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주제는 비난 또는 비판입니다. 사람이 비판 안 하고 살 수 있나요? 비판 없이 이 세상이 돌아갈까요? 소위 우리가 생각하는 비판은 성경에서 말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이해와 오해를 갖고 있습니다.
비판하지 말라?
우선 사전적 의미, '사물의 옳고 그름의 가리워 판단하고 밝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성경은 '비판하지 말라'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해석을 잘 못했거나, 번역을 잘못했을 뿐입니다. 성경에서 '비판하지 말라'는 'Do not judge'로, '네가 심판자의 자리에 앉지 말라'입니다. 비판 자체를 금하거나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비판은 굉장히 건강한 기능입니다.
성겨에서 금한 것은 사실 비난입니다. 중상모략. 사실과 다르게 상대방을 헐뜯는 것. 비난의 사전적 정의는, '남의 허물과 결정을 책잡아 나쁘게 말하거나 사실과 전혀 맞지 않게 헐뜯는 태도' 주로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이 쪽의 경우를 경고한 것인데, 비판이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11절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 원문에도 보면 '크리노', '심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말을 할 때, 마치 자기가 최종적 결정권자이거나, 재판장처럼 한 인격에 대해서 "저 인간은 틀렸어." 완전히 전체 부정을 하는 무모한 태도는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남을 비방하는 것만큼 재미있는 것이 또 없어요. 아닌 척 앉아 있지만, 그렇지요? 이 재미가 굉장히 쏠쏠하다고 해요. 그런데 여러분, 남을 비방하는 것이 습관이 되는 거 아세요? 우리 자체가 죄성을 갖고 있고 남을 비방하는 것 자체가 죄성을 폭발하는 도구가 없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찰스 스윈돌이라고 하는 유명한 방송 설교가는 "남을 비난하지 말아야 할 7가지 이유"에 소개한 글을 보니 굉장히 공감히 가는 내용이라서 소개해보려고 해요.
- 우리는 모든 사실을 다 알 수 없기 때문이다.
- 사실을 알 수 없을 뿐더러, 우리는 모든 동기를 다 알 수 없다
- 사람은 근본이 객관성이 없다. 인간은 이타적이지 않고,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사랑마저도 지독한 이기성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겉으로는 이타적인 것을 가장 드러내는 것 같지만.. 특별히 자식 사랑 같은 경우.. 자식 사랑만큼 이타적인 것이 또 있을까? 그러나 그 안에 교묘하게 이기성이 감추어져 있는 경우가 많지요. 결국은 부모들의 이기적인 심성이 이타적인 방식으로 나타날 때가 있어요. 그래서 거기서 자기만족이나 대리만족을 느끼려는 경우가 있어요.
- 인간의 인식세계가 제한 적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사람마다 그 모양을 각기 다르게 만드셨어요. 사람 대하는 것만큼 재미있는 일이 없어요. 어떤 사람은 무슨 주제를 대입해도 네모로 나오고, 동그라미로 나와요. 왜 그럴까요? 틀이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될 때 그 사람의 내면의 틀이 그렇게 만들어져 있어요. 그래서 요즘은 인성 검사 많이 하지요? 제가 한 번은 평생 싸우는 사람을 알고 있어요. 두 분 어떤 주제를 주어도 같은 시각으로 본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그것도 기적 아닙니까? 이 사람은 늘~ 세모로 보고, 이 사람은 늘~ 동그라미로 보고. 알고 보니 두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틀이 달라요. 그래서 우리가 사람을 쉽게 틀렸다 맞았다 하는 것은 조금 어리석은 표현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인식 세계가 제한적이에요.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니다.
- 우리는 볼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다. 그저 가기가 보는 경험의 세계로 말할 뿐이다.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 코끼리 만지는 시험을 했는데, 다섯명이 만지고 와서는 '고무 호스처럼 깁디다.' 이 사람은 코만 만진 거구요. '담벼락처럼 튼튼합니다.'라고 합니다. 자기가 만진 경우의 세계로만 인간을 말할 수밖에 없어요.
- 사람은 기본적으로 편견적일 수 밖에 없다. 모든 구조가 편견에 붙잡혀 있습니다.
- 사람은 일관되지 못하다.
그런데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마 18:23-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우리가 갚을 수 없는 허물을 용서받은 자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자입니다. 우리는 죽어도 깨어나서 일만 달란트 빚을 갚을 수 없는 가난한 자였어요. 갚을 수 없는 자였는데, 탕감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백 달란트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비난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 부분을 반드시 집고 넘어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쉽게 비난할 수 없고, 눈에 들보를 가지고 남의 티를 책잡을 수 없는 것은 우리가 근본적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탕감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근본적인 은혜를 기초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비난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그 비난 속에는 교묘한 어떤 심리가 감추어져 있냐? 차별화를 위한 비난입니다. 자기는 상관없는 자처럼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이 속에는 자기기만과 자기 의와 그 의가 교만으로 감추어져 있어요. "난 너하고 달라." 이 죄를 가장 크게 보면서 예수님께로부터 비판을 받았던 이들이 바리새인입니다. '파리새'라는 말이 '분리'라는 뜻을 가집니다. 왜 분리합니까? 너희와 같이 할 수 없어요. 대한민국의 기독교가 사실은 하나여야 하는데, 어마어마하게 많은 교단과 교파로 갈라졌지요? 전부 분리된 것입니다. 그 이면에는 전부 개혁을 부르짖으며 분리를 했어요. 개혁을 부르짖었어요. "너희들은 틀렸어. 너희들과 함께 할 수 없어." 자기 의에요. 그런데 잘 보면, 거의가 사실은 진리 문제로 갈라진 경우는 10%도 안되고, 거의 90%가 지방색, 정치적인 이권 등과 같은 것으로 갈라진 거예요. 차별화한 것, 자기 의에요. 그 이면에는 자기 의와 교만이 감추어져 있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진짜 의도가 무엇이냐? 11절입니다. 11절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 왜, 형제를 비방하는 것이 율법을 비방하는 것과 같을까요?
자, 우선 율법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봅시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의 대 강령이라.'라고 하셨어요. 무슨 말 앞에?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는,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그럼 율법의 가장 집약된 핵심가치가 뭐냐?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정신입니다. 그러니까, 비판하지 말라는 말의 사실상 적극적인 목적지는 뭐하라는 건가요? 이웃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야고보서 사도가 이 말을 여기에 기록하고 있는 적극적인 정신이에요. '비판하지 말라'는 것은, "난 그런 거 유치해서 안 해" 그 정도로 끝나는 것으로는 안된다는 말이에요. :비판하지 말라"는 명령 속에는 적극적인 의미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자리까지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교적인 생활과 열심을 하면서도 하나님 사랑한다는 경쟁 속에서, 형제를 비판하면서 사랑을 내세울 때가 있어요. 그래서 비판은 할 수 있어요. 성경은 그런 의미에서 비판하지 말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비판이 뭘로 연결되어야 하느냐? 그 형제를 사랑하는 태도로 묶어지지 않는 비판은 위험에 빠질 수 있어요. 자기기만의 의에 빠지는 비판으로만 끝날 수가 있다 그 말이에요.
어느 글에서 읽은 글인데, 학교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이 떠드니까 "전부 다 책상 위에 올라가서 무릎 꿇고 손들고 있어" 벌을 준거예요. 그중에 어리어리 한 아이가 무서우니까 바지에 오줌을 싼 거예요. 친구들이 알기 시작하면 그 교실에서 놀림감이 되겠지요? 살면서 그게 얼마나 창피하고 생활에 문제가 생기겠어요? 이걸 선생님이 발견하고서는 물동이 물을 담아서 오줌을 싼 아이에게 가서 "누가 눈 뜨라고 했어?" 물 바가지를 끼얹었어요. 아이의 옷이 다 젖었겠지요? 사랑이에요.
항상 경고를 주고, 야단을 치는 것은 건강한 기능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비난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사랑으로 매듭지어져야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는 구절이 너무 유명한 나머지 다음 구절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가 않은 것 같아요. 요한복음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본성적 속성은 우리를 심판하는 데 있지 않다 그 말이에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 위에서 재물 되게 하신 사건도 결국은 우리를 구원케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사랑의 목적지예요. 그 초대에 응하지 않는 자가 할 수 없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그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심판이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일상 속에서 언어 습관 속에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지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의 온 수레바퀴를 윤택케 하기 위한 생활의 태도입니다. 이것은 훈련해야 할 문제입니다. 자꾸 남 헐뜯고, 비난하고, 뒷담화 하기 시작하면 굉장히 재미있어요. 그런데 그게 길어지고, 습관화 되고, 내재화되면.. 재미는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 영혼이 핍박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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