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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story/설교문

새벽설교 I 요한복음 9장 24-41절

by №1★↑♥ 2023. 1. 12.

개역개정 I 요한복음 9장 24-41절

24 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25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26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27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28 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이니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29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30 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31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32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33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34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35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36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 시오리이니까 내가 믿고 하나이다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38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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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게 하시는 주님

 

요한복음 9장의 특징은 대화가 참 많이 나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과 제자와의 대화, 바리새인과 맹인, 맹인의 부모와 바리새인, 다시 바리새인과 맹인의 대화, 그리고 예수님과 맹인의 대화가 나옵니다. 오늘 본문은 맹인과 바리새인의 두 번째 대화입니다. 부모에게 답을 얻지 못하자 맹인과 다시 대화를 하게 된 겁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맹인도 상황 파악이 되었던지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단순히 사실을 말하기보다는 자신의 주관을 또렷이 드러냅니다. 아마 이러한 변화는 자꾸 물어오는 바리새인들의 불온한 의도를 눈치챘던 모양입니다. 먼저 24절에서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붙이려는 모습을 봅니다. '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물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바리새인들은 할 수 없이 앞 못 보던 사람을 다시 불러 말하기를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라고 합니다.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말하라는 압력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한 것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인에게 눈먼 사람을 눈 뜨게 하는 권능을 주시겠느냐는 뜻입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25절입니다.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눈 뜨게 된 것을 예수님이 하신 일로 받아들이기 싫은 그들은 그에게 또 물었습니다.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9:26). 그러자 그 사람은 짜증스럽게 대꾸했습니다. "내가 이미 말했어도 듣지 않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합니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합니까?"(9:27).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합니까?" 한 것은, "당신들은 그를 믿지 않는 사람들 아닙니까? 안 믿으면 됐지 뭘 자꾸 반복해서 캐묻는 것입니까? 그렇게 확인하고 또 확인해보고 나서 그의 제자가 되기라도 하겠다는 것입니까?"하고 빈정댄 말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화가 나서 그 사람에게 욕을 하며 말했습니다. 28-29절입니다. '28 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29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이 말속에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계명의 하나인 안식일 준수 계명을 어기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일 수 없으며, 따라서 그런 사람의 말을 믿고 따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앞을 보게 된 사람이 다시 대답했습니다(9:30-33).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는데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고 하니 참 이상합니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말은 사실상 바리새인들의 이해할 수 없는 사고와 옹고집을 정면으로 비판한 것입니다. 비천하게 여겨지던 거지로부터 이런 핀잔을 받은 바리새인들은 또 화를 내며 말하기를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는 그를 쫓아내 버렸습니다(9:34)

 

 

바리새인들이 그 사람을 좇아냈다는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다시 만나셔서 물으셨습니다. 35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여기 '네가 인자를 믿느냐..'. 그가 대답하기를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9:36) 하자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9:37). 그때 그는 말하기를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는 엎드려 절했습니다(9:38). 그가 예수님께 절했다는 것은 그를 주님으로 경배한 행위를 가리킵니다. 그가 예수님에 대해 갖게 된 신앙이 확실하고 고백적이며 실천적인 것임을 보여주는 행위입니다. 3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심판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 내용은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입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으로 인해 일어난 논쟁의 끝자락에서 이렇게 심각한 심판 이야기를 하십니다. 예수님은 맹인이 눈을 뜬 사건을 통해서 당시 유대인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영적 진리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먼저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한다'는 것은 맹인이었다가 눈을 뜬 사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한다'는 것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이를 들은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반문합니다. "우리도 맹인인가?"  그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못 알아들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맹인인가'란 말을 서로에게 하는 것을 볼 때에 자신들이 거기에 해당될 것이라 여기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경고를 알아들었지만 그것을 자신들에게 적용하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도 날카로웠기 대문입니다. 아픈 부분을 찌르면 본능적으로 회피하는 것처럼 그들도 그 경고의 메시지를 피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영적으로 맹인이었습니다. 눈앞에 있는 분이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41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그들의 죄가 여전히 그대로 있다는 말은 예수님과 함께 있지만 죄의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맹인인가'가 아니라 '진짜 나에게 해당되는 말씀이구나!'란 수용적인 태도가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마다 필요한 자세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말씀 앞에 선다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맹인인가'가 아니라 '저는 진짜 맹인입니다.'란 곡백과 함께 주님의 은혜를 더욱더 의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변화가 일어날 때 영적인 부흥을 체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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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이야기 속에서 등장하는 두 부류의 사람 사이의 대비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쪽 사람은 앞을 보지 못하다가 고침을 받은 사람이고 다른 쪽은 바리새인들로 대표되는 유대인들입니다. 먼저 우리는 앞을 보게 된 사람에게서 일어난 변화를 주목합니다. 그 변화는 그에게서 이루어진 신앙의 생성과정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그에게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하고 처음 물었을 때는 그저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라고 대답했습니다(9:10-11). 그리고 "그가 어디 있느냐?"는 물음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노라"라고 대답했을 뿐입니다(9:12).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서는 믿고 있었지만 그가 참으로 누구이신지 알지 못했고 그를 더 찾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바리새인들과의 대면과 문답을 거치며 그는 예수님에 대한 이해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에게 다시 묻기를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떤 사람이라 하느냐?" 했을 때는 "선지자"라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9:24)했을 대는 대답하기를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은 보는 그것"이라고 하여 사실 예수님께서 죄인임을 강력히 부인했습니다(9:25)

더 나아가 하나님은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며, 창세 이후로 태어날 때부터 보지 못하는 사람의 눈을 뜨게 했다는 말을 들어본 일이 없는데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셨다면 자기의 눈을 고치는 일 같은 것은 할 수 없었을 것이라(9:31-33)하며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분이심을 조리 있게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바리새인들로부터 축출을 당한 자기에게 다시 찾아오신 예수님 앞에서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하면 그를 경배하는 신앙의 소유자가 된 것입니다. 

이에 반해 바리새인들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에게서 우리는 아무런 변화도 발견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 더욱 완악해져 갔음을 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태어날 때부터 앞 못 보던 사람이 보게 된 사실에 대한 그 어떤 기쁨과 감사와 축하의 말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는 사실은 인정하려 하지 않고, 그가 침을 뱉어 진흙을 이기는 노동(?)을 안식일에 함으로써 안식일을 범했기에 그는 죄인이며,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일 수 없고, 그러기에 눈먼 사람을 고치는 일 같은 것은 할 수 없다는 논리에마나 매달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 하기로"결의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이 드러난 명백하나 사실 자체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이들이야말로 진정 눈먼 자들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나는 과연 눈 뜬 사람인가?" 하는 질문을 진지하게 던질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 있는 이의 모습이고 구원의 시작입니다. 그 질문 없이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영의 눈이 멀었음을 깨닫는 이만이 그 눈을 뜰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눈을 뜬 이들만이 남들이 보지 못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고 그것을 소유하며 향유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눈 뜬 자 같으나 눈먼 자로 살지 맙시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영적으로 눈을 뜨는 역사가 우리 모두에게서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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