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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story/설교문

[새벽설교] 누가복음 8:42-48 I 아무도 몰라줘도 괜찮아-혈루증 여인 I 김병삼목사

by №1★↑♥ 2021. 6. 17.

[새벽설교] 누가복음 8:42-48 I 김병삼 목사.  미국의 잡지 중에 크리스챤니티 투데이가 있습니다. 일반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런 설문을 조사했습니다. 

아무도 몰라줘도 괜찮아-혈루증 여인 

  "당신은 외로움을 느끼십니까?"라는 질문에 몇 프로나 "그렇다"고 대답을 했을까? 놀랍게도 80% 정도의 사람들이 종종 외로움을 느기며 살아간다고 대답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숫자를 하나 보여드리려고 하는데요. 

자살율
자살율

 

 

  미국에서 2016년, 1년간 자살한 사람들의 수가 44,965명입니다. 2013년 1년 동안 총기로 사망한 사람들이 33,600명 입니다. 안 놀라세요? 911테러에 죽은 사람이 3,400명입니다. 우리는 911를 테러를 굉장히 큰 사건이라 생각하는데.. 그것이 10배 넘는 사람들이 자살 혹은 총기로 사망을 합니다. 저 사람들의 특징이 외로움 가운데 자살을 하거나, 총기사고는 외로움에 대한 불만이 상대방에게 표출되는 범죄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2007년~11년, 5년간 72,000명이 자살을 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숫자냐하면? 2003~2011년 이라크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가 39,000명, 아프가니스탄 전쟁 10년 동안(2000-10) 사망자가 15,000명이었다고 합니다. 전쟁이 굉장히 무섭다고 하는데, 외로움 가운데 고독하게 자살한 사람들의 숫자가 그보다 훨씬 많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통계에 의하면 매일 40명 정도의 사람들이 자살을 한다고 해요. 외로움입니다. 외로움은 때때로 다른 사람에게로부터 오는 소외감도 있지만, 자기 스스로 느끼는 고독감도 있습니다. 이 외로움에 대한 문제는 어쩌면 80%의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일지 모릅니다. 신학자 '폴틸리히'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혼자 있는 것은 고독이요 마음의 쓰라림이지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마주하는 시간이며, 세상을 살아갈 에너지를 회복하는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외로움의 문제는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다." 우리 인간이 느끼는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보편적 감정입니다. 아무도 우리를 만족시켜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보편적인 외로움이 우리들에게 올 때의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없을 때 그 외로움으로 인해 우리들이 죽어가지만 그 외로움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 우리를 만들어 가시는 시간이란느 것입니다. 

 

  오늘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이 여인을 통하여, 이 외로움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이 여인에게 찾아온 영광을 보려고 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이 여인에 대해서 취할 수 있는 정보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12해를 혈루증을 앓았다. 또 다른 하나는 아무에게서도 고침을 받지 못했다. 이 여자에 대해서 말하는데 영어성경은 이 여인에 대해서 'a women'으로 간단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정관사가 쓰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누군지 모르는 그 한 여인. 그러니까 이 여인은 어떤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어떤 한 여인이라고 합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밀려들고 있는데 군중 가운데 한 여인, 이 여인이 얼마나 외롭고 고독했을까?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나는 주변인이고, 사람들 틈에 낄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큰 외로움이었을까요? 오늘의 말씀이 그렇게 시작을 하고 있어요. 눅 8:42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밀려들더라

  사실 우리가 제일 힘든게 그런게 아닐까요? 많은 사람들 속에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외롭다'고 느끼는 감정. 왜? 나를 알아주지 않으니까.. 때때로 우리가 힘들고 아픈 것은 나를 알아 주었으면 좋겠는데.. 누구도 우리의 아픔을 이해해주지 못한다는게 아닐까요? 이 여인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던 것 같아요. 게다가 예수님께서 가실 때에라고 되어 있는데 NIV영어성경을 보면 'As Jesus was on his way'로 표현되고 있더라고요. On his way. 예수님이 자신의 길을 가고 계셨어요. 오늘의 말씀에 보면, 12해를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만나셨는데.. 그 길은 고침받은 여인을 위한 길이 아니라.. 예수님은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그 길을 가고 계셨다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은 무엇을 위해 그 길을 걷고 있으셨을까요? 오늘의 말씀 바로 앞에 나오는 부분입니다. 회당장이 야이로 예수님께로 나아와 자신의 딸 아이를 고쳐달라고 간청을 듣고, 야이로의 딸을 고쳐주려는 길 위에 있었고, 많은 군중들은 예수님에게 밀려들었습니다. 여인이 예수님의 길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 위에서 여전히 곁가지에 불과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43절,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은 자기 병을 고치려고 노력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 당시에 이런 노력을 많이 했던 것을 봐서는 가난하거나 못살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노력도 할 수 있을 만큼 돈이 있었다는 것을 봐서는.. '고침을 받지 못했다.'라는 부분을 유진 피터슨이 쓴 '메시지 성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여자는 가지고 있던 돈을 의사한테 전부 썼으나 어느 누구도 그녀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돌봄을 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 돈이 있었는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못하고, 해결할 수 없는 그 일, 혈루병이라는 것이 여자들에게는 하혈을 의미합니다. 당시 2000년 전 상황, 근동지방의 상황을 생각하면 그렇게 쉽게 목욕을 할 수 없었을 거예요. 피를 흘려요. 잘 씻을 수 없어요. 사람들에게는 격리되는 것도 참 힘든 일인데.. 어쩌면 몸에서 냄새도 나고 사람들이 이 여인의 옆에 가면 멀리 하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참 힘든 상황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합니다. 

 

  제가 미국 박사과정에 있을 때, 10여국에서 온 많은 나라들이 함께 공부하고 있었어요. 그 중에 짐바브웨에서 온 한 목사님이 있었어요. 정말 형언할 수 없는 냄새가 났어요. 정말 제가 과장을 하나 하지 않고요. 수업 시간에 그 냄새 때문에 밖에 나가서 숨을 한번 쉬고 올 정도로 심했어요. 그래서일까요? 누구도 그 옆에 먼저 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가능하면 조금 더 떨어져 있고 싶었던 것 같아요. 이 냄새라는 것이 참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제가 오래된 환자들을 심방할 때가 있습니다. 환자와 가족들은 냄새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잘 모릅니다. 그런 곳에 심방할 때면 참 힘이듭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손주들이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잘 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나이드는 것도 참 비참한데, 내가 원했던 것도 아닌.. 우리가 사회적으로 격리되는 것도 참 힘든데.. 가까운 사람들이 나와 같이 하려고 하지 않는 것, 공동체로부터 가족으로부터 내가 가까이 가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에게 찾아왔던 고독감. 외로움은 참 힘든 일이었을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 여인을 위해 가고 있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예수님께로 나아왔을 때,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에 이 여인이 주인공이 되는 일이 여기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43-45절, '43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44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4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무리가 밀려들어 미나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지근거리 옆에서 보좌하고 가는데, 아무도 예수님을 만졌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라는 부분을 영어성경은 또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the edge of clock' 예수님의 옷 끝자락에 손을 대었다. 만진게 아니라, 터치했다는 거예요. 이 여인의 마음을 생각해보세요. 늘~ 사람들의 따롤림과 외면을 받았던 여인이 군중가운데 예수님을 따라가다가 붙잡지 못하고 살짝 터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댔느냐?" 베드로가 볼 때, "아무도 예수님께 손을 댄자가 없습니다. 누가 예수님을 만졌겠습니까? 하도 많은 사람들이 밀려드니 부딪친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오늘 이 부분을 상상력을 더해서 말씀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46-48절 '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47 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이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하니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여기서 두가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여인이 손 댄 것을 아셨을까? 그 여인의 아픔이 예수님에게 전해진 거예요. 나인성 과부의 이야기를 기억하시죠? 예수님의 마음이 그 여인의 마음에게 들어갔어요. 그 여인의 아픔 가운데 예수님의 마음이 들어가고 예수님의 능력이 나간 걸 아셨어요. 그리고 여인은 그것을 숨기지 못할 것을 알았어요. 왜? 지금 이 여인은 예수님의 옷 자락에 손을 대었을때, 자신의 혈루근원이 마르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숨기지 못할 것을 알고 예수님게 떨며 엎드려 이야기 합니다. 

 

  이번 새벽에 말씀을 전하는 중에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주님 앞에 서는 선한 두려움으로 서서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주님 앞에 내가 죄인이라고 이야기 할 때, 우리들을 사용하시고, 평안히 가라고 하시는 주님을 경험하고, 그 영광을 보기 원합니다. 말씀을 준비하다가 이 장면에서 저에게 떠 오른 찬양이 있었어요. '거친 세상에서 실패하거든 그 손 못 자국 만져라 고된 일 하다가 힘을 얻으리 그 손 못 자국 만져라' 그런데요. 찬양을 하다가 제가 자연스럽게 가사를 이렇게 바꾸었어요. '거친 세상에서 실패하거든 주님 옷 자락 만져라 고된 일 하다가 힘을 얻으리 주님 옷 자락 만져라 주님 옷자락 만져라 주님 옷자락 만져라 주가 널 지켜 인도하시리 주님 옷 자락 만져라' 오늘 이 새벽에 주님의 옷 자락을 만질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붙잡는 것이 아니라, 주님 옷 자락을 터치하는 것만으로도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내 능력이 나갔느니라. 누가 내 옷자락을 만졌느느냐?" 오늘도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일본의 기독교인 중에 유명한 성자 두 사람을 꼽자면 한 사람은 '우찌무라 간조' 그리고 '가가와 도요히코'라는 사람입니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당시 동경의 시장이었던 아버지와 기생이었던 어머니의 첩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늘 본처의 자식들에게 어려움을 당하고, 눈칫밥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멸시와 천대.. 그래서 자신은 늘 주변인이라 생각을 하고 마음의 병이 많이 깊어져 결국 폐병에 걸리게 됩니다. 부모를 원망하고 자랐던 가가와 도요히코가 어느 날, 담벼락에 우두커니 서 있는데 구세군 전도대가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전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사랑하십니다." 그 때 담벼락에 기대있던 가가와 도요히코는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사랑하십니다라는 말을 듣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세군 전도대 앞으로 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누구나 사랑하신다고요?" "그렇습니다." / "하나님은 기생의 아버지도 사랑하시나요?" "그렇습니다." / "하나님은 어떤 사랑하십니다."는 그 말 한 마디가 가가와 도요히코의 상처를 치유했고, 그의 인생을 바꾸어놓았고, 일본의 성자라 불릴만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도 사랑하시나요?"

  "열두해를 혈루병을 앓으며, 냄새 나서 사람들에게 다돌림을 받던 나도 사랑하시나요?" "그럼 너도 사랑하지~" / "주님 제가 평생을 이렇게 살아오며 마음 아프고, 평생을 살아오면서 자신 없이 살수 밖에 없었던 내 삶도 주님 사랑하시나요?"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오늘 48절의 말씀, 유진 피터슨의 성경을 보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너는 나를 신뢰하는 믿음의 모험을 했고, 이제 다 나아서 온전해졌다. 잘 살아라. 복 되게 살아라." 예수님께서 그렇게 보내셨어요. "딸아~"라는 말은, 성경에서 딱 한번 여기에서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딸아~" 이 말은 성숙하고 아름다운 여인을 부르는 호칭이었다고 해요. 예수님께서 12해를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향해서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이제 네가 평안히 가라~" 이 말 속에는 많은 것들이 들어 있어요. "얼마나 많은 날들을 고생하며 살아왔는지 내가 안단다 나를 두려워하지 말고 평안히 가라~" "혹시 내 안에 뭔가 잘못된 일을 해서 이런 병을 앓고 있다는 죄책감이 있었더라면 그것이 너의 잘못이 아니란다. 이제 네가 이 병과 열두해를 살았던 염려를 가지고 네가 살아갈 필요가 없단다. 딸아 평안히 가라" 오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편 8: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제가 무엇이관대 나를 이렇게 기억하시며 나를 부르셨습니까?" "사랑하는 딸아, 사랑하는 아들아 평안히 가라" 오늘 주의 은혜 가운데..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이 말씀 붙들고 이 세상으로 나가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일므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 여인의 마음으로, 이 여인의 마음으로 주님 옷 자락을 만졌으면 좋겠습니다. '거친 세상에서' 찬양하며, 믿음으로 쥠의 옷 자락을 만지는 새벽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찬양하시겠습니다. 

 

 

찬양 - 주님 옷 자락 만져라

 

  우리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열두해를 혈루증을 앓았던 여인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는 그의 인생이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주님 가만히 보니 우리들의 삶도 다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때론 외로웠고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지 못하는 것때문에 참 고독했고, 힘들었습니다. 어느 날, 이 여인이 주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주님을 따라가며 많은 군중들 가운데 휩쌓여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미약한 존재였지만.. 부끄럽게 주님께 나아가 주님의 옷에 손을 대었을 때,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옷을 만졌느냐? 나에게서 능력이 나갔느니라" 주님, 우리가 부끄러운 이 손으로 주님의 옷자락을 붙잡습니다. 주님, 외롭고 힘들고 많이 아파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딸아, 사랑하는 아들아~ 평안히 가라. 네가 놓임을 받았느니라. 평안히 가라. 너와 함께 할것이니 평안히 가라~" 오늘 예배하는 자들 중에 우울증으고, 공황장애로, 불면증으로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이제 주의 이름으로 놓임을 받을 줄 믿습니다. 하나님, 죄책감으로 많은 수치심으로 마음이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제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네가 놓임을 받을지어다. 평안히 가라. 평안히 가라." 믿음으로 주님 말씀 붙들고 평안히 가게하여 주시옵소서. 승리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특송 - 주 발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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