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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story/설교문

류응렬 목사 I 야고보서 4장 1-10절 I 하나님과 친밀하십니까? I 믿음 8

by №1★↑♥ 2024. 7. 22.

하나님과 친밀하십니까? 

- 와싱톤중앙교회 류응렬 목사 -

살아있는 믿음. 오늘은 야고보서 말씀으로 8번째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하나님과 가까이 하라. '하나님과 친밀하십니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은 흩어져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 당시 핍박 속에 있었던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쓰여진 말씀입니다. 당시의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핍박을 받고, 생명을 던져야 되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신앙을 위해서 생명을 던지는 그 사람들에게 오늘 말씀의 시작은 참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야고보서 4: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참 믿기 어려운 상황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토록 신앙으로 생명을 걸고 살았던 사람들인데 그들 가운데 다툼이 있고 분쟁이 있었다는 말씀. 어느 교회나 초대교회도 싸움이나 분쟁이 있는 것을 보면, 역시 우리는 타락한 죄인이요.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긍휼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이때 싸움이나 다툼이라는 것은? 군대에서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싸움'이라는 단어는 '필레모이'라는 헬라어 단어를 사용하는 데 거대한 전쟁. 나라 간의 전쟁과 같은 큰 싸움을 말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다툼'이라는 헬라어 단어 '마카이'라는 단어는 '소소하게 일어나는 분쟁'을 말합니다. 싸우는 데는 수많은 이유가 있겠지요. 한 가지 공통점은 내가 옳다는 생각하기 때문에 서로 싸움이 일어날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런 다툼과 싸움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이유를 다른 데서 찾고 있습니다. '너희들 가운데 정욕에서 내가 옳다는 자기 욕심에서 싸움이 나오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싸움, 전쟁 같은 다툼. 때로는 세상보다 더 위험하고 무섭다고들 합니다. 세상에서는 때로 술 한잔을 가지고 마음을 풀기도 하지만 교회 안에서 분쟁이 일어나면 마음이 참 상하고 영적인 위기까지 만나게 됩니다.

어느 교회의 설교 제목을 보니까 '하나님이 막걸리 보다 못하십니까?' 얼마나 우리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는 설교제목입니까? 교회 안에서 싸움이 일어나면 때로는 끝없이 싸울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내가 옳다라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서로 간의 하나님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다가 마음이 상해서 상처로 교회를 떠나기도 하고 정말 아픈 일은 교회를 처음 나왔다가 때로는 연약한 성도들이 그런 싸움 와중에 교회를 떠나기도 하지만 하나님에게서 떠나는 일이 종종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는 길임을 모르고 싸우는 것이 때로는 교회 분쟁의 현주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정욕 때문에 나의 욕심, 자기 의 때문에 싸운다고 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이런 정욕을 가지고 기도를 해도 하나님이 듣지 않는다고 해요. 당연하겠지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으로 서로 섬기고 세우는 일인데 그런 싸움 속에서 기도한 들 어찌 하나님께서 들으시겠습니까? 오늘 이런 분쟁과 싸움 중에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해결책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하나님과 친밀하라. 그리하면 하나님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가까이하시리라. 교회 문제든, 인간의 문제든, 사회의 문제든 모든 세계의 문제든 가장 핵심, 근본 해결책을 오늘 주님이 말씀을 해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깊이 가까이 하라. 하나님을 묵상하고, 하나님의 얼굴빛을 비추어 하나님께 나아가라. 모든 문제의 실마리가 여기에 있고, 진정한 회복과 기쁨의 씨앗이 여기서 발화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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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가까이 하라는 이 말은 우리에게 참 평범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가만히 곱씹어 보면 구약 시대 때는 하나님께 가까이할 수 없었던 시대였습니다. 그 위대했던 모세도 타지 않는 떨기나무 앞,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가까이 오지 마라." 그리고 "신을 벗으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 택한 백성 이스라엘도 시내산 가까이 나오도록 못하게 하나님이 막으셨습니다. 부정한 죄인 가운데 거룩하신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요. 그러나 오늘날 똑같은 죄인 된 우리에게 오늘 야고보가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그 옛날 하나님과의 끊어진 관계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피로 다리를 놓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죄악과 허물을 주님이 다 없이 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그 하나님의 아들 딸로서 가까이하라고 말씀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 우리뿐만 하나님도 우리와 얼마나 가까이하기를 원하시는지 오늘의 말씀을 보면 성령께서 사모할 정도로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이하기를 원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뿐이겠습니까? 인간들 사이에서도 사람들도 가까이하고 싶은 사람이 있기 마련이지요. 사랑하는 사람이란 언제나 가까이 있고 싶은 사람입니다. 때로는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는  유익이 있다고 생각을 할 때에도 가까이하기를 원하는 것이 사람의 삶이지요. 자녀들의 삶을 위해서라면 때로는 무리를 해서라도 좋은 사람과 가까이하려고 좋은 환경과 가까이하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맹모 삼천지교라는 말이 있지요. 맹자의 어머니, 아들을 위해서 세 번이나 이사를 했다는 말. 오늘날은 세 번 이사하는 게 평범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고대 당시에는 한 번 이사한다는 것이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누구를 가까이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누구와 함께 지내는가에 따라서 내 미래가 결정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를 오시는 많은 분들 중에 이사를 하기 전에, 먼저 교회를 정하고 이사를 한다는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은퇴를 하신 목사님이 교회 가까이에 가서 내 삶을 보내고 싶습니다라는 고백을 들을 때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우리 교회에서 얼마 전에 신앙생활 잘하시다가 소천하신 집사님이 계십니다. 주님을 위해서 참 멋지게 사셨던 분입니다. 40년 전에 뉴욕에서 오랫동안 사셨던 분입니다. 이 분이 신앙이 없을 때는 이민 생활 고달프니까 14시간 넘도록 일을 하시다가 밤늦게 들어오시면 맥주 한 캔을 마시고는 창 밖으로 교회 뜰에 던지곤 했어요. 그렇게 꾸준하게 일 년 동안 매일 밤 맥주 캔을 투척을 한 거예요. 성도님들과 목사님 마음이 얼마나 어려웠겠어요? 어느 날 목사님이 작심을 하고 밤에 잠복근무를 하서 맥주캔을 던지는 순간을 포착해서 범인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그에게 내린 벌이 주일날 교회 나와서 성도님들 앞에서 "내가 범인이요."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교회 나와서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만나는.. 교회로 나오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교회를 나오게 되었고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서 정말 멋진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뉴욕의 포리스트 기도원을 십 년 동안 운영하면서 참 많은 사람에게 유익한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3년 동안 많은 탈북자들, 선교사님들을 자신의 집으로 모시면서 고결하게 불태우셨던 분이십니다. 하나님께 가까이하는 것. 심지어 교회 뜰 가까이 있을 때에도 누렸던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한번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갈망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 삶에 매일 누가 제일 가까이에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세상을 가까이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하나님이 친밀한 삶. 우리도 기쁘지만 하나님도 기다리고 있는 삶입니다. 오늘 내 영혼이 얼마나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가? 야고보는 세 가지의 대조 질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이 질문을 통해서 한 번 우리의 신앙생활을, 하나님과의 거리를 점검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세상과 벗 되는가, 하나님과 벗 되는가?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가?'에 대한 첫 질문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벗이 되고 있는가? 내가 세상과 벗이 되고 있는가? 야고보서 4: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니라

참 무서운 말씀이지요. '벗'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필로스'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필로스', '필레오' 많이 들어본 단어지요? 사랑이란 단어입니다. 벗이 된다는 것은? 그를 정말 사랑하고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모든 것을 나누고 기쁨으로 여기는 것이지요. 세상과 벗 된다는 것은,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이 좋아서 세상에 내 모든 것을 던지는 사람. 하나님과 벗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좋아서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고 내 소중한 것을 하나님과 나누고 내 삶을 드리는 것을 가리킬 것입니다. 

오늘 세상과 벗 된 사람은 하나님과 원수 되는 사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어요. 세상과 벗 된 사람을 향하여 영적 간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하나님이 얼마나 많이 말씀하십니까? 택한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것을 두고 영적 간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그것이 하나님과 원수 된 것이라.'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벗이라고 불렀던 참 귀한 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굴까요? 아브라함입니다. 이사야 41:8,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 자손아

'나의 벗, 내 친구' 아브라함의 자손아.. 벗이라는 단어는 그와 함께 대등한 관계일 때 사용할 수 있는 단어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셨길래 벗이라고 하셨을까요? 사실 아브라함의 삶은 하나님의 벗이 될만한 삶이 못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갈대아 우르로 떠난 것은 참 위대한 일이었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지 못하고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었을 때 그는 즉시로 물질이 풍부했던, 양식을 찾아 애굽으로 떠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지 못하여 하갈을 취하여 아들을 낳았던 아브라함. 자신의 목숨을 위해서 아내를 누이라고 두 번이나 속였던 아브라함. 모든 것이 다 부족해서 하나님과 벗이 될 만한 성품과는 거리가 멀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을 다듬으셔서 마침내 믿음의 명장으로 만드십니다. 창세기 22장에 아들을 바치라고 하셨던 말씀. 약속의 대를 이어야 할 아들을 바치라는 믿기 어렵고, 순종하기 어려운 말씀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여 아침 일찍이 길을 떠나갔던 아브라함. 정말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도 바칠만한 진짜 벗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어떤 말씀을 읽다 보니까 흥미로운 묵상을 해 놓은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누가 제일 아프셨을까요? 예수님도 참 고통스러우셨지만 주님의 제자들도 아프고.. 어머니 마리아도 참 가슴 아팠지만 정말 가슴 아픈 분, 당신의 아들을 못 박고 있는 하나님이었어요. 그 하나님의 고통스러운 피 눈물, 아무도 모르는 그 아픔. 그 아픔을 위로해 준 사람이 아브라함이었을 것이다. 왜 그래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벗이었기 때문에.. 아브라함도 자신의 아들을 바쳐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위로할 줄 아는 사람. 하나님도 때로는 우리 모르게 흐르는 눈물이 있을 터인데.. 그 눈물의 깊이를 알고 하나님이 눈물을 닦아 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이 즐겁고 기뻐하실 때 주님과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사람. 이런 벗으로 우리가 주님 앞에서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고, 얼마나 따스하고 감격이 넘치는 삶이 안 되겠습니까? 누가 이렇게 하나님의 벗이 되려고 할까요? 하나님의 벗이라는 것은 찬란한 영광. 하나님의 벗이라는 것 때문에 고결한 가치를 정말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니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짜 벗이 되려고 하는 거지요. 

제가 대학교 1학년 때 예수님을 만났을 때였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온 세상이 똑같이 흘러가지만 주님을 만나고 그날 밤. 주님이 나를 부르신다면 감격 속에 주님 앞에 눈을 뜰 것이고, 다음날을 주님이 허락하신다면 감격 속에 일어나서 오늘도 사명이 있는 줄 알고 잠을 깨었던 날들.. 저는 늘 어두운 과거 때문에 가난했던 삶 때문에 늘 아파하고, 열심을 내어 살아가려고 했는데.. 어느 날 주님이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있었어요.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아도 괜찮다. 너 한 사람 만으로 충분하다." 주님은 저에게 다가오셔서 따스한 친구가 되시고, 진짜 벗이 되어 주셨습니다. 

중국 선교지에서 선교사로 살아갈 때 많은 북한의 친구들, 고아와 함께 보낼 때 였습니다. 때론 위험 속에 고통을 받고, 핍박 속에 살아가고 외로움으로 눈물 흘릴 때에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라는 그 생각을 하게 되면 누구 한 사람 알아주지 않아도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사라지고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내가 너의 벗이다. 내가 너의 친구로 함께 하신다."는 그 말씀 하나로 모든 것을 이기는 힘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벗이 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벗이라면 이토록 감격스럽고 기쁜데 하나님도 우리가 하나님의 진짜 벗이 되기를 얼마나 기다리실까요? 그렇다면, 세상의 벗이란 누구를 말하는 걸까요? 세상을 필로스하는, 세상을 좋아하는 사람. 세상의 쾌락을 좋아하고, 세상의 인정, 세상의 명예, 세상의 상대적인 가치를 좋아하고 따라가는 사람. 이런 사람을 두고 심각하게 말합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사람이라.' 세상과 하나님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을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말하고 싶지요. 주님 우리가 그래도 땅 위에 발을 디디고 살지 않습니까? 땅의 것도 필요한 것을 주님이 알지 않습니까? 주님 당연히 아시지요~ 우상이라는 것은? 머리에 뿔이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보다 조금 더 좋아할 수 있는 것.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하나님보다 다른 무엇이 작용을 한다면 그것이 나의 벗이요, 그것이 우리의 우상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무조건 세상을 거부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우선시하는 삶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중요하게 해야 할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세상과 벗이 되지 않게 도와주세요." 좋은 기도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기도는? "하나님, 제가 하나님과 벗 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얼마나 감격스럽다는 것을 알게 해 주세요. 하나님과 벗 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이라는 거. 감격이 넘치는 설레는 삶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세요. 하늘의 태양빛을 보아야 땅의 화려한 빛에 동요되지 않는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가 천국에 이르게 되면 그 영광스러운 주님, 진짜 우리의 벗 되시는 하나님을 만날 날이 올 것입니다. 땅에서도 빛 되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이 땅에서의 모든 싸움, 모든 다툼을 이겨낼 수 있는 진짜 비밀이라고 말씀합니다. 

 

 

 

 

 

 2. 교만으로 사는가, 겸손으로 사는가?

두번째, 하나님과 가까이하는가? 에 대한 진단 질문입니다. '교만으로 살아가는 가는가? 아니면 겸손으로 살아가는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교만이라는 사실. 인간을 타락시킨 주범이 교만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4:6,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하나님이 그냥 두고 보지 않으신다는 거예요. 겸손한 자에게는 특별한 은혜를 주시는 주님. 이 말씀의 배경이 되는 것은 잠언 3:34,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거만한 자, 교만한 자는 자기 자신이 제일이라고 누가 감히 나를 건드리냐 하지만 거만한 자를 향한 하나님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비웃으시는 하나님' 교만과 거만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5:5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왜 이렇게 성경 전체에서 교만과 겸손을 이토록 강조할까요? 그것이 인간을 타락시킨 주범이요, 인간이 회복되었을 때 나타나는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신자, 하나님 앞에서 참 신자를 바라보게 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서 교만이 주인 노릇하고 있는가? 겸손이 다스리고 있는가? 교만이 근본적으로 죄라는 것은?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내가 주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에게서 나오는 말과 가치와 행동이 다 교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 겸손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 앞에 내 자신을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말 행동 태도 이 모든 것들을 겸손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교만한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이 비웃으신다는 사실 가슴에 새겨야겠지요? 

교만하고 거만한 사람은 세상에 자신 밖에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야고보가 이렇게 겸손과 교만을 말하는 것은 특별합니다. 어쩌면 "내가 예수님의 동생인데.."라고 하면서 가장 교만할 수 있는 사람 아닐까요? 예수님의 제자들은 기껏 예수님과 3년 동안 살았잖아요? 나는 형과 함께 30년을 살았던 사람인데..라고 하면서 자신의 기득권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었겠지요? 하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겸손으로 나아가라.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원하는가? 겸손으로 나아가라. 겸손이라는 것은? 단순한 윤리 도덕이 아니고 창조주 하나님 앞에 내 자신을 발견한 사람. 피조물의 당연히 살아가야 될 모습. 그리스도인의 새로워진 품격이 겸손이란 단어로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교만과 겸손을 이 단어로 표현하고 싶어요. '주인 의식과 주님 의식'  교만이라는 것은? 내가 주인이라는 주인 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 교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겸손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라는 주인의식에서 비롯되는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가끔 교회 생활을 할 때에도 교회는 내가 지켜야 된다. 교회는 우리가 지켜야 된다라고 말하는 분이 계십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친히 세우시고 친히 지켜나가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동체 일원된 몸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사랑으로 겸손으로 잘 섬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잘 섬기다가 이름도 없이 살 때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겁니다.

오늘 교만과 겸손을 이야기 할 때 성경의 대표적인 한 사람이 나옵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이지요? 하나님이 그를 세우셨을 때 그는 참 겸손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왕으로 기름 부음 받을 때 그가 한 말은, "나는 가장 연약한 베냐민 지파사람, 우리 중에서도 가장 연약한 사람입니다. 어찌 저 같은 사람에게 이 일을 행하십니까?" 사실 사울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유력한 베냐민 지파의 사람이고, 그는 키가 크고 훤칠했던 사람. 사람들에게 특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어요. 40세가 되어서 공적으로 왕위에 올랐을 때까지 밭을 갈았던 사람입니다. 왕이 되어서도 사울이 누구이길래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했을 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처형을 할 수도 있었지만 잠잠하게 하나님께 맡겼던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고 왕의 시간이 지나갈 때 그의 마음속에 교만이 싹트기 시작했지요. "다윗은 만만이요 사울은 천천히라"는 말에 자존심이 상하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영적인 경계선을 넘어선 사울, 제사장 만이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예배를 자신이 직접 집도하는 영적인 교만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만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멀어진 비참한 최후였습니다. 진정한 겸손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가까이할 때 일어나는 삶입니다. 하나님 그 눈빛을 사모하고 말씀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숨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 야고보가 오늘 그 부탁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라. 겸손하라. 베드로도 부탁을 합니다. 여러분 이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세요. 시편의 기자도 부탁을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3. 두 마음인가, 성결한 마음인가?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가? 세 번째 진단 질문입니다. '내가 두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가? 아니면 성결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야고보는 오늘 구체적으로 하나님과 가까이하기 위해서 주는 명령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4: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사람. 그리고 성결한 사람에 대해 비유하고 있습니다. 두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하나님도 따르고, 세상도 따라가는 사람. 성결한 사람은 다른 말로 하면 한 마음을 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 마음을 품지 말고, 성결하라는 것은 구약 성경에 참 많이 들려진 메시지입니다.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아 내가 너희로 특별하게 부르셨는데 하나님만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서라. 그러나 그들은 끊임없이 우상을 숭배했고, 하나님도 섬기고 땅 위에서 풍요를 가져다줄 우상을 섬기는 두 마음을 품은 사람들은 영적인 간음자들이라고 소리쳐 외치고 있는 거예요. 

구약에서 이렇게 두 마음을 품고 살았던 인물의 대명사가 있다면 야곱입니다. 언제나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살았던 한 사람. 이런 야곱을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에게 찾아오셔서 얍복강에서 만나주신 하나님. 고통스러운 형 에서와의 문제 다 해결이 되었고, 많은 아내, 많은 자녀를 주시고 거부되게 하신 하나님. 이 정도 고난을 받았다면 이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이 땅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불태우다 가야 하는데 지금 야곱이 머물고 있었던 곳은 세겜이었어요. 하나님과의 약속의 땅 베델이 아니라 세겜에 머물렀던 야곱. 야곱은 그것이 좋았어요. 사람들의 인정과 존경을 받고, 노호를 평안하게 누리고 다 평안한 것 같았어요.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도 아니고.. 하나님도 추구하고 세겜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야곱. 두 마음을 품었던 대명사였습니다. 

이런 야곱에게 하나님이 어느 날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버림을 받은 자녀라면 그냥 세상에 뿌리내리도록 내 버려두셨겠지만 끝까지 찾아오셔서 "야곱아 이제는 베델로 올라가라." 야곱이 처음으로 했던 일이 무엇입니까? 집안사람을 다 불러 모은 다음에 세겜 땅의 문화를 다 버리게 합니다.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몸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 집에 있는 모든 우상을 버리라. 두 마음. 세상에 흩어진 모든 것들을 다 끊어내신 하나님. 우리가 예배해야 될 그 하나님께로 나아가자. 이 순간이 바로 야곱의 거룩한 부흥 운동이 일어난 순간입니다. 그로부터 남은 평생을 주님께 쓰임 받았던 야곱의 삶이었습니다.

 

 

 

 

 

오늘날 싸움이 있는 공동체, 다툼이 있었던 공동체를 향한 야고보의 처방책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가까이하시리라. 하나님과 친밀하라. 거기에 모든 해답이 들어가 있다. 여러분들도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겉으로 드러나는 싸움은 없을지라도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은 없는가? 내 마음속에 뭔가 시기와 싸움 미움이 있는 분 계시지 않나요? 성경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가 살인하는 자라고 끔찍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해결해야 할 부분입니다. 

주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주님을 닮으리라. '뉴러 커플링'이라는 의학적인 용어가 있습니다. 뇌 과학자들의 연구를 보면, 선생님이 학생들을 학교에서 가르칠 때는 선생님에게서 나오는 뇌파가 학생들에게도 똑같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집에서 아이들이 그 주제를 가지고 공부를 다시 하게 되면 선생님에게서 배운 뇌파가 집에서도 똑같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러니 남편과 아내가 닮는다고 하잖아요? 서로를 바라보고 대화를 하다 보면, 똑같은 뇌파를 주고받아서 닮아간다는 것. 스승과 제자가 닮아가고, 부모와 자녀가 닮아간다는 것이 바로 '뉴러 커플링'으로 일어난다는 이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하나님의 그 뇌파가 우리에게도 전달이 된다면 우리에게 하나님의 뇌파가 똑같이 일어난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사람이 될 수가 있겠지요? 저는 이것을 '뉴러 커플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커플링, 디바인 커플링이라고 부르고 싶어요. 신적 일치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제가 이 단어를 깨닫는 순간 제 마음이 얼마나 뜨겁고 설레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주님과 함께 디바인 커플링이 되어야겠다.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품고, 그 말씀을 그대로 간직해야겠다. 그렇게 기뻐하다가 갑자기 이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다고 정말 두려움과 너무나 조심스러운 생각이 들게 되었습니다. 

가끔 우리 성도님들이 하는 말이 "우리 성도님들은 다 목사님을 닮기 마련이지요." 그런 말을 우리가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뇌파와 함께 일주일을 살아낸다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주님 앞에 하나님의 절대 진리의 말씀만 그대로 전하게 도와 주십시오. 사람들이 설교자가 아니라, 디바인 커플링이 되어서 설교자를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닮아가는 성도가 되게 해 주십시오.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야고보서를 통해서 가슴에 새겨야 할 하나님의 구체적인 삶의 실천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이 가까이 하시리라. 하나님과 친밀하라. 한번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누구와 가까이하는가? 좋아하기 때문에 가까이하는 겁니다. 하나님과 가까이하면서 정말 기쁨을 누리고 있는가? 그 깊은 사랑을 누리고 있는가? 그래야 더 가까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과 가까이할 수 없는 존재지요. 예수님 세상에 오셔서 당신의 십자가에 대신 죽어주셨기 때문에 무너진 담을 연결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과 가까이할 수가 있는 겁니다. 예수님과 가까이하는 것이, 하나님과 가까이하는 길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오셔서 말씀해 주시고 찾아오신 주님. 주님의 그 주파수로 당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예수님. 그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 일 때마다 그 마음의 주파수가 우리 마음에 새겨지게 될 것입니다. 찬양할 때 기도할 때, 찬양할 때 그 마음의 주파수가 우리의 마음에 새겨지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더 주님을 사랑하게 될 것이고, 주님을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하나님도 가까이하리라. 땅 위에서는 이 주님을 희미하게 볼 것이지만, 그러나 언젠가 천국에 이르게 될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우리 하나님을 만날 날이 올 것입니다. 

다 같이 일어나셔서 말씀을 간직하며 찬양하기 원합니다. "보서서 나의 주님. 선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 내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립니다. 주님 마음을 내게 주십시오. 나를 향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주님의 마음을 내게 주소서."

'보소서 나의 주님'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인생의 문제, 모든 나라의 문제에 대한 한 가지 근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 주시는데요. 하나님을 가까이하라는 것입니다.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의 벗으로 살기를 좋아하는가? 세상이 좋은가? 내가 주인이 된 내 주인의식, 교만으로 사는가? 주님 의식, 겸손으로 사는가? 내 마음속에 여전히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두 마음을 품고 있는 것 아니면 오직, 예수님 한 분을 향해서 살아가고 있는가? 기도하기 원합니다. "주님 닮기 원합니다. 주님과 디바인 커플링, 신적인 일치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속에는 하늘의 성품이 깃들고 이 삶이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향기가 되게 하시어 다툼과 싸움이 있는 세상에서 하늘의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기도합니다. 

 

 

아버지여, 감히 우리가 하나님 앞에 눈을 뜨고 얼굴을 대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고 말씀하시는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가까이 할 수 없는 죄인이지만..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 지시고, 우리를 종이 아니라 아들이라 딸이라 불러주시니 고맙습니다.
하나님을 더 가까이, 주님을 더 가까이하게 하시고
주님의 그 마음을, 그 마음의 주파수를 그대로 우리의 마음에 선율로 담게 하소서 
그리하여 디바인 커플링, 정말 신적인 하나님과 일치가 되는 이런 하나님의 아름다운 종들이 되게 하소서.
다툼,  싸움 있는 세상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이 아름다운 창조물이 싸움과 다툼으로 병들어 가는 세상, 
우리가 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으로 평화와 하나 됨, 하나님의 복음의 통로 되게 하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은혜,
날마다 새롭게 죄악 가운데서도 일으키시는 성령 하나님의 교통 하심이
오늘 하나님과 가까이, 하나님과 더 가까이 친밀한 관계로
주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기 원하는 주의 사랑하는 백성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까지 함께 있을 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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