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story/설교문

성탄예배 I 마태복음 1장 18-20절 I 의로운 사람 요셉

by №1★↑♥ 2022. 12. 22.

개역개정 I 마태복음 1장 18-20절 I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반응형

 

성탄예배 I 마태복음 1장 18-20절 I 의로운 사람 요셉 I 송태근 목사

 

마태복음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여기서 '나심'이라는 말이, '게네시스'에요. 이 말의 뜻은, '창세기라는 책의 이름의 어원과도 같습니다.' 가만히 보면, 마태복음 1장은 크게 두 덩어리로 나뉘어 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 구분이 1-17절까지에요. 전부 무슨 내용이냐? 1절,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라고 되어 있고, 그리고 17절은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여러분, 그리스도의 계보로 시작해서 족보는 그리스도로 마쳐집니다. 그래서 계시록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과 시작. 또는 알파와 오메가로 소개를 하기도 하지요. 이 17절까지의 내용은, 창세기 1장에 보면 인류의 기원을 다루듯. 그분과 유사한 구문입니다. 그리고 18절서부터 25절의 마지막 부분은, 창세기 기사처럼 대략 인류의 기원을 설명한 다음에 본격적으로 아담의 창조를 설명하듯이 18절서부터는 새로운 시작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성경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1장과 마태복음 1장은 구조자체가 아주 유사하다 정도로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18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여러분, 성경 속에서도 마태의 관점을 이 짧은 문장 안에서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마리아를 예수 어머니로는 소개를 해요. 그죠? 그런데, 요셉을 마리아의 남편으로는 소개하지만, 예수의 부친으로 설명하지 않아요. 바로 뒤에 이름이 나오는데 이왕이면 유대사회의 통념상, 오늘날도 그 통념이 이어지고 있는데.. 요셉의 아들 예수라든지.. 예수의 부친 요셉이라든지.. 설명해주면 독자들에게 훨씬 거부감이 들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런데 당시도 그렇고 오늘의 통념상에서도 이해하자면 이 부분은 굉장히 어색한 부분이 아닐 수 없어요. 굳이 어머니를 마리아로 설명하면서도 아버지를 아버지로 소개하지 않고, 마리아의 남편으로만 소개를 하고 있지요. 마태가 왜 이런 설명방식을 택했을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남녀가 생식적인 방식으로 태어나신 분이 아니고 성령을 통해서 태어난 분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강조하기 위해서 이러한 방식을 택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요셉의 족보 속으로 오셨지만, 요셉의 혈통을 따라오신 분은 아닙니다. 왜? 성령께서 마리아에게 잉태되어서 아기 예수님을 이 땅에 낳으셨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 신앙고백에서도 보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그런 중요한 신학적 전제를 이 짧은 구문 속에 담고 있는 거지요. 

자 그런데 그다음 19절입니다. '그의 남편 요셉은' 어떤 사람이라? '의로운 사람이라' 여러분 오늘 우리가 집중해서 다룰 내용이 '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그 시대의 정의와 구약의 정의와 오늘 우리는 이 의로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것이 오늘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고, 교회가 회복해야 될, 또 우리 성도님들의 신앙 요소 가운데 잃어버리고 있는 초점을 한번 같이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일단은, 큰 전제를 성경에서 살폈어요. 어떤 사람? 의로운 사람이라 했어요. 그 의로운 사람이 뒤에 어떤 행동을 하는가 하면? 19b절, '..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기 때문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내용은 뭘까요? 정혼한 아내가 어느 날 소문을 들어보니 갑자기 배가 불러오고 아기를 가졌다는 거예요. 확인해 보니, 정말 그런 거예요. 여러분~ 이게 당시에는 말이 안 되는 상황이지요. 왜냐하면, 여기 약혼이라는 표현을 했지만.. 새로 번역되기 전에는 '정혼'이라는 말을 썼어요. 이 부분을 바로 이해하려면 유대인의 결혼 풍습을 이해해야 해요. 유대인들은 예식을 두 번 합니다. 첫 번째, 예식은 신부의 집에서 이뤄져요. 그걸 정혼이라고 하지요. 이 정혼 때는 서로 계약서를 주고받고 약조를 맺는 겁니다. 이 자체가 이미 합법적인 부부예요. 조건이 있지요. 단, 정혼의 기간에는 남녀가 합방을 하지 못해요. 정혼식이 끝나자마자 남자는 이 한마디를 남기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요. "내가 일 년 후 어느 날 그대가 알지 못하는 시간에 반드시 당신을 다시 데리러 오겠습니다." 그리곤 자기 집으로 돌아가요. 신랑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무엇을 하냐? 아버지의 감독아래 집을 짓습니다. 누가 살 집일까요? 예. 이제 사랑하는 아내와 살 집을 짓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에도 보면, 주님이 어디로 가십니까? '내가 가는 길을 지금은 너희가 알지 못하지만 후에는 알리가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는 말이 바로 유대 관습 속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신랑은 아버지 집에 돌아가서 집을 짓는데 집 짓는 유대인들의 평균 기간이 1년쯤 됩니다. 그러면 어느 날 감독관인 아버지가 아들을 호출합니다. "내가 보니까, 집은 이만하면 됐다. 너 빨리 가서 아내를 데려오도록 하라." 그러면 신랑은 그날로 즉시 한 걸음에 동료들을 동반하고 신부를 데리러 달려갑니다. 그 의미예요. 

요 일 년의 기간은 서로 죽음이 걸린 문제 외에는 만날 수가 없어요. 그러다 보니 당연히 육체적인 관계도 맺을 수가 없어요. 그 날짜는 감독관이신 아버지만이 결정할 수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때와 기한은 우리가 알바가 아니요.'라는 것은, 예수님이 그 날짜를 모른다는 말이 아니라, 그 날짜를 경험하는 것은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버지만이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뜻이에요. 그 기간 안에 얘기를 들어보니까, 자기의 아내가 될 사람이 본인과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는데 배가 불러온다는 거예요. 확인을 해보니 사실이에요. 그래서 '가만히 끊고자 하여'라고 되어 있지요. 왜 이러한 것을 '의인'이라고 표현했을까요? 전혀 그 시대의 사회적 통념상 맞지 않는 거예요. 

 

 

여러분 요한복음 8장을 한번 볼까요? 요한복음 8:3-5,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이분들은 전부 율법에 목숨을 건 사람들이에요. 율법에 아주 열심히며, 정말 율법대로 사는 이들이에요. '..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여러분, 지금 요한복음 8장의 현장은 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중심으로 해서 주변에 둘러싼 청중들이 전부 돌을 들고 있어요. 그러면 우리가 얼핏 믿는 자의 시각에서 볼 때는, "에이~ 못된 놈들. 불쌍한 여자를.." 그럴 수가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 당시의 그들의 행동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고, 마땅한 것입니다. 왜? 지금 신명기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법 집행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을 뭐라 할 이유가 없어요. 여러분 신명기 22장에 보면, 이런 문구가 있지요. 신명기 22:23-27, '23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 만나 동침하면 24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 죽일 것이니...' 여러분, 음행 하다가 붙들린 여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법대로 하면, 요한복음 8장의 그림이 못된 놈들이고, 이상한 겁니까? 당연하고, 마땅한 것입니까? 그렇지요. 당연하고 마땅한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청중들은 지극히 마땅하고 지극히 당연하게 하나님의 법 집행을 하고자 돌을 들고 씩씩거리고 있는 거예요. 그들을 나무랄 아무 이유가 없어요. 그런데 여기 예수님의 해석을 보십시다. 요한복음 8장 5절,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이에 대해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죠?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러자 하나둘씩 돌을 땅에 내려놓고 다 떠나고 맨 마지막에는 누구와 누구만 남았나요? 네, 죄 많은 여인과 예수님만 남았어요. 이게 뭘 얘기하고 싶은 걸까요?

예수님은 율법을 지키는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그 현장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율법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문자적 형식을 넘어서 율법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를 독자들에게 가르치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율법을 인류에게 주었더니 로마서 3장의 말씀처럼 우리가 들통이 난 게 있어요. 그게 뭐죠? 율법을 읽어낼 줄도 모를 뿐만 아니라, 그 율법을 혹여라도 지킬 수 있는 실력과 자격을 갖춘 '의인이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어요. 그래서 갈라디아서는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뭐라? 가정교사라. 인류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줬더니 지킬 수 있는 능력도 없고, 실력을 가진 자도 하나도 없다는 것이 드러났어요. 그래서 인류는 율법을 통해서 로마서의 말씀처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죄인 것을 깨닫지 못했었다고요. 그래서 이 율법이 자동적으로 '아하!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필요한데, 바로 그것을 실행하실 분이 중보자이신 메시아구나!' 우리의 모든 의식이, 자신에 대해서 진저리를 내보고, 세상에 대해서 진저리를 내본 사람만이 그리스도를 찾게 되어 있어요.

다윗이 최고의 정권 절정기에 밧세바 사건을 겪어요. 그러고 나서 그가 참회하며 울며 울며 쓴 유명한 시가 뭐죠? '내가 어머니의 모태에서부터 죄악 중에 태어났나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하게 하사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그러면서 그때 다윗이 바라본 게 뭐죠? '아! 인간은 누군가의 긍휼히 필요하구나'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아니하시고..' 아니 구약시대에 그런 망언이 어딨 어요? '하나님은 제물로 드리는 제사를 원치 않으시고 자비를 원하시며, 인애를 원하시며, 긍휼을 원하시는구나!' 율법이 지양하는 그 끝이 뭔가를 알았어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려고,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려고.. 그러면 오늘 마태복음 1장 19절에서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이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했다'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당시 사회가 생각하는 의로움과는 상당히 다른 레벨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셔야 해요.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천국의 새로운 윤리처럼, 팔복의 말씀 속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부름을 얻을 것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며..' 그 율법도 결국은 뭘 가르쳐 주기 위함이죠?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용서, 하나님의 자비로우심. 그걸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뭐예요? 율법이에요. 우리는 율법대로 다 잣대를 들이대면 전부 0점 자리요. 무능력자요. 죽어 마땅한 것이 율법에 이에요. 그런데 그 율법의 의를 이룬 것이 긍휼이고, 그리스도시며, 자비로우심이에요. 그것을 갈라디아서 기자는 이렇게 설명했지요?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가정교사가 되었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큰~ 이 성탄의 선물이 어떻게 온 인류에게 흉악을 걷어내고 다가오게 되었는가?  요셉의 의로움의 순종 때문임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요셉은 여기서 말하는 성경기자, 아니 마태가 설명하고 싶었던 의로움이라는 것은? 법을 지키고, 법대로 하는 그런 의로움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여기서 요셉이 실천했고, 그가 순종했던 의로움은 그 율법을 뛰어넘어, 논리를 뛰어넘어서 하나님의 용서. 하나님의 자비, 하나님의 긍휼, 예수님이 팔복의 산에서 새로운 천국의 윤리를 가르쳤던 것처럼 그 의로움을 실현하고 실천했던 것입니다. 왜 이 의가 오늘의 성도들의 가슴 한가운데 성탄을 맞는 한국교회 한 복판에 새롭게 회복되어야 할 의로움일까요? 이 의로움은 그런 회색빛 차가운 창백한 의로움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실현하는 의로움을 얘기하는 거예요 

사도행전에서는 고넬료를 어떻게 설명했죠? 경건한 자.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 거기에 부연 설명이 붙지요. 많이 구제하였으니.. 고넬료는 어렵고 곤고한 자들에게 백 부장으로서 많이 하나님의 긍휼을 실현하고, 실천한 자였어요. 그걸 성경은 경건이라고 말하고, 의로움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의 가지고 있었던 기본적인 의로움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교회가 이해하고 있던 기본적인 의로움. 그게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그걸 넘어서 우리는 어떤 의로움으로 더 나아가야 되냐? 하나님의 의로우심. 하나님의 의로우심이라는 것은 공의와 사랑이 입 맞춤하는 것을 얘기합니다. 그런 요셉의 하나님의 자비가 기초된 의로운 순종을 통해서 마리아를 어떻게 하죠? 받아들여요. 그 긍휼을 실천하고, 자비를 실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순종하면서 받아들이는 가운데.. 이 가문에 온~ 인류의 구주가 되시는.. 인류의 선물이 되는 하나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길로 오시고 소망으로 오시는 거예요. 놀랍게도요. 하나님의 생명과 구원의 역사는 이런 긍휼의 순종을 통해서 확대되고 생산되는 원리를 갖고 있다는 거지요. 

최근에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외부에서 오신 손님들을 교회가 잘~ 접대하고 맞아들이고 잘 환대했더니 그 속에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그 구원은 또 다른 생명을 낳는 은혜로 확대되고 발전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거지요. 그래서 한국교회가 어느 때보다도 이 질서, 이 원리르 순종해야 해요. 율법이 가지는 차가운 의로움이 아니라, 요셉이 순종했던.. 하나님의 자비가 기초가 된 의로움. 그 의로움이 우리 성도들의 가정에 한국교회 속에 새롭게 회복되고 확인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하고 축복합니다. 

 

 

 

두 번째. 아마 결론이 될 겁니다. 성경을 볼까요? 20절,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얼마나 요셉이 힘들었을까요? 그렇지요? 여러분 같으면 고민 안되었겠어요? '..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안에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여러분, 여기 요셉이 놀랍게도 누구의 자손으로 소개되고 있지요? 다윗의 자손이에요. '다윗의 뿌리예요.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을 빌려서 오시지만, 계보는 누구를 통해서 오시는 겁니까? 하나님이 약속하신 다윗의 계보로 오시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상식 선에서 합리적인 질문을 해봐야 합니다. 뭐냐? '이상하다. 요셉도 그 시대 사람이고, 평범한 한 남자였을 텐데.. 어떻게 그 마리아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성경을 보면, 마태가 그걸 특별히 소개합니다. 뭐라고 소개하냐? '..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게에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여기서 '무서워하지 말라' 할 때는, 하나님의 의도와 반대로 갈려고 시도하거나, 어떡할까? 주저하고 방황하고 있을 때, 성경은 일관되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제지, 구호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마리아의 된 것을 보고 고민하고 있던 요셉에게 어느 날.. 주의 사자가 현몽합니다. 이게 놀라운 거예요. 아니! 주의 사자가 현몽한다고 다 들을까요? 다 들을 수 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드러내야 합니다. 이 요셉은 하나님의 말씀에 평소에도 천착해 있던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머니 마리아도 마찬가지예요. 이 때는, 성경이 완성되지 않았던 시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특별한 계시 방식을 통해서 현몽할 수 있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김홍전 박사라는 분이 쓴 '예수님의 행전, 예수님의 생애'라는 7-8권짜리 책이 있어요. 그 방대한 분량을 전부 마태복음, 누가복음, 마가복음 중 예수님의 탄생기사만 집중적으로 연구한 책이에요. 많은 신학생들이기 참고하는 책이기도 한데, 그 책에 아주 재미있으면서도 흥미로운 설명 하나가 오래 기억이 남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비록 어리고 젊지만, 계시의 수납자로써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거예요. 

제가 언젠가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어요. 맨날 눈만 뜨면 노름하고, 해 떨어지면 술집 찾아가서 기생들하고 술판을 벌리고, 니나노~ 젓가락 뚜들기고 있는 자에게 어느 날.. "요셉아~ 네 아내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러면 갑자기 술김에 "아멘!" 그럴 수 있나요? 그건 절대 불가능한 일에요. 적어도 요셉이 그리고 마리아가 이런 주의 사자, 천사의 고지에 수납할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이 구약 성경의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되었던 메시아의 오심에 대한 대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고지와 이런 계시가 임했을 때, 이들은 주저하지 않고 그 고지와 계시의 메시지에 온 인격으로 수납할 수 있었다는 거지요. 결국 메시아는 아기 예수는 그 하나님의 언약에 기반했던 사람들의 믿음과 기다림을 통해서 성취되는 거예요.

그것은 바울의 경우에서도 우리가 확인할 수 있지요. 바울이 다메섹 언덕에서 특별한 경험.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요. 그런데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의 대 학자입니다. 그런데 그 다메섹 언덕의 경험은 구약의 묵시 문학에서.. 묵시 문학이라 함은, 에스겔, 다니엘, 이사야와 같은 구원과 종말을 담고 있는 상징적인 메시지로 풍자한 글들의 형식을 얘기합니다. 거기에 익숙한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다메섹 언덕의 저 북쪽을 향해서 예수 믿는 사람을 체포해 죽이려고 영장을 발부받아 나아가다.. 그 가파른 언덕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요. 그때 만났던 특별한 경험이 바로 자기가 익숙하게 잘 알고 있던 구약의 말씀 속에 나타난 묵시 문학 속에 나타난 특별한 형태예요. "사울아 사울아~"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깜~~~ 짝 놀라요. 바울은 그때까지만 해도 메시아 따로 알고 있었고, 예수를 따로 알고 있었어요. 바울도 메시아를 기다렸어요. 그런데 이런 예수는 그토록 기다려오던 메시아일 수 없다는 분리된 마음을 갖고 있었어요. 사도 바울의 의식 한복판에 구약의 메시아와 신약의 그렇게 핍박하던 한 인물이라는 관통이 이루어지면서 짜릿한 만남이 바울의 인식 속에 형성이 되는 겁니다. 그러자 그는 거기서 엎드러지죠. 결국 그 회개도 뭐에 기초한 회개입니까? 구약의 언약에 기초한 회개예요. 그 구약의 언약을 알지 못했다면, 바울의 다메섹의 회심도 이루어지지 못했을 겁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예요. 마리도 마찬가지예요. 결국 이들이 이 어마어마한 두려움 속에서도 그 하나님의 계시와 천사의 고지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에 창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었던 사건이에요. 믿습니까?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성탄을 맞이하면서 두 가지 사실 앞에 결론을 모아야 될 것 같습니다. 첫째는, 이천 년 전 아기 예수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이 성탄이라는 선물을 주셨어요. 그러면 이 성탄은 미래 지향적으로 어떤 모습이어야 될까요?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출발의 날로 새로워져야 할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렇게 오셨듯이 약속을 따라 '너희가 본 그대로 내가 다시 오리라', '처소의 준비가 끝나면 내가 다시 오리라.' 그래서 계시록은 어떻게 마감이 되지요?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우리는 그날까지, 그 전기 간까지.. 남은 생애 동안 길고 멀고 험하지만.. 그 노정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긍휼의 환대, 자비로움의 순종을 실현함으로 더 많은 생명과 그리스도의 사랑이 온~ 땅에 버져나가도록 우리는 이번 성탄을 출발로.. 코로나는 틀림없이 지나갈 거예요. 이 땅에 영원한 게 어디 있나요? 줌으로 예배하는 여러분들도 아멘입니까? 지나갈 거예요. 여러분 이 땅을 걸어가는 동안 그리스도의 자비를, 긍휼을 실현해 내는 참된 의로움의 순종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다~ 일어납니다. 찬송가 중에 123장. 이 후렴의 '노엘'은 프랑스 어에요. '아기가 나셨다. 성탄' 정도의 의미입니다. 

 

 

 

 "하나님, 저물어가는 2020년 끝에 서서 뒤 돌아보면, 기적 같은 한해였음을 다시 한번 고백합니다. 오늘도 임마누엘로 우리와 함께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여전히 질병에 묶여 고통 중에 있는 전 세계의 환우들을 자비롭게 여기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시어서 수고하는 의료진들을 ㅂ주께서 용기를 주시고 모든 누적된 피로를 말갛게 씻으시며 여전히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하는 공산권의 성도들.. 특별히 북녘땅의 동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속히 구주 나심의 아름다움의 복된 소식이 차별 없이 온 인류마다 증거 되게 하시고 오늘 주신 말씀처럼 변치 않는 하나님의 언약의 모든 성도들, 교회가 든든히 서 가는 기회가 되게 하시고 차가운 율법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 율법을 넘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기초된 의로움이 되도록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한국교회가 살아날 수 있도록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금요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로 하여금 무릎 꿇게 하시고 어느 때보다도 부르짖음과 간구가 필요한 때에 교회적으로, 국가적으로, 개인적으로 엎드려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새롭게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옵니다. 이제 가정에서 가족과 함께 주님과 함께 잘~ 마무리하는 성탄이 되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지금도 여전히 험하고 낮은 곳에 고통 중에 있는 우리 이웃들을 향하여 우리 삼일의 청년들과 성도들은 하나님의 긍휼을 배달하는 사랑의 통로, 복의 근원이 되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축도 : 지금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 하심이 머리 숙여 경배를 드리는 모든 주의 백성들 해외, 군에, 선교지에 사랑하는 성도들.. 복 중의 생명까지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