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story/송태근목사

[새벽설교] 야고보서 4:13-17 I 영원한 것 세 가지 I 송태근 목사 I 삼일교회

by №1★↑♥ 2021. 7. 8.

  이 당시에는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면서 장사를 하는 소상인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어차피 이 대상이 흩어진 유대인들에게 쓴 글입니다. 그들은 일찍이 고국을 떠나서 타향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동하는 것이 그리 썩~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영원한 것 세 가지 

  어쩌면 평생을 나그네로 사는 것이 몸에 베인 사람들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소위 무역상들이지요. 사도행전 16장에 루디아라는 여인이 등장하지요. 루디아는, 이름이 아니고 '리디아 쪽에서 온 여자'라는 뜻입니다. 그 여자는 뭘 하는 사람이었죠? 옷감을 팔며 장사를 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렇게 이곳저곳을 왕래하며 장사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조금씩 조금씩 돈을 만지게 된 거예요. 그러다 보니 생활이 조금씩 나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자리를 잡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뜻하지 않은 폐해가 발생하게 되는데, 교회 안에서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상대적인 박탈감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서 교회 안에 뜻 밖에도 복음이 왜곡되기 시작했어요. 잘 사는 것이 하나님이 복을 준 것이라는 논리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시작을 했습니다.

  우리나라 근 현대사에서도 그런 흐름이 있습니다. 처음 이 땅에 복음이 들어와 뿌리를 내릴 때에는 신앙 자체가 순수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가족도 버리고, 생명도 버렸던 그런 순교의 터 위에 한국교회가 건강하게 부흥을 하며 출발을 했어요. 그리곤 6.25를 겪게 되지요. 온 나라가 잿더미에 앉게 되었습니다. 새 정부가 들어서고 처음에는 미 군정으로 시작된 이 나라가 독립국가로써 모양을 갖추게 되면서 잘 살아보아야겠다는 국민적 의지가 담보되어서 정부에서 밀어붙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어린 자매들이 간호사라는 이름으로 저 먼 나라 가서 말이 간호사지, 국민들조차 만지기 싫어하는 시신들을 하루 종일 닦아요. 그리고 우리 아버지들은 광부라는 이름으로 파견이 되어서 수백 미터 갱도까지 들어가서 석탄가루를 마셔가며 마르크화를, 달러를 고국으로 보내왔어요. 그 종잣돈으로 한국경제가 이만치 기초를 닦게 되었는데 그때 온 국민이 잘 살아보자는 것이 염원이었지요. 이러한 경향이 교회 안에 슬그머니 편승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복음의 모든 내용들이, Real need. 사람들에게 진정한 필요를 선포하고 전하는 것이 아니라. felt need. 오늘날 사람들이 뭘 필요로 하는가? 오늘날 현장은 뭐가 필요한가? 복음의 초점이 삐딱선을 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복 받고, 무병장수하고 만사형통하고.. 다는 아니겠으나 일부 복음이 왜곡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70-90년대를 거쳐오면서 우리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병들고 변질된 복음의 내용을 형성하고 말았어요. 

 

  이런 비슷한 분위기가 지금 야고보 사도가 이 글을 쓰고 있는 교회 공동체 안에 스며들어온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뜻하지 않은 폐해였습니다. 또 하나의 이중적 폐해가 무엇이었냐? 성공한 상인들이 세상에서 어떤 방식으로 돈을 벌게 되었는가? 건강한 신앙과 하나님이 주인 되는 비즈니스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라."라고 고백은 하면서 비즈니스 현장에서는 전혀 다른, 하나님과 상관없는.. 속이고, 탈세하고, 부당이득을 취하고, 무자비하고, 힘의 논리로, 경제의 논리로, 세상 사람들과 하등 다름없이 세상의 가치를 따라서 장사는 장사대로 하는 거예요. 그 사람이 크리스천이에요. 여기서 이중적 폐해와 혼란이 발생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가 사실은 그 부분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13-14절 '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이 부분을 이렇게 오해해서는 안돼요.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비즈니스 할 때에도 무계획으로 대책 없이 해야 하냐? 그 이야기가 압니다. 질서를 따라 영업을 하고, 비즈니스를 해야 되겠지요. 여기에는 계획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핵심적인 가치는 그 비즈니스의 전 과정 속에 정말 하나님이 주인 되어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 되지 않는 모든 영업은 그것이 서로 이윤을 남길지라도 헛되다. 그 말을 여기서 '안개'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헛되다'를 말하는 주제의 책이 어딘가요? 전도서입니다. 전도서의 주제는 세 가지입니다. 살아보니 헛되더라. 살아보니 세상은 모순 그 자체더라. 살아보니까, 인생이란 게 불확실하더라. 인생을 살면서 다 누려본 전도자가 내린 결론이에요. 솔로몬이 그랬다면 맞는 거예요. 그중에 가장 큰 주제가 헛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야고보 사도는 '안개니라.' 그랬어요. '텅 빈 실체인 것 같아서 잡았는데 아무것도 손에 잡히는 것이 없더라' 하나님 없는 인생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그랬다면 

 

  오래전 이야기이긴 하지만 1996년에 미국 TWA항공사가 그 해에 목표를 초과 달성해서 순이익이 400% 였어요. 그러자 회사에서 자축의 의미로 샴페인을 터트렸습니다. 그리고 샴페인이 터트려지는 그 시간에 TWA 800 항공기가 파리에서 뉴욕을 왕래하는 비행기가 원인모를 고장으로 200명 모두가 숨을 거둡니다. 이것이 400% 초과 달성했던 그 해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어요. 그리고 5년 후에 문을 닫게 됩니다. 그런 일이 살면서 한두 가지 일일까요? "다녀오겠습니다." 그러고 문을 나서도 올지 안 올지 어떻게 장담할 수 있습니까? 하루를 살아가는 동안에도 얼마나 많은 위험요소들이 우리 주변에 않습니까? 별의별 일들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으리란 법이 없지 않습니까? 정말 안개 같아요.

  그래서 인간은 살면서 크게 세 가지 물음을 가지고 산다고 해요. 

  1. 무엇이 영원한가?
  2. 무엇이 정말 의미가 있는가?
  3. 무엇이 새로운가?

  사람은 그렇더라고요. 정말 가진 게 없어도 거기에 분명한 동기가 있고, 의미가 있다면.. 목숨을 걸 수 있는 게 유일하게 인간이에요. 그래서 인간의 내재적인 본심 속에는 항상 의미 지향적인 본심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동기에 붙들리는 게 그만큼 중요해요. 가치가 있다고 할 때에 거기에 전 인생을 던지잖아요.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무엇이 영원한가? 오래전에 제가 세 가지를 답 변겸 설명을 드린 적이 있어요. 

  히브리서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누가 영원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예레미야 선지자가 그의 글에서 남긴 구절 가운데 가장 마음이 든든해지고 감격되는 구절은 '주의 성실함은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인자와 성실하심은 아침마다 새롭다고 했어요. 아무리 인간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오래 병 자리에 누워 있거나 그러면 힘들어서 변하더라고요. 자꾸 지치잖아요. 인간은 어쩔 수 없어요. 물론 변화할 때, 좋게 변화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부패성 때문에 서로가 관계가 나쁘게 변해요. 인간은 별수 없더라고요. 골동품처럼 갈수록 귀해지는 경우도 있지요. 그런데 갈수록 서로가 폐품이 되어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인간은 영원할 수가 없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더욱더 예수 그리스도만이 영원하신 분이심을 오늘의 성경 기자가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를 불러주신 분, 오늘도 우리를 찾아주시고, 초대해주시는 분, 누군가 나를 항상 찾아주고 있다는 것만큼의 기쁨이 어디에 있습니까? 

  영원히 나를 사랑의 추적을 해주시는 분이 계세요. "얘 지금 어디 가 있지? 오늘은 또 어디 가서 뒹굴고 있나?" 음부에 자리를 펼지라도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시는 분이세요. 어저께나 오늘이나 동일하시고, 소망되시는 분. 그분이 여러분들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인생을 얼마를 살았든, 살아온 횟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살수록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인생의 관점과 방향이 이분께 계속 더 목마름이 커져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 대해서 손을 내려놓아야 해요. 붙잡고 싶었던 것에 대해서 좌절하고, 오르고 싶었던 자리에 대해서 진저리를 내면서 결국 예수님 밖에 없구나! 이쪽으로 우리의 시선이 자꾸 옮겨가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너무 세상이 좋은 사람이 있지요? 시험 들면 그래요 

  제 친구 중에 하나는 금식을 하다가, 목회가 힘드니까 금식을 했어요. 위급하다고 해서 급하게 친구들끼리 찾아갔습니다.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뭔가를 중얼거려요. 뭐라고 하나 귀를 기울여보니.. "세상이 너무 좋아~ 떠나기 싫어." 충격을 받았어요. 우리는 세월이 가고, 시간이 흐를수록 오직 그리스도만이 영원하시다는 사실 앞에 절실한 고백이 나와야 해요. 시간도 흐르고, 세월이 가고, 인생도 다 지나갑니다. 그 말은 이 땅의 것들은 다 한계가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영원하십니다.

 

  또 무엇이 영원할까? 마태복음 24:35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영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약속을 붙잡고 산다고 해요. 약속이라는 것은 개념이 아니고, 실체입니다. 그 언약의 약속의 말씀이 우리의 인생을 니드 해 가야 합니다. 자기가 필요한 말씀을 붙드는 게 아니라, 그 말씀이 여러분들을 붙들기 시작해야 합니다. 모든 신구약의 사람들의 일생의 원칙과 원리들을 찾아보면,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하기 시작했음을 확인할 수 있어요. 말씀에 붙잡힌 인생과 내가 붙드는 인생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인생에 사는 원리가 달라요. 여러분, 말씀에 붙들리기를 바랍니다. 말씀이 여러분들을 붙잡아야 해요.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하세요. 

 

  세 번째로, 요한일서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결국 오늘 본문의 결론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알았다면 그대로 행해야 하는 게 오늘의 대답이에요. 오늘 이 야고보서 4장 끝 부분에 나오는 인생은 어떤 종류의 인생이었습니까? 비즈니스를 하면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데 이중적으로 살더라는 것입니다. 고백 따로, 삶 따로. 그리고 그들이 만지기 시작한 부가 교회 공동체 속으로 들어와서 복음의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잘 사는 게 하나님의 은혜구나! 포함되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이 곧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포함하지만, 복음의 핵심적 가치는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복음이 약속한 전부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돈을 만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자랑하기 시작했어요. 결국 그 자랑은 뒤집어 말하면 "이거 내가 만들었다!" 그 말 아닙니까? 그건 하나님이 준 게 아니에요.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자기가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건 은혜 아니지요. 하나님이 주신 것만이 복이고, 은혜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비즈니스를 그럴듯하게 해서, 수많은 이윤을 남길 수 있다 할지라도 우리 고백이 겸손하게 주님이 하셨습니다. 그때에 이것이 주님 것이 됩니다. 믿습니까? 오늘 결국은 그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디서부터 나온 얘기인지 아십니까? 하늘의 지혜와 땅의 지혜의 차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지혜 문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런 기록을 하나 남깁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도 힘쓰는 자들이 돼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우리가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야 바른 행위가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10장에서처럼 '너희가 하나님께 열심은 있으나 진리를 좇은 것이 아니니라..' 그러면 우리가 대표적인 케이스 하나를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달란트 비유가 나오지요. 주인이 어디 멀리 떠나기 전에 종들을 불러서 "너는 다섯, 너는 둘, 너는 하나" 맡깁니다. "내가 멀리 다녀올 테니 이것으로 장사를 해라." 세월은 유수같이 흘러서 주인이 돌아올 시간이 되었고 주인과 종들이 장사한 내용을 가지고 결산을 하게 됩니다. 다섯 달란트 맡았더너 종이 다섯을 남겼다고 원금과 함께 가져왔습니다. 두 달란트 받았던 종 역시 두 달란트를 남겼다고 원금과 함께 가져왔습니다. 성경을 나중에 잘 보시면, 다섯 달란트를 남긴 종에게나 두 달란트 남긴 종에게나 글자 하나 안 틀리고 정확히 칭찬이 똑같아요. "착하고 충성된 종아 잘하였도다." 그렇다면, 그 메시지는 얼마를 남겼느냐에 초점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 달란트 맡겼던 종도 결산을 하러 왔습니다. 원금을 땅에 묻었다가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어떻게 된 건지 물었더니, 장사를 안 했어요. 그냥 땅에다 묻어놓고 주인 돌아올 때 다시 꺼내서 원금에 일원 한 푼 손해 나지 않도록 보관했다가 다시 가져온 거예요. 그 대화의 내용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5:26-28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 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한 달란트 맡았던 종의 잘못이 무엇일까요? 뭐가 문제인가요? 너무 처벌이 가혹하지 않나요? 두 가지입니다. 뭐하라고 맡겼죠? 장사라고 맡겼습니다. 장사를 한다고 해서 꼭 이윤이 남는 법은 아니지요? 손해도 볼 수 있어요. 주인이 그거 몰랐을까요? 주인이 원하는 것은, 맡길 때 주인의 뜻대로 장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머지 종들은 손해 날줄 몰랐을까요? 각오하고 장사했어요. 왜? 그것이 주인에게 돈을 맡긴 뜻이었기 때문에 손해날 것을 각오하고 장사했어요. 그런데 한 달란트 맡은 종은 장사를 안 했어요. 왜 안 했을까요? 주인이 어떤 분인지를 몰랐기 때문에.. 문제는 거기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해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알았으므로.." "네가 나를 그렇게 알았느냐?!" 결국 종의 문제는 주인과 관계 문제였어요. 주인을 정확히 몰랐어요.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0장의 말씀처럼 '너희가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은 있었으나 지식을 쫓은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신앙인들 가운데 열심히 있는 분들이 있어요. 그분들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어요. 종교적 열심과 자기 의에 기초한 열심일 수 있어요. 이거 위험한 거예요. 다른 열심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뭘 원하는지를 먼저 알고..

  요한복음 5:30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예수님까지도 이 땅의 사역을 어떻게 하신데요?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계획을 가지고 많은 비즈니스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과정에 철저하게 주인은? 기초는 하나님이 되셔야 합니다. 그럴 때, 그 비즈니스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비즈니스요, 영광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만 이 시대 사람들이 그 생성되어진 이문과 이익을 자랑하기 시작했어요. "나 이 정도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했다는 거예요. 그 장사는 자기 장사였어요. 

 

  여러분 너무 잘 아시는 뇌성마비 지체장애인 송명희 시인이 쓴 시중에 '나'라는 시가 있어요. 저는 25년 전에 이분과 오랜 시간 대화를 할 기회가 있었어요. 한 마디 하기가 너무너무 힘든 장애를 갖고 계신 분이에요.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야고보서 4장을 맺으면서 두 가지만 생각합시다. 우리는 이 땅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시편 기자는 우리 인생을 바다에서 영업하는 자와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야고보 사도의 지적대로 고백과 삶이 다른 경우들이 발생할 수 있고, 그런 영역이 얼마든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현상이 나타날까요? 우리는 아직도 내 삶의 한 복판에 주님이 주인 되시지 않는 경우일 때 그런 자리가 만들어지고, 그런 삶의 시간들이 잉태됩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찬양 마지막으로 함께 부르기 원합니다. 

내가 주인 삼은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되신 주 앞에 나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 주 사랑 거친 풍랑에도 깊은 바다처럼 나를 잠잠케 해주 사랑 내 영혼의 반석 그 사랑 위에 서리"

 

기도

아직도 주님이 주인되지 못하는 삶의 자리 내려놓게 하여 주시옵소서. 거기에 주님이 앉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참된 행복이 찾아옵니다. 참된 평안이 찾아옵니다. 내려오십시오. 삭개오를 만나셨을 때,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삭개오야~" 이름을 불러 주시면서 "내려오라~" 하셨습니다. 내려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주님이 앉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흐트러졌던 인생과 혼돈 되었던 삶에 질서가 잡히고 하늘이 약속한 평안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어느것도 대신할 수 없고 흉내낼 수 없는 참된 평안이 내 삶을 지배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오늘 이 아침에 아직도 내려놓지 못하는 삶의 자리가 있습니까? 그것을 주님 앞에 내려 놓으십시오. 뭡니까?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