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story/설교문

류응렬 목사 I 야고보서 3장 13-18절 I 당신의 지혜의 출처를 확인하라 I 믿음 7

by №1★↑♥ 2024. 7. 8.

류응렬 목사, 야고보서 강해, 야고보서 3장 13-18절, 당신의 지혜의 출처를 확인하라, 믿음 7, 와싱톤중앙장로교회 류응렬 목사, 2022년 10월 2일 와싱톤중앙교회 주일예배

당신의 지혜의 출처를 확인하라

- 와싱톤중앙교회 류응렬 목사 -

오늘은 일곱 번째, 지혜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마다 꼭 하는 기도가 "지혜롭고 총명하게, 건강하게 좋은 신앙 성품의 인격자라 자라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지혜에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위로부터 나는 하늘의 지혜가 있고, 땅에서 나는 사탄이 주는 지혜가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나는 지혜가 아닌 지혜가 어떤 일을 만들어 낼까요? 사람을 때로 파괴시키기도 하고, 자기뿐 아니라 주위도 힘들게 하는 것이 땅 위의 지혜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영문학 영시를 전공했습니다. 박사 과정을 준비하다가 신학 공부를 하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처럼 평생의 삶을 살기 어렵지만, 예수님께서 30살에 공생애를 하셨는데 저도 예수님처럼 3년 동안은 제 삶을 공생애로 드리리라는 결단을 하고, 어떻게 하면 이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선교지로 갈 것인지, 아니면 농촌으로 가서 말씀 섬길 것인지.. 기도하는 중에 신학대학원에 진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격과 기대가 있었는지 모릅니다. 주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주말에는 이 학교 저 학교를 다니면서 전도를 했습니다. 방학이 되면 낙도로, 오지로 전도를 하며 보내다가 2학년쯤 되었을 때에 영적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이 연구하면 할수록 주님을 향한 사랑이 깊어지고 영혼을 향한 목자의 사랑이 더 깊어져야 하는데 책에 책장이 쌓일수록 제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객관적으로 체계적으로 연구는 하는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하나님을 향한 경외가 점점 식어진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대로 제가 계속 신학공부를 해야 하나? 고민스러웠을 때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특별한 방법으로 저에게 인도를 해주셨습니다. 고흐가 쓴 책을 하나 읽게 되었습니다. '영혼의 편지'라는 책입니다. 고흐는 평생토록 무명의 화가로 고통 속에 지냈지요. 그가 살아 생전에 팔았던 작품은 1점뿐이었으니까요. 그럼에도 평생 그림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동생 테오가 도와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흐가 테오에게 쓴 편지가 600통이 넘게 남아 있는데 그 편지글 가운데 나오는 문구가 제 가슴을 떨리게 하였습니다. 

 

 

반 고흐 영혼의 편지 세트

COUPANG

www.coupang.com

 

진정한 화가는 캠버스를 두려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캠버스가 화가를 두려워한다.

 

 

저는 이 문장의 주어를 바꾸었습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신학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신학이 참 신앙인을 두려워할 뿐이다." 제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지식적으로 공부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체계적으로 논리적으로 분석했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의 숨결을 만지고자 하는 마음이 적었기 때문입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후학들에게 하는 후배들에게 늘 하는 부탁이 있습니다. "절대로 지식적으로 공부하지 말라." 아무리 태산 같은 지식을 쌓는다 할지라도 사울 같은 사람이 될 수는 있지만, 바울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수록 하나님을 향한 더 뜨거운 가슴이 있는가? 우리 성도님들이 성경 공부할 때, 읽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바르게 성경을 읽고 있는가? 두 가지를 물어보면 됩니다. 성경을 더 깊이 알수록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마음, 경외하는 마음이 더 깊어지는 가? 하나님을 알 수록 친밀하지만 더 사랑하고 있는가? 두 번 째는 내 마음속에 영혼, 사람을 향한 따스한 마음이 배어 나오고 있는가? 그것이 있다면, 올바르게 성경공부, 신학을 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체계적으로 성경을 공부하고 가르치기는 하지만 그러나 내 마음속에 하늘의 기쁨, 하늘의 따스한 마음이 베어 들지 않는다면 때로는 말씀 때문에 날카로워지고 비판적이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식을 쌓아갈 뿐입니다. 이것이 땅의 지혜와 하늘의 지혜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땅의 지혜는 습득하는 것, 정보를 논리적으로 습득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지혜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주님이 주시는 하늘의 은혜를 맛보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는 그 시작부터가 다릅니다. 잠언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지혜의 시작은 좋은 책, 많은 책이 아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하나님을 참으로 바르게 아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이런 지혜는 출처도 다릅니다. 세상의 지식과 지혜는 책을 통해서 얻을 수 있지만 하늘의 지혜는 위로부터 난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이 되는 것이지요. 야고보서 1장에서의 말씀에서도 '너희가 지혜가 부족하거든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이 지혜를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말씀을 하는 겁니다. 

오늘 야고보는 두 가지 지혜에 대하여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온 지혜가 있고, 땅에서 온 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13절에서 야고보가 묻습니다. 야고보서 3: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당시는 지혜, 소피아를 숭상했던 시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혜를 위해서 앞 다투어 연구를 했고, 많은 사람이 지혜롭다고 생각했던 그 시기에 야고보가 묻습니다. "너희 중에 지혜가 있는 사람, 총명이 있는 사람이 누군가?" 뭘 말하려고 하는 걸까요?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지혜, 지식 체계 많은 사물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 진짜 지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의 지혜는 세상 적인 지식이 아니고 다른 데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오늘 전혀 뜻밖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지혜가 있다면 온유한 마음으로 선행을 통해서 그 지혜를 보이라." 두 가지 말하고 있지요? 온유함으로 선한 행실을 통해서 지혜를 나타내어라. 우리에게는 평범하게 들리는 데 당시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거슬리는 말이었습니다. 

온유라는 말이 우리에게는 좋게 들리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피해야 할 덕목이었어요. 당시 사람들은 힘과 지혜를 숭상했기 때문에 온유한 것, 겸손한 것을 거부했던 시대입니다. 사실 오늘날도 이런 사람들이 참 많이 있지요. 인류가 발전해 오면서 강한 사람, 남들보다 더 뛰어나고 우위에 있는 사람에 의해서 역사가 발전해 왔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야고보가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 표상이 아니겠어요? 마 11:28-29,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 우리에게는 참 아름답게 들리는 말이지만 예수님 시대 때는 온유와 겸손이 좋은 덕목이라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했겠습니까? 메시아라면 거대한 왕국에서 태어나든지.. 거대한 군사력을 가지고 오든지 해야 하는데.. 예수님의 모습은 그들의 생각한 메시아 상과는 전혀 거리가 있었습니다. 예수님 뿐 아니라, 하늘의 지혜를 추구하고 닮아가는 사람들은 이 온유함을 추구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뿐 아니라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도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고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성령이 말하는 가지 열매 중에서도 온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님들 하늘의 지혜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깊이 찾아오셔서 하늘에 속한 지혜를 따스한 마음, 온유와 겸손에 잘 담아서 사람들을 세워내는 지혜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제는 우리 교회에서 새가족 환영회를 가졌습니다. 100명이 넘는 많은 새 가족이 참석을 하시었습니다. 교회에 오시게 된 이유를 다양하게 설명하셨습니다. 우리 자녀들.. 어린아이들을 잘 케어해 주시는 선생님들, 전도사님들 부모님들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어요. 부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를 많이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고마웠습니다. 많은 분들이 가장 많이 사용했던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비교적 큰 교회라 생각해서 왔는데, 너무나 따뜻한 교회였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친절한지.." 제가 그 말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우리 교회의 목회 철학이 한 사람입니다.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세워나가는 것. 새 가족들이 따스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신 성도님들이 참 자랑스럽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정에서도 이런 온유함이 지배하는 가정, 우리가 늘 강조하는 표어 우리 교회로 말미암아 워싱턴 한인 사회가 따스한 사회가 될 수 있도록.. '우리 곁에는 케이시피시가 있다." 한 사회가 행복해질 때까지.. 진정한 행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 아니겠어요? 이런 그리스도의 통로로 온유함과 겸손으로 나아간다면.. 우리 교회에서 뿐 아니라 이런 따스함이 이 지역으로 선포될 것이고.. 거기에 정말 하늘의 지혜를 담고 살아가는 사람의 일상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지요. 하늘의 지혜는 구체적인 삶을 통해서 나타나야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지혜를 말할 때 약간 사변적인 부분을 생각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삶을 통해서 보이라.

온유함을 어떻게 보여야 할 까요? '선한 행실을 통해 보이라.' 야고보가 계속 반복해서 강조해서 하는 말입니다. 삶을 통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혜와 믿음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찬송을 많이 쓴 시인이자 작가 '윌리엄 카우퍼'의 시구 하나가 있습니다. "지혜와 선함은 쌍둥이로 태어난다. 하나의 마음이 두 자매를 모두 품어야 한다. 이 둘은 떼어놓고 보아서는 안 된다."

지혜와 선함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꿰뚫은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회기의 시작이 오늘입니다. 이제는 순 모임도 개편을 해서 순장님들이 새로운 모둠과 순 모임을 하게 됩니다. 특별히 순장님들, 순모님들은 따스한 온유함과 선한 행실로 성도들을 잘 세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온유라는 그릇에 담아서 말씀으로, 사랑으로 섬기는 우리 순 모임. 가끔 순모임 다녀왔다가 마음이 상해서 다니지 않는 분들이 몇 년에 한 번씩 나타나기 마련인데 가끔가다 보면 때로는 하나님의 백성이 모인 자리에 왔는데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이 나오기도 하고, 성경을 좀 알기는 하는데 그것을 사람을 세우는 말이 아니라, 자기 지식과 자랑처럼 보이는 부담스러운 모습을 보게 되면 두 번 순 모임 가게 되기가 어렵겠지요? 그러기에 여러분들이 순 모임 하게 될 때마다 한 마디를 하더라도 꼭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늘의 속한 지혜로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땅에 속한 지식으로 대화를 하고 있는가?" 

하늘에서 난 지혜, 땅에서 난 지혜가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 야고보는 구체적으로 이 두 가지의 특징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모두가 나름의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지혜가 하늘의 지혜가 맞는지. 아니면 나도 모르게 땅에 속한 지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돌아보기 원합니다. 

 

 

반응형

 

 

 

1. 땅에서 난 지혜는 시기와 다툼이 지배한다.

첫째는, 땅에서 난 지혜는 시기와 다툼이 지배한다. 땅에서 난 지혜, 그 지혜가 결국에 만들어 내는 것은? 시기하는 것 다툼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14-15절입니다. 야고보서 3:14-15, 14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이런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주로 자기주장, 자기 자랑입니다.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하늘로부터 난 것이 아니다. 땅 위의 것, 정욕의 것, 귀신의 것." 우리는 지혜가 다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시기와 다툼을 조장하는 하나님이 원치 않는 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시기라는 것이 언제 일어나는 걸까요?  남들과 비교해서 평가를 하려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게 시기심입니다.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마치 자기 자식을 대하듯이 남들이 잘 되는 것을 바라보면 정말 기뻐하고, 축복하게 되는데 언제나 비교의식에서 나오는 것. 때로는 자기 불만에서 나오는 것이 시기의 욕망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잠언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잠언 14:30,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하느니라

정말 무서운 말이지요? 시기라는 것이 뼈를 썩게 하는 것이라고까지 해요. 시기심이라는 것이 한번 우리를 지배하기 시작하면 우리 마음속에 평강을 다 빼앗아갑니다. 겉으로는 얼굴 표정을 관리한다고 해도 그 마음속에 시기심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면 참 불행한 인생이 되는 거예요. 비교를 하면서, 상대주의에 한번 사로 잡히면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인생을 끝내게 되는 거지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소중하게 그렇게 만드셨고, 나도 그렇게 만드신 겁니다. 시기심이 우리를 얼마나 망가트리는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모차르트를 다루는 아마데우스의 영화를 보면, 천재 작곡가 모차르트의 이야기이지만.. 살리에르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살리에르는 당시에 최고의 인정을 받았던 궁정음악인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아주 새로운 젊은 아이가 탄생했는데, 모차르트였습니다. 보잘것없는 아이였습니다. 키도 작고 조그만 시골에서 자란 아이로 비교할 수 조차 없는 아이인데 한 가지가 그 마음을 불편하게 했어요.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은 음악적인 천재성을 가지고 이쓴 모차르트. 그것이 그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모릅니다. 고통 속에 시기심에 불타올랐던 살리에르가 외쳤던 절규가 있습니다. "왜 이 모차르트가 같은 망나니에게는 저렇게 천재적인 재능을 주시고, 저에게는 저런 천재적인 재능을 알아보는 눈 밖에는 허락하지 않습니까?"

이 시기심 마침내 살리에르의 가슴속에 불타올랐을 때 모차르트를 교묘한 방법으로 죽음으로 몰아가게 합니다. 그리고 평생 고통 속에 살아갔던 살리에르의 스토리가 그 영화입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예술을 추구했던 사람도 시기심이 한번 발동되기 시작하니까 인생이 망가지고, 상대도 망가뜨리게 됩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은 이 시기를 일삼아 것을 통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얼마나 무너트리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한 번 물어보세요. "내 마음 속에 혹시 시기하는 대상이 있으십니까?" 저 멀리 있는 분은 시기의 대상이 아니에요. 나와 관계되는 사람 중에 이 시기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 참 불편해지고, 그를 바라볼 때도 평강이 사라지고 때로는 돌아설 때 거울 앞에 서 있는 내 자신을 돌아보면.. 이게 아닌데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시기는 땅에서 난 지혜이고, 사탄의 것이고 거짓 영의 것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 거짓 영의 특징은? 야심 경쟁심 다툼이라고 합니다. 우리 성경에는 다툼이라고 하는데 요즘 성경에서는 경쟁심, 야심으로 많이 번역을 합니다. 다툼이라는 '에리테이아'라는 헬라어는 성경이 기록되기 전에는 나타난 문헌에는 아리스토 텔레스의 문헌에 딱 한번 등장하는 문자입니다. 이 단어는 당시 때 아주 중요한 가슴을 치는 단어였습니다. 당시에 정치를 하면서 자기 당파의 이기심만을 추구하는 그 상황을 꼬집어서 '에리테이아'. '다툼, 경쟁심'이라는 단어를 사용을 했습니다.

이것이 어디 야고보 시대뿐이겠습니까? 이 경쟁심이 발동이 되면 나라를 위한 정치가 되어야 하는데 자신의 당락, 자기의 야심을 위해서 활동을 모든 것에 자기중심이 된 모습을 두고, 경쟁심 야심 다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3: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우리는 지혜라면 다 좋은 줄 알았는데 어떻게 이런 지혜가 있을까요? 우리가 땅 위에서도 이런 일을 참 많이 보지 않습니까? 겉으로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때로는 다른 사람을 다스릴 수 있는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 그 똑똑한 머리로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나라를 어지럽게 하는 상황들.. 땅에서 난 잘못된 지혜의 모습입니다. 이런 지혜라는 것은? 시작부터가 문제였지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신 말씀에 순종하며 살기를 바라셨어요. 그것이 진짜 지혜의 삶입니다. 그런데 사탄이 인간에게 찾아와서 준 마음이 뭔가요? "하나님이 너희의 지혜를 빼앗아 가기를 원하니 저 선악과를 먹으면 너희 눈이 밝아서 지혜롭게 되리라." 결국에는 지혜를 위해서 선악과를 먹었는데, 지혜를 얻기는커녕 죄악의 뿌리를 얻었을 뿐입니다. 

주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몰랐을 때는 시기와 다툼이 그들을 지배했습니다. 누가 크냐를 두고 싸웠던 제자들.. 심지어 어머니까지 가세해서 내 아들 하나를 주의 오른편,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들은 제자이면서도 시기와 다툼을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시기와 다툼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성령이 지배했을 때 그들에게 진정한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셨던 기도가 이겁니다. "거룩한 하나님 저들을 성령으로 하나 되게 하소서." 그 기도대로 정말 성령이 임하시니까 하나가 되어서 생명 사역에 힘썼던 제자들. 그들로 말미암이 일어난 것이 사도행전의 역사였습니다. 우리가 이런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게 하소서. 성령의 지배를 받게 하소서." 그런 사람이 기도의 사람입니다. 

 

 

 

​ ​

 

 

 2. 하늘의 지혜는 하늘에 속한 열매를 맺는다.

두 번째로는, 하늘의 지혜는 하늘에 속한 열매를 맺습니다. 땅에 속한 지혜는 우리를 파멸시켰는데, 하늘에 속한 지혜는 하늘의 속한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오늘 야고보는 하늘에 속한 열매를 8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3:17,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하늘의 지혜가 만들어내는 8가지 열매. 마치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 말씀을 가만히 묵상하다 보면 발견하는 한 가지가 있어요 이런 지혜는 우리가 구할 수 없는 것이라는 거예요. 첫째로 성결이라는 것? pure. 우리 모두는 타락한 존재입니다. 예수님만이 선하고 성결하신 분이지요. 우리의 것을 구해야만 얻을 수 있는 덕목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양순이라는 단어가 참 중요합니다. 양순이라는 것은? 양보하고, 고집부리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하늘의 지혜가 있는 사람은 자아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자아가 없어졌기 때문에 고집부릴 일도 없다고 합니다. 어떤 영어 성경을 보면, '기꺼이 양보를 한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누가 양보 할 수 있는 사람일까요? 여유 있는 사람, 너그러운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양보입니다. 내 속에 예수님으로 채워져 있으면 모든 것을 배려하고, 양보할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께 그렇게 부탁하고 싶어요. 정말 생명을 바쳐서 싸워야 할 일이 아니라면 양보하세요. 지나가고 나면 바람처럼 지나가는 삶입니다. 그러나 정말 싸워야 할 성경의 진리라면 전부를 던져서라도 싸워야겠지요?

지혜로운 사람 중에 강조하는 '화평'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화평이라는 것은 성경의 9가지 열매에서도, 오늘의 본문에서도 그리고 팔복에서도 나옵니다. 왜 이렇게 화평이 중요할까요?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난 인간은 화평을 누릴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졌기 때문에 인간관계도 화평이 일어날 수 없는 것이지요.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고 나니까 남편과 아내가 화평이 깨어지고 형이 동생을 때려죽이게 되고, 두발가인처럼 전쟁물자를 만들어 서로 싸우게 되고 모든 화평이 깨어지는 것이 인류의 역사입니다. 이 깨어진 화평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친히 십자가 지시고 하나님과 끊어진 화평을 연결하신 분이 주님이십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다시금 주님과 화평을 누리게 된 것.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특별한 선물입니다. 그러니 주님, 당신의 십자가로, 당신의 영으로 우리를 지배해 주십시오. 그래야 우리가 진정한 화평을 누릴 수 있겠습니다. 오늘 이런 하늘에 속한 지혜를 얻기 위해서 구해야 할 것은, 하늘의 성령이 나를 지배해 주십시오. 

 

 

 

​ ​

 

 

오늘 우리는 하늘에 속한 지혜 그리고 땅에 속한 지혜를 함께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지혜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어떻게 다를 수 있는가? 우리 성도님들 한번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모두가 나름대로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있는데 나의 지혜는 출처가 어디인가? 똑같이 살아가지만 하늘의 지혜로 사는 사람이 있고, 땅의 지혜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가 이런 하늘의 지혜로 살 수 있는 사람일까요? 사도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구한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한다." 그리스도가 지혜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4,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모든 지혜가 다 모아져 있는 그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알 때에 하늘의 지혜를 누린다는 것이지요. 한국의 지성, 지혜의 아이콘이었던 이어령 교수님. 교수님이 예수님을 알게 되었을 때 그가 했던 위대한 고백이 있습니다. 모든 지식과 학식을 다 가지고 있지만 결국에는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자살로 들어가려 했던 사람.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팔아버린 사람. 나는 땅 위에서 많은 지성인과 많은 지식을 다 누렸지만.. 그러나 내 영혼은 파우스트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분의 고백입니다. "제 자신도 지성의 무력과 붕괴를 통해서 그것을 넘어선 영의 세계. 초월에 세계에 이르는 마지막 모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 초월의 세계, 영적 세계로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나의 구주로 모시고, 영성의 세계로 살다가 이 땅을 떠난 한 교수였습니다.

하늘의 지혜를 구하는 것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을 말씀에 비추어 보기 원합니다. 내 지혜가 하늘에 속했나? 땅에 속했나? 우리가 지상에서는 많은 지성을 가지고 있지만 주님을 희미하게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이 땅을 떠나게 되는 순간에는 지혜의 화신 되시는 예수님을 눈과 눈을 마주하고 볼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까지 말씀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더 주님을 깊이 알고 주님을 닮아가는 지혜로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을 세워내는 이런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 같이 일어나셔서 주님 앞에서 찬송하시겠습니다.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F.jpg
0.08MB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G.jpg
0.15MB
원하고바라고기도합니다E-by.서은주.jpg
0.11MB

존귀하신 아버지, 오늘 하늘에 속한 지혜와 땅에 속한 지혜를 보았습니다. 우리가 나름대로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살아갈 때에 하나님 행여나 우리의 지혜가 내 지식, 땅에서 얻은, 땅에서 나는 것들을 돌아보면서 주님 앞에 비오니 하늘의 영으로 하늘의 지혜로 우리를 충만케 하옵소서. 주님 땅에서 많은 지식을 습득하며 살아가지만.. 그것이 하늘의 지혜의 용기에 담겨져서 참으로 온유함으로 선한 행실로 나타나게 하소서. 그리하여 우리도 참 평안을 누리고 곁에 있는 사람들을 아름답게 세우고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참 따뜻한 하나님의 사랑이 강물처럼 넘치는 이런 지역으로 우리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그렇게 땅 위에서 주님을 희미하게 알지만 언젠가 주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볼 날이 올 것입니다. 그날을 사모하며 주님 닮아가기 원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 하심이
하늘의 지혜를 사모하며 참으로 온유함과 선한 행실을 통해서 
하늘의 지혜, 삶으로 나타내기를 원하는 
주의 모든 백성들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 지어다. 
아멘.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