고 두 달을 주시면 제가 기도 많이 하고 섬기겠습니다. 그랬더니 "두 주 기도하고 섬기라"라고 해요. 제가 두 가지 기도제목이 있었습니다. "주님, 제가 어린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고, 어린아이의 언어와 말을 주세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설교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십시오." 더 중요한 기도는, "주님 제 마음속에 부담이 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성가대 지휘도 하고, 주일학교를 섬겼습니다. 저와 함께 열심을 내어서 섬겼던 한 분이 있는데, 제 눈에는 그분이 자신의 영광을 다 취하는 것처럼 교만하고 부담스럽게 판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저분 때문에 마음이 불편한데, 저분을 옮겨 주시던지 완전한 변화가 일어나야 제가 마음껏 목회를 할 수 있겠습니다." 매일 밤 11시에 교회에 올라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나흘 째 되는 날, 주님이 찾아오셔서 저희에게 십자가가 무엇인지, 예수의 피가 무엇인지 원수도 주님이 품고 하나님의 제자로 품으셨는데 어찌 그를 그리 차가운 눈으로 판단하고 있는가?
다음 주 주일이 되어서 그분을 만났는데 얼마나 사랑스럽고, 너무 귀하게 여겨지던지.. 그 사람의 행동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바라보는 제 눈이 달라지니까 전혀 새로운 사람처럼 보이게 된 거예요. 시간이 지나면서 저의 가장 소중한 동역자로 얼마나 아름답게 변화되었는지 모릅니다. 차가운 비판이 아니라, 참고 인내하며 섬겼을 때 진정한 사람의 변화를 보게 되는 겁니다. 허물이 보일 때가 있습니까? 정말 참기 어려울 정도로 비난의 대상이 있습니까? 그때 나를 거울로 여기고 내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가장 올바르게 서게 되면 그 찬란한 빛이 그에게도 전달이 되어서 그로 말미암아 사람이 변화되고 세워지게 되는 겁니다.
두 번째, 우리가 이러한 상황을 만나게 되면 '비판한 잣대로 비판받을 것을 기억하라.' 이 말씀을 성경에서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7:1-2,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2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정말 무서운 말 아닙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비판하시는 데, 내가 하는 비판대로 하나님이 우리를 비판하시리라. 사도 바울도 이 말씀을 굉장히 많이 반복합니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하나님이 똑같이 우리를 판단한다는 사실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나 어떻게 우리 사회에서 그토록 하나님이 말씀하심에도 왜 이렇게 험담과 남이 없을 때 그를 흉보는 일들이 그렇게 많은가? 어떻게 하면 이것을 근절할 수 있는가?를 묵상해 보았어요.
우리 성도님들 이렇게 적용해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우리 속에 다 성령님이 계시고, 우리의 대화 가운데 그 자리에 예수님이 앉아 계신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이야기를 듣고 계신다고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말이 달라질 것입니다. 내 말도 달라질 것이고, 상대방이 때로는 그리스도의 품격 없이 말한다면.. 듣는 우리도 그를 잘 교정해 줄 수 있을 겁니다.
또, 하나 이렇게 적용해 보기 바랍니다. 우리가 판단하는 대로 주님이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시는데 언젠가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 될 날이 오게 될 것인데.. 두루마리 책을 보여주시는 데 내가 몇 월 며칠 누구를 험담했던 사실이 상세하게 기록된 것을 볼 날을 생각하면 우리의 말과 행동은 많이 달라지지 않을까요?
설교를 듣는 이 순간에도 아! 그 집사님이 들어야 되는데!'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면 정말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할 사람은 나 자신입니다. 주님이 너무나 확실하게 부탁하십니다. 비판하지 말라. 그 비판으로 너희도 심판을 받으리라.
세 번째, 비판을 넘어 사랑으로 사람을 세워라. 우리가 비판을 하지 않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사람을 세우는 자세. 우리는 비판으로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따스한 마음, 사랑만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보실 때 차가운 정의감으로 보셨다면 누구 한 사람 살아남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따스한 사랑으로 우리를 보셨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 앞에 자녀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닐까요? 우리가 할 일은 이 사랑을 받았기에 사랑하는 일 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 프란시스 수도사가 있습니다. 수도원에서 함께 금식하는 절기가 있어 일주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는데 한 제자가 조용히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저 수도사가 금식 기간에 규율을 깨트리고 밥을 먹었습니다." 다음날 제자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상을 차리게 했습니다. 보란 듯이 제자들 앞에서 음식을 맛있게 먹습니다. 깜짝 놀란 제자들에게 프랜시스가 주는 교훈입니다. "한 사람은 금식을 어기고 죄를 짓고, 한 사람은 그것을 바라보고 차가운 눈으로 고자질을 하고, 많은 사람은 이 사실을 두고 비방을 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될 금식이 서로를 비방하는 죄악으로 물들었으니 금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일을 바라볼 때 비난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이해하고, 배려함으로 사랑으로 품는다면 그것이 진정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는 일이 될 것입니다.
대학교 때 제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저를 말씀으로 지도하신 분은 선교사님이라 불렀지만.. 세상에서는 외교관직을 가지셨던 분입니다. 외무부에서 근무하시면서 일주일에 1-2번 저를 만나서 일대일로 성경공부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제가 믿음이 없었던 시절이라 때로는 약속 시간에 늦기도 하고, 가지 않기도 하고 주일날 때로는 예배에 불참하기도 하다가 제가 두 번이나 성경공부를 가지 않았습니다. 요즘처럼 전화도 있는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마냥 선교사님이 기다리셨다가 떠나셔야만 했습니다. 제 마음속에 불안한 마음이 왜 없었겠어요?
한 번은 수업을 마치고 교실 문을 나서는데 앞에 보니 선교사님이 기다리고 계시는 거예요. 하루 휴가를 내시고 학교로 심방을 오신 겁니다. 너무 미안한 마음으로 교실 안으로 들어가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선교사님의 첫마디였습니다. "응렬 형제~ 참 보고 싶었어요. 성경공부 합시다." 창세기를 펼치셨어요. 그분의 끝없는 사랑. 그 끝없는 인내, 사람을 향한 그 품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제가 주님을 알게 되었고,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야고보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가슴에 새겨야 될 말씀을 들었습니다. "비판하지 마라. 비방하지 마라." 우리가 비판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오히려 비판을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비난을 당해야 할 사람 아닙니까?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원수 된 우리들.. 죄인 된 우리들의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무너진 우리를 위해서 우리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이죠? 심판받아야 할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그를 조롱하고, 심판할 때에 우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아버지, 부디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주님의 그 눈물의 기도 흘렸던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사랑을 입고 용서를 받아서 주님의 자녀가 된 겁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부탁입니다. 비판하지 마라. 하나님이 듣고 계신다. 우리 모두가 다 연약한 죄인이다. 그럴 상황이 되면 거울삼아 내 자신을 들여다보라. 그래도 도저히 참기 어려운 사람, 참기 어려운 상황을 만나거든 그 문제, 그 사람을 가지고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깊이 나아가 보십니다. 그 십자가가 보일 때 내 자신이 보일 겁니다. 그리고 이런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피 흘리신 예수님이 보이실 겁니다. 그 눈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게 되면 그 사람은 똑같은 사람일지라도 긍휼 한 마음, 품는 마음. 상대를 위해서 기도하는 목자의 심장이 새겨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 야고보가 우리에게 묻습니다. 그대는 오늘 살아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면, 비방하지 말라. 비방을 넘어서 그를 품고 배려하고, 사랑하라.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사랑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낼 때 우리 공동체는 땅 위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주게 될 것이고 우리를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발견할 것이고, 지켜보시는 하나님은 미소를 지으시면서 영광을 받게 되실 겁니다.
일어나시면서 우리의 신앙의 고백을 담은 찬양을 드립니다. '주 안에 우리는 하나입니다. 모습은 달라도 예수님 한 분 만을 바랍니다. 사랑과 선행으로 서로를 격려하며 따스함으로 보듬어 가겠습니다. 주님 우리를 통해 계획하신 일, 우리 입술을 통해 행하실 일, 찬양하게 하신 일. 그 놀라운 일들.. 너를 통해 행하실 일을 기대합니다."
신약도, 구약도, 사도 바울도, 야고보도 모두가 우리에게 반복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특별한 부탁입니다. 비판하지 말라. 비난하지 말라. 험담하지 말라. 다 연약한 죄인이요. 하나님이 듣고 계시고, 그 비판으로 심판당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살아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면 이 믿음을 삶으로 보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 기도하기 원합니다. "주님, 제가 디아볼로스, 마귀가 아니라 성령에 이끌리는 인생, 하나님의 영에 이끌리는 인생이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안타까운 상활, 때로는 비난받을만한 사람을 만날지라도 주님 우리가 오히려 그를 품고 긍휼히 여기며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올려드릴 수 있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긍휼과 인내로 말미암아 사람이 세워지게 하시고, 변화되게 하시고 우리가 천국 공동체 되게 하시고 우리 공동체로 말미암아 우리가 속한 이 사회가 따스한 하나님의 사회가 되기를 소원하며 기도합니다."
"존귀하신 우리 아버지여. 심판받아서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졌고, 멸망받아야 할 저희를 그리스도의 그 큰 사랑,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려 내시고 구원하여 주신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 우리 교회의 사랑하는 성도님들 가운데 모든 비난, 험담을 내려놓고 그를 향해서 우리를 품고 기도하며 긍휼히 여기고, 이 사랑으로 사람을 세우는 천국 공동체가 되게 하옵서. 하나님, 우리 모두가 연약합니다.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로 인하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 피 흘리셨음을 압니다. 우리 속에 주님이 주인 되셨기에 그렇게 살게 하시고 그렇게 형제자매를 대하게 하옵소서. 언젠가 우리가 입을 열어 말할 수 없을 때가 오고, 걷을 수 없고, 눈이 희미하여 보지 못할 때가 오게 될 텐데 아직 말할 수 없고, 걸어 다닐 수 있을 때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그로 말미암아 땅에 디디며 살아감으로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세상을 따스하게 만드는 하늘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 하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그 생명, 하늘의 구원, 그 사랑, 그 긍휼 받은 사람답게
그리스도인이라는 그 이름의 품격에 걸맞게 살아내기를 원하는
주의 모든 백성들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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