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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story/송태근목사

[새벽설교] 야고보서 1:12-18 I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음 I 송태근 목사 I 삼일교회

by №1★↑♥ 2021. 7. 1.

 

  우리가 어제는 시험을 기쁘게 여기라. 기쁘게 여겨야 하는 이유는? 시험에는 인내를 이루는 온전함이 두 영역이 있다고 말씀을 드렸어요. 인내를 감당해야 하는 그 자체가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음 

송태근 목사 삼일교회

  시험이 오면.. 그것을 온전히 이루어야 합니다. 운동으로 말하자면, 훈련을 전 코스웍을 잘해야 되는 온전함이 있습니다. 그것을 겪고 감당할 때에는 너무 힘들어요. 너무 힘들고, 이유도 모르겠고, 왜 겪어야 하는지도 모르게 그것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렇게 하루하루 버티고 겪고 나가다 보면 저 먼 끝에 나도 생각지 못했고, 기대하지 못했던 놀라운 하나님의 목적하신 선물이 놓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 시험을 통해 설정하신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선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겪고 있는 중에나 시험의 때에는 그것을 알까요? 모를까요? 모를 때가 태반이라는 거예요. 이렇게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데는 두 영역이 있기 때문에 시험이 올 때는 기쁘게 여기라, 기뻐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다.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그 연장선상에서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12절을 보시면, '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 복이라는 개념은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의 입장에서는 매우 친숙하고 익숙한 개념이고 단어지요. 마태복음 5장에 보면, 팔복을 설명하시면서 이 복이라는 개념을 굉장히 자주 사용하셨고, 새롭게 정의하셨습니다. 야고보의 입장에서는 이 복을 항상 마음에 담고, 오늘 그의 서신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마카리우스' 이 복을 여기에 다시 설명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복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입고 잘 사는 현세적인 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복을 말하는 거예요.  자, 그런데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야고보 사도가 상급에 해당하는 '면류관'이라는 개념을 동원했어요. 이 면류관은 당시 사람들은 누구나 아는 개념이 하나 있습니다. 운동 경주가 끝나고 우승자에게 생화로 엮은 월계수관을 실제로 씌어줍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워요? 얼마나 감동이 있겠습니까? 자, 그런데 그 면류관이 며칠이나 가겠습니까? 이것이 살아있는 식물로 엮어서 머리에 올려준 우승이고 상징이에요. 참, 기쁘지요. 감동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갈까요? 보름 갈까요? 여기서 생명의 면류관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렇게 한시적이고 일시적인 면류관의 상대 개념을 말하는 거예요. 주께서, 장차 이 시련의 저 끝에서 우리에게 씌워줄 면류관은 그렇게 한시적이고, 일시적인 면류관이 아니라 영원한 성격을 가진 면류관이라는 것을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생명의 면류관에 대한 약속을 받은 교회가 하나 있지요? 계시록에 보면, 일곱 교회가 등장하는데 어느 교회입니까? 유일하게 책망이 없었던 두 교회가 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와 서머나 교회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이 이름을 붙인 교회가 미국에 가도 굉장히 많아요. 한국에도 더러 있고, 그런데 서머나 교회라 이름 붙인 교회는 흔치 않아요. 왜 그런가? 이유가 있습니다. 서머나는, 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 네 환란과 궁핍을 아노니' 특별히 서머나교회는 지독한 환란과 궁핍에 처해있던 교회였어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이 생명의 면류관에 대한 유일한 약속이 주어졌던 교회가 서머나 교회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거기에 '궁핍'이라는 말은? 절대 결핍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여기서 환란이라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짓눌려진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얼마나 힘들까요?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요? 서머나 도시 자체가 굉장히 부요한 곳이었습니다.   그 도시가 부요하게 되었던 이유가 있어요. 로마 황제의 신전을 유치하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을 했습니다. 그 로마 황제를 섬길 수 있는 신전을 유치해야 로마황제를 더 잘 숭상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에 따른 엄청난 후원이 중앙정부에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제적인 이익 때문에 로마 황제의 숭상을 위한 신전 유치에 혈안이 되어 있었어요. 그걸 제일 먼저 따낸 도시가 서머나입니다. 로마의 철학과 기강과 틀을 가장 잘 반영해낸 도시로 중앙정부의 엄청난 지원을 힘입어서 이 도시는 늘~ 돈과 사람과 경제가 흥청망청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상대적으로 그 세파의 흐름에 따를 수 없었던 그리스도인들은 상대적으로 던져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기자가 서머나 교회를 향해서 "내가 네 환란과 궁핍을 아노니 죽도록 충성하라 생명의 면류관이 네게 있으리라." 여기에서 배출한 유명한 폴리캅이라는 주교를 역사 속에서 기억할 것입니다. 기꺼이 한 시간의 고통을 감내하고 팔십 년 동안 자기를 사랑했던 예수님을 부인할 수 없다는 유명한 고백을 하고 화형을 당했던 폴리캅. 이분이 서머나 교회 출신입니다. 이렇게 그 시련과 환란을 잘 견디어 낸 자에게는 한시적이고 일시적인 면류관이 아닌 영원한 생명의 면류관이 담보가 되어 있는 거예요.

자, 그런데 영원한 면류관이라는 것이 뭘까? 에 대한 개념은 조금 더 살펴보기로 하고 다음으로 나가겠습니다. 

 

  13절,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2절 말씀과 좀 배치가 되지요? 분명히 '시험을 참는 자는..' 그래 놓고, 13절에서는 '사람이 시험받을 때는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시험받지도 시험하지도 않으신다'. 이 두 구절은 서로 배치되는 구절이 아니고 앞의 시험과 뒤의 시험의 의미가 다릅니다. 앞의 시험은 말 그대로 테스트, 연단의 개념이에요. 그런데 지금 13절의 시험은 말 그대로 유혹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유혹이라는 말은 어디서 파생된 개념이냐 하면? 낚시꾼들이 고기를 잡기 위해서 낚시 바늘 끝에다가 미끼를 걸어요. 미끼라는 뜻입니다. 도처에 이런 미끼가 덫을 놓고 우는 사자와 같이 때로는 광명한 사자와 같이 성도들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래서 이 덫에 걸리는 결과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합니다. 내부적인 요인과 외부적인 요인입니다. 외부적 요인은 방금 말씀드린 대로 도처에 걸려 있는 미끼가 항상 가득해요. 왜냐하면, 이 세상은 틀 자체가 타락한 세상이에요. 타락한 구조에서 토해내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미끼입니다. 늘~ 우리를 무너뜨리고, 넘어트리려고 하는 것들로 가득합니다. 이런 외부적인 문제들이 도처에 깔려있는데.. 문제는 우리 속에 내부적인 요인이 있어요. 죄성이에요.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죄성. 죄는 어원적으로 지치지 않는 열망을 이야기합니다. 죄를 향한 지치지 않는 열망.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서 대표적으로 두 인물을 들 수 있어요. 다윗과 같은 경우는 나라가 가장 태평성대를 이룰 때 여유로워져서 결국, 전쟁 중인데도 전쟁의 현장에 참석하지를 않고 늦게까지 잠을 자고 일어나 옥상에 올라가 바람을 쐬러 갔다가 목욕하는 여인 하나를 보게 됩니다. 그 여인이 목욕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옥상을 거닐다가 그 광경을 본 것도 죄가 아니에요.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못 볼걸 많이 봅니다. 문제는 뭐냐? 성경에 정확하게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목욕하는 여인을 보고 다윗이 "알아보라"라고 명령합니다.' 알아봤다. 알아보았더니 충성스러운 부하 중에 우리야라는 장군의 아내라는 정보를 갖고 와요. 죄는 우리 마음속에 한번 착근을 하면, 따라서 합니다. "죄는 끝장을 본다." 죄란 놈은 절대 중도포기란 말이 없습니다. 죄는 끝장을 봐요. 그 여인을 데리고 왔는데, 레위기 율법대로 부정한 기간이었어요. 여자들이 한 달에 한 번씩 갖는 부정한 기간이었어요. 그런데 다윗이 돌려보내지 않고 그 기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범죄를 저지릅니다. 이게 죄가 갖는 무서운 집요함입니다. 죄는 집요합니다. 특별히 성적인 죄는 집요합니다. 굉장히 집요합니다. 글래서 하나님 앞에 넘어지죠? 그리고 그가 썼던 시 중의 하나가 시편 51편인데, "내가 죄 중에 출생하였으며 내 모친이 죄악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근본이 죄 덩어리라는 것을 고백하면서, 그가 아주 중요한 고백 하나를 하지요. "내가 하나님 앞에 목전 앞에, 범죄 하였나이다".

  그러니까, 옥상을 거닐 때에는 그 인식이 멀어져 있었어요. 항상 우리 신자들이 항상 놓치지 말아야 될 것이 신전 인식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인식입니다. 코람데오라고 하지요. 신전인식입니다. 여기에 가장 샘플이 누구냐 하면, 요셉입니다. 요셉에게는 두 단어를 기억할 수 있어요. 비록 종살이의 몸으로 팔려갔지만, 보디발의 아내가 한번 유혹을 한 게 아니에요. 성경을 보시면 '날마다 종용했다.'라고 했어요. 한참 피 끓는 청춘의 나이였던 요셉을 향하여 '날마다' 유혹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셉이 뭐라고 했죠? "내가 어찌 하나님께 범죄 하리오"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어쩜 그렇게 다윗과 정반대의 샘플로 우리에게 메시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두 번째 단어가 "함께 있지 아니하니라." 그래서 성적인 죄는, 어떤 죄도 그렇지만 맞서서 이길 죄는 없습니다. 피해야 합니다. 피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외국의 해병대 캠프에는 "앞만 보고 달려라" 휴가 나가는, 외출 나가는, 외박 나가는 병사들을 향해서 좌우를 보지 말고.. 길을 가다 보면 우리의 눈을 빼앗기고 마음을 빼앗는 수많은 유혹거리들이 얼마나 많아요?  이 경제구조와 문화자체가 이상하게 더러운 눈과 마음을 자극시켜서 팔아먹으려는 수 많은 시도들.. 자동차 선전하는데 아름다운 자매들이 왜 벗고 나와야 합니까? 난 이해를 못하겠어요. 어느 회사에서 역발상으로 다 입혀가지고 나오면 더 잘 팔릴 것 같은데.. 거의 다 벗겨서 나와서요. 어쩌자는 겁니까? 자동차 파는데 왜 벗어요? 이게 한 예지만 모든 경제의 구조가 그런 인간의 단만마 적인 자극을 통해서 장사를 하는.. 여기에 현대인들이 생각 없이 무너지는 아픔을 봅니다. 그런데 이것을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14-15절,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여러분, 결국 이 끝이 뭘로 끝이 납니까? 사망으로 끝이 납니다. 사망의 반대 개념이 뭡니까? 생명이지요? 아까 시련을 잘 견디는 자는 무슨 면류관을 얻어요? 생명의 면류관을 얻어요. 사망은 소멸하는 겁니까? 실존하는 겁니까? 사망은 소멸하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망이라는 것은? 생물학적인 개념처럼 소멸하고 없어지고 숨이 끊어 멎는 그런 사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여기서 말하는 사망은 하나님과 반대되는 모든 삶의 형태와 패턴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죄를 토해내고, 죄를 쏟아내고, 음란과 사욕과 거짓과 살인과 위협과 이 모든 것들이 사망의 패턴입니다. 공격하고, 무너트리려 하고, 악을 쓰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이게 전부 사망의 냄새예요. 생명의 면류관 영원한 면류관은 생명의 냄새를 내게 되어 있어요. 거룩과 의와 자비와 양선과 온유와 절제와 사랑과...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이 두 가지의 반대 개념을 성경 기자가 대비시켜놓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늘~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네를 뛴다. 왔다 갔다 한다는 거예요. 이것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 충분히 공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독일 출신의 유대인 철학자인 아렌트라는 사람이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전범자 중 하나인 아히만을 잡아서 재판하고 신문하는 과정을 보고서로 낸 적이 있어요. 제목이 이렇습니다.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 요지는 이겁니다. "세인들은(세상 사람들은) 그 전범자 아히만의 무서운 살인만행의 기록을 봐서 성격 파탄자이거나, 인격장애자 혹은 무지막지한 흉악범이거나 이런 사람으로 기대하고 재판을 기다렸어요. 그런데 정작 신문하는 과정에서 겪고 만난 아히만은 너무나 뜻밖의 인물이었습니다. 너무나 상냥하고, 친절하고,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한 아저씨의 모습에 불과했어요." 그런 사람의 내면에 인간의 생명과 존엄에 대해서 무자비한 만행이 나왔다는 것이 도무지 사람들 생각 속에 상상할 수 없었던 결과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아렌트라는 사람이 쓴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혹시 여러분, 좀 된 영화이지만 공범이라는 영화 보셨습니까? 공범에 보면, 공소시효가 며칠 남지 않은 유괴범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목소리가 공소시효를 며칠 앞두고 라디오를 통해 노출이 됩니다. 며칠 안에 범인을 잡아야 하기 때문에.. 그런데 어느 아름다운 자매가 그 목소리를 듣게 돼요.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예요. 자기 아버지 목소리인 거예요. 그런데 자기 아버지는 한 20년 가까이 그렇게 착하고, 선하고, 평범한 삶을 살던 그런 아버지였어요. 그런데 그 아버지 속에 그런 무서운 음성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공소시효가 지난 시간에 맞추어서 아버지가 딸에게 그런 메시지를 건네지요. "다~ 너를 사랑해서 그랬단다." 그런데 라디오에 노출된 아버지의 음성은 너무나 끔찍하고, 무서운 음성이었어요. 아이의 부모를 협박하는 전화 음성이었어요. 이렇든 인간의 내면에는 항상 이 둘 양자가 공존을 해요. 양자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해요. 악과 선의 얼굴이.. 오늘도 우리는 사망의 냄새를 낼 것인가? 생명의 면류관을 향해서 오늘도 우리가 이 하루를 잘 감당할 것인가? 성경 기자는 이렇게 단호하게 우리에게 해답을 남겨 놓고 있습니다. 

 

   우리 16절을 볼까요? 16-18절, '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여기 '낳으셨느니라.'는 말은, 만들고 출산했다는 그 말이지요. 뭘로? 진리의 말씀으로.. 그러니까 신자가 그 사망의 냄새와 생명의 냄새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요. 말씀을 구하며, 하나님 앞에 철저히, 매일매일 은혜를 구하며 무릎 꿇는 일입니다. 우리 시편 119편을 열어보겠습니다. 시 119:9-11, '9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10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11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여러분 이 과업은 매일 매일 우리의 일상 속에서 하루를 시작하면서 평생을 싸워야 할 문제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기자는 어제 본문을 통해서 '너희가 지혜가 부족하거든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거기서 두 가지를 이야기한 거예요.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 구하는 것은 기도하는 일을 말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사망의 냄새와 생명의 냄새 사이에서 그리스도인으로써 어떤 삶을 경주할 것인가? 하나님은 시험하지 않습니다. 시험당하지도 않습니다. 문제는 외부적인 미끼들이 죄를 향한 끊임없는, 지치지 않는 열망이 걸려들 뿐입니다. 이것을 방지하는 길은 딱히 없어요.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속에 매일매일 심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순간 죄가 건드려지면 우리 마음 속에 말씀이 삐져나오고 터져 나와야 해요. 계속해서.. 그래서 강력하게 그 말씀이 우리의 삶을 보호하고, 견디게 하고, 버티게 하는 힘과 동역이 돼야 합니다. 오늘도 이 새벽에 주신 말씀 붙들고 하루를 승리케 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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