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story/송태근목사

[새벽설교] 야고보서 4:1-10 I 싸움과 다툼의 원인 I 송태근 목사 I 삼일교회

by №1★↑♥ 2021. 7. 7.

  원래 성경이 쓰여질 때에는 장, 절의 구분이 없었어요. 그러나 후대의 학자들이 독자들이 성경을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장, 절로 나누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어떤 때는 오히려 전체 내용을 이해하는데 정절 나눔이 방해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싸움과 다툼의 원인

  오늘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데, 우리 지난 시간 두 가지 지혜. 땅의 지혜와 위로부터 오는 지혜 하늘의 지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을 드렸지요. 땅의 지혜는 시기, 다툼, 자랑, 거짓. 그리고 그 결과는 혼란과 악한 일(악한 일 = 무익한 것, 아무것도 남는데 없다) 그리고 반대로 위로부터 오는 하늘의 지혜의 성격은 어떤 것인가? 화평, 관용, 양순, 긍휼. 그리고 의의 열매와 같은 것들로 설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4장은 여기서 끊어질 내용이 아니고, 그러면 그 땅의 지혜가 왜 발생하느냐? 땅의 지혜의 성격은 도대체 어떻게 생산되는 것일까?에 대한 세부적인 내용으로 들어가 보고자 했던 것이 4장으로 끊어져서 전혀 다른 주제처럼 비춰지는 데 오늘 4장은 그런 의미에서 전혀 다른 주제가 아니라 지난 시간과 연결되는 내용이라 보시면 됩니다. 1절을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땅의 지혜 중에 시기와 다툼에 대한 부분이 있었는데 그 부분을 조금 더 세세하게 그러한 것이 어디서부터 발생하는 것인지를 원인 추적을 해들어 가는 거예요. 아주 단호하게, 분명하게 그 근본 원인을 두 글자로 설명하는데, 결국 정욕의 문제다. 생각이 틀렸기 때문이다.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다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땅에서의 모든 싸움의 종류는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을 하지만, 그 내용은 몇 가지 안됩니다. 대의명분, 의의, 틀렸냐 맞았냐? 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아요. 그런데 야고보 사도는 그런 것으로 진단을 하지 않습니다. 딱, 한 단어! 결국 정욕의 문제다. 그럼 결국 정욕은 출처가 어디인가? 그 근본 자리로 가서 확인을 해보겠습니다.

  뱀이 여자에게 하던 말인데, 창세기 3:4-6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결국 뱀의 배후 세력은 사탄이지요. 먼저 여자를 꼬십니다. 여자에게 아주 달콤한 언어로 "이거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 타락한 천사도 그 동기가 하나님처럼 되는 게 그들의 이상적인 꿈이었어요. 긴 인간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시도되었던 것이 인간도 신처럼 될 수 있다는 운동이었고, 사고방식이었습니다. 오늘 여기 뱀도 여인을 꼬일 때 그 말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자존할 수 있다 그 말이에요. 쉽게 말하면,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 그 말이에요. 독립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를 이렇게 죄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여자가 넘어가요. 6절에 잘 보시면, 경로를 이렇게 소개해요. '그 여자가 나무를 본 즉' 모든 죄는 처음에 무엇을 보느냐(가시적인 것)에서부터 시작을 해요.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게 됩니다. 남자들~ "나는 주는 대로 먹어~" 주는 대로 먹으면 안돼요. 생각을 하고 먹어야지. 따져보고 먹어도 될까? 말까? 눈에 당장 달콤하다고 해서 주는 대로 먹으면 나중에 그거 토해내느라고 나중에 큰 곤혹을 치르는 경우들을 많이 봅니다. 이건 꼭 음식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이렇게 죄가 정욕을 타고 들어옵니다.

  그 정욕의 근본뿌리는, 스스로 독립하고자 하는 인간의 가장 핵심가치인 죄의 문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정욕으로 발동을 하고 그 정욕은 시기와 다툼과 분열과 세상적인 욕망을 낳게 되지요. 그리고 세상은 인간의 그 욕망을 이용하는데 천재적인 기질을 갖고 있습니다. 어제 교보문고에 갔다가 눈에 들어오는 책이 있어서 서서 읽어보았어요. '낭비 사회를 넘어서..'라는 제목인데 파리 시빌 대학의 교수님이 쓴 책이었어요. 거기서 이런 개념을 주로 말합니다. '계획적 진부화' 논리는 간단합니다. 모든 생산자들이 물건을 만들 때, 그 수명을 일부러 2-3년 주기로 정한다고 합니다. 더 이상 길게 못 쓰게, 그래서 2-3년만 쓰면 그 물건을 못 쓰고 새로운 물건을 구매할 수 있도록 심리적 진부화까지를 의도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이클에 인간이 길들여지면 2-3년만 지나면 계속 새로운 욕구가 생기도록 중독시켜 가는 거지요. 그렇게 해서 소비를 촉진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각 다행히도 

  인간의 욕심과 탐욕은 밑빠진 독처럼 끝이 없기에 이러한 메커니즘을 심기에 가장 적합한 요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비를 부추기고, 과도한 소비의 욕구와 욕망이 인간성을 파괴시키고 파괴된 인간성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결국은 같이 파괴하게 만드는 결과를 빗게 된다는 논리입니다. 절대 비약적인 논리가 아닙니다. 굉장히 지금까지의 역사 속에서 검증되었던 패턴이었고 맞는 원리입니다. 요즘처럼 소비가 하나의 문화 패턴이 되어 있는 시대에 한 번쯤 읽어볼 필요가 있는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결국 이 땅의 다툼과 시기를 보면, 먹을 게 입을게 부족해서가 아니에요. 편중되어 있어서 시기 다툼이 벌어지는 거예요. 멀리 갈 것도 없이 한반도의 경우도 한번 보십시오. 북쪽은 배곪아 죽고 있어, 남쪽은 배 터져 죽고 있어요. 너무 먹어서 문제예요. 세계 식량을 종합적으로 보면 인류가 먹고도 남는데 한쪽에는 너무 몰려 있고, 한쪽에는 너무 없단 말이에요. 게다가 그 인간의 욕망이 식량마저도 무기 삼고 있어요. 정치 역학에서, 정치 공학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식량뿐입니까? 자원 전부 지금 하나의 헤게모니를 잡기 위한 무기화시키기 위한 조건들 아닙니까? 어디서 발단이 되었냐? 정욕의 문제요. 죄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사상과 철학의 문제도 아니에요. 결국은 이 땅에서 일어나는 분쟁의 끝을 파고 파보면 정욕의 문제요, 인간의 탐욕의 문제요. 죄의 문제라는 것이지요. 그것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어디로 끌고 가는 지를 보겠습니다. 

 

  2절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그래서 계속 지구촌은 이런 시기와 다툼 전쟁, 살인 이걸로 해가 뜨고 해가 지지요. 이런 일들이 어떻게 설명되는지 계속 볼까요?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일반적으로 이 부분을 기도할 때 많이 인용을 하시는데 사실은 기도하는 데 똑바로 기도해라. 하나님 앞에 열심히 바르게 부르짖으라와 같은 단선적인 메시지를 위해서 본문이 쓰인 게 아니에요. 야고보서의 수신자가 1:1에 누구라고 하나요?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썼던 글입니다. 이 전제를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 그러면 이 세상에 분위기와 구조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보셔야 해요. 로마라는 제국 하에 로마의 가치, 로마의 철학, 로마의 문화 속에 그리스도인들이 던져져 있고 살아가고 있어요. 그러면 당시 로마의 철학이 무엇입니까? 힘을 숭배. 힘이 정의예요. 그래서 많이 가지려고 하고, 높이 올라가려고 하는 것이 로마 문화의 로마 철학의 정신적 가치였어요. 곧, 힘이 정의인 사회. 가진 자가 선이에요. 오늘이나 그 때나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만.. 그러다 보니까, 그 안에 던져진 그리스도인들은 그 세대를 본받지 않고 하나님의 원리와 하늘의 원리를 붙들고 순종하여 살려니까 상대적으로 지독한 궁핍 아래 던져질 수밖에 없는 거예요. 요즘 식으로 말하면, 양극화가 벌어진 거예요. 구조적으로 가진 사람은 더 갖게 되고, 못 가지고 가난해서 핍박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더 지독하게 공고함에 처해지게 되고.. 이때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왜 혼란과 유혹이 없었겠어요?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가? 예수 믿는다는 것이 꼭 이렇게 손해 보며 사는 게 맞는 건가?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의 고백을 통해서 천국 가는 티켓 확보하면 되는 거지 세상은 세상 아닌가? 우리도 먹고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 똑같이 거짓말 하고, 똑같이 눈감고, 똑같이 타협하고, 오늘 일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패턴처럼 신앙은 신앙이고 현실이 있지 않냐?' 이분법적이고, 이원론적인 삶의 유혹이 굉장히 크게 밀려들어왔어요. 

  그래서 야고보 사도가 흩어진 12지파, 교회들을 향하여 남긴 교훈이 뭐냐하면, 그 시대의 그리스도인들 마저도 그런 갈등 속에 무너지기 시작했단 말이에요. "잘못 구하고 있다." 구한다는 것은 꼭 기도만이 아니라, 일생을 거쳐 살아가는 삶의 패턴을 얘기하는 거예요. 꼭 기도만으로 단정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인생 전체가 뭐 하는 거예요? 구하며 사는 거예요. 어떻게 구하며 살고 있습니까? 오늘 성경은 정확하게 두 가지로 말합니다.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잘못 구함이요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 여기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이 뭐예요? 사단의 가장 교묘한 속임수처럼 "네 힘으로 살 수 있어". 요즘 세상은 과학의 발달로 예측이 가능해졌어요. 물질만능주의, 보이는 문화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에 꼭 절실하거나 절박한 게 많이 사라졌어요. 하나 더하기 하나 더하는 상식이 통하는 시대이고, 꼭 그렇게 상식적인 것이 좋은 건 아니에요. 세상 자체가 예측 가능해졌어요. 그러다 보니까, 하나님 앞에 구하는 삶의 패턴이 점점 사라지거나, 희미해지거나, 덜 절실하게 되었어요. 정말 아무것도 없을 때에는 그분 밖에는 바랄 게 없었어요. 그것을 가장 철저하게 훈련받았던 곳이 어딘가요? 광야. 뭐가 있어요, 거기. 하나님 밖엔 바라볼 데가 없어요. 그래서 이스라엘 공동체가 40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철저하게 온 지성과 인성과 감성으로 몸으로배웠던 신앙이 하나님께만 의존하는 신앙의 패턴이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물질이 풍부하고, 먹고살고 입을 만 해지다 보니까 그렇게 절실히 구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되다 보니, 재앙의 세대가 일어난 것입니다. 

  게다가 구하는 것마저도 잘못 구해요. 하나님은 늘~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기 위해 존재하는.. 내가 선택하는 신 중의 하나로 취급당하는 아주 부당하고 불편한 세상이 되고 말았지요. 구하지 않거나, 잘못 구하는 세상. 이것이 기도만 말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에 걸친 전인생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현대적 패턴을 아주 예리하게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덜 먹고 덜 입을 때는 그래도 늘~ 절박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어요. 아무것도 기도밖에 할 게 없잖아요. 그런데 기도밖에 할 수 없었던 그때가 정말 은혜였다는 사실을 요즘 깨닫잖아요. 여러분 기도 밖에 할 게 없을 때가 복입니다. 별로 이해가 안 되시는 모양인데, 기도 밖에 없을 때가 정말 복된 시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세상이 점점 풍요해지다 보니까 구하지 않게 돼요. 구하는 것마저도 잘못 구하게 돼요. 내가 먹고 입고 쓸려고 내가 고지에 오르려고 구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어요. 자, 그런데 성경은 조금 더 나아가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4절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간음한 여인들아.. 그러니까 주제가 바뀌는 것처럼 비춰집니다. 연결이 안 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어요. 그런데 3절과 4절 사이에 주제가 바뀐 게 아니라, 설명이 바뀐 것이 아닙니다. 설명의 양식이 바뀐 거예요.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간음'을 어떨 때 표현했나? 하나님 외의 것을 기대하고 의지하고 바라보는 것을 전부 영적으로 '음행한 이스라엘아', '간음한 이스라엘아'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나 지금 시대나 사람들이 점점 물질의 풍요와 물질의 보이는 것에 의존하다 보니까 자꾸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거기에 확률을 두더라고요. 가능성을 두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은 신앙이고 내가 천국 가는데 필요한 티켓이고, 현실이라는 것이 있지 않냐? 현실은 그런 게 아니니까.. 현실은 현실의 원리로 살아가는 것이다. 말하자면, 양다리를 걸친 상태를 '간음한 여인들아..' 하나님 의지하지 않는 건데, 하나님도 고백하고, 세상에 나가서는 세상의 발을 담그고 그쪽의 원리와 패턴에 맞게 살아가고.. 양다리를 걸치고 살아가는 거지요. 보이는데 더 확실하잖아요. 만져지는 게 더 확실하잖아요. 이걸 의지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지요. 이 상태를 성경은 '간음한 여인들아..' 그리고 이어서 바로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이 말은 양다리 걸치기는 존재할 수 없다. 양다리를 거쳤다는 것은 이미 대립각에 서 있다는 것을 따끔하게 충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네 신앙생활의 행동과 태도는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 한쪽 발을 딛고 있는 것은, 50%는 하나님 믿고, 50%는 하나님 의지하는 상태가 아니다. 왜 사랑의 속성이라는 것은, 항상은 전부 아니면 전무입니다. All or Nothing이에요. 사랑의 속성은 굉장히 독점적이에요. 그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사랑의 내용이에요. 두 남자가 있는데, 이 쪽 남자는 99%로 사랑하고, 이 쪽 남자는 1%로 사랑하는 거 안된다 그 말이에요. 우리 남편은 99.9% 사랑하고, 옆집 아저씨는 0.1%로 사랑하고 이것도 안되요. 100%.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헌신의 태도요, 내용입니다. 사랑의 성격이에요. 그래서 아주 재미난 표현을 남겨놓았어요.

 

  성경을 잘 보세요. 5절,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놀랍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뭐하신데요? 시기하신데요. 자꾸 우리가 한눈 파니까, 세상에 한눈 파니까 성령님이 우리를 시기하신답니다. 시기의 가장 기초 개념은 사랑이 전제 된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데 시기해요? 나랑 아무 상관없는 형제가 다른 여자와 데이트하는데 시기가 생기나요? 그건 좀 이상한 거지요.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형제가 다른 자매와 다정하게 전화를 하고 문자를 주고받으면 질투가 나고 시기가 나요. 그것은 굉장히 정상적인 반응이에요. 시기가 안 난다? 뭔가 관계의 문제가 생긴 거지요. 그런데 그분은 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어요. 그래서 사랑한 우리를 영원히 붙들고 시기하십니다. '시기하시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시기하고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이 본문을 가만히 종일 묵상해보았습니다. '아니 나같은 지푸라기 같은 존재를 뭐가 있다고 시기까지 하시고, 사랑하실까?' 감동이 쓰나미처럼 몰려올 수밖에 없는 거지요. 이 세상은 나를 사랑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은 시기하시기까지 사모하여 우리를 사랑하신데요. 그래서 우리 반대로 성도들이 세상을 의지하거나 다른 것에 한눈파는 것을 그분이 견뎌하지 못하세요. 가만 두지를 않으세요. 왜? 그분의 사랑의 속성이 전부 아니면, 전무한 성격과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6절입니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 역시 다른 주제처럼 보이지만, 겸손이 뭐에요? 성격상 양보 잘하고, 거친 소리도 못하고 그런 걸 성경에서는 겸손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동양적 미덕이고, 유교적 미덕입니다. 성경의 겸손은 오로지 그분만 바라는 삶의 태도를 겸손이라고 합니다. 겸손의 반대가 무엇입니까? 교만입니다. 교만은 뭔가요? 하나님 없이 독립하여 살 수 있다는 모든 삶의 방식과 가치와 태도를 교만이라고 합니다. 자기 잘난 체하는 것을 교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잘나게 하신 부분은 잘났다고 하면 됩니다. 그게 겸손이에요. 우린 자꾸 성경적 가치로 이해하지 않고 세상의 유행적 가치로 이해하려는 습관이 있습니다. 교만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는 여지의 모든 태도입니다. 겸손은 그분만이 내 인생이 유일한 대답임을 인정하며 그분만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마지막으로 9절입니다. 9-10절 '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겸손과 낮아지는 데 정서적으로 낮아지는 수준이 우리 속에 잃어버린 슬픔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애통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역사를 바꾸고 시대의 물줄기를 바꿀 때 항상 전조 주권으로써 슬픈 마음의 회복을 준비시키셨습니다. 사사시대를 통해 이스라엘이 몰락할 때도 슬픈 마음을 가진 한 여인을 준비하셨어요. 그래서 한나가 성소에서 슬퍼하며 어떻게 기도를 했냐? '통곡하며 부르짖었다.'고 성경 기자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슬픈 마음과 기도를 통해서 한 사람을 준비하시고 시대의 회복을 열지 않았습니까? 왜 슬픔을 회복해야 했을까요? 슬픔의 회복은 하나님께 모든 간구를 맡기는 인간의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울며 울며 그분께 나아가는 거예요. 어떤 상황 속에서도 거기에 길이 있고, 거기에 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유일한 방식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의 문제는 이 슬픔을 잃어버리고 애통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삼일의 성도들이 이 혼란한 시대 앞에, 정욕으로 가득한 시대 앞에 슬픔을 회복하고, 애통을 회복하는 교회가 되어서 우리가 큰 교회이기 때문에 뭔가 역할을 해야 한다는 교만한 생각을 갖지 말고 작은 마음을 가지고 모든 민족의 슬픔을 끌어안고 오늘 금요일입니다. 금요일 밤에 하나님 앞에 나오셔서 나 한 사람의 몫이라도 무릎 꿇어 부르짖는 것이 가장 겸손을 순종하는 은혜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