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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story/송태근목사

새벽설교 I 야고보서 3:13-18 I 두 가지 지혜 I 송태근 목사 I 삼일교회

by №1★↑♥ 2021. 7. 6.

  지혜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소개하지요. 첫째는, 땅의 지혜가 있고, 하늘의 지혜가 있다고 합니다. 또 다른 표현으로 위로부터의 지혜라고 표현을 합니다. 땅의 지혜가 무엇이고, 위로부터의 지혜가 무엇인가? 우선 본문을 봐가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두 가지 지혜

 

 

  13절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 지니라' 많은 사람들이 지혜와 지식을 구분을 못해요. 지식은 거의 정보 개념이나, 정보의 차원이에요. 요즘은 뭐 홈페이지나 일반 사이트에 가면 많은 정보,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혜와 지식의 차이를 이런 예로 설명을 할까요? 

  어느 분이 잘못을 해서 감옥에 들어갔어요. 간수가 그 죄수를 가만히 관찰을 했어요.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악한 일을 해서 이곳까지 오게 되었을까?' 감옥이란 곳은 정말 마지막까지도 가서는 안 될 곳이 감옥이에요. 관찰해보았더니 무식하더래요. 글씨를 모르더라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글씨도 모르는 무식으로 인해 고단한 인생을 살게 되었구나!' 딱한 마음에 짬짬이 불러다가 글을 가리켰어요. "당신이 글을 알게 되면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갖게 된다." 글을 열심히 가리키고, 죄수도 고마운 마음에 열심히 글을 배웠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덧, 만기 출소 날짜가 되었습니다. 뜨거운 마음으로 감격의 인사를 나누고 다시는 이런 곳에 오지 말라고 당부를 하고 보냈어요. 한 참 있다가 죄수 하나가 들어오는데 바로 그 사람이에요. 간수가 너무 실망스럽고 놀랐습니다. "아니, 나랑 그렇게 약속을 해놓고선 또다시 이곳에 오게 되었느냐?"라고 물었는데, 이번엔 죄목이 뭐냐? '공문서 위조죄'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지식이 부족했던 걸까요? 지혜가 부족했던 것일까요? 지혜가 부족해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지혜를 이렇게 정의해놓았더군요. '지혜란 지식을 바르게 사용하는 인격과 기술의 총체를 말한다.'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이 악한 쪽으로 활용이 되면, 그것이 흉기가 됩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선한 지혜를 타서 활용이 되면 생명을 살리고 이익이 되고 유익이 되지요. 그러니까, 이 땅에는 두 가지 지혜가 있다고 성경은 말하는데.. 본문을 보겠습니다. 

 

  14-15절 '14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자, 정리를 합시다. 땅의 지혜와 위로부터 오는 지혜가 있다고 합니다. 땅의 지혜란 뭘까요? 그것은 사람이 만들어내는 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땅의 지혜의 반대 개념을 뭐라고 설명을 했지요? 위로부터 오는 지혜라고 합니다. 이 말은, 방향적인 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내 속에서 만들어낸 지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즉, 밖에서 부터 오는 지혜를 위에서부터 오는 지혜라고 설명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밖에서 오는 지혜는 내가 만들어낸 지혜가 아니고.. 즉,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라는 뜻이에요. 이걸 조금 더 정직하게 표현을 하자면 이런 뜻이 됩니다. '내가 만들어 낸 지혜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의 차이를 땅의 지혜와 위로부터 오는 지혜로 설명'을 한 거예요.

  자, 그러면 내가 만들어 내는 지혜, 땅의 지혜의 특징을 네 가지로 설명을 합니다. 첫째, 14절을 잘 보세요. '독한 시기, 다툼, 자랑, 거짓'입니다. 이 네 가지를 마귀적인 것, 귀신의 것, 정욕, 세상의 지혜라고 했어요. 그러면 시기부터 설명을 드릴게요. 시기는 보통 영어 성경에서는 질투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는데, 유사하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 시기는 이기적인 욕망과 자기중심적 열심을 얘기합니다. 이런 세상적이고 마귀적이고 정욕적인 덕목들이 과연 세상에만 있을까? 그렇지 않지요. 아직도 정화되지 않은 내면의 세계에도 이러한 요소들이 무섭게 뿌리내리고 자리 잡고 있어요. 또 이 시기는 역사를 보면, 역사를 특이한 발전으로 향하는데 촉매제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오래전에 어느 TV 대담 프로그램에 미인 여자가 나왔습니다. 이분은 남편에게 버림을 받은 여자예요. 버림받고 나서 매일 술로 또 세상적인 근심과 염려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습니다. 왜 남편은 나를 버렸을까? 그리고 그 후에 남편이 누구와 결혼을 했냐? 하면, 에스라인의 글래머러스한 여인과 결혼을 하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한 거예요. 그러면서 이 분이 무서운 시기심에 불타서 결심을 했어요. 그리고 열심히 다이어트를 했어요. 그래서 진짜 남편이 새로 맞이한 그 여자보다 더 글래머러스한 몸매를 만들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미국의 유명한 에어로빅 강사가 됩니다. 그것이 비디오로 출시가 되어서 그런 사연에 의해서 만들어진 비디오라는 스토리가 엮어지니까 수많은 한을 가진 여자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 어마어마한 재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프로에 초빙이 되어서 자기가 왜 에어로빅 강사가 되었는지 등에 대해서 강연을 한 거예요. 그리고 끝말에 나를 그렇게 버린 남편에게 지금은 감사하다. 그리고 이분도 더 훌륭한 남자와 잘 살았다는 이야기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어요. 

  세상의 살아가는 스토리 속에서도 이러한 시기가 그런 작용을 해요. 이건 건강치 못한 실예지만 시기라는 것은 이렇게 우리 속에 쓴 뿌리를 남기는데 잠언에서는 이런 설명을 합니다.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 그런데 이런 분위기가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 속에서도 있었어요. 누가 더 큽니까?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던 질문이지요. 이러한 시기는 항상 비교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0:12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비교하란 말이에요? 하지 말란 말이에요? 비교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 비교가 잘 못된 시기심을 촉발합니다. 예수님에게 무서운 질책을 경험했던 바리새인들도 항상 예수를 체포하고, 잡고자 하는 그 이면에 성경 기자가 무슨 수식어를 남기죠? '시기하여 에수를 잡고자' 그러니까, 바리새인의 이면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 시기심이었습니다. 요셉을 죽이려 하고, 애굽에 팔아넘겼던 형들의 동기가 무엇이에요? 시기심이었어요. '왜, 요셉만 이뻐할까? 왜, 요셉에게만 채색옷을 입히실까?' 시기심이었어요. 그런데 진짜 무서운 시기가 뭔지 아세요?

  파킨슨이라는 박사가 만들어 낸 개념인데, '무능력 질투증' 이게 무슨 말이냐? 능력은 없는데 질투는 충만한 거예요. 이것을 무능력 질투증이라고 정의를 했더라고요. 이러한 시기는 항상 무슨 생각이 들어오면서 시작이 되냐? 항상 불평등하다는 생각이 들어오면서 전제가 시기심을 촉발시켜요. 불평등하다는 전제로 발생된 시기심은 정의라는 이름으로 가면을 쓰고 달려들 때가 많아요. 굉장히 무서운 거예요. 이것은 전체 공동체나 사회적인 현상으로 일어날 때가 있어요. 그런데 그 이면에는 사실에는 시기심이에요. 공평하지 않다. 정의롭지 않다. 그 이면에는 시기심이 자리 잡고 불평등하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정의라는 가면을 쓰고 상대방을 찌르고 공격할 때가 비일비재하다는 거예요. 이것은 철저하게 화평을 깹니다. 그래서 시기가 낳는 자식이 뭐냐? 다툼이에요. 그다음 항목이 뭡니까? 그래서 시기는 늘~ 다툼을 낳습니다. 이 다툼은 분열의 영성이에요. 공동체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항목들입니다. 그러니까, 논리적으로 잘 보세요. 이런 것들은 각각 떨어진 독립된 것들이 아니라 연결이 되어 있어요. 시기는 다툼을 낳아요. 다툼은 분열을 낳아요. 분열은 파멸을 낳게 되고, 파멸은 모든 아름다움과 공동의 선을 파괴하고 맙니다. 그만큼 이 시기심이 무서운 결과를 낳게 됩니다. 마치 입 안의 작은 혀가 온 인생이 수레바퀴를 불태울 수 있듯이.. 같은 이치예요.

 

  그다음 두 번째 항목이 뭔가요? 다툼이지요. 세 번째 항목은, 자랑입니다. 고린도전서 1:28-29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무 육체도 자랑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랑합니다. 자랑이 낳는 자식이 하나 있어요. 자랑이 꼭 생산해 내는 자식이 있는데, 거짓말을 낳습니다. 그다음 항목이 뭐예요? 진리를 거스르는 거짓. 거짓은 항상 과장으로부터 시작이 돼요. 이것이 에덴동산을 파괴했던 사탄의 계궤죠.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과장시켜요. 그리고 극단적인 말을 하고 덧입히고, 플러스알파 해요. 진리를 왜곡시키는 거예요. 자랑은 항상 자기 과장을 낳아요. 그래서 우리가 표정까지도 거짓말해서는 안돼요. 뭔가를 강력하게 설명하려다 보니까 과장을 낳게 되는 거예요. 

  과장은 거짓인데, 이 거짓은 영원히 감추어질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4: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5절 중간에 보니까, '..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영원히 감추어질 것은 없어요. 다 시간 속에서 진상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드러납니다. 감추어질 것은 없어요. 그래서 항상 자랑은 과장을 낳고 과장은 거짓말이 됩니다. 그러면, 이제 땅의 지혜는 인간이 생산해내는 냄새나는 지혜는 이 정도로 하고..

 

  야고보서는 대체적으로 네 가지 항목에 집중했어요. 그러면 위로부터 오는 지혜의 색깔은 무엇일까?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말하기 전에 땅의 지혜의 결과를 16절이 말하고 있습니다.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이것이 땅의 지혜가 가진 결과라는 것입니다. 두 가지를 설명했지요. 첫째로 혼란이에요. 무질서입니다. 왜 무질서 해지죠? 핵이 없어질 때, 중심이 없어질 때.. 즉, 하나님이 중심 되지 않는 세상은 전부가 무질서한 세상이에요. 그리스도가 주인 되지 않는 하나님이 주재자가 되지 않는 인생은 전부 무질서한 인생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탐욕에 끌려 살게 되고, 욕망에 붙잡혀 살게 되고 이기심에 불타서 살게 되고, 그렇다 보니까 그 인생이 무질서하게 됩니다. 그것을 여기서는 혼란이라고 했어요. 즉, 하나님이 주인 되지 않는 삶을 성경은 혼란이라고 하고,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여기서 말하는 악은 선악의 반대 개념이 아니라, 남는 게 없는. 헛 장사란 말이에요. 여러분, 장사하는 분들이 장사의 목적이 뭘까요?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죠? 하나도 남지 않는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란 거 아시죠? 장사꾼의 모든 궁극적인 목적은 이윤 창출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예요. 인생도 장사하는 자로 비유합니다. 그럼 남는 게 있어야 할 거 아니에요. 그런데 자기 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국은 무질서하게 되고, 남는 게 없는 헛된 인생이 된다는 말을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나아가서 위로부터 오는 지혜의 색깔을 봅시다. 여러 가지를 이야기를 했는데 짧은 시간에 모든 것을 다 살펴보기는 어렵고 몇 가지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13절입니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 지니라' 우선 하늘의 지혜, 위로부터 오는 지혜의 특징은 첫 번째는 온유합니다. 프라우스라는 말은 헬라어인데, 잘 훈련되고 절제되고 통제된 상태를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런 말을 합니다. "나는 천성이 온유하지 못해~" 천성이 온유한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온유하라는 거예요. 여기서 말하는 온유는 그런 어떤 성품적인 의미도 잇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 인간의 본성을 말합니다. 그저 사람이 타고나기를 사분사분하고, 그런 상태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잘 훈련되고 잘 통제되고, 잘 절제된 상태를 말합니다. 천성이 온유하지 못하다. 그 말 맞습니다. 인간은 천성이 온유하게 태어나지 않습니다. 유아 부실에서 얘기들 노는 모습 한번 보세요. 그들이 온유하나? 누가 학습하지 않았는데도 남의 것 빼앗을 줄 알고, 꼬집을 줄 알고, 물어뜯을 줄 알아요. 어디 인간이 온유하게 태어납니까? 죄 덩어리로 태어나는 것이 인간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성품으로 만들어지는 거예요. 하나씩 하나씩 다듬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온유하다는 말을 헬라 사람들이 쓸데에는 들에 들짐승들을 잡아다가 "앉아! 서! 뛰어! 넘어!" 처음에는 말 안 듣지요. 그러나 한 3개월 동안 회초리로 때려가면서 당근을 잘 줘가면서 훈련을 시켜요. 3개월 후에 그 야생마, 야생짐승이 말을 잘 듣게 되었어요. 그때에 '프라우스' 온유해졌다. 즉, 잘 훈련되고 통제되어지고 길들여졌다. 그 말이에요.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으로 잘 통제되어지고 길들여져야 됩니다. 그걸 온유하다고 하는 거예요. 이게 위로부터 오는 지혜입니다. 

  그다음 덕목을 보십시다. 17절의 '성결하고'는 똑똑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똑똑한데 성결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굉장히 똑똑해요. 그런데 성결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염되지 않은 그 뜻입니다. 어떤 이물질도 들어가지 않은.. 그래서 여기서 성결이라는 말은 물량적이라는 말이에요. 오로지 주님만 바라는 태도와 상태를 말합니다. 성결한 상태예요. 

  세 번째, 화평. 로마서 12장에 보면 이런 본문이 있죠?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라' 그리고 마태복음 5장에서도 예수님께서 팔복을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원문에는 '복이 있도다 화평케 하는 자여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을 것이라.'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라면 화평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그 말이에요. 고린도후서 5:17-18절에도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빚으신 목적을 화목케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우리 직분이 뭐예요? 성도의 직분은 화목케 하는 직분입니다. 마귀의 직분은 분열과 파멸을 가져옵니다. 그게 기질이에요. 트러블 메이커는 자기는 정의의 칼을 가지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덕목이 아니에요. 여기서 그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네 번째, 관용하며 양순하며. 관용은 잘 들어보세요. 잘못과 죄를 정당화하자는 말이 아니에요. 관용이라는 말은 잘 못된 것, 죄를 정당화하자는 말이 아니라, 그건 그것대로 나무라고 지적하고 책임을 물어야 해요. 그러나 죄와 사람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그 말이에요. 그가 비록 죄를 지었지만, 그가 비록 잘못을 저질렀지만 준엄하게 대가를 지불케 하고 그다음에는 그를 덮썩 안아 줄 수 있는 용기를 관용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 틀리면 전부 다 죽일 놈이에요. 하나 틀리면 그 사람의 인생 전체가 엑스예요. 사람을 많이 대해야 하는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이 이런 실수와 오류를 범할 수가 있어요. 그것을 우리는 보통 선입관이 작용한다고 하는 거예요. 한번 틀렸으니까, 저것도 아닐 거야. 관용이라는 것은 잘못된 것, 죄를 인정하고 책임을 묻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앉아 줄 수 있는 용기를 관용이라고 해요.   

  양선이라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긍정적 기질, 그 상대방의 생각을 들어줄 줄 아는 태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도 "정말 그럴 수 있겠네요. 세상에~ 그럴 수도 있겠네요?" 들어주는 거예요. 과거에 정 무슨 총리께서 국가와 국가 간에 중요한 주제를 놓고 회담을 하다가 그 사람의 화법에 상대방이 오해를 해서 국가 전체에 큰~ 혼란이 있었던 적이 있어요. 그분은 크리스천인데 모든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거리는 제스처를 하는데, 상대방은 그것을 예스로 이해했어요. 큰 중차대한 일을 할 때에는 혼란이 일어나서는 안 되겠지요. 그러나 여기서는 개인대 개인의 상태를 말합니다. 즉, 양선이라는 것은 생각을 들어주고 긍정해주는 기질. 특별히 우리가 공동체 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인간에 대한 예의이고 태도입니다. 그런데 상대방이 말을 하는데 자기 생각과 너무나 틀려, 말하는 데 계속 이래(?). 그것도 눈까지 감고. 정말 그러지 마세요. 정말 기분 나빠요. 아주 단호한 기질의 성격을 가진 분들이 가끔 그래요. 저도 그런 경우를 많이 겪었어요. 그러면 얘기하다고 할 맛이 안 나요. 끝까지 들어주는 거예요. 그게 양선입니다.

  그다음으로 긍휼. 중요한 덕목입니다. 여러분 은혜와 긍휼의 차이점이 있을까요? 은혜와 긍휼은 사실 틀립니다. 그 차이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은혜는, 자격 없는 자에게 베풀어지는 호의를 은혜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은혜보다 더 큰 덕목이 긍휼입니다. 긍휼은 뭐냐? 저주할 자를 불쌍히 여겨, 저주를 중단하고 동정을 베푸는 것 까지를 긍휼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긍휼은 더 적극적인 태도예요.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 중에 하나가 긍휼입니다. 그것을 가장 꽃 피워낸 자리가 십자가의 자리입니다. 편견이라는 덕목이 등장을 하지요? 편견은 역사의 아주 무서운 오류를 낳을 수 있어요. 공동체에 아픔을 줄 수가 있어요. 편견을 정의하자면 이런 거예요. 자기 고집이에요. 자기 일부분의 생각을 전체적인 생각으로 일반화하거나, 원리화시키려는 시도를 편견이라고 해요. 사람마다 다 편견이 있어요. 경험의 세계가 다르고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편견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 죄인들은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편견에 붙잡힐 수 있다는 전제를 반드시 깔고 살아야 해요. 어떤 분은 하나님도 자꾸 설득하려고 해요. "하나님, 그거 아니에요." 기도하면서 하나님 막 혼내고, 하나님 얼마나 당황스럽고 뻘쭘하실까요? 자기 고집이지요. 그런데 이런 실수가 주로 신앙이 약한 자들에게 벌어지는 현상이 아니고, 나름 신앙생활 짬밥을 만들었다는 중에서 일어나는 실수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도층의 사람들, 편견에 붙잡힐 수 있습니다. "내가 다 해봤는데~" 이 말 자주 했던 분 계시죠? 그런데 자기가 해본 것 밖에 모르잖아요. 박사라고 요것밖에 모른다 그 뜻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박사 자랑할 게 못 돼요. 그것만 공부하느라고 다른 것들은 모른다 그 말이에요. 사실은..

  그리고 거짓은 영국 배우들이 배역에 따라 마스크를 갈아서 착용하는 상태를 거짓이라고 합니다. 배역에 따라 마스크를 자꾸 다른 걸 쓰는 걸 거짓이라고 해요. 그러면 이렇게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은, 두 가지 결론으로 통로를 주셨어요.

 

 

  마지막으로 첫째, 디모데후서 3: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구원에 이르는 지혜. 그러니까, 이 지혜는 어디로부터 오나? 성경에서 와요.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준데요. 구원에 이른다는 말은, 우리를 죽을 자리에서 살려내는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받은 백성들이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의 전 인생의 과정을 말하는 거예요. 그 인생길을 걸어가는 데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가 있어야 해요. 그걸, 누가 주는 건가? 성경이 말해준다는 거예요. 

  그리고 두 번째, 어디서 지혜가 올까요? 약 1:5 '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두 번째는, 어떻게 해야 해요? 기도해야 해요. 결국 지혜는 성경과 기도입니다. 말씀과 기도입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만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얻을 수 있고, 그 지혜가 우리의 삶을 풍성케 하고, 윤택케 한다. 평생토록 말씀과 기도에 붙들려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발판으로 인생과 나그네 길을 걸어가는 윤택한 삼일의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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