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잠깐 오후에 용산전자상가에 잠깐 다녀왔습니다. 볼일을 보고 나가는데 스피커 매장 앞에서 연세 많으신 두 분과 매장 주인과 시비가 붙었는데, 듣자 하니..
당신이 보이고 싶은 대로 살아라
워낙에 고가 품이라 매장에 일일이 진열을 하지 않고 카탈로그로 보고 결정을 하면 물건을 가져다주는 판매방식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친구분 두 분이 스피커를 보러 나온 거예요. 두 할아버지는 "물건을 보자"하고, 주인은 "결정하시면 가져다 드리겠다"하시는 거예요. "물건을 보고 결정하겠다." 그러니까, "할아버지 결정하시면 바로 가서 물건을 갖다 드리겠습니다." 이것 때문에 시비 붙었던 거였어요. 소리가 하도 커서 듣게 되었습니다. 물건을 하나 결정하고 사는데도 보고 사요. 그런데 매장에는 실제 물건이 없어, 카탈로그로 설명을 하며 가상의 물건을 보여주는 거지요. 하물며 세상 사람들이 어떤 인생을 결정하고 자기의 생각을 설득당할 때, 우리의 말과 논리만 듣고 설득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삶을 보고 '정말, 저렇게 살아야겠구나! 저게 예수 믿는 사람의 삶이구나!' 보고 믿게 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행동이 점점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어느 세계적인 회사의 입구에 '관건은 실행이다.'라는 사훈이 붙어 있다고 합니다. 짤막한 문구이지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는 문건이 아닌가요? 이런저런 토의와 연구 다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실행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우리가 야고보서 세번째 시간을 맞으면서 19절부터 보지만, 18절 마지막 끝부분을 보면 '..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 맞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이 땅에 오신 그분을 통해서 이 땅의 교회가 만들어지고 이 땅의 우리가 구원받는 백성으로 태어났지요. 그런 의미에서 말씀으로 우리를 낳았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많은 신학적이고 중요한 가치가 담겨진 기록입니다. 오늘 19절부터는 그 말씀으로부터 낳아진 백성들을 향한 발언이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첫마디가 '형제들아'로 시작합니다. 19절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이 호칭은 이미 말씀으로 낳아진 이 땅에 태어난 하나님의 백성들을 전제한 발언들을 지금부터 전제하겠다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낳아진 백성들은 뭘로 키워야 될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고 말씀으로 키워야 된다는 이야기를 지금부터 하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은 세가지 단계로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말씀이 떨어질 심령의 밭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토양 준비
- 말씀이 심어질 밭에 대한 토용을 어떻게 준비해야 되냐?
2. 그 밭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
3. 그렇다면, 그 후에 어떻게 열매를 맺어야 되는가?
심었으면 그것이 살아 있는 씨라면 열매가 맺혀야 정상입니다. 그것이 건강한 밭인 것이 증명이 되고, 옳은 씨가 심기워진 것이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삼단계에 걸쳐서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그 전에 성도님들께 질문하나 하고 싶습니다. "말씀을 받는 것이 먼저일까요? 죄악을 제거하는 것이 먼저일까요?" 더러 죄를 먼저 제거해야 한다는 분들도 계실 것 같아요. 그런데 순서상 죄를 먼저 제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항상 순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먼저 받아야 죄가 뿌리 뽑혀 나가고 제거가 됩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순서입니다. 그러니까, 뭐가 다 되고 갖춘 다음에 예수를 믿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흠이 있어도, 죄가 있어도 일단 계속 살아 있는 생명의 말씀을 자꾸 듣는 자리로 와야 합니다. 깨닫고 듣는 게 압니다. 듣다 보면, 말씀 자체가 능력이 있고, 말씀 자체가 생명력이 있기에 우리 삶 자체에 놀라운 신비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그 말씀을 받으려면 어떤 밭으로 준비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19절.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원문에도 보면 '그리고'라는 말이 없어요. 보통 어법이 이렇게 되게 되어 있어요. '듣기는 속히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그래야 사실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를 설명하면서 그 사이사이를 이어주는 접속사에 해당하는 '그리고'라는 말이 없어요. 그 말은 무슨 뜻이냐? 있으나 없으나 같은 뜻 아니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라는 말이 붙으면 각각의 주제가 되지만.. '그리고'라는 접속사가 빠지면 사실상 하나의 서클과 같은, 원과 같은 하나의 개념이 됩니다. 그러니까, 사실 이것은 하나의 개념을 설명하는데 이해를 시키기 위해서 각각 개념을 분리시켜놓은 것입니다.
그러면 세가지 개념을 간단간단하게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듣기는 속히 하라' 이 말은 말 그대로 빨리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계속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두 번 째, '말하기는 더디하라' 여기서 '더디'는 말은 속도의 개념이 아니고, 말하기는 둔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는 보통 말을 먼저 합니다. 거기에 폐해가 뭐냐 하면? 사실은 같은 개념이기 때문이 딱히 구분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을 위해서 성경 기자가 일부러 구분을 해 놓았습니다. 세 번째 덕목이 뭐냐? '성내기도 더디하라' 둔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내기는 단순한 분노 자체를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분노 자체는 정죄할 덕목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화를 내셨어요. 불의나 부당한 일 앞에서는 그런데 여기서 성낸다는 말은 앞의 말과 연관 지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런 뜻입니다. 자기의 의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내뱉는 말이나 화를 이야기합니다. 돌아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일터에서나, 많은 사람들이 집약되어 있는 공동체 같은 경우에는 화를 낼 일이 많아요. 그런데 거의 8-90%가 화를 내고 지나 보면 내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한 분노가 한 8-90%가 됩니다. 그래서 얼굴이 뜨거울 때가 많지요. 저도 그럴 때가 많습니다. 화를 내고 돌아서서 복귀를 해보면, 8-90%는 자기 편견과 자기주장과 자의 의를 드러내느라고 내뱉은 분노가 8--90%에요. 상대방에게도 죄송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울 때가 더 많아요. 여기서 말하는 말과 성냄은 그런 경우를 얘기합니다. 그런 경우들이 왜 발생하느냐?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먼저 축적되지 않을 때 이런 일들이 벌어질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늘~ 잘 안돼도 매일매일 정규적, 규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습관을 가져야 해요. 그래서 그 말씀이 우리 모든 내면의 잡초화 된 현상을 자꾸 눌러야 합니다. 이 일이 매일 우리 속에서 시소게임하듯 싸우는 것입니다.
어제 새벽에도 잠시 말씀드렸지만, 우리 속에는 생명의 냄새와 사망의 냄새가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요. 그 악의 평범성에 대한 리포터가 말해주듯이 나쁜 사람이 따로 있고, 원래 선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늘~~ 공존해서 항상 시소게임을 벌여요. 그러면서 성경 기자가 이런 얘기를 합니다. 20절,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여기서 하나님의 의가 뭘까요?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시련이나 시험을 통해서 도달시키고자 하는 각 개개인에 대한 목적지를 말합니다. 자, 여러분~ 어느 엄마가 자기 아이가 여덟살 될 때에 약속을 했데요. "네가 21살 때까지 술, 담배, 세상 기준에서 못 된 짓 안 하면 네가 21살 되는 해에 너에게 1,500불을 주겠다." 그리고 아이에게 계약서를 써주었데요. 이 아이는 그 계약서를 받기 위해서 21살 때까지 정말 지켰어요. 그리고 21살 되던 해, 그날 그 부모는 그 아이에게 계약서대로 1,500불을 지불을 했습니다. 이 부모가 이 아이와 계약한 주된 계약의 목적은 1.500불을 주는 게 목적이었을까요? 아니죠~ 이 아이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할 줄 아는 성년이 되기까지 건강한 청년으로 자라는 것이 이 아이가 부모에 의해서 바람을 받아왔던 목적지였을 거예요. 그럼 아이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아이가 21살 청년이 되었어요. 이 아이의 진짜 복은 뭘까요? 1,500불 받은 걸까요? 아니죠~ 건강한 청년으로 자란 것만큼 큰 복이 어디 있을까요? 그걸 1,500 불하고 비교할 수 있는 문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 각각의 인생에게 바라는 하나님의 의가 있단 말이에요. 하나님의 계획이 있단 말이지요. 그것을 말하는 거예요. 그것을 후반 절에 성경이 이렇게 소개를 합니다. 25절을 한번 볼까요?
25절,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는다' 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21살 된 청년이 받은 복은 뭘까요? 1,500불일까요? 아니란 말입니다. 그 청년이 누린 복은 건강한 판단과 삶의 습관을 가지고 자란 자기 자신이에요. 아멘! 그걳이 이 청년이 누리는, 그리고 그 부모가 의도했던 의요, 복이란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 의미로 오늘의 말씀을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 첫번째,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질 밭을 어떻게 준비하느냐? 세 가지로 설명했어요. 듣기는 속히 하라. 여기서 듣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거예요. 그리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성내기도 더디 하라. 성내는 자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 가끔 목회하는 동료와 크리스천들 가운데 분노 조절을 못해서.. 요즘에는 이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것도 질병 중에 하나로 여긴다고 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젊은 이들 가운데, 뿐만 아니라 연세 드신 분들 가운데에서도 이 분노 조절이 안 되는 사람이 있어요. 그 순간에는 시원하지요. "한번 어떻게 하고 갯값 물어?!" 이렇게 해서 평생을 망가트린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요. 그런 조절을 못해서 성을 터트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낼 수 없다고요. 그래서 그 문제도 심각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은 미디어의 영향이 굉장히 커요. 한국 사람들은 못 참아요. 얼마나 더 빨라야 해요? 우리나라처럼 더 빠를 수가 있어요? 그냥 한번 무슨 사건이 터지면 한 시간 안에 전 국민이 알 수 있는 놀라운 네트워킹이 되어 있는 나라.. 그래서 외국에서 우리나라에 오면 깜짝깜짝 놀라요. 오죽했으면 한국을 빗대어 '재미있는 나라'라고 할까요? 변화가 무쌍하고, 속도가 빠른 나라는 보 다보다 처음 본다는 거예요. 다른 나라 100년에 이루어낼 일을 10년 안에 이루어냈다는 것이 꼭 자랑일 수만 있을까? 걱정이 되는 부분이 있어요. 그래서 요즘 하버드 대학에서는 아주 유명한 강의 중 하나가 '느리게 사는 법'. 이 강의가 최고 인기 강의라고 합니다. 느림의 미학. 이제는 좀 천천히 가야 하지 않겠는가? 마찬가지예요. 여기에는 굉장히 중요한 기독교 가치가 사실은 전 사회 속에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녹아져야 하는데 어쩌다가 교회마저도 그 세류의 흐름 속에 실려 있는 느낌을 받습니다.
자, 두번째 성경을 보십시다. 21절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여기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는 말은, 말씀의 씨가 그렇게 떨어졌으면 그 말씀을 잘 유지해라 그 말이에요. 어떻게 유지하느냐? 여기는 크게 두 가지를 설명했어요.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어떻게 하라고 했죠? 거둬내라 제거하라. 여러분 우리 심령은 가만히 두면 가만히 둔 상태로 있는 게 아니라, 반드시 잡초화 되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흔히 자주 쓰는 표현 가운데 "시간 남고 돈 생기면 죄짓는다"라고 했지요? 맞습니다. 고달파야 죄 지을 생각도 못하고, 죄지을 여가도 없습니다. 그게 참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내면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 밭이라는 것은, 계속 밭갈이하지 않으면, 경작하지 않으면 잡초가 저절로 올라와요. 저절로.. 그래서 이 과수원 같은데 가면 과실이 실하게 맺히도록 하기 위해서 농부들이 뭘 하냐? 절지 작업을 합니다. 틈틈이 나가서 전지가위를 들고 잔가지를 자꾸 잘라주고, 잡초들을 자꾸 뽑아냅니다. 이유는 딱! 하나예요. 양분이 쓸데없는데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자꾸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해주는 거예요. 안 그러면 잡초가 무성해지고, 잔 가지가 무성해지면 모든 양분이 그리로 다 분산이 됩니다. 그래서 나중에 결실하는 계절이 되면 과실이 애기 손만 해져요. 그런데 부지런히 제거해주는 절지 해 주는 농부가 결실한 과일은 사과 하나가 애 머리통만 해요. 맛도 있고.. 우리 심령은 어쩔 수 없어요. 다윗이 넘어진 후에 고백한 시어 중 하나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내 모친이 나를 죄악 중에 잉태하였나이다." 본질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제야 그는 내 힘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오실 메시아에 대한 구원의 소망을 갖게 됩니다. 그것이 다윗이 넘어진 후에 중요한 구속사적인 관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매일매일 이 구원을 바라야 합니다. 오늘도 그 구원이 여러분들의 심령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축복합니다. 구원은 내가 예수 믿습니다. 선언한 그 순간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우리는 구원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주님, 오늘도 저를 구원해주세요. 오늘도 이 송 목사 꼬락서니를 보세요."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매일매일 그 구원이 심령 속에서 이루어지려면 잡초를 제거해 주어야 합니다. 말씀이 온유하게 자라날 수 있는 덕목이에요.
마지막 세번째로, 22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말씀을 행하는 자가 돼라.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으면 자신을 속이는 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재미난 비유를 합니다. 23절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이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매일 거울 보시죠? 옛날 거울은 오늘처럼 선명한 것이 아니고 철, 구리 같은 걸 갈아서 만든 것이었기 때문에 어렴풋이 보이는 그런 거울이에요. 그래서 성경 기자도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이것이 그런 의미입니다. 그때 거울은 희미하게 보이는 거울이었어요. 어쨌든 거울을 볼 때, 내 모습이 비취죠? 그러면 거울에는 내 모습이 남아 있습니까? 남아 있지 않습니까? 남아 있지 않지요. 나도 잊어버리고 거울도 잊어버려요.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만 하고 듣기만 하면, 신앙이 관념화됩니다. 오늘 이게 굉장히 중요한 영지주의 적인 속성을 잉태할 수가 있어요. 신앙의 관념화되어요. 그래서 잔뜩 머리만 커져요. 그래서 계속 그 머릿속에서 판단만 하고 깨닫는 게 구원인 것처럼.. 무서운 신앙의 편파가 생겨나기도 합니다. 이것이 오랜 뿌리를 가진 영지주의적 속성의 개념이에요. 머릿속에 생각하고, 깨달은 것이 자기 실력이 아니에요.
재미난 책이 있더라구요. '유재석처럼 말하고 강호동처럼 행동하라' 저는 뭐 서서 몇 군데 읽어봤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국민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어마어마하더군요. 특히 10대, 20대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거의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어쨌든 그 두 사람의 영향력은 굉장해요. 그런데 이 두 사람 모두 강점이 있더라고요. 유재석 씨는 말 그대로 명 MC지요. 그런데 그는 원래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데요. 카메라 울렁증에다가, 무대 공포증에다가 버벅거리는 습관이 있었데요. 원래가.. 그런데 지금은 온 국민, 세대를 아울러 존경받고, 인정받는.. 그래서 별로 안티가 없는 MC가 되었어요. 세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합니다. 배려. MC로서 게스트를 철저히 배려하는 거예요. 자기의 MC의 철학은 가드다. 농구로 말하면 가드다. 자기는 슈터가 아니다. 어떤 유형의 슈터들이더라도 슛을 잘 쏠 수 있도록 배급해주는 가드 입장이다. 그리고 두 번째가, 공감의 능력. 누가 나와도 먼저 공감 해주는 것. 세 번째가 어울림. 기꺼이 무너져서 어울릴 수 있는 낮아짐의 자세.
강호동 씨도 못지 않은 MC지요? 이 분은 운동선수 출신으로, 처음에 이 사람이 나왔을 때 일단 시끄러워요. 목소리가 큰 데다가 MC로서의 절대 결격사유인 마산 사투리. 그런데 이 사람이 MC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이 무엇이냐? 현장감. 몸으로 행동하는 것. 이 얘기를 왜 하냐 하면? 이 사람들이 목표만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아니고, 무섭게 목표를 향해서 시간을 투자해서 노력하고 공부하고 실행을 했어요. 관념에만 꿈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보이고 싶은데로 살아라!" 누가 한 말인지 아십니까? 소크라테스가 한 말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를 이렇게 봐주었으면 하는 모습이 있어요. 그러면 그렇게 살라 그 말입니다.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저도 우리 교인들이 저를 봐주었으면.. 그러면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쉽냐 말이에요? 어렵습니다.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이 말을 일찍이 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당신이 보이고 싶은 대로 살아라."
결론입니다. 27절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기독교가 차짓하면, 언어의 유희에 빠지고 관념의 유희에 빠질 위험성이 굉장히 많아요. 그런데 참~ 기쁘고 감사한 것은? 우리 삼일교회는 어느 교회도 흉내 낼 수 없는 강점이 뭔지 아세요? 제가 부임해보니까 딱! 알겠더라고요. 그런데 정작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더라고요. 항상 삼일교회 성도들은 젊어서가 아니라 신앙을 이론으로 먼저 배우기 전에 몸으로 먼저 배웠어요. 이건 굉장한 강점입니다. 대개 일반의 교인들은 이론을 먼저 배웁니다. 그리고 몸으로 실천을 하려고 하지요. 그런데 이게 잘 안되거든요. 그런데 몸으로 먼저 배운 사람은 정확한 개념과 이론만 정리해주고 던져주면 거기에서 무서운 에너지와 상승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삼일교회에 갖는 에너지의 강점이에요. 여기에서 우리가 만족해서는 안 되겠지요?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확한 이론을 통해서.. 그렇다고 해서 전혀 이론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또 속으로 '우린 이론을 모르고..' 그 말이 아니고, 거기에 강점이 우선이다는 거예요. 현장의 강점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수시로 주시는 말씀을 통해 우리 모든 삼일의 성도들이 정말 고아와 환란 당한 자, 가난한 자를 외면치 않고 수시로 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대로 순종해내고 행동할 수 있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오늘 주신 말씀처럼 당신이 보이고 싶은대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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