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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story/설교자료

[사도행전]사도행전을어떻게 설교할 것인가?(1) I 구조와 그 주요 내용 I 정훈택

by №1★↑♥ 2021. 3. 4.

  어느 책이나 다름없이 사도행전에도 주제와 구조가 서로 얽혀 있다. 즉 무엇을 사도행전의 주네로 보느냐에 따라 사도행전의 구조는 다르게 분석될 수 밖에 없다. 반대로 구조를 어떻게 분석하느냐에 따라 그 주제도 다르게 산출될 것이다. 우리는 우선 사도행전의 내용을 따라 그 주제를 찾고 이 주제를 중심으로 사도행전의 구조를 분석할 것이다.

 

 

 

 

 

 

1. "사도행전"이란 제목에 대하여

  "사도행전"이란 제목은 이 책의 내용이 사도들이 한 일을 체계적으로 보도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사도란 누구를 가리키는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예루살렘에 돌아와 다락방에 올라간 제자들 중 열 한 명의 이름이 1장 13절에 기록되어 있다. 이 명단은 가롯 유다의 이름이 빠진 것을 제외하면 누가복음에(6:14-16) 수록되어 있는 열두 사도 명단과 같다. 그러나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명단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나오는 명단과 다음 몇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다. 첫째, 사도들의 이름이 약간 다른 순서로 제시되었다. 둘째, 가나안인 시몬(마, 막)을 셀롯인(=열심당) 시몬(눅, 행)으로 소개한다. 셋째, 다대오(마, 막)를 야고보의 유다(눅, 행)로 부른다. 소유격 "야고보의"는 부자관계를 뜻하는 지, 형제관계를 뜻하는지 불명확하여 대부분의 현대어 성경이 "야고보의 아들 유다"로 번역한 데 비해 몇 현대어성경은 "야고보의 형제 유다"로 번역해 놓았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승천 후 첫 사건으로 맛디아의 사도 선택을 보도한다. 이 사건은 "그들이 맛디아를 얻으니 저가 열 한 사도의 수에 가입하니라."(1:26)는 기록으로 마감되었다. 2장 이후에 나오는 "사도들"(23회)이나 "열 둘"(6:2)은 이제 맛디아를 포함한 열두 사도들 전체 혹은 그 중 몇명을 지시하는 특별한 용어로 사용된다. 이들 이외의 인물이 사도들 전체 혹은 그 중 몇명을 지시하는 특별한 용어로 사용된다. 이들 이외의 인물이 사도로 지칭된 경우는 바나바와 바울 뿐이다(14:4, 14). 그렇다면 "사도행전"이란 책제목은 이제 맛디아가 포함된 열 두 사도들, 혹은 바나바와 바울이-개별적으로나 전체적으로- 한 일들 소개하는 책이란 뜻이 된다.

 

 

  하지만 사도행전을 이러너 책으로 이해하는 데는 상당한 어려움이 잇다. 첫째, 사도행전의 첫 부분은 사도들이 한 일이 아니라-복음서들처럼-여전히 예수님의 사역을 소개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승천하셔서도 자신의 사역을 계소하셨다고 사도행전 자체가 소개한다. 신학자들은 이런 의미에서 사도행전이라는 이름보다 '성령행전'이나-복음서들 처럼-'에수님의 사역'이라는 이름이 이 책에 더 적합하다고 믿는다. 둘째, 위에 언급한 열둘 혹은 열 네 사도들 중 그 활동이 구체적으로 소개되거나 이름이 거명되는 사람은 베드로, 요한, 바나바, 사울 정도이다. 12장 2절에 야고보 사도의 죽음이 언급되어 있다. 사도행전을 '사도들의 활동'을 보도하는 책으로 이해할 때 부각되는 사도들은 전반부에는 베드로, 후반부에는 바울이다.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은 이 두 거목의 활동도 아주 제한적으로 소개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예루살렘을 떠난 베드로 사도의 활동에 대해 사도행전에서 아무런 힌트도 읽을 수 없다. 셋째, 사도행전은 사도로 불리지 않은 사람들 예를 들면 빌립과 스데반의 활동도 소개한다. 넷째, 16장 4절 이후에는 '사도', '사도들'이란 용어가 아예 사용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어떤 신학자들의 제안처럼-사도행전을 '성령행전', 아니면 '예수님의 사역'이라고 바꾸어 부르고 이에 따라 사도행전의 내용과 구조를 분석하는 것이 좋을까? 분명 성령님과 예수님이 모든 사건을 주도하고 계시기는 하지만 사도행전이 소개하는 직접 동작자들은 사도들, 예수님의 제자들, 즉 교회이다. 그렇다면 전반부를 베드로 사도행전, 후반부를 바울 사도행전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가?

 

  물론 이러한 제안도 적합하지 않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에는 아주 중요한 주제가 하나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누가는 성령에 충만한 사도들과 제자들, 특히 초대교회 시절에 교회의 기초를 놓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베드로 사도와 이방인의 세계에 교회를 세우는데 전적으로 헌신한 바울의 활동 중 필요한 내용들을 선택하여 사도행전을 구성했다. 이 주제를 부각시키면 사도행전은 초대교회를 소개하는 단순한 역사서가 아님이 명백해진다. 

 

2. 사도행전의 주제에 대하여

  사도행전의 주제는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을 연결할 때 더 쉽게 나타난다. 모든 신학자들은이 인정하듯이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연결된 책으로 썼다. 고대 저술 환경의 한계로 인하여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한권의 책으로 만들어 내는 것은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누가복음의 끝에 이 책이 사도행전에 연결된다는 것. 사도행전의 시작에 이 책이 누가복음에 이어지는 것임을 독특한 문학기법으로 표시해 두었다. 누가복음의 끝에 예수님의 승천하심에 관한 기사를 간략하게 요약 소개 한 것, 사도행전의 처음에 이 사건을 확대하여 자세하게 소개한 것이 그러한 기법에 속한다. 이런 기법을 통해 독자들은 누가복음을 읽은 다음에 예수님의 승천기사에서 시작하는 책 즉 사도행전을 찾아 계속 읽어갈 수 있었다. 

 

  다른 방법으로로 누가는 사도행전 서론에 누가복음과 같은 수신자 '데오빌로 각하'를 언급하고 누가복음의 애용 즉 '예수님이 활동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지적함으로써 누구나 사도행전을 누가복음에 연이어 읽도록 지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의 주제나 구조, 그 특별한 내용들을 누가복음과 아무런 관계없이 추출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 될 것이 틀림없다.

 

 

  신학자들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합쳐 '누가문서' 혹은 '누가-행전'이라고 부르는 책을 누가가 쓴 때는-빨라야- 사도행전의 끝이 보여주는 사건 즉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여 '두 해'정도를 지낸 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시기는 예수님의 죽음, 부활, 승천이 있은 때로부터 한 세대가 지나간 약 64년 경이다.

 

  누가는 누가복음의 내용들을 모두 목격한 예수님의 직제자는 아니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들 즉 기독교 제 2세대에 속했다. 사도행전의 저자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우리'부분(16:10-17:20;20:50-21:18;27:1-28:16)을 제외하면 누가가 사도행전의 사건들도 직접 목격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내용 대부분을 목격자들에게서 듣고 수집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는 그가 듣고 알고 있었고 자세히 살펴 책으로 기록하려는 내용들을 '우리 중에 일어난 일들'(눅 1:1)이라고 표현했다. 대부분의 일들이 일어날 때 그는 그 자리에 없었다! 그런데 그 일들이 저자 자신을 포함한 '우리' 가운데서 벌어진 일이라고 한다. 어떤 경우 이런 표현이 가능할까? 이 기록을 ㅌ오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은 확인할 수 있다. 누가는 비록 목격자는 아니었지만 그 일들이 일어났을 때 정말 그 자리에 있었던 목격자들과 자신을 묶어 '우리'라고 표현할 수 있는 바로 그 집단 즉 교회에 속해 있던 한 사람이며, 이제 이 집단을 대변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그러한 입장에서 이 집단에 속해 있지 않아서 그 '우리'와 대조되는 사람 즉 데오빌로에게 이 책을 써보내려하고 있었다.

 

  '우리 중에 일어난 일들'이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기로괴어 있는 모든 일들이다. 앞 부분 즉 그들 가운데 벌어진 '예수님의 생애와 활도, 교훈에 얽힌 모든 내용'을 우리는 누가가 전한 '복음'이라고 부른다.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먼저 쓴 글' 즉 누가복음을 '예수님이 활동하시며 가르치기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행 1:1)로 요약했다. 그 복음(사건)은 예수님의 승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으로 마무리 되었다.

 

 

   승천하신 이후에 그들 가운데 벌어진 일들을 적어 놓은 것이 사도행전이다. 복음(사건)의 결과요 계속편인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을 토대로 하여 그 위에 세워진 교회 역사의 한 토막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이 인류를 위한 것이며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헤 하는 것임을 알고 계셨다. 자신의 사역이 끝나면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도 알고 계셨다(눅 24:47). 사도들은 이 일의 증인으로 선택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사도들은 성령이 오시기까지 증거 활동을 시작해서는 안된다. 성령의 능력을 입기까지 기다려야한다(눅 24:28-29).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승천에 이어 사도들과 제자들의 기다림부터의 일들을 차곡차곡 기록하여 놓은 책이다. 오순절이 되어 복음증거활동의 신호가 울리고 사도들은 드디어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바울이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는 활동에 대한 기록으로 사도행전은 끝난다. 누가복음에서 시작된 '우리 중에 이루어진 일들'에 대한 기록작업 전부가 이렇게 끝난 것이다.

 

  사도행전의 주제는 사도행전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지만 특히 사도행전의 끝에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바울이 ...담대히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쳤다.'(28:31). 죄수 바울을 통하여 복음이 로마에 전파되고 있었다. 물론 그 이후에도 복음은 계속 전파되고 있었다. 물론 그 이후에도 복음은 계속 전파되고 있었다. 물론 그 이후에도 복음은 계속 전파되었다. 로마를 넘어 이십 세기를 거쳐 지금도 세계 곳곳에 복음이 전파되고 있다. 누가는 그 한 부분 로마에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끝으로 사도행전을 마감했다. 

 

  '우리 중에 일어난 일들'은 예수에게서 시작된 일들에서 시작하여 로마에서의 복음사역까지의 일들을 뜻한다. 만약-어떤 신학자들의 주장대로-누가가 70년경에 책을 썼고 또 로마 이후의 바울의 활동을 제 3권의 책으로 쓰려고 계획했었다면, 누가복음 1장 1절의 '우리 중에 일어난 일들'은 그 이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없는 것을 토대로 무엇을 주장한다는 지극히 위험한 오류에 빠지기 쉽다. 따라서 이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있는 것만을 다루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이상을 요약해보면,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활도오에 관한 책이라기보다는 복음이 증거되고 수용되어 곳곳에 믿는 자들이 생기고 교회가 세워지는 사건들에 ㅔ관한 책이라고 불러야 한다. 사도들이 아니라 복음의 전파와 수용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 일에 성령과 예수님의 도구 내지 동역자로 사용된 사람들이 주로 사도들이었다. 그들의 주된 사역은 복음을 전파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초점은 사도들이라기보다는 복음이 어느 지역으로 전파되어 가느냐에 맞추어져 있다. 어느 지역에 복음이 수용되고 난 이후의 신자들의 삶의 양상과 교회의 존재방식은-우리에게는 아주 중요한 관심거리이기는 하지만-사도행전에는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거의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사도행전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복음의 전파와 수용 즉 한 지역에 복음이 돌파해 들어가는 그 첫 부분에 누가는 관심을 쏟았다.

  그래서 나느 사도행전의 구조와 주요 내용들을 다루는 이 글의 제목을 '복음을 따라서..'라고 붙여 보았다. 사도행전을 기록하는 누가의 시각이 '복음이 어느 지역으로 어떻게 들어가게 되었는가'에 놓여 있다는 의미다.

 

3. 복음의 전파

  복음은 무엇인가? 이 단어는 글자 그대로 '좋은 소식'을 뜻한다. 무엇이 사도행전에서 좋은 소식인가? 사도행전 1장 1절을 참고한다면 '예수님이 행하시며 가르치신 것' 즉 누가복음의 모든 내용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절을 따르면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이라고 말해야 한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곧 복음서이다. 사도행전에 포함되어 있는 많은 설교나 변증도 예수님의 생애, 하신 일들, 그 교훈을 요약하거나 상세하게 설명하는 복음이다. 이 복음은 때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5:42).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10:36)라고 요약되기도 했다. 

 

  이러한 내용을 가리키는 명사 '복음'은 사도행전에 두 번 사용되었다. 이 빈도만 본다면 '복음'은 '복음전파'란 용거가 사도행전의 구조를 결정할 정도로 중요한 기능을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두 구절은 사도행전의 두 주요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사역 내지 사명과 관련되어 있어서 결코 무시되거나 가볍게 다루어질 수 없다. 베드로 사도는 이방인의 할례를 다루는 예루살렘 회의에서 하나님께 자신을 고넬료에게 보내신 사건을 회상하며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말씀을 전하도록" 하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서 자신을 선택하셨다고 말했다(15:7). 바울 사도는 자신의 생애와 예수님께 받은 사명을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요약했다(20:24).

 

  누가는 복음이라는 용어보다는 같은 의미를 가진 '말씀'이나 '하나님의 말씀' 혹은 '주님의 말씀'을 더 자주, 즉 28번 이상 사용했다. 8장 4절의 '복음의 말씀'이라는 표현은 '복음'과 '말씀'이 다른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동사형 '복음을 전하다(유앙겔리제스다이)'는 사도행전에서 약 10번 사용되었다. 이 동사는 목적어 없이 사용되기도 하는데 이 때 '복음을 전한다'는 표현과 '말씀을 전한다'는 표현은 사도행전에서 거의 같은 뜻이다. 목적어를 동반한 경우의 용례가 이를 확인해 주나. 8장 12절에는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의 이름'이, 15장 35절에는 '주님의 말씀'이, 그리고 10장 36절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평화'가 그 목적어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말하다', '가르치다.', '증거하다'도 사도들과 제자들의 같은 활동을 지시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들이다. 사도들은 예수님에 관하여 말하고 가르치고 증거하는 증인으로 선택되었던 것이다. 사도행전에 모두 약 14번 사용된 이 용어는 사도행전 전체에 걸쳐 나타나며 사도들의 이 활동이 그들의 주된 직무였음을 알려준다. 그들이 주로 한 활동은 병을 고치고 능력을 행하고 은사를 활용한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나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파한 것이다. 이런 용어들을 모두 '복음 전파'로 요약한다면, 이 '복음 전파'가 사도행전의 전체 내용과 구조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임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사십' 일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말씀하셨고' 제자들에게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고 말씀하시고(1:3-11) 승천하셨다. 예루살렘 교회가 지상에서 예수님 없이 처음 공식적으로 행한 일 즉 맛디아 사도의 보충은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증거하게'하기 위함이었다(1:22). 그 자격요건으로 제시된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부터 '모든 것을 보고 들은' 것은 맛디아 사도와 다른 열 한명의 임무가 부활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관한 복음 전체를 전하는 것임을 암시한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심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드디어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오순절 사건은 예수님의 예고대로 증인의 자격을 갖춘 제자들이 증인으로서의 활동을 개시했다는 데에만 그 의의가 있다. 누가는 이 때 미완성의 제자들이 비로소 거듭났다거나 드디어 교회가 탄생했다고 느낄 어떤 암시도 남겨 놓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성령의 충만을 받고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다'(2:4) 그들이 다른 언어로 말한 것은 베드로 사도의 설교에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이 하신 크신 일'(11절) 즉 예수님에 관한 복음이었다. 모여든 무리가 예수님의 지상생에 대해 대부분 알고 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베드로의 설교는 그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예수님의 부활하심에 집중되어 있었다. '너희들이 법 있는 사람들의 손을 빌어 못막아 주신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신 것이다.'(2:23, 24, 36). 열 두 사도가 이렇게 복음을 전한 결과 예루살렘 교회는 숫자가 언급되지 않은 목격자들(사도들과 제자들) + 3,000명으로 증가했다. 이 새 신자들을 향한 사도들의 가르침은 이후에 계속되었고-사도들만이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는 이 시점에 모두가 그들 곁에 모여 있어야만 하는-급박한 필요 때문에 첫 제자들은 모든 물건을 통용하고 재산을 팔아서라도 그 필요를 충당했다.

 

  3장 1절에서 7장 60절까지의 내용도(예루살렘에서의) 복음 전파로 요약할 수 있다. 베드로 사도가 한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이 예루살렘 성전 솔로몬 행각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동기를 제공했다. "말씀을 들은 사람들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오천이나 되었다'(4:4). 베드로와 요한은 잡혔지만 오히려 이것이 산헤드린에서 복음을 전하는 기회가 되었다. 두 사도가 놓인 후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4:31). 다시 사도들이 잡히는 사건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그들을 옥에서 끌어내셨고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5:20)고 지시하셨다. 누가는 이 사건의 결과를 이렇게 적어 놓았다.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다.'(5:42).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6:7) 사도들이 '말씀 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도록 하기 위하여 예루살렘 교회는 구제를 맡을 사람들 일곱을 임명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중했다. 누가는 그 중 한 명 스데반의 전도활동을 6장에서 7장에 걸쳐 소개했다. 예수님에 대한 증거 활동이 사도 이외의 사람들에게로 자연스럽게 확대 된 것이라고 평해야 한다.

 

  8장부터 누가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은 더 이상 소개하지 않고 복음이 다른 지역으로 확대되는 사건들로 눈을 돌린다. 누가의 관심은 교회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다세하게 기록하는 것아 아니라 복음이 어떻게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지역으로 차곡차곡 확대되어 가느냐에 있었다! 스데반의 순교와 교회에 대한 박해로 사도 이외에는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졌다'(8:1). 이 흩어진 교인들을 통해 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아에 전파되었다. 누가는 그 중 빌립과 베드로 사도와 요한 사도의 전도 활동을 소개했다. 예수님을 만난 사울도 다메섹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했다'(9:20). 그리하여 유대, 사마리아, 갈릴리에도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졌다(9:31). 이방인에게(10장)만이 아니라 주로 이방인들이 사는 베니게, 구브로, 안디옥에도 복음이 전파되었다(11장). 예루살렘에서 시작한 복음 증거가 이제 예루살렘이 속한 더 넓은 바깥지역 즉 팔레스타인 전역으로 확대된 것이다. 누가는 12장을 이렇게 마무리 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장했고 널리 퍼졌다.'(24절) 

 

  13장부터 누가는 시야를 팔레스타인의 북부 지역으로 옮겨간다. 바나바와 바울의 전도 여행을 통하여 바보,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버가에 복음이 전해지고 믿는 자들이 생겼다. 교회가 세워지고 조직되었다. 증가하는 이방인 기독교인들에 대한 할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사도와 장로들이 회의를 소집했다. 회읜 베드로 사도의 제안대로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자.'(15:19)는 결정을 내렸다. 범세계 교회의 연합적 기초를 마련한 이 회의를 끝으로 누가는 누구도 더 이상 사도라고 부르지 않았다는 것은 눈여겨볼 만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15장 26절부터 바울의 두 번째 전도여행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다. 이전 지역을 거쳐가는 동안 바울은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지만 누가의 시야는 이제 복음이 새로운 지역으로 어떻게 옮겨갔느냐는 자신의 관심을 따라 유럽지역으로 이동한다. 따라서 아주 짤막한 보도로 바울이 성령의 지시를 따라 드로아까지 갔음을 보도한다. 그곳에서 바울은 환상을 보고 마게도니아로 갔다. 드디어 복음은 유럽에 전파되기 시작했다. 누가는 복음이 바울에 의해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고린도로 전파된 경로를 다시 자세하게 기록해 두었다. 바울은 두번 째 전도여행의 마지막(18:19-21)과 세 번째 전도 여행의 시작(19:1-20:1)에 에베소에서도 복음을 전했다. 에베소에서도 복음을 전했다.에베소에서의 사역을 누가는 다시 한번 '주님의 말씀이 힘이 있었고 자랐고 강해졌다'(19:2)고 요약했다. 삼차 전도여행에서 바울은 마게도니아, 아가야를 거치지만-복음전파의 관점에서-누가는 별 자세한 기록 없이 이름만 언급하고 돌아오는 길 즉 드로아, 밀레도, 가이사랴를 거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까지의 일을 간략하게 보도했다. 19장 21절부터는 누가의 시야는 다시 복음이 들어갈 새로운 지역 로마로 움직여 간다. '내가 거기(즉 예루살렘에) 갔다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예루살렘으로의 귀향은 따라서 바울이 로마로 가게 되는 과정으로 보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복음이 바울에게 실려 로마로 가게 되는 직접적인 동기는 21장 27절에 기록되어 있는 성전에서 바울이 체포되 사건이다. 그러나 누가는 죄수로 잡혀 재판을 받고 로마로 호송되는 이 과정을 로마 선교에 도달하는 준비나 무의미한 시간의 낭비로 소개하지는 않았다.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이 때 유대인 지도부(22:1-23:10)와 로마 총독을 위시한 고관들, 헤롯 왕과 그의 부인(24:1-26:32) 등을 향해 강하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었다(28:16)절에 바울과 함께 복음이 로마에 도착했고 바울은 그곳에서 2년 동안 복음을 전했다. 이렇게 하여 복음은 예루살렘, 유대와 사마리아, 팔레스타인, 지금의 터어키와 그리스 지역을 거쳐-적지 않은 신학자들이 지적하는 대로 당시 사람들이 땅끝으로 인식하고 있었는지 모르는-로마에 도착한 것이다. 그러나 로마는-우리 관전에 보면-복음 전파의 끝이 아니라 역사를 흘러 모든 민족에게로 복음이 전파되는 새로운 시작이다. 우리는 그 연장선 위에서 오늘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다.

 

  새로운 지역으로 복음이 전파되어 복음의 결과 영향력이 넓어지고 강해지는 것. 즉 예수님의 비유대로 겨자씨같이 작은 천구기 큰 나무로 자라 하늘의 온갖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이는 것은 혹은 작은 누룩 같은 천국이 세상 전체를 발효시키는 것이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할 때 가지고 있었던 주제였음이 확실하다. 누가는 복음 전파에 헌신한 사도들의 삶을 소개하고 찬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믿는 복음의 경이로운 확장 과정을 데오빌로에게 그리고 모든 독자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그렇게 복음을 소개하고 이 모두를 주도하신 하나님과 성령님, 그리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찬양하기 위하여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4. 사도행전의 지역적 관심과 그 구조

  누가가 장소에 강조점을 두었다는 사실은 지금은-특히 누가복음에서-신학적 공리처럼 통용된다. 누가는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 설교활동을 기록함에 있어서 지역적 구조를 그틀로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이 수시로 예루살렘을 오르내리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요한복음이나 예수님이 자주 갈릴리 이외 지역으로 여행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마태복음과 달리 누가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전반부는 갈릴리 지역(눅 4:14-9:50), 후반부는 예루살렘으로 가는길(9:51-19:27)에 이어 예루살렘에서(19:28-24:53) 활동하신 예수님을 소개하고 잇다. 그리하여 복음사건은 예루살렘에서 끝났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생애의 목적지요 종착지였다.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눅 13:33).

 

  복음사건이 마무리된 바로 그 예루살렘에서 사도행전의 이야기들이 시작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 즉 성령을 기다릴 것을 명령하셨다(행1:4).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 즉 교회는 기다림으로 그 첫발걸음을 시작한다. 기다리면서, 과거 예수님이 열 두 사도를 임명하신 것을 회상하면, 그들은 결원이 생긴 사도직을 보충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교회'라고 부른다면 교회는 이미 탄생한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믿음'이외에 교회구성에 필요한 다른 원리가 있다는 것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복음전파는 교회 즉 믿는 사람들의자격 요건이 아니라 교회의 직무, 신자들이 해야 할 일로 제시되었다. 그 직무가 성령의 오심으로 시작되었다. 교회는 그 때까지 예수님의 출발신호를 기다려야 했다. 예루살렘에서..

 

  1장 8절은 성령의 역할과 교회의 사명뿐만 아니라 사도행전의 구도 이해에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수님은 복음 전파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유대로 사마리아로 그리고 땅끝까지 진행될 것을 예고하시며 성령이 오시면 제자들이 능력을 받고 예수님의 증언으로 바로 이 작업에 돌입할 것이라고 예고하셨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이 말슴을 중심으로 복음이 어떻게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유대와 사마리아, 전체 팔레스타인, 지금의 터어키가와 그리스 그리고 로마에까지 도창하는가르 자세하게 보도한다. 

 

  사도행전을 복음이 전파 확장되는 이 지역적 구조에 따라 간략하게 분해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서론(1:1-26)

   2. 예루살렘에서의 복음전파(2:1-7:60)

   3. 유대, 사마리아, 팔레스타인에서의 복음펀자(8:1-12:25)

   4. 터키 지역에서의 복음전파(13:11-15:35)

   5. 그리스 지역에서의 복음전파(15:35-21:26)

   6. 로마에서의 복음전파(21:27-28:31)

 

5. 사도행전의 주요 신학적 내용들

  (1) 성령의 사역이 사도행전의 모든 사건을 주도하고 있음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선 사도행전의 주제로 부각시킨 복음의 증거가 성령의 오심과 연결되어 말해진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며 오순절에 성취된 것이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시 많은 사람들이 성령이 충만하여 복음 사건들에 개입하였고 예수님 자신도 성령으로 충만하여 활동하셨으며 또 제자들이 성령의 활동에 연관되어 있음을 말슴하셨지만 그들이 증인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하려면 성령의 오심을 기다려야 한다고 명령하셨다. 오순절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성령님이 오시자 베드로 사도는 즉각 이것이 요엘 2장의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승천하신 예수님이 약속대로 '아버지께 받아 부어주신 것'으로 설명했다(2:33).

  오순절 이후 사도들의 증거활동은-일일ㅇ이 언급되어 있지 않은 경우라 하더라도-성령의 충만으로, 성령의지시와 인도로 진행된 것을 누가는 고백하고 있다. 예루살렘에서 유대와 사마리아로 그리고 땅끝을 향하여 더 넓은 지역으로 나아가는 증인들의 지역적 안배도 결국은 성령님의 지시를 따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복음 전하는 것를 듣고 회개와 믿음에 도달하여 교회의 새 구성원이 되는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인도와 충만으로 그러한 상태데 도달하여 교회의 새구성원이 되는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인도와 충만으로 그러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복음을 들을 기되를 얻는 과정에도 성령님께서 개입하시고 복음을 받아드르이도록 사람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고 설명하는 경우도 잇다. 이 때문에 신학자들이 이 사도행전을 '성령의 행전'이라거나, 이렇게 시작된 새로운 시대를 '성령의 시대'로 정의하고 싶어하는 것은 결코 무리는 아닐 것이다. 우리가 사도행전의 주체를 '복음의 전파'로 압축한 것은 이 성령님의 사역을 부정하거나 축소하려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주요 활동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땅에 진행된 것에 대한 복된 소식을 모든 시대, 모든 지역의 모든 사람들에게 실어나르게 하는 거심을 강조하려는 것이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님의 사역'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우리는 이 용어 안에 하나님의 사역과 예수님의 사역을 모두 함축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물론 사도행전은 후대에 선정된 용어 '삼위일체'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사도들로 말미암아 오래 전 지구상에 진행된 복음전파의 사역은 사도행전에서 때로는 '하나님', 때로는 '주님', 때로는 '예수님'과 결합되어 언급되고 있어서 '성령님의 사역'과의 관계를 생각해보도록 만든다. 신적 명칭 대신 '하나님의 사자' 혹은 '주의 천사'가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 모든 사용 예를 비교해보면, 다른 일이 다른 일음에 결합된 분업의 형태가 아니라 같은복음전파와 수용이 경우에 따라 다른 이름에 결합되어 있어서 결국 이 일들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이 계시며-간혹 사람들이 느낄 수 있도록 활동하시는-성령님이 계실 뿐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한다.

 

  몇 구절에서 우리는 삼위일체 교리를 유추할 수 있는 흔적을 발견할 수도 있다. 우선 누가복음/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은 성령 사역의 대상이실 뿐만 아니라-특히 승천 이후에-성령사역의 주체이시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즉 예수님은 성령으로 충만하셨을 뿐만 아니라 성령님을 제자들과 교회에 보내신 분이시다. 그래서 16장 7절에는 성령을  '예수의 영'이라고 불렀다. 누가복음 끝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지적하며 누가는 사도행전 1장 2절에서 이것을 '성령으로 명령하신 것'이라고 재해석했다. 그에게 있어서 승천하신 예수님의 이를은 곧 성령님의 일인 것이다. 자주 누가는 성 삼위 하나님의 이름 대신 '주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느넫,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하셨다.'(2:36)를 참고하면, 누가가 '주님'이라는 용어로 하나님을 지시하는지 예수님을 지시하는지 심히 불명확함을 알게 된다. 그에게 있어서 이 모호한 표현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지시하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고 설명하는 것이 가장 적절해 보인다.

 

  사도행전의 사건들을 만들어내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성령님이시다. 그리고 승천하신 예수님이시다. 하나님의 섭리 아래서 세사으이 역사와 사도들, 제자들의 활동은 인간적 도구로 활용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사건들을 기록한 누가의 역사적 기준을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 내지 구속사관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한다. 기록된 모든 일들을 물질에 새겨진 법칙과 질서를 따라 나타난 것으로 보지 않고 살아 계시며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2) 두 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사도행전의 특징은 예수님의 지상 사역시 '제자들'로 불리고 후에 즐겨 '사도들', '교회'로 불린 사람들은 세상에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는 주체로 부름 받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루신 일들을 사람드르에게 알리고 그 결과를 만들어냄으로써 예수님의 일을 이어갔다. 1장 15절에서 26절에 걸쳐 기록되어 있는 맛디아 사도의 선출 기사는 성령의 오심을 기다리던 제자들이 마치 독단적으로 선출하기 위하여 모여 있던 모든 제자들 즉 초기 예루살렘 교회가 열심히 기도하기는 했지만-다른 기록들과 달리-사도를 보충하라는 하나님의 명령도 성령의 감화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사도를 임명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결원을 보충한 것이기는 하지만 선출되는 사람은 예수님이 직접 선택 임명하신 열 한 사도들과 같은 활동을 하고 같은 책임을 져야 한다. 이제는 교회가 예수님의 역할을 이 땅에서 당분간 대신해야 한다는 믿음이 없이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선출된 맛디아가 아무런 차별 없이 '열한 사도의 수에 가입했다.'는 사실도 이 점을 보장하는 것이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며 안수하여 믿는 사람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했다는 기록들도 같은 것을 알려준다. 지상에서 예수님이 하셨던 일들을 이제 사도들과 신자들이 믿음으로, 기도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계속하게 된 것이다. 복음을 전할 때에 성령님이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들에게 오셨다(10:47)는 기록은 교회가 독단적으로 그렇게 믿었다기보다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사역하셨음을 믿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들, 제자들,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세워놓은 구속사역의 인간적 도구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안디옥 교회에 특출한 사람들이 몇 명 있었다. 그들이 주님을 섬기며 금식하고 있을 때 성령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슴하셨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13:3). 안디옥 교회는 이 지시를 따라 '금식하ㅏ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냈다.'(3절). 눈에 보이는 파송지는 명백히 안디옥 교회다. 그러나 누가는 4절에서 이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전도여행을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교회의 일과 성령의 일을 동일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런 표현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회개하고 믿음의 길로 들어서는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해도 좋으냐는 난제에 부정적 답을 결정한 예루살렘 교회는 이 사실을 안디옥 교회에 통보하여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다.'(15:28)고 썼다. 성령과 교회가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함께 만들어간다는 믿음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표현일 것이다. 교회는-잘못 가지 않는 한-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것으로 부름을 받은 천국의 백성이요 대행자로 선택된 그릇이라고 말 할 수 밖에 없다.

 

  (3) 기독교 신앙이 구약 신앙의 연장임이 강조되고 있음도 사도행전ㄴ의 특별한 내용으로 제시하고 싶다. 누가복음 24장 25절에서 27절의 본문과 44절에 이르는 본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구약성경을 인용하시면서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야만 했다고 받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야만 했다고 설명하셨다. 사도행전에도 대부분의 복음 사건들이 구약 예언의 성취로 소개되었다. 그 주제들을 열거해 보면, 가롯 유다으 죽음과 다른 사도의 대체(1:16-20). 성령을 부어주심(2:1-21),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3:18; 8:32-33;13:27-37), 부활하심(2:24-31'26:33), 승천과 하늘에 계심(2:35-26, 28) 등 거의 모든 기독론적 주제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은 구약 예언의 열매인 것이다.

 

  예수님은 '나와 같은 선지자를 일으키라'(3:22)는 예언의 성취로 오신 분이시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선지자들의 자손', '언약의 자손'으로 불린다(25절), 예수님은 사람들이 구약시대부터 애타게 기다려 왓떤 바로 그 '다윗의 씨'(13:22-23)이다. 오리라던 바로 '그 의인'이시다(7:52). 딸다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회개와 예수님을 믿음으로 주어지는 죄사함도 구약적 신앙의 연장인 것이다(10:43).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가장 껄끄럽게 생각했던 이방인들의 선교와 구원도 예수님의 창작이거나 베드로 사도의 신비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시대부터 하나님께서 자신의 종들을 시켜 예언해 오셨던 것이다(13:17;15:16-18).

 

  데살로니가에 도착한 전도자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리스도이심을 구약성경을 가지고 증명했다(17:2-3)고 한다. 이 주제는 세 번째 전도여행 후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바울의 설교에 자주 등장한다. 그는 벨릭스 총독과 아나니아, 더둘로 그리고 몇 유대인 지도자들 앞에서 심문 받으며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및 선지자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는다'고 답변했다(24:14). 바울은 자신이 죄수로 잡혀 심문 받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기바라기 때문'이라고 이해했다(26:6). 다른 고백을 인용해보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거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 밖에 없으니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리라 함이다.'(26:22-23). 로마에서 유대 지도자들에게 설교할 때 바울은 이점을 크게 강조하였다. 

  사도행전은 복음을 구약성경의 바른 계승으로 이해하고 소개한다. 예수님이 오신 것, 그 예수님을 믿는 것은 따라서 구약 시대에 시작된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받아들이고 그 일원이 되는 것이다. 반대로 예수님을 반대하고 믿지 않으면 배척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저 버리고 고귀한 구속의 계획을 부정하는 것이다.

 

  (4) 열 두 사도의 역할도 사돠행전의 한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사도'란 누가에 의하면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 받으신 때부터 승천하신 날까지 예수님에 관한 모든 것을 보고 들었으며, 이것을 그대로 전파해야 할 사명을 받은 목격자들이다(1:22). 이 조건하에서 가롯 유다는 맛디아로 대체되었다. 바울의 위치가 중요하고 그의 사역이 광범위하기는 했지만 누가는 바울을 혼자 사도라고 부르며 맛디아 대신 열 두 사도적 권윌 가진 것으로나 제 13의 사도로 소개하고 있지는 않다. 그는 바나바와 바울을 이름을 언급함이 없이 넓은 의미로 한 번 '두 사도들'이라고 언급해꼬(14:4) 바나바와 함게(이 순서를 주의하라) 14장 14절에서 사도들이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누가는 '사도'란 직함을 교회의 창립과 관계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예수의 1차 목격자들로서 그들의 증거 사역을 통해 교회의 기반을 놓았다. 그들은 성령의 충만을 받아 복음전파의 도구가 되고, 복음을 관리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다. 맛디아가 보충된 사도들은 일곱 집사를 임명하여-그 주목적은 구제였음에도 불구하고-복음사역이 계속될 수 있도록 한다. 사도들은 믿는 사마리아인들을 인수하여 형제로 맞아들였다. 사도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전도한 것을 계기로 하여 사도들은 이방인 전도를 정당한 것으로 인정한다. 이방 기독교인과 관계하여 구약의 율법준수 문제가 대두했을 때 사도들은 예루살렘의 장로들과 함께 회의를 소집하고(16:4)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데 이로써 교회의 기초는 확고히 다져진 것으로 평가된다. 따라서 이 회의가 끝난 후에는 사도행전에서는 더이상 아무도 사도로 불리지 않았다.

 

  물론 사도들의 권위가 사라졌다고 추측할 수는 없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주신 전도의 사명을 수행하고 각 지역에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떠나 뿔뿔이 흩어져 나름대로의 복음사역에 몰두했다. 그러나 교회 설립과 관계된다(마 16:18-20참고) 직무는 일단락 되었다고 보는 것이 사도행전의 시각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그들을 이제 더 이상 사도라 부르지 않음으로써 교회의 기초라는 사도의 역할은 일단 완수한 것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바울이나 복음전파에 앞장선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임명된 이 목격자들과 같은 방향을 가는 것이기는 하지만, 교회 설리자란 의미의 사도직과는 다른 넓은 의미의 '사도'였다. 바울의 경우는 맛디아의 경우와 달랐다. 복음 전파자들과 교회를 돌보는 장로들은 계속하여 보충되었지만 사도직은 결원이 생겨도 더 이상 보충될 필요가 없었다.

  

  (5)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저술하며 무엇보다도 복음사건과 복음사역을 정확한 역사적 안목으로 정리하고자 했다. 누가는 현대적 의미의 역사가 즉 자신의 역사관을 따라 중요한 사건들을 빠짐 없이 모두가, 즉 불신자라도 쉽게 인정할 수 있는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기술한 그런 사람은 아닐지라도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있엇던 사건들을 그 지역의 그 출발점에 맞추어 하나 하나 추려서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누가는 세계사의 흐름을 주시하면서도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복음의 발생과정과 그 진행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하면서도(눅 2:1-2;3:1-2 참조) 막상 세계사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사도행전의 사건들이 결코 신앙의 유형으로 제시되지 않았음을 말해야 한다. 따라서 어떤 사건이든지 복음이 전파되고 수용되는 곳에 필연적으로 반복되어 일어나야 할 그런 사건처럼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오순절의 사건과 그 후에 발생한 초기 예루살렘 공동체의 모습도 신앙생활 혹은 교회 공동체의 본이 아니라 예수님의 약속을 기다리던 목격자로 이루어진 최초 예루살렘 교회가 경험한 역사적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만이 아니라 신약성경의 그 누구도 오순절의 사건과 그 결과들을 신앙의 이상형, 기독교 공동체의 이상적 모습으로 회상하거나 그렇게 모방하도록 강요하지 않았다. 

 

  이 때의 사건과 그 결과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필요를 인식하는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 필요를 인식하는 것이다.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이 방언의 능력으로 나타났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거나 신앙의 필요 조건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성령의 오심을 복음을 증거의 사역과 관련하여 말씀하셨다. 성령의 오심을 기다리던 제자들은 능력을 받고 곧 바로 그들이 보고 들었던 하나님의 크신 일들을 스스로 전파하기 시작했다.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었던 다른 언어권에서 온 유대인들은 그들의 방언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듣고 놀랐다. 복음전파와 다양한 언어라는 필요성이 결합된 사건이었다. 예수님은 성령의 약속이란 자신의 일과 복음의 증거란 제자들의 사명을 이렇게 절묘하게 결합시켜 놓으신 것이다. 

 

  초기 공동체적 삶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성령의 오심을 기다리던 최초 제자들이 몇 명 모여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오순절에 회개하과 세례를 받고 예수님을 믿도록 돌아선 3,000명의 새 신자들에 비교하면 상당히 적은 수리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아마도 고린도전서 15장의 500여명이 그 최대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맛디아를 선출한 날 모여 있었던 120여명을 최소치로 잡아도 좋을 것이다. 승천을 목격한 제자들이 매일 조금씩 줄어들었다고 보는 것은 승천의 영광스러운모습에 잘 어울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증거의 사명을 직접 받은 사람들은 사도들뿐이었다는 데서 발생한다. 3,000명의 새 신자들이 성령에 자극 받아 기쁨으로 모이고 사도들에게 그들이 새로 믿게 된 예수님의 사역과 교훈을 계속 배우자면 숫한 필요가 증가했을 것은 분명한 일이다. 이 필요를 누가 무엇으로 충당해야 하는가? 예수님을 직접 따랐던 최초 제자들이 이 일에 봉사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봉사와 섬김을 책임질 일곱 사람을 선출했다는데 이들이 복음 전파에 뛰어듦으로써 증인의 사명이 사도 이외의 사람들에 의해서도 수행되었고 스데반의 순교와 예루살렘 교회의 바개로 사방에 흩어진 신자들이 말씀을 전파했다는 기록과 함께 초기 공동체의 생활에 대한 언급이 더 이상 등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 문맥에서 의미심장하게 보아야 할 것이다. 처음의 긴박한 필요가 이제 해소되었고 따라서 공동체 생활은 사라졌다고 이해할 수 밖에 없다. 즉 오순절의 사건과 그 후속 결과들을 누가는 다만 역사적 사건과 경험으로 기록해 놓았을 뿐이다. 

 

  이러한 제한을 우리는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많은 사건들, 특히 이적과 은사에도 적용해야 할 것이다. 누가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사건들을 언제나 '기사와 표적' 혹은 '표적으로 설명했다. 이 일들도 믿음 내지 신앙생활의 필수 요건이 아니라 사람들을 믿음으로 불러오는 역할을 한 사건으로 이해한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언제라도 필요에 따라 특별하게 역사하실 수 있다. 사도행전의 모델을 따라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꼭 이렇게 꼭 저렇게 하셔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적 활동에 대한 엄청난 압력이 된다. 이적과 능력은 신자들의 필요에 따라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결정에 따라 사람들이 전혀 기대하지 않는 때에 언제라도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누가를 역사가로 부를 때 우리는 사도행전의 사건들을 꾸며낸 이야기로 과소평가하거나 매일 어디선가 계속되어야 할 일들로 과대평가하지 않을 것이다. 

 

  (6) 사도행전이 구약시대와 신약시댈들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라는 단일 주제로 서로 연결하고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계속 하나님의 약속의 백성으로 언급되며 복음을 가장 먼저 들을 수 있는 우선권을 가진 사람들로 등장한다. 만약 유대인들이 부정적으로 평가된다면 이것은 시대의 전환점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복음의 수용에 대한 유대인들 자신의 거부에 따른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연적으로 복음에 가장 가까이 있었다. 그들의 역사 끝에 하나님의 아들이 구속의 일들을 진행하시려고 오셨기 때문에 그들은 복음을 누구보다 쉽게 듣고 쉽게 이해하며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누구보다도 유대인들이 먼저 하나님의 약속에(2:39; 3:25)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권에 참여한다(3:26; 5:31). 이스라엘의 한 부분은-구약 시대나 마찬가지로-계속 복음을 반대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으로 나타나지만(13:46; 28:25-27)누구보다 긍정적으로 말해지는 부분도 여전히 이스라엘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들, 복음전도자들은 어디서나 재빨리 '믿음의 길에 들어서는 유대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교회의 초석이 된 사도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다. 최초의 제자들도 마찬가지다. 복음 사건의 목격자들이 되어 최초의 교회를 구성했던 밑거름 즉 기독교 첫 세대는 모두 유대인들로 구성된 것이다. 심지어 복음이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고 바울이 자신을 주로 이방인의 사도라고 인식했을 때도 복음은 어느 곳에서나 가장 먼저 유대인들에게 전해졌다. 구브로(13:5), 비시디아안디옥(13:14), 이고니온(14:1), 데살로니가(17:1), 베뢰아(17:10), 고린도(18:4), 에베소(19:8), 로마(28:17)에서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가장 먼저 회당을 찾았고 그곳에서 복음을 전했다. 이방인의 세계에서도 유대인들은 첫 교회의 주류를 이루었다. 유대인들은 교호가 탄생하는 하나님의 도구, 교회의 터전으로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복음의 수용에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낼 때 바울은-예수님이 자신의 지상 사역시에 종종 그러했던 것처럼-유대인에게 등을 돌리고 이제부터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전파되고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올 것이라고 심각하게 세 번씩이나 경고했다(13:4; 18:6,22,31). 같은 경고가 로마의 유대인들에게도 선포되었다(28:17-28). 물론 이 경고도 유대인들이 원칙적으로 복음에서 제외된다는 뜻은 아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시기 위하여 사용하셨던 특별한 민족 이스라엘은 다른 모든 민족과 같은 위치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즉 복음에 대한 태도 즉 회개와 믿음이 그 미래를 결정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한편으로는 그들의 역사적 유산으로 인하여 더 쉽게 복음을 수용할 수 있었던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이 그들의 선입 및 고정관념으로 작용하여 복음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민족으로 전락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실패가 이방인에게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부각되고 이 가능성을 따라 복음이 계속 선포되는 가운데-누가는 아마 이방인들로 구성되는 미래의 웅장한 교회, 복음의 나라를 꿈꾸면서-사도행전을 마감해 놓았다.

 

- 정훈택(총신대신대원과 화란 캄펜신학대학에서 공부했으며, 지금은 총신대신대원 신약한 교수로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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