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story/설교문

예레미야애가 1장 I 슬프다 이 성이여 I 부산성민교회 새벽기도회 홍융희 목사

by №1★↑♥ 2021. 8. 18.

  예레미야애가라는 제목은 우리에게 한자로 알려 있습니다. '애가' 슬픔의 노래. 그런데 실제로는 '애가'라는 슬픔의 노래보다 '애카'라는 원문에서 나온 제목입니다. 오늘의 본문이 '슬프다'로 시작을 하지요? 이것이 원어로 '애카'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원문의 제목은 그 책의 첫 마디가 제목입니다. 그래서 원래 이 책의 제목이 '애카'입니다. '아이고 어떻게? 어쩜좋아?'라는 말이 '애카'입니다. 

 

슬프다 이 성이여

  이 책의 제목이 '애카'인데, 이스라엘의 나라가 멸망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멸망하던 당시에 선지자인 예레미야가 기록했을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노래일 것이다라는 '예레미야'를 놓고, '애카'라고 하는 첫 마디로 이 책의 제목을 삼은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물론 우리말로 해석해 '창세기', '출애굽'라고 명명하잖아요? 물론 그것도 좋습니다. 그게 대부분 중국에서 이 책을 번역하면서 제목들을 붙인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히브리 원문의 제목을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야 원래 이 성경이 쓰여지던, 읽혀지던, 전해지던 그 문화권의 뉘앙스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애굽에서 탈출했다라고 말하지만, 원래의 그 제목은 '그리고 그 이름들'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이전에는 그냥 무리들이었어요. 아무런 이름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출애굽하면서 하나님께 이름을 얻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까? 본인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으니까.. '야~ 변덕스러운 너희들에게 내 이름을 주지 않고, 내가 내 이름을 갖겠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셨거든요. 이처럼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다만 노예에서 해방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름이 주어진 그들에게 정체성이 주어진 아주 중요한 책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이름들'이라고 시작하거든요. 모든 책들은 그렇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책들을 이해할 때는 첫 마디가 뭐냐?가 중요한데, 이 예레미야의 애가의 첫마디는 '슬프다'입니다. '아이고 이럴 수가' 그래서 우리가 '애카'라는 제목을 제대로 이해하면 전체의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스니다.

  그런데 왜 '애카'일까? 왜 슬프다 일까? 여러분, 우리는요? 감정이 굉장히 메마른 삶을 살고 있어요. 그래서 아무리 슬픈일이 있어도 우린 잘 슬퍼하지 않아요. 그리고 자꾸 계산을 하는데, 예레미야애가의 방식은 뭐냐? 슬픔으로 읽어야 해요. 아주 슬픈.. 그야 말로 내 인생 가장 슬픈 날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여러분 이 슬픈날이 왜 찾아올까요?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라고 오는 것이 아닐까? 여러분 기쁜 날은 금방 갑니다. 여러분 신나는 날, 기쁜날은 금방 금방 지나갑니다. 그런데 정말 내 마음이 너무너무 아프고 슬픈날은 시간이 안가요. 시간이 안간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그만큼 밀도가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민하고 밤잠 이루지 못하는 밤은 그렇게 길 수가 없어요. 아니 잠자면 후딱 지나가는 시간인데, 잠 못 이루는 밤은 너무너무 길잖아요. 왜 그럴까요? 내 삶의 밀도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내가 왜 태어났지?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하고 있지? 내가 왜 이런 슬픔 가운데 앉아 있지?'라는 것은, 자기를 돌아보게 되는 시간. 그래서 더 내 삶이 지금까지의 삶보다 더 진하고 내 삶이 도 곤고해지는 시간이 바로 이 슬픔의 시간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이 예레미야애가 1~5장을 읽을 때는, 정말 마음을 내려놓고 곧 눈물이 떨어질 것처럼 그렇게 읽어야 합니다. 

  시 거든요? 시라는 것은 읽을 때는 산문과는 다릅니다. 시인의 마음을 읽어야 하는데, 지금 예레미야의 마음은 어떤가? 예레미야의 마음은? 철저하게 절제되면서도 절제된 슬픔을 아주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너무 슬프면 소리가 안나요. 너무 슬프면 소리를 못 질러요. 지금 하나님이 구원한 백성, 이스라엘 백성.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고 왕은 끌려가고, 모든 고관들은 다 포로로 잡혀가고 백성들은 탄식에 빠져 있는 이 시간을 바라보고 있지만 예레미야의 슬픔은 굉장히 절제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레미야 1-4장까지는 '답관체'입니다. 알파벳 a,b,c,d,e 순서대로 절절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1절이 ㄱ으로 시작되면, 2절은 ㄴ으로 시작되고, 3절은 ㄷ으로 시작되는.. 너무 너무 슬퍼 죽겠는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히브리 알파벳이 총 22자거든요. 그래서 오늘 본문이 22절까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시를 쓰기도 어렵겠지요? 그런데 이 슬픔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렇게 쓰고 있다. 어마어마 한 거죠? 3장에 가면 66절인데, 왜 66절인가? 알파벳을 하나당 3절씩 넣어서 66절을 만든거에요. 그리고 5장은 22절로 되어 있지만, 답관체는 아닙니다. 이게 시편에서도 이렇게 쓰는 시가 가끔 있거든요. 당시에 시를 쓸 때 고도의 시가 이 답관체인데 예레미야 애가는 너무너무 슬픈데도 그 슬픔을 절제하면서도 답관체로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하는 것을 오늘 '왜 이 슬픔을 예레미야는 절제하면서 표현하고 있는가? 이 슬픔가운데 내밀하게 곤고하게 굳어지고 있는 부분은 무엇인가?' 같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슬픔 가운데 무엇을 붙잡아야 할 것인가? 1절입니다. 1절a,'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사람들이 전에는 많이 많이 왔다갔다 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다 누구였습니까? 예배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에는 항상 예배하는 사람들이 가득했고, 찬양하는 소리로 가득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적막하게 앉았다. 여러분 여기서 '전에는', '이제는' 여러분 이게 슬픔의 이유입니다. 슬픔이 찾아오는 이유가 뭐냐? 전에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 하나도 대단하지 않아 보였어요. 당연한 것 같았어요. 전에는 당연했던 것이 슬픔을 당하니까 이제는.. '너무너무 슬프구나! 아, 그 때 사람들이 많이 앉아 있던 것이 너무너무 좋았던 거구나!' 알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또 1절b'..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 '전에는 이제는 전에는 이제는 전에는 이제는' 세번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게 슬픔의 이유입니다.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였고,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 그때는 그것이 별로 좋아보이지 않았어요. 너무너무 당연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적막하게 앉았고, 과부같이 앉았고, 강제노동을 하는 지금에와서 생각해보면 전이 정말 좋았구나! 정말 그 때가 은혜였구나! 그게 행복이었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여러분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평상시에 당연하게 여깁니다. 나는 이정도 대우 받는 것이 당연하고, 나는 이정도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하고, 이정도의 삶을 누리는 것이 내게 너무 당연해.. 아무런 감사도 없어요. 그런데 그 감사의 거리를 잃어버리고 나면.. 슬픔이 찾아오고 나면 그 때에야 비로서 우리는 '아.. 전에는..'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에 누렸던 것이 정말 은혜였고, 감사였고, 하나님의 손길이었구나!' 이제는 이 막막한 순간이 찾아오기 전까지 우리는 전에 누리던 감사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슬픔을 주신다. 그래서 1절에 담겨 있는 애카의 의미, '전에는, 이제는' 여러분 그런데 그 전에는 사실 무엇입니까?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애카의 날이 오면 지금 누리는 모든 것이 전에는이 됩니다. '아, 그때 우리 정말 좋았잖아.' 그러니까, 지금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가정에 감사해야 하고, 지금 우리 일터와 지금 우리의 교회에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감사하고 있습니까? 실제로는 감사보다 불평이 더 많고, 남이 더 좋아보이고, 남이 더 대단해보이고, 내것은 별로 귀해보이지 않잖아요. 여러분, 이러다가 애카의 날이 옵니다. 애카의 날이 오면 비로서, '야.. 그때..'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하나님께로 더 나아가기로 원하십니다. 지금 이 순간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놓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이제는의 때가 되면 어떻게 됩니까? 2절입니다. '밤에는 슬피 우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들 중에 그에게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들도 다 배반하여 원수들이 되었도다' 여러분 밤에는 뭐해야 하나요? 평안히 자야지요. 그런데 잠이 안옵니다. 왜? 슬피 우느라.. 눈물이 뺨에 흐르느라 잠을 잘 수가 없는 거예요. 계속해서 뺨에 눈물이 흐르는 거예요. 이 시의 시제를 살려서 읽으면, '눈물이 흐르고 흐르고 흘러 계속해서 흘러서 흘러서 그치지 않는군!' 그냥 슬피 우는 정도가 아니라, 밤마다 밤마다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서 계속 눈물이 흐르는 것입니다. 왜요? 후회의 눈물입니다. 전에는.. 누리던 그것을 이제는 잃어버렸어요. 그런데 무엇을 잃어버렸냐? 사랑하는 자들을 잃어버렸고, 친구들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사랑하는 자들이었는데.. 이 나라가 망하고, 민족이 망하고, 그들을 위로하는 자가 없는 자가 되었고,  친구들이 나의 원수들이 되었고.. 그 때에는 결국 앗수를 믿고, 애굽을 믿고, 모압을 믿었고, 암몬을 믿었는데 이제는 다 배반하고 등을 돌려버렸어요. 원래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어요. 여러분 우리는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것들을 더 많이 믿어요. 그런데 그 보이는 것들이 확실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확실하지 않아요. 평소에는 모르지요. 그런데 그 날이 되면 우리의 건강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우리의 물질이 얼마나 금새 사라지는 것인지, 우리의 명망이라는 것이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지를 깨닫게 되지요. 분명히 오래도록 쌓아왔는데 한순간에 날아가는 것을 보면서 우리의 건강도 물질도 명망도 한 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보면, 우리는 그 때가서 깨닫게 되지요. 아! 이것들이 다 나를 지켜줄 수가 없는 것이구나! 

 

반응형

 

  3절입니다. '유다는 환난과 많은 고난 가운데에 사로잡혀 갔도다 그가 열국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쉴 곳을 얻지 못함이여 그를 핍박하는 모든 자들이 궁지에서 그를 뒤따라 잡았도다' 여기서 나오는 중요한 단어가 '쉴곳'입니다. '마노아흐'라고 하는 '쉴곳'이 무엇을 상징하는가? 바로 하나님의 품입니다. 이 쉴곳이 뭐냐? 그냥 잠시 쉬었다 가는 휴게소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의탁할 만한 하나님의 품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들이 겪는 가장 큰 문제가 뭐냐? 유다의 환란과 많은 고난 가운데 제일 큰 문제는 쉴 곳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을 그들은 떠났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고난이 찾아왔는가? 그들이 쉴곳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의 품을 떠나 그들의 욕망을 따라 갔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4절은 뭐라고 말합니까? '시온의 도로들이 슬퍼함이여 절기를 지키려 나아가는 사람이 없음이로다 모든 성문들이 적막하며 제사장들이 탄식하며 처녀들이 근심하며 시온도 곤고를 받았도다' 자, 이렇게 슬픔을 당하는 때가 되면, 사람들이 다시한번 하나님을 찾고, 우리의 잘못을 깨우치고 뉘우치고, 회개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시온의 도로들 마저 슬퍼합니다. 왜? 왕래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절기를 지키러 나가는 사람이 없어요. 하나님께 나아가 어떻게든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해보려는 사람들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게 지금 '애카'의 이유입니다. 이 '애카'는 나라가 망했기 때문이 아니라, 나라가 망했음에도 아무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이 '애카'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찾지 않아요. 아무도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아요. 아무도 이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을 찾지 않아요. 그래서 오히려 도로들이 슬퍼한다는 것입니다. '야, 우리가 비어 있으면 안되는 거 아니야? 지금 유대인들이 우리를 밟고 지나 예루살렘에 절기를 지키러 가야 하는거 아니냐? 왜 아무도 가지 않느냐?' 모든 성들이 적막해요. 제사장들은 탄식해요.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예배가 드려지지 않는 거예요. 처녀들이 근심합니다. 처녀들이 춤을 추면서 축제를.. 하나님을 향한 노래를 불러야 하는데, 아무도 그들을 찾지 않아요. 시온도 곤고를 받았어요. 시온산이 적막하게 내려 앉아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이 '애카'의 이유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에는 아직 애카가 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하나님 전에 나와 있잖아요. 여러분 왜 예배가 소중합니까? 예배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요. 예배가 나에게 돈을 줍니까? 예배가 나에게 건강을 줍니까? 예배가 나에게 명성을 줍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배하는 백성은, 망하지 않습니다. 예배하는 백성은 소망이 있습니다. 예배하는 백성은 슬프지 않습니다. 왜? 우리가 그 마음의 쉴 곳, '하나님의 마노아흐'를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와서 절기를 붙잡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백성은요? 다시 그 속에서 다시 가능성과 다시금 능력과 평안이 다시금 싹터 오르는 것입니다. 

 

  5절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소망인데요. 같이 읽겠습니다. '5 그의 대적들이 머리가 되고 그의 원수들이 형통함은 그의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곤고하게 하셨음이라 어린 자녀들이 대적에게 사로잡혔도다' 눈에 보이는 현실은 그의 대적들이 머리가 되고, 원수들이 형통합니다. 그런데 왜 그런가? 그의 죄가 많음으로.. 죄가 많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구나!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 않지요. 누가 일합니까? '여호와께서 그를 곤고하게 하셨다.'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 슬픔은, 이 애통은 어쩌다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우연히 이렇게 된 것이 아니고, 문제가 문제를 만나 진화해서 온 것이 아니구요. 여호와께서 그를 곤고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에 희망이 있는거냐? 여호와께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나의 이 문제와 나의 이 아픈 상황은 그냥 닥쳐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개입하셨다. 하나님의 놀라운 큰 손이 나의 애카 가운데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해결책이 어디에 있을까요? 해결책도 여호와께 있는 것입니다. 그걸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걸 모르면 막막하고 두렵고 거기서 끝나버립니다. 그런데 거기서 망하지 않는 것은, 여호와께서 내게 곤고함을 주셨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주 나의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지금 나는 다 깨져버렸어요. 아무런 반석도 없어요. 그런데 주님이 나의 반석이시다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호와께서 나를 곤고하게 하셨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하냐? 11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애 1:11 '그 모든 백성이 생명을 이으려고 보물로 먹을 것들을 바꾸었더니 지금도 탄식하며 양식을 구하나이다 나는 비천하오니 여호와여 나를 돌보시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나는 비천하오니 여호와여 나를 돌보시옵소서. 여호와여 하나님만이 나를 돌보실 수 있습니다. 나의 이 슬픔 가운데, 나의 이 애카 가운데 나를 살릴 이는 하나님 밖에 계시지 않습니다.'라고 하는 고백인 것입니다. 여러분, 여호와를 찾기전에 어땠다고요? 그 모든 백성들이 생명을 이어보려고 살아보려고, 보물로 먹을 것들을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그 귀한 보물로 먹을 것으로 바꾸었더니 어떻게요? 탄식하며 양식을 구하나이다. 보물로 양식을 바꾸었더니 그 양식이 사라져버렸어요. 얻을 수 없었어요. 결국 보물도 잃고 먹을 것도 잃고 먹을 것을 구하고 있어요. 아직도 양식을 구하고 있어요. 여러분 보물은 우리를 살릴 수 없습니다. 양식도 우리를 먹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여호와여 나를 돌보시옵소서. 보물도 아닙니다. 양식도 아닙니다. 여호와만이 나를 돌보실 수 있습니다. 라고 하는 고백이 우리의 애카 가운데 우리를 살리는 유일한 믿음인 줄 믿습니다. 

 

 

우리 이 시간 기도할 때, 하나님 저의 슬퍼해야 할 문제는 무엇입니까? 제가 잃어버린 애카는 무엇입니까? 제가 당연히 여기고, 감사하지 않는 삶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지금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께 내 마음을 드리고 지금 하나님을 반석으로 삼아 내가 그 위에 서리라. 주 나의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오직 하나님을 내 소망으로 삼아 오늘도 다른 것 기웃거리지않고 하나님 주시는 능력 위에 서서 이 하루를 주님과 동행하게 하옵소서.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시고, 우리를 통하여 누구를 살려요? 우리의 다음 세대, 우리의 자녀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 교회와 가정 가운데 넘쳐날 줄로믿습니다. 

 

기도

하나님, 예레미야애가를 시작합니다. 애카, 슬프다. 아프다. 어찌 이리 되었는가? 이 곤고한 날이 오기 전에 저희들이 오늘의 감사를 회복하기 원합니다. 오늘 나를 만나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 나를 사랑하시고, 내게 말씀을 주시고 내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주님의 손길이 얼마나 존귀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오늘도 다시금 내 삶의 목적으로 삼고, 내 삶의 반석으로 삼아 그 위에 서는 백성들이 되게 하옵소서. 이번 한주간도 믿음으로 출발합니다. 주여, 아무리 아파도 아무리 어려워도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께 예배하는 이 자리를 떠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예배의 자리가 얼마나 나에게 주어지는 소망의 자리인지 하나님 허락하시는 은헤의 자리인지를 알아 예배 가운데 회복하게 하시고 삶 가운데 예배하게 하셔서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하루 한 주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이여 나를 돌봐주시고, 나의 눈을 띄워주시고 나의 소망이 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