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야고보서 2장을 14절까지 살펴보면서 차별에 대해서 말씀을 나눌까 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무지막지한 차별의 역사의 점철이지요. 우리는 보이지 않게 차별을 당하고, 또 차별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차별하지 마라
아마, 차별 없는 세상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차별은 우리 일상의 매우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가운데 우리가 의식하는 차별도 있고 의식하지 못하는 차별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차별이 존재합니다. 교회 안에 무슨 차별이 존재할까? 없습니까? 더 교묘하게 감춰져 있는 것이 교회 공동체 안의 차별이지요.
오늘은 이것이 왜 무서운 죄인가? 차별의 가장 적극적인 하나님의 명령은 무엇일까? 이웃 사랑입니다. 오늘 사실상 결론이 차별로 시작하여 이웃사랑으로 내려집니다. 1절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여기 보면, 영광의 주라는 매우 낯설지 않은 표현이 등장하지요. 사도들이 영광의 주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의 사고의 전제가 있습니다. 아무 때나 영광의 주라고 주님을 호칭하지 않아요. 무엇을 염두에 둘 때 영광의 라는 표현을 쓰는지 염두해 둘 필요가 있는데,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사망 권세를 깨트리고 부활하신 그 예수님을 강조할 때, 뭐라고 표현하죠? 영광의 주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면 야고보 사도가 왜 이 대목에서 차별을 설명하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그 예수님을 강조하고 싶었던 걸까? 여기에는 신앙적 신학적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은, 이 땅에서의 모든 차별을 무너트리기 위해서 죽으신 거예요. 이방인과 유대인과의 막힌 담을 허셨지요. 그것이 에베소서 1-2장의 굉장히 중요한 주제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모든 것들을 허물기 위해서, 차별을 없애고 깨어지고, 부서지고, 망가진, 무너진 하나님의 존엄한 원래 창조의 형상의 회복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고, 사망권세를 깨치고 부활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인류의 가장 오랜 질병 중 하나인, 인간이 인간이 차별하는 것이 왜 죄이고, 이것을 유독 강조하는지를 보기 원합니다.
2절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이 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일이 어디서 일어나고 있냐? 회당에서.. 보통 교회라고 이야기할 때에는 에클레시아라는 말을 써요. 그런데 여기에서는 회당이라고 했어요. 회당은 교회가 아니지요. 회당은 어원으로 보면, '시나고그'라는 단어를 써요. 자, 그러면 이 '시나고그'가 갖는 유대인들의 세계관 속에서 중요한 위치가 뭐냐? 우리 앞서 1장 초반에 이 글을 야고보 사도가 누구에게 보낸다고 했지요? 열두 지파에게 보낸다고 했어요. 그러면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 그들이 어디서 생활을 하냐? 시나고그에서 생활을 합니다. 시나고그는 유대인들에게 적어도 어떤 공간인지를 먼저 아셔야 하는데.. 첫째, 거기서는 교육이 이뤄집니다. 물론 예배도 이뤄집니다. 말씀도 가르치고, 그다음에 거기에는 유대인들의 조그마한 사회 공간입니다. 단순히 예배가 드려지고, 말씀만 가르쳐지는 공간을 뛰어넘는 종합적인 공간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유대인들의 조그마한 사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차별이 이런 사회에서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신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차별의 문제가 우리의 실제적인 삶 속에 어떻게 깊숙이 들어와 있는가를 몇 가지 실례를 통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일 큰 차별이 뭔가요? 인종차별입니다. 우리는 보통 12년 전까지만 해도 살색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검은색은 살색이 아닌가요? 검은색도 살색이 될 수 있지요.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은 검은색이 살색입니다. 흑형이라고 하면 안됩니다. 실제 있었던 일인데 어느 흑인이 택시를 탔어요. 한국인 기사가 한국말 모르겠지 하고, "대성이 탔냐?" 그랬데요. 대성이 뭐냐? 옛날 연탄회사 중에 대성연탄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 흑인이 그걸 알아들었어요. 그런데 이 흑인이 아주 멋진 사람이에요. "예, 형님" 한방 먹은 거지요. 우리 특별히 용산 주변에는 외국인들이 아주 많지요. 안산 쪽에 가면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아요. 그런데 거의 99%가 동남아에서 코리안 드림을 좇아서 우리가 하기 싫은 허드렛일을.. 물론 그들 나름대로는 목적을 갖고 그 일을 위해서 왔겠지만.. 아주 험한 일을 와서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 땅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 욕이라고 합니다. 그 욕을 누구에게 배웠는지 물어봅니다. "싸장님에게 배웠어요." 그에게도 인격이 있고 이름이 있을 텐데 욕지거리를 들었다는 거예요. 우리가 외국에 많이 이민을 나가 있습니다. 나라가 한참 어렵고 힘들 때 어마어마하게 나갔어요. 그 땅에서 많은 차별을 받고 살았어요. 그리고 달러를 받아 고국에 송금을 많이 했어요. 그것이 종잣돈이 되어서 이 땅의 우리가 이 정도 기반을 갖추고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뼈아픈 가난한 역사를 천대받고 차별받던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되는 민족인데.. 우리는 이 땅에 비슷한 사정을 따라 들어온 외국인.. 100만 명으로 추산합니다. 어마어마한 숫자입니다. 목포가 50만이 안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에게 이중적인 차별을 합니다. EBS 방송국에서 실제로 배우들을 분장시켜서 몰카 형식의 실험을 했지요. 아시아계 사람, 순수 백인 사람으로 분장하고 두 사람다 영어를 사람으로, 길을 묻는 실험을 합니다. 동남아 외모를 갖고 있는 사람은 거의 도움을 못 받았어요. 그냥 지나가고 대꾸하지 않고 모른다 하고. 그런데 백인은 아주 직접 안내해주고, 7-80% 도움을 받는 슬픈 실험이 있었어요. 이구동성으로 결과 후에 응했던 사람들의 공통적인 가슴 아픈 대답이 무엇이었냐? "백인이면 그랬겠냐?" 우리 민족이 참~ 나쁜 게, 물론 좋은 점도 많지만.. 나쁜 게 뭐냐? 이중적 잣대를 갖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 기독교 인들의 세계관 안에서 인간에 대한 이중적 잣대를 갖고 있어요. 여러분 정말 저나 여러분이 생각해야 할 고급한 신앙이 무엇일까요? 정말 고급진 신앙이 뭘까요? 저는 그 사람이 한 인간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이 어떤 상태에 처해 있든지.. 장애를 가진 사람이든, 색깔이 다른 사람이든, 형편이 다른 사람이든.. 입장이 다르고, 어른이던 아이던.. 그들을 향해 어떤 태도를 갖느냐? 가 그 사람의 신앙의 실력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래서 방정환 선생님이 '어린이'라는 호칭을 만들어 사용하게 한 것이 굉장한 수준이라고 봐요. 어린이라는 말이 높이는 뜻이거든요. 꼬마, 꼬마 하지 마세요. 조폭 세계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뒷골목에서 가르쳐 말하는 비하적인 발언입니다. 꼬마야. 조직세계에서 하는 말이에요. 심지어 TV에서도 배운 사람들일텐데 종종 꼬마라는 말을 쓰더라고요. 한 번은 모 교회에 있을 때인데, 저는 시간이 남으면 교회 아무도 없더라고 괜히 둘러봅니다. 사찰적 기질이 있어서.. 여기도 열어보고.. 일층 어느 교육관의 문을 무심히 열었는데 평소에 아주 젠틀하고 나이스 하고, 가장 신앙적이고, 교회 장로님의 아들이요, 정말 더할 나위 없는 형제인 교회 학교 부장도 하는 형제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아이를 중앙에 세워놓고 이단 옆차기에, 어퍼컷에 막~ 때리고 있는 거예요. 어린아이를.. 그래서 제가 놀라고 기겁을 해서 잡았어요. "왜, 이렇게 때리느냐?"라고 그러자 아이는 겁이 나서 아무 소리 못하고 얻어맞고 있다가 담임목사님이 나타나니까 안 그래도 울고 싶었는데 대성통곡을 하고 우는 거예요. 그런데 별일 아니에요. 교육관 같은데 보면 방석들이 있지 않습니까? 안 쓸 테 방석을 한쪽에 쌓아두잖아요. 그런데 아이가 들어와 보니 방석이 쌓여있고, 아무도 없으니까.. 그 방석 위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기 얼마나 좋아요. 그걸 짝~ 뿌려놓고 혼자 난리를 치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다가 부장 집사님에게 걸린 거예요. 그래서 무지막지하게 혼나고 있었던 거예요. 제가 너무 놀라서 그해 연말에 잘랐어요. 아무도 안 보는데서, 작은 아이의 존엄한 인격을 그까짓 일로, 그보다 더 한 일을 했어도 그러면 안돼잖아요? 보세요. 차별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이 외에도 인종차별, 신분차별, 빈부차별. 여러분 혹시 가끔가다가 쇼핑몰이나, 백화점 같은데 가면 살 사람인지, 아닌지 기가 막히게 안다고 해요. 태도가 딱! 달라요. 게다가 요즘은 외모 차별까지 하지요.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돈 들여 고치는 거 아닐까? 그러니까, 밖에 나가보면 얼굴이 다 비슷하잖아요. 우리 교회 자매들은 얼굴이 다~ 틀려요^^ 거리 나가보면 구분이 잘 안돼요. 원판 사진 놓고 봐야 구분을 할까.. 불행한 일이지요. 게다가 성형 중독에 빠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가슴이 아파요.
어느 형제는, 모든 신문에 예외 없이 다 걸린데요. 내가 봐도 험하게 생겼어요. 게다가 턱에 수염이 많아요. 눈도 매섭게 생긴 청년이에요. 면접 보면 다 떨어져요. 일단 시험은 잘 보는데, 외모에서 면접관들이 기겁을 하고.. 심지어는 대놓고 "너 그 인상 가지고 밥 벌어먹고 살겠냐?" 그랬다고 해요. 요즘은 또 키, 70 아래는 사람 취급도 안 하더라고요. 80은 돼야 사람 취급받는 이상한 공화국이 되어가고 있어요. 이 같은 외모지상주의가 굉장히 심각하지요. 결혼 적령기 앞둔 부모들은 집안, 배경, 출신, 선거 때마다 돌아오는 고질적인 병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38 따라지 이래 가지고.. 이 조그만 그것도 반토막 난 나라에서 지역별로 나누어서.. 심지어는 경상도 출신의 담임목사가 있는 교회에는 전라도 출신의 교역자가 이력서를 안내요. 내봐야 떨어지니까.. 사실, 요즘은 개선이 되어가는 중이지만 이력서의 포맷 자체도 근본적으로 한국은 뜯어고쳐야 해요. 정말 순수하게 존재 자체로만 평가받을 수 있는 사회가 언제나 올까? 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이 한복판에 결국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그 신앙 고백을 갖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이 굉장히 큽니다. 특별히 CEO로 그리스도인으로 생업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그것이 썩~ 쉽지 않은 순종이지만, 해야합니다. 고용 차별도 있지요. 장애인들이 겪는 차별은 말할 것도 없고. 가끔 가다가가 장애인들이 사슬을 묶고 이동권 보장해달라고 시위하는 모습을 보면 참~ 마음이 아파요. 여러분 한번 눈 가리고 장애를 의도해서 서울시내 돌아다녀보세요. 얼마나 다닐 수 있을까? 저는 천호동에서 서울역까지 안내를 하고, 맹인들이 짚는 지팡이를 집고 버스 타고, 지하도 건너고.. 실습을 한 적이 있어요. 기가 막혀요. 요즘은 많이 개선이 되고 있는 중이긴 하지만.. 아직도 정말 한 장애를 입은 자를 위해서 교회가 기꺼이 액수와 상관없이 물질을 투자할 수 있는 정신적 가치가 회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보통 크기와 액수의 논리로 따지지요. "그 한 사람을 위해서 그 많은 돈을 써?" 아닙니다. 모, 신학교에는 장애인이 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가, 한 장애인이 학교에 입학했어요. 그 장애인을 위해서 2억을 들여서 계단 뜯어고치고, 엘리베이터 새로 놓고 했다고 해요. 그것이 건강한 사회가 되는 지름길이고, 공동체가 아닐까요?
저는 참 속상한게 앞자리 빼놓았어요. "안 그래도 앉을자리 없는데 왜 빼놓았냐?"라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하냐? 그냥 웃지요. 필요합니다. 그러고 말아야지, 싸우겠어요? 짧은 시간에 설명을 다 할 수도 없고.. 그분 여기 계신가 몰라요. 계셔도 할 수 없어요. 필요합니다. 저 뒤에다가 안 그래도 불편한 분들을 앉혀놓고 예배드리게 한다면.. 예배자로서의 중심이 아니지요.
자, 그러면 마지막으로 저는 이런 실례를 들자면, 한도 끝도 없지요. 건강한 예를 듣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전라도 김제에 가면 '전라북도 문화제 136호' 금산교회입니다. 유명한 ㄱ자 교회입니다. 이때만해도 남녀가 함께 앉아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예배당을 ㄱ자 모양으로 만들어서 서로 안 보이게 예배를 드리도록 구조를 만든 거예요. 저 교회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저런 구조로 교회를 만드는 교회가 더러 있었어요. 이 땅에 복음이 처음 들어올 때, 미국 선교본부에서 한국의 지역을 나누어서 들어왔어요. 예를 들면, 전라도 쪽은 미국 남장로교회가 가서 복음을 전하십시오. 그래서 인천과 군산 쪽으로 미국 남장로교 회로 들어왔어요. 그때 들어오신 선교사 중 한 명이 '테이트'가 오신 거예요. 이분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다가 성경공부를 하고, 예배 드릴 공간이 필요했는데.. 조덕삼이라는 괜찮게 사는 집안의 사람과 만남이 이루어졌어요. 이 분은 예수는 믿지 않지만 미국 선교사가 이 땅에 와서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지만 애를 쓰고 다니니까 사랑채를 쓰라고 내주게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랑채에서 처음에 성경공부가 시작되었고, 그것이 예배로 발전이 되어 교회가 됩니다. 그 집에 머슴 하나가 있었습니다. 이자익이라는 머슴은, 고향이 경남이에요. 경남 남해 사람이 어떻게 전라도까지 왔냐? 일찍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고아가 된 거예요. 먹고 살길이 막막했는데, "전라도 쪽에 가면 벌판도 많고 항상 먹을게 많으니까, 어느 집에 가서 머슴살이라도 하라"는 말을 듣고 차비도 없어서 남해에서 전라도까지 끝없이 끝없이 걸어서 김제까지 온 거예요. 그리곤 조덕삼 씨의 말을 부리는 마부 머슴으로 일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주인이 선교사님에게 사랑채를 내주고, 거기서 정기적으로 모이더니 성경공부를 하고 그러다가 이것저것 심부름을 했겠지요? 그러던 중에 이 머슴과 주인이 같이 예수를 믿게 되었어요. 자기 집에서 모이니까.. 자연스럽게..
그리곤 같은 날 세례를 받아요. 그리고 집사까지 됩니다. 두 사람의 헌신적인 봉사와 섬김으로 교회는 날로 성장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장로를 뽑게 되는데 누구나 마을 사람들과 교인은 당연히 물질적으로 겸손하게 헌신을 잘하는 조덕삼 집사가 장로가 되리라고 기대를 하고 있었어요. 투표가 끝나고 뚜껑을 열어보니, 조덕삼 장로가 떨어지고 머슴 이자익 집사가 장로가 된 거예요. 교인들이 수근수근 됩니다. "야~ 이거 클났다. 어떡하냐? 교회 재산 다 저 사람 건데, 종놈이 먼저 장로가 되었으니 이 난감한 일을 어떡하면 좋을까?" 많은 사람들이 걱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조덕삼 집사가 그 결과를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초대 장로가 된 이자익 머슴이자, 장로님을 지극정성으로 영적으로 섬기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장로로 세워진 이자익 장로가 너무 겸손하게 강력한 리더십을 잘하는 거예요. 그래서 한 날은 테이트 선교사와 의논을 합니다. "저분을 신학교에 보냅시다. 재정은 내가 대겠소. 선교사님 허락해주십시오. 내가 설득해보리라." 그래서 이자익 장로를 불러 "앞으로 이 땅에 일꾼이 필요한데, 보아하니 당신은 리더십도 있고, 자질도 있으니 평양신학교에 입학을 하시오." 그 뜻에 순복 하여 이자익 장로는 장로를 내려놓고 평양신학교에 입학을 하게 됩니다. 5년 만에 졸업을 하고 목사 안수를 받아요. 그런데 마침 그때에 고향교회에서 새 담임을 모셔야 했는데, 그 사이에 조덕삼 장로가 우리 집에 머슴이었던 그러나 지금은 목사 안수를 받은 그분을 목사로 청빙 합시다. 적극적으로 주도를 해서 이자익 목사를 자기 교회 새담임으로 청빙을 한 거예요. 청빙을 했는데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너무너무 겸손하고, 반듯하게 교인들을 잘 돌보고, 말씀을 잘 가르치고, 화합을 잘 이루어내는데 열매가 나타나는 거예요. 그때에 한국교회가 굉장히 어지러웠어요. 심지어는 1927년도에 우리나라 전교회를 대표하는, 전교회를 아우르고 섬기는 총회장에 당선이 돼요. 머슴이었던 목사님이.. 그다음에 인물난에 봉착했을 때 47년도 48년도에 두 번 더 총회장을 역임하게 됩니다. 3번 총회장을 한 전후무후한 일입니다. 기독교계의 최고 수장의 역할을 한 겁니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 뒤에는 이 조덕삼 장로의 신분과 모든 편견을 넘어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 사랑의 실천을 구현해 낸 순종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아름다운 한국교회의 미담입니다. 믿습니까? 한 사람의 깨어짐,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이 야고보서 2장에서 내내 말하는 큰 주장이 뭐냐? 구속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존엄한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을 어떻게 자기도 모르게 차별하고 편견을 가지고 판단하고 정죄할 수 있는가? 이 무서운 죄. 사실 제일 그리스도인이 지을 수 있는 무서운 죄가 인간을 차별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여기서 출신, 외모, 빈부, 신분, 인종 등의 대표적인 영역 안에서 나도 모르게 벌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 내가 선한 의도로 뭔가를 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역으로 다른 사람을 차별화시켜 버리는 상대적 박탈감을 주게 하는 일들도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는 거예요.
예를들면, 이런 거지요. 어느 교육부서 목사님이 기안서를 만들어 왔어요. 교육부서 아이들 미주 투어 기안을 만들어 온 거예요. 투어 목적이 굉장히 좋아요. 아직 청소년들의 마음속에 넓은 마음을 품고, 기독교 국가의 모습과 좋은 대학을 탐방시켜서 미래에 대한 꿈을 갖게 하고.. 좋은 말은 다 써놓았어요. 2주 동안 400만 원 가까운 비용까지 해서 이번 여름방학 때 교육부서 아이들을 데리고 야심 차게 계획을 해서 투어를 하겠습니다. 무심히 사인할 수 있었지만..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해보니까.. 이 액수가 내가 그 해당하는 연령의 자녀가 있어도 보내기가 버거운 액수예요. 그래서 제가 교역자를 불렀지요. 이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가는 아이들이야 좋지요. 갈 형편이 되고, 부모도 좋아하겠지요. 그런데 더 많은 아이들이 돈이 없어서, 형편이 안돼서 못 간다면 이건 그 아이들에게 상대적 박탈감과 상처를 남길 수 있는 일일 텐데.. 이거 꼭 해야겠나? 뜻은 좋고, 목적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이면에 남은 아이들을 한번 생각해보자. 해서 이해가 되고 그게 맞다는 판단을 해서 그 계획을 취소시켰던 적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이런 선의적인 일을 재정을 들여서 할 수 있지요. 그럴 수 없는 나머지 사람들이 이 일 때문에 차별당하는 느낌을 받고, 상대적 박탈감을 받을 수 있는 일이라면.. 우리의 자유를 절제하는 것이 맞지 않겠는가? 저는 그것이 주님이 살아내셨던 삶의 방식이라고 믿습니다. 기꺼이 그분이 관을 쓰고 오시지 않고 낮고 천한 몸, 가장 외모 차별을 받았던 분이 누구냐? 예수님이에요. '고운 모양도 없고, 흠모할 만한 것도 없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은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얼마나 나이보다 연세가 들어 보였는지.. '네가 아직 50도 안되었는데?' 청년에게.. 그만큼 예수님이 외모적으로도 마음고생과 실질적으로 고생도 많이 하셔서 외모보다 들어 보였단 말이에요. 동안이 좋은 게 아니에요. 동안은 죄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죄인의 마음으로 살아요^^ 결론이 이상한데^^ 차별하지 맙시다. 주님의 가장 적극적인 사랑의 명령입니다.
기도
이 땅의 슬픈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이 땅의 차별을 철폐하는 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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