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면허증이 있는데 운전을 못하시는 분들을 일컬어 장롱면허라고 합니다. 분명 운전할 수 있는 라이선스는 있는데, 정작 차를 몰고 나가지 못합니다. 경험이 없는 거지요.
참 믿음의 네 가지 특징
그래서 두려운 마음에 고속도로도 올라가지 못하는 분들을 장롱면허라고 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받았으면, 그 믿음이 실제적인 행위로 나타나야 야고보 사도는 온전한 믿음이라고 강조를 해요. 오늘은 그 믿음의 정체와 실제적인 사례에 대해서 몇 가지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지요. 이 부르심에는 이 두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를 회개로 부르십니다. 사망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놓는 구원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이 부르심에는 우리가 조건반응이나, 작용할 아무 근거가 없어요. 왜냐하면, 죽었던 자이기 때문에 어느 날 눈 떫니까, 누가 살려냈어요. 하나님께서 성령님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살려낸 것입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조건이나 근거가 1%도 개입될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 놓곤, 두 번째 단계로 우리를 소명으로 부르시지요. 우리는 이것을 긴~ 인생 동안 펼쳐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 땅으로 낳으시고 구원의 백성으로 부르셔서 무엇을 하려 하시는가?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일생 속에서 드러나야 하는데.. 그러한 삶을 우리는 믿으의 삶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믿음에는 또 두 단계가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계속해서 믿음을 강조할 때 두 가지로 설명을 하라. 증명하라고 합니다. 첫 번째는, 물질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성품과 인격의 문제. 그걸 딱 한마디로 야고보서에서는 '혀의 문제'로 규정을 했지요. 야고보 사도는 믿음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이 평생을 걸쳐서 무얼로 믿음을 드러내고 증명해야 하는가? 첫 번째는 물질, 두 번째는 성품과 인격의 문제입니다. 그걸 또 다른 말로 혀로 설명을 했습니다.
오늘 후반절은 그러한 내용으로 설명을 하는데, 14절을 봅시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오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하고 15절부터 참 믿음의 특징에 대해서 네 가지로 설명을 하는데, 오늘 말씀의 제목이 참 믿음의 네 가지 특징입니다. 첫 번째 특징이 뭐냐? 15-16절,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오' 요한일서에서는 이렇게 표현을 했어요. '누가 세상의 제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형제들아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한일서 3:17-18절의 말씀이에요. 이것을 딱! 한 문장으로 정리를 하자면.. 참된 믿음의 첫 번째 특징은, '방관하지 않고 개입한다.' 이것이 살아 있는 믿음, 참된 믿음의 특징이어야 합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자는 방관하지 않고 반드시 개입합니다.
땅에다가 두 사람이 똑같이 씨를 심었습니다. A라는 농부도 심고, B라는 농부도 씨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두 농부가 열심히 물을 뿌려주고, 좋은 거름을 외국에서 수입해다가 뿌려주고 가꾸고 정성을 들였어요. 그러면 둘 중에 하나는 살아 있는 씨이기 때문에 반드시 싹을 돋우고 줄기를 내서 열매를 맺어야 됩니다. 그런데 A라는 농부가 뿌린 씨에서는 나와요. 그런데 B라는 농부가 심은 씨에서는 동일한 조건을 들이댔음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대번에 누가 심은 시가 살아 있는 씨라는 것임을 알게 됩니까? 열매로 알았어요. 오늘 사실 야고보서 2:14-26절까지의 이 이야기는 결국 그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 살아 있는 믿음의 증거가 뭐냐? 방관하지 않고 개입하는 것입니다. 주변에 이렇게 우리의 긍휼을 부추기고 우리의 마음을 자극하는 어떤 조건이 발생할 때에 거기에 반드시 조건 반사적인 반응이 나타나야 해요. 그래야 그 안에 심겨진, 던져진 말씀과 믿음이 살아 있는 말씀이고 살아 있는 믿음이에요.
자, 두 번째 17절입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오' 행함이 없는 믿음 안에는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라는 말속에서 어떤 특징을 발견해야 할까요? 사실은 같은 이야기이긴 하지만, 조금 시각을 달리해서 믿음은 무엇과 반드시 함께 한다? 행위와 함께 한다는 거예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신앙의 특징이 뭐였냐?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 편지를 쓰면서 세 가지를 칭찬했어요. 첫째는, 소망의 인내. 사랑의 수고, 마지막에 믿음의 역사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큰~ 지진으로 말미암아 엄청나게 힘든 상태에 있었어요. 그런데 더 불행한 이웃의 소식을 듣고 그들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돈을 모으고, 헌금을 해서 더 어려운 곳을 돕는데 수고를 아끼지 않았어요. 그 소식을 바울이 듣고 너무 고마워서 성도들을 격려하며 위로할 겸 편지를 쓴 거예요. 그렇게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1장에서 세 가지를 칭찬했어요. 믿음의 인내. 믿음의 역사, 소망. 거기서 믿음의 역사라는 말은 믿음의 히스토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일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된 믿음은 반드시 행위와 같이 일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보면 17절에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를 반대로 읽어봅시다. '살아 있는 믿음은 행함이 있는 것이니라.' 진짜 살아 있는 믿음은 행함과 일을 하게 되어 있어요. 살아있는 믿음이라면 반드시 역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믿습니까? 오늘 하루도 그 믿음이 일을 하시고, 그 믿음이 역사되기를 바랍니다.
자, 세 번째 특징은 18절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자, 여기 보시면. '보이라' 그랬어요. 세 번째 참된 믿음의 특징은, 믿음은 보이는 것입니다. 보여주는 게 아니에요. 보여주는 것과 보여지는 것과 틀리지요? 그 사람의 내면에 계속해서 살면서 누가보여지고, 누가 나타나야 합니까? 믿음의 주재자 되시는 예수님이 드러나시고, 예수님이 나타나야 해요. 그래서 고린도후서 4:7에 보면, '이 질그릇에 보배를 가졌으니' 우리 질그릇이에요. 우리 안에 누가 계세요? 보배가 계십니다. 그러면 그 보배가 계속 보여지고 드러나려면 어떤 조건이 선행되어야 할까요? 질그릇이 은으로 바뀌고, 조금 있다가 금으로 바뀌로, 다이아가 박히고 그렇게 변해야 할까요? 반대로 질그릇 안에 보배를 담은 인생이라면 살면서 이 질그릇이 잘게 부서져 나가야 합니다. 잘게 깨져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점점 더 누가 보여집니까? 예수님이 보여지는 거예요. 그 말이에요. 보여지는 삶. 나를 과시하고, 내가 이 정도 인품과 성품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주라는 말이 아니라, 질그릇 안에 보배를 담은 인생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 보배가 평생을 통해 보여야 하는데 거기에는 조건이 딱 하나예요. 질그릇이 계속 깨지고 부서져 나가야 보배가 보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잘못 착각을 하고 오해를 해서 이 질그릇이 어떻게 하든 금그릇이 되고, 은그릇이 되고, 다이아몬드가 박혀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을 거라고 속고 속이고 있어요. 성경에서는 그런 가르침이 없어요. 성경은 일관되게 예수가 믿음의 주재자이시고, 우리 안에 예수를 모시고 사시는 삶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질그릇에 보배를 가졌다. 깨어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부서져야 우리 안에 예수가 보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세 번째 참된 믿음의 특징이에요.
자, 네 번째 믿음의 특징이 뭐냐? 19절입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여러분 귀신들도 하나님을 알아요? 몰라요?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에요. 왜? 귀신은 지식적으로 아는데, 하나님께 순종하고 주인으로 모시는 관계에서 아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적어도, 내가 저 서람을 안다고 할 때에는 두 가지 차원인 거 아시죠? 물론 여러분들도 저를 알 거예요. 아직 채 2년이 안되었지만 매주 보시면서 설교 내용을 보시면서 대충 저런 사람이구나! 알 거예요. 그런데 제 어머니나 제 와이프만큼은 알지 못하지요. 와이프는 저의 못된 점. 꼬락서니, 식성, 습관 이런 걸 다 알아요. 어떻게 알까요? 저와 지내면서 경험했잖아요. 겪었잖아요. 앎에는 두 단계가 있는데, 귀신도 예수님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것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지요. 그냥 지식적으로 단순히 인포메이션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오늘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믿음과 앎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정확하게 마음의 모시는 문제를 얘기합니다. 19절은 그 말입니다. 귀신도 떠들고 안다고 했어요. 우리가 사실 말만 갖고 있는 신앙은 조금 극단적인 표현 이어 조심스럽지만.. 귀신 흉내를 내며 사는 거예요. 귀신도 그렇게 살아. 똑같은 이야기 합니다. 귀신도 흉내 내며 사시겠어요? 귀신도 말합니다. "나도 알아" 그러나 참된 믿음은 그 정도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생의 전방위적인 영역 안에서 그분을 주인으로 경배하고 모시는 삶을 얘기해요.
요즘 대세 중 한 분이 김보성이라는 분이 있어요. 이분이 독실한 크리스천이더라고요. 이분이 20여 년 동안 무명의 세월은 아니지만 딱히 특별한 배역 없이 힘들고 어렵게 지냈데요. 심지어는 전기세도 내지 못하라 정도로 근근이 어려운 생활을 이어오던 중. 요즘 시대가 필요로 하고, 목말라하는 의리라는 주제 앞에 이분이 확 떴어요. 드디어 자기 철을 만난듯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어요. 그래서 모든 광고에 보면, 이분이 등장을 하더군요. 이분이 등장하는 광고 매출량이 어마어마해요. 캔 제품 같은 경우는 69% 정도 판매율이 늘었다고 해요. 컵 제품 같은 경우는 63% 또 세븐일레븐에서 판매되는 비락식혜 같은 경우는, 48.3% 어마어마하죠? 이 분은 모든 용어에 의리를 말 바꾸기를 해서 '신토부 의리' '아메 의리 카노' '마무 의리' 이분의 진지함이 과장된, 남성성이 엮어져서 사람들에게 요즘 어필하는 인물 같아요. 그러면서 한국인의 의리. 과연 옳은가?라는 주제로 어느 분이 칼럼을 썼어요. 두 가지 질문을 했는데, 이 질문은 칼럼 쓴 분이 만든 게 아니라 네덜란드 비교문화 경영학자인 '폰 스트로페 나스'라는 박사 물었던 질문입니다. 두 가지를 물었는데 시간이 없으니, 한 가지만 소개를 할게요. 문제입니다. '친구가 차를 몰고 가다가 과속을 해서 사람을 치었는데, 당신은 그 차 안에 동승을 하고 있었습니다. 유일한 증인인 당신이 과속 사실을 숨기면 친구는 가벼운 처벌만 받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대로 얘기한다면 인생의 중대한 국면을 맞게 되는 큰 벌을 받게 될 수 있습니다. 유일한 증인인 당신은 법정에서 당시 그가 과속하지 않았다고 증언할 용의가 있는가?'라고 물었어요. 40여 개국에 흩어져 있는 바이어들에게 물은 것입니다. 거기에 한국도 속해 있었습니다. 결과는 놀라웠어요. 아무리 친구라 하더라도 진실을 얘기하겠다는 비율이 가장 높게 나온 나라가, 캐나다. 97%. 미국, 영국, 서독도 비슷합니다. 90% 이상. 그런데 60%대로 떨어지는 나라가 프랑스, 일본, 싱가포르입니다. 그리고 40%대의 나라가 있는데 중국, 인도네시아, 러시아. 딱하게도 한국은 20%대로 꼴찌를 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친구의 과속 사실을 숨겨주겠다는 것입니다. 의리의 국가지요. 이 칼럼의 결론이 뭐냐 하면? 이것은 나라마다 민족성과 문화의 중대한 차이가 있다. 이런 평가를 내리면서 재미있는 마무리를 했습니다. '한국은 인간관계를 중시하고, 인간관계에서도 의리가 중요한 정의사회이다. 올바른 정의가가 아니라, 정(초코파이)의 사회이다. 규칙과 약속도 중요하지만,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규칙과 약속을 과감하게 왜곡하고 적절하게 변형시킬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규칙대로 하거나, 원칙을 너무 강조하면 살아가기가 힘들다. 고지식한 사람. 인정머리 없는 사람으로 통하기 쉽다. 이런 온정주의가 어쩌면 초고속 경제성장을 만든 힘이었을지도 모른다. 한국인은 서로 의기투합하기만 하면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는데, 야근도 불사하고, 주말도 반납해주며, 해외 오지 시장을 개척한다. 의리를 중시하는 이러한 정의 문화가 유럽이 150여 년 동안 이룬 근대화를 불과 20-30년 만에 이루어내는 결정적인 추진력이 되었다.' 여기까지는 듣기 좋지요? 그런데 항상 앞에 좋은 이야기가 나오면, 뒤에 별로 신통한 이야기가 나오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세계 13위 경제대국이자 한국을 본받고자 하는 국가들을 거느린 선도국가가 되었다. 의리와 정은 초고석 경제성장을 이루는데 무엇보다 효과적이었지만 달성한 경제적 성과를 유지하고 국가와 사회를 미래의 불확실한 위험으로부터 지켜내는 데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다. 고속성장을 위해 그동안 무시되어 왔던 규칙 준수, 안전 우선, 책임 완수 등의 가치를 이제는 되찾아야 할 때다. 중진국을 넘어 선진국을 바라보는 단계에 이르렀음에도 규칙보다는 인간관계를 앞세우고, 규범보다 정을 위에 두는 온정주의를 고집하다간 제2, 제3의 세월호와 같은 참사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뼈아픈 지적이지요? 여러분 세월호 다시 거론하기도 힘든 주제이지만, 안전에 대한 규칙이 없었나요? 법률이 없었나요? 관리하는 사람 없었나요? 자리자리마다 월급 받아가며 관리하는 사람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고 나자마자 이런 잘못된 의리 문화. 잘못된 온정주의 성경은 정확하게 뭐라고 말하는가?
마태복음 7:15-21,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잘 보세요. 행하는 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22절 '23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론은 불법이라고 말합니다. 행하지 않는 게 불법이 아니라, 뜻대로 행하지 않는 게 불법입니다. 결국 이것은 무엇이 정확해야 한다는 것일까요? 뿌리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은 뿌리에 관한 믿음이었어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뿌리에 관한 강조였고, 그 뿌리가 바른 기초라면 거기에는 반드시 야고보 사도가 강조한 것처럼 믿음의 열매가 나타나야 한다 그 말이에요.
그래서 오늘 야고보서 2장 24절, 결론입니다.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차짓 잘못 읽으면 이것은 행위도 있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식으로 바울의 가르침과 배치되는 표현으로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도행전의 강의를 통해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에서 종교회의가 열려요. 종교회의의 주제가 무엇이냐?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느냐?'였어요. 그때에 두 지도자가 사도 바울의 문제제기에 대해서 인정을 해줍니다. 승인을 해줍니다. 첫 번째 인물이 베드로, 두 번째 인물이 야고보입니다.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사도행전 15장에서 두 사다고 승인을 합니다. 그런데 왜 야고보 사도가 오늘의 본문에서 왜 '믿음으로만 아니니라.'라고 했을까요? 그 믿음이 참된 믿음이요, 참된 뿌리라면 반드시 거기에 합당한 행위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설명이에요. 그러니까, 야고보의 설명이나 사도 바울의 설명이 동일한 설명입니다. 야고보는 열매에 포커스로 설명을 한 것이고, 바울은 뿌리를 포커스로 강조를 한 것입니다. 즉, 믿음과 행위는 항상 같이 가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행위도 중요한데, 뭐가 더 중요하다? 바른 행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내 아버지의 자녀요, 천국에 들어갈 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모두 불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첫째,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되어서 그 기초 위에 살아있는 믿음의 말씀이 여러분들의 삶을 지배하고, 반드시 결실하는 참된 믿음의 열매가 온 생애를 통해 드러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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