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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story/설교문

[설교문] 주일예배_딸아, 평안히 가라 I 마가복음 5:25-34 I 주승중 목사

by №1★↑♥ 2021. 6. 13.

주일예배 I 마가복음 5:25-34

딸아, 평안히 가라

 

  우리는 지난 3주간 동안 예수님께서 그의 공생애 동안 죽은 사람을 살리신 세 가지 사건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는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청년을 장례행렬에서 다시 살린 사건이었고, 또 하나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를 무덤에서 일으킨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지난주에 들었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린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신 사건이 진행되고 있을 때 그 사이에 끼어든 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고 있던 이름 없는 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보다 중요한 인물로 보이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에 대한 이야기, 즉 죽은 자가 살아난 놀라운 이야기의 중간에 끼어들어 있습니다. 그녀의 바로 앞부분 21-24절까지는 그 당시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었던 회당장이 자신의 병든 딸을 살려달라고 예수님 앞에서 엎드려 간청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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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이렇게 끼어든 그녀의 이야기 뒷 부분에서 또다시 회당장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너무나도 놀라운 이야기. 죽은 자를 살리신 이야기가 완성됩니다. 이렇게 이 여인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영향력 있었던 회당장의 죽었던 딸이 살아난 엄청난 이야기의 중간에 끼어들어 있습니다.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 사람의 짧은 이야기가 대단하고 중요한 이야기 중간에 삽입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가지게 되지요. '왜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부정한 여인의 이야기가 죽은 사람을 살리는 엄청난 이야기를 뚫고 들어와 있는가?'하는 질문입니다. 마가는 왜? 죽은 자를 놀라운 이야기를 단숨에 끝내지 아니하고, 초라하고 무기력한 한 여인의 이야기를 그 속에 삽입하고 있는 것일까?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이 질문의 답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이 질문을 가지고 이제 우리는 이 여인에 관심을 기울여 보고자 합니다. 이 여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한 마디로 이 여인은 크나큰 중병에 걸려 있었고, 그 중병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을 부정하게 만드는 저주 받은 사람으로 여겨지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병으로 인하여 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의하면, 그녀가 겪고 있는 고통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녀는 지난 12년 동안 계속해서 혈루증을 앓아왔습니다. 혈루증은 지속적으로 하혈을 하는 부인병의 일종이지요. 그러므로 그녀는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양의 피를 쏟아내면서 생명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고통을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또 혈루증은 레위기 15장에 의하면 '부정한 병'으로 간주되었고, 그 병을 앓는 사람과 접촉을 하는 사람까지 부정하게 되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녀는 아마도 몸을 꽁꽁 싸매고 있었을 것입니다. 혈루증 환자는 누구에게나 환영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싸매고 있어야 했고 역겨운 냄새를 감추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은 26절에 의하면 '그동안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당했다.'라고 합니다. '많은'이라는 말이 두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녀는 이 병을 고치고자 모든 노력을 쏟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효험도 얻지 못했고 가지고 있는 재산만 다 낭비하게 됩니다. 그녀는 여전히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모든 것을 다 잃었는데 그녀의 병은 오히려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고 오늘 본문은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그녀는 건강도 잃어버리고, 돈도, 희망도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채 탄식하고 있었습니다. 의학적으로 치료가 불가능한 육체적인 고통, 사람들로부터 외면받는 사회적인 고통, 종교적으로도 부정한 사람으로 간주된 종교적 고통 그렇게 그녀는 많은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그녀에게 어느 날,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된 소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마가는 27절에서 이렇게 간단히 표현했지요. '예수의 소문을 듣고' 매우 간단한 표현이지만 사실 이 행간에는 많은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실의와 좌절가운데 빠져 있는 그녀에게 어느 날 모든 병자를 고치시고, 악귀들을 쫓으시고 38년 동안 걷지 못하던 사람을 일으키시며, 눈먼 자를 뜨게 하시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기적을 일으키신 분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놀라운 말씀으로 바람과 물결도 꾸짖는 분이라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그분은 죽은 자도 일으키셨다는 놀라운 이야기가 들려왔습니다. 그녀는 그분에 대한 이러한 놀라운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속에 마지막 실낱 같은 희망을 붙잡게 됩니다. '내가 만일 그분의 옷자락이라도 만지기만 내 병이 나을 수 있을 거야' 드디어 그녀는 마지막 희망을 붙잡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모험을 하리고 결단을 하고 예수님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그 마음속 깊은 곳에 주님에 대한 간절한 믿음과 소망. 즉, '그런 분이라면 내가 그분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면 내가 나을 수 있을 거야!'라는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녀가 이런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은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가 이것을 분명히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마 9:20-21 '20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21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그녀는 마침내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그녀는 수 많은 군중들 속에서 능력의 예수님을 만지기 위해서 손을 내밉니다.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그녀였지만.. 그녀는 마지막 소망을 가지고 온 힘을 다하여 그 손을 내 뻗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창백한 손을 뻗어 예수님의 옷가를 만집니다. 그 만짐은 도시의 길거리에서 우연히 스쳐 지나가는 그런 만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간절한 소망과 믿음의 만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마침내 예수님의 옷가를 만졌을 때, 그녀가 그토록 소망했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녀는 만진 즉시로 피가 멈추는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누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눅 8:44,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엄청난 일이 벌어졌는데, 그 무엇으로도 고침 받을 수 없었던 피가 즉시로 멈춘 것입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고침 받았음을 알았습니다. 오늘 본문 29절입니다.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자신에게서 권능이 나갔는 줄 곧바로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통해서 누가 고침을 받게 되었는지, 누가 이렇게 거룩한 권능이 흘러가도록 한 것인지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아마도 예수님의 이 질문은 그녀를 찾으라는 명령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쟈들은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누군가가 에수님을 살짝 만진 것이 대수이겠나 싶어 예수님의 말씀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어요. 그래서 베드로는 별생각 없이 즉흥적으로 이렇게 대답합니다. 31절과 누가복음 8:45를 의역을 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 보세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누군가가 밀었겠지요? 그러나 이렇게 사람이 많은 데서 만진 사람을 어떻게 찾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마치 제일 소중한 가족을 찾듯.. 자신을 만진 그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녀를 찾는데 별 관심이 없었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자신의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여인이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시면서 그녀를 보기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군중 속에 있는 믿음의 사람이 누구인지 찾으신 것입니다. 

 

 

  이 때 마침 그 여인이 더 이상 숨을 수 없음을 깨닫고 자발적으로 나갑니다. 그 사실을 누가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8:47,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 알고 떨며 나아와서 그 손댄 이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들 앞에서 말하니' 여인은 두려움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아가 주님 몰래 행한 일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전에 평생 동안 짊어지고 있어야 할 그 고통과 이제 자신의 몸에 변화를 가져온 예수님에 관한 그 사실과 그 자신이 새롭게 된 사실에 대해서 모든 것을 털어놓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두려움과 떨림을 가지고 나아왔다고 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두려웠을까요? 율법에 의하면 다른 사람을 부정하게 만들 수 있는 그녀가 주님을 만진 것은 적절하지 못한 행동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녀는 무안을 당하고 심한 꾸중을 듣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병들어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사람들에게서 학대받았고, 의사들에게서 고통받았고, 심지어 제사장들조차 그녀의 병든 몸은 언제나 멸시를 받았기 때문에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을 꾸짖거나 창피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해서는 안될 일을 함부로 한 것에 대해서 야단치시거나, 불쾌해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자신을 만짐으로써 자신이 부정하게 되거나 또는 자신의 권위가 손상되지 않을까?에 대해서도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순간 오직 그녀의 믿음과 그녀의 미래에 대해서만 온통 관심을 기울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딸아, 딸아~" 

 

  예수님은 그 첫 마디에서 자신의 가족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딸아~" "니가테르" 이 말은, 바로 회당장 야이로가 자신의 죽어가는 딸을 부를 때 사용한 단어로써 실제적인 부녀 관계를 지칭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 바로 그 '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셔서 이 여인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딸'이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에 대해서 정말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속에는 한~ 없는 에수님의 사랑과 은혜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마가는 오늘 본문 27절에서 이 여인이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라고 기록했지만, 의사이자 과학도였던 누가는 눅8:44에서 이 여인이 '예수의 뒤로 와서 옷가에 손을 대니 그 즉시로 고침을 받았다.'라고 기록합니다. 그냥 옷이 아닙니다. '옷 가'입니다. 그런데 여기 '옷가'라는 단어 '크라스페두 히마티우'라는 말로 '크라스페두'는 가장자리에 붙어 있는 술을 말합니다. 겉옷에 가장자리에 붙어 있는 옷 술. 또 '히마티우'는 외투를 말해요. 영어 성경(NASB)은 그래서 이 부분을 ' fringe of His cloak' 새번역 성경은 '이 여자가 뒤에서 다가와서는 예수님의 옷 술에 손을 대었다'라고 정확하게 번역을 했습니다. 즉 그녀는 예수님의 외투, 옷자락 끝에 달려 있는 술에 손을 댄 것입니다. 

 

  유대인의 관습에 의하면 이 걷옷에 달린 술은?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술 달린 옷은 그 당시 제사장이나 랍비 같이 권위 있는 자들이 없었는데 그러므로 이 옷 술은 아무나 만질 수가 없었습니다. 이 겉옷에 달린 술을 만질 수 있는 사람은 두 종류뿐이었는데, 하나는 '허락을 받은 사람' 아니면 '가족들'만이 만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장면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녀는 지금 만져서는 안 되는 것을 만졌습니다. 더군다나 그녀는 부정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의하면 누구든지 이 여인과 접촉이라도 하게 되면 그 역시 부정한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그녀가 지금 예수님의 뒤에서 몰래 만진 겁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의 권위를 상징하고, 가족들만이 만질 수 있는 옷 가의 술을 만진 것입니다. 그녀는 그럴 자격이 없었습니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허락 없이 한 것이었지요? 그러므로 그녀는 엄청난 책망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당장 불호령이 두려워 떨고 있는 그녀에게 예수님께서 맨~ 처음 하신 말씀이 바로 '딸아~"라는 것이었습니다. 야이로가 죽어가는 외동딸을 향해서 한 없는 사랑과 안타까움을 가지고 불렀던 '딸'이라는 단어, 그 사랑하는 딸을 잃을 수 없어 자신의 체면 무시하고 한 시골청년의 무릎 앞에 꿇어앉아 절박한 심령으로 부르짖었던 '딸'이라는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여 이 여인을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딸아" 그러므로 이 말은 그냥 상징적으로 무의미하 게 부르는 말이 아닙니다. 그녀의 이름을 모르니까 그냥 일반적으로 불렀던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실제로 아버지가 애절하게 딸을 부를 때 사용하는 부녀지간에 쓰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딸아~"라고 부르는 예수님의 이 첫마디는 뭘 의미하느냐? 예수님은 그녀의 불손한 행위를 용서하시고 "네가 나를 만질 자격이 있다고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나는 너를 이미 용서했고, 용서할 뿐만 아니라 네가 나를 언제라도 만질 수 있는 나의 가족을 이미 받아들였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딸이라고 부르시는  예수님의 이 한 마디 속에서 우리를 향한 주님의 한 없는 사랑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복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을 게속해서 칭찬하십니다. "딸아~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라고 그리고 예수님은 "평안히 가라~"고 축복된 음성과 함께 그녀를 보냅니다. "딸아~ 거룩함을 가지고 가라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 샬롬과 함께 가라. 이제 더 이상 피 흘림이 없이, 생명을 빼앗아가는 혈루증도 없이, 더 이상 아무런 희망과 도움도 주지 못하는 의사들로부터의 괴롭힘을 당할 필요 없이 하나님과 함께 평안히 가라, 이제 충만하여 건강하고 기쁨에 넘치는 인간적인 삶을 살기 위하여 가라~"고 주님 말씀하십니다. 이제 그녀는 온전해졌고 그 모든 속박에서 온전히 해방된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엄청나고 놀라운 이야기 회당장의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영향력 있던 회당장과 그의 딸에게도 가련한 이 여인에게 행하였던 것과 동일한 일을 행하십니다. 그 당시 높은 신분이었던 회당장의 딸이라고 해서 무엇을 더 베풀어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름 없는 무명의 여인은 회당장의 딸이 받았던 것과 같이 똑같이 생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엄청난 고통 가운데 있었고,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 있었지만 이제 그녀는 예전과 전혀 새로운 인물이 되었고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의 권능을 통하여 예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왜? 이 초라한 여인의 이야기가 그 엄청난 이야기 죽은 자를 살리는 이야기의 맥을 끊고 중간에 끼어들어 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이 여인의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들과 똑같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오히려 이 여인의 이야기는 소외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더 소중하게 여기시기에 중요한 인물인 회당장의 딸이 죽어가고 있어 급히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될 상황 속에서도 걸음을 멈추신 주님의 마음, 그 주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하여 바로 여기에 삽입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녀의 이야기는 더 이상 보잘것없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녀의 이야기는 대단한 이야기 사이에 끼어든 것도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그녀의 이야기는 죽은 자를 살린 놀라운 이야기를 멈추게 할 정도로 중요한 주님의 가족이 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이 마음을 알았던 복음서의 기자들. 마태, 마가, 누가 모두가 다 죽은 자를 살리는 엄청난 이야기를 하다가 이 여인의 이야기로 그 큰 이야기의 맥을 끊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이야기는 바로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지금도 그렇게 사랑하시고 소중하게 여기심을 우리에게 웅변적으로 말씀해주시는 놀라운 주님의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지금도 그렇게 사랑하고 계십니다. 어거스틴의 표현처럼 주님께서는 마치 온 세상에서 나 하나만을 사랑하시듯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렇게 지금도 사랑하시고,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바로 그 모습을 이 여인의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여기도 엄청난 환란과 어려움 중에서도 이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고 고백하는 한 자매가 있습니다. 최려나 자매.. 그녀는 중국에서 태어난 조선족 4세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집에서 가스폭발사고가 나서 같이 있던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본인도 온 몸의 95%가 불에 타서 살아날 확률이 5%로 미만이었습니다. 하지만 기적적으로 죽지 않고 살아났는데 앉을 수도 설 수도 없이 24시간을 병상에 누워서만 생활하게 되었고 병원에서 계속해서 수술을 받으며 치료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자신의 화상 당한 모습을 보면서 이 자매는 다시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음에 절망하며 지냈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그녀의 소식을 들은 중국 엘림교회의 한 장로님이 그녀를 찾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장로님의 마음에 그녀를 찾아가라는 마음을 주셨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장로님은 그녀를 찾아가 복음을 전하고, 성경책을 주면서 위로의 말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너를 아주 많이 사랑하신다."라고 했는데.. 최려나 자매는 그 말을 듣고서 너무 화가 났었다고 합니다. '이 많고 많은 사람 중에서 왜 하필 저여야만 했나요? 또, 왜 하필 화상이어야만 했나요?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저와 제 가족에게 이런 힘든 시간을 주시는 건가요? 이것이 만약 햐나님의 사랑이라고 한다면 저는 그 사랑받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장로님이 전해주고 간 그 셩경책이 눈에 밟혀서 어느 날 성경을 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한 구절 읽고 덮고, 한 구절 읽고 덮고 한 장을 읽는데 한 달이 걸릴 정도로 천천히 성경을 읽는데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그녀에게 임했습니다. 그녀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에 한국의 전남 광양에서 크리스천인 한 성형외과 선생님이 그녀의 소식을 듣고 치료해주고 싶다고 한국으로 초청을 했습니다. 이 선생님이 그녀를 무상으로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면서 계속해서 수술을 해준 겁니다. 이때 최려나 자매가 생일을 맞았는데 교회 청년부에서 오빠, 언니들이 병상에 누워있는 그녀를 찾아와서 축하해주고 축복을 해주었습니다. 당시 그녀는 눈 주변 피부가 수축이 되어서 눈에 붕대를 감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청년들이 그녀를 축복해주면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를 진심으로 부르며 축복해주었는데.. 그 가운데 그녀가 그 찬양 안에서 너무나 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펑펑 울면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나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고, 나의 삶 속에서 이미 그 사랑을 받고 있었다는 그 사실이 저에게 너무나 놀라운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고, 하나님이 이미 저를 만나주셨고, 저를 치유해주고 계셨고, 제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이후에 그녀는 계속해서 수술을 받는데 40여 차례의 수술을 받습니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회복하여 마침내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 앞에 나설 때에는 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써서 남들이 자기를 쳐다볼까봐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지선 자매로부터 위축되고 두려운 마음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치유받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되면서 최려나 자매는 이지선 자매를 멘토로 삼아 용기를 남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고 당당하게 살아가기로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도전하고,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사회복지대학원에서 공부하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게 되는데.. 그녀가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화상을 만난 뒤 저는 하나님이 너를 사랑한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왜 하필 나야 여만 했는지? 나와 가족에게 그토록 힘든 시간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도무지 알 수 없었지요. 평화롭게 지내오던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차라리 마음 편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저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셨어요. 최선의 방법으로 제가 걸어가야 할 길을 열어주셨지요. 죽어가는 피부를 기적처럼 살리셨고, 치료비가 끊기지 않도록 항상 그다음을 예비해놓으셨습니다. 열이 40도 이하로 떨어지지 않을 때도, 생사를 오가는 그 수많은 시간 동안에도 안전하게 지켜주셨어요. 가족들의 눈물과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셨고, 저를 인격적으로 만나주셨어요. 하나님은 예전의 저도 사랑하셨지만, 지금의 저를 훨씬 더 사랑하시는 분이에요. 지옥이라고 여겨지는 시간들을 통해 천국을 알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요. 그리고 앞으로 저를 통해 하실 일들이 무척 기대가 돼요."

 

  사랑 주안의 성도들,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통 가운데 있던 여인을 당신의 가족으로 받아주신 주님. 지옥 같은 삶을 살았던 최려나 자매를 세상이 줄 수 없는 사랑으로 품에 안아주신 그 주님이 지금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을 그렇게 사랑하고 계십니다. 아멘! 한 보잘것없는 여인도 결코 소홀히 여기지 않으시고 병든 자 고통 가운데 있는 자에게 더욱 관심을 가지시고 그녀에게 놀라운 사랑과 관심을 베푸신 주님께서 지금 이 시간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보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아멘! 그리고 그 주님께서 지금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묻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들 가운데서 진정 주님을 만지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비록 지금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있지만.. 비록 내 육신이 연약하고 내 사랑하는 부모 형제가 고통 가운데 있지만.. 비록 코로나로 인해 가게 문을 닫을 수밖에 없어 온 가족의 생계가 막막한 가운데 있지만.. 비록 코로나로 인하여 일자리를 잃어 탄식하는 가운데 있지만.. 비록 사랑하는 사람들과 만날 수도 없어 우울증으로 힘든 가운데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주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치유되고 회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으로 주님의 옷 술을 만지기를 원하는 사람을 지금도 우리 주님이 우리 가운데서 찾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혈루증을 앓고 있던 이 여인은 예수님의 옷 술만을 만졌음에도 주님의 딸이 되어 12년 동안 앓던 난치병과 모든 고통에서 완전히 해방되고 고통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오늘 우리는 누구입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누구입니까? 저와 여러분들은 주님의 옷 술을 만진 정도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옷 깃을 만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함께 나눈 주님의 가족들입니다. 옷깃만 만졌어도 구원받았는데..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믿음으로 받아먹으며 성령 안에서 주님과 함께 한 가족 된 우리들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우리 모두가 주님의 손을 내밀어 주님의 옷자락을 붙잡기 원합니다. 옷자락뿐만 아니라 주님의 손을 꽉! 붙잡기 원합니다. 그리고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는 주님의 음성에 우리 이렇게 대답하기 원합니다. "주님, 제가 만졌습니다. 저의 병든 육체가 치유되기 원합니다. 제 마음의 상처가 고침 받기 원합니다. 병들어 있는 제 영혼이 회복되기 원합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하여 코로나 블루에 걸린 제 마음이 치유되기 원합니다. 그래서 제가 만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부활하신 주님의 손을 잡았습니다."

  여러분, 그리하면 우리에게 우리 주님 이렇게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딸아~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네 모든 괴로움에서 놓여 치유될지어다~ 아들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네 모든 문제에서 놓여 자유할지어다~" 아멘!  하나님, 우리 주안의 모든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손 꼭 붙잡고 주님으로부터 이러한 축복된 음성을 날마다 들으며 이 코로나 상황 속에서도 오히려 승리의 삶을 살고 주변의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서로에게 손 내밀어 축복하면서.." / 찬양 - 때로는 너의 앞에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십자가의 은혜로 하나님의 딸로,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런데도 때로 우리는 마치 고아처럼 행동하며 살았음을 고백합니다. 이 시간 다시 한번 내가, 우리가 주님과 한 가족임을 확인하고 믿음으로 주님의 손을 붙잡고 일어나게 하옵소서. 그리고 주님의 한량없는 이 사랑을 코로나로 인하여 고통과 신음 가운데 있는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고, 증거 하는 축복의 통로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하옵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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