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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story/설교문

[ 새벽설교 ] 이사야 51:17-23 I 높은뜻정의교회

by №1★↑♥ 2021. 7. 30.

    예루살렘을 위한 좋은 소식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복된 소식에는 예루살렘을 세 가지로 묘사합니다. 술 취한 예루살렘, 자유한 자 예루살렘, 기뻐하는 자 예루살렘. 이렇게 세 가지 모습으로 묘사하는데 오늘의 본문은 술 취한 자 예루살렘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52장 1-6절은 자유한 자 예루살렘. 그리고 이어지는 52장 7-11절까지는 기뻐하는 자 예루살렘 이 세 예루살렘의 상태를 보게 될 텐데요. 물론 그것은 우리의 모습니다. 

 

이사야 51:17-23

 

  우리는 앞선 51장 9절에서 "깨소서 깨소서"하면서 하나님께 깨어나라고 탄식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이스라엘이 깨어나라고 촉구합니다. 17절 '여호와의 손에서 그의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일어설지어다 네가 이미 비틀걸음 치게 하는 큰 잔을마셔 다 비웠도다' 앞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잠 드신거 아닙니까? 깨어나십시오. 그러는데, 오늘은 하나님께서 "깰지어다 깰지어다 일어설지어다"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깨어나라고 탄식하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깨어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누구 말이 맞는 것일까요? 지금 이 상황은 하나님이 깨어나서 행동하셔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깨어나서 믿음을 가져야 하는 상황입니다. 지금 적의 위협 앞에 누워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고 하나님이 아니거든요. 때때로 이것은 우리가 범하곤 하는 잘못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탓하곤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 자신을 탓해야 할 때가 더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혹 이 새벽에 나오셔서 지금 저의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탓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런 음성을 들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의 탓이 아니라, 너의 탓이 아니더냐" 이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올 수 있습니다. 사실 천재보다 인재가 더 많듯이 하나님의 탓을 하지만, 사실 우리는 자신을 탓해야 할 일이 많거든요. 기도 응답 중 하나도 "그건 네가 할 일이다." 그런 응답이 있습니다. 

  가령 우리는 환란 중에 있는 환우에게 "왜 저런 일이 있습니까? 왜 위로해주시지 않습니까? 왜 빨리 해결해주시지 않습니까?"로 하나님을 탓할 수 있겠지요. "여호와여 깨소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마 "니가 가서 위로를 좀 해라. 그건 너도 할 수 있다. 그건 너를 통해서 할 일이다."부분이 있습니다. 우리 한테 촉구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우리는 그러한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깨어날 것은 내가 아니라 너다." 

  신앙이 성숙하면 성숙할수록 하나님 탓하고, 사탄을 탓하기보다는 자기 책임적이 됩니다. 나 자신에 대해서 돌아보고 나 자신을 책임지게 되는 모습이 신앙적인 성숙입니다. 예루살렘의 절망적인 상황은 분명했습니다. 18절 '네가 낳은 모든 아들 중에 너를 인도할 자가 없고 네가 양육한 모든 아들 중에 그 손으로 너를 이끌 자도 없도다' 지금 이스라엘의 상태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경험하는 것은 무엇이냐? 죄를 지어서 바벨론에게 붙여졌거든요.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받았어요. 이제 복역기간이 다 차고 70년이 다 차고 해방되게 되었는데, 이스라엘이 지금 일어날 힘이 없는 거예요. 그런 이스라엘의 모습이 바로 '자녀가 죽어서 자신을 집으로 데려갈 사람이 없는 늙은 여자의 모습', '남편이 죽어서 과부가 된 모습.' 두 가지 모습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19절 '이 두 가지 일이 네게 닥쳤으니 누가 너를 위하여 슬퍼하랴 곧 황폐와 멸망이요 기근과 칼이라 누가 너를 위로하랴' 누가 너를 위로 하랴? 여기서 두 가지는 자식이 없는 것, 남편이 없는 것. 그리고 황폐와 멸망은 땅에 닥치는 재앙이고, 기근과 칼은 백성들에게 닥치는 재앙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이렇게 이스라엘의 절망적인 상황을 처절하게 묘사하는 이유는 너희에게는 절망만 있다는 그 말씀이 아니라, 그래서 하나님께 소망이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상황이 아무리 절망스러워도 '그래 나에겐 절망뿐이니, 하나님께만 소망이 있다.' 이렇게 나가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절망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지만, '나에게 소망을 두라. 나에게만 소망이 있다.'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19절 말미에 '누가 너를 위로하랴'라고 하셨거든요. 그 말씀은 위로할 자가 없다라기보다는, 오직 나만 너를 위로할 수 있다. 그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때때로 사람들에게 위로를 구하지 않습니까? 물론 하나님은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를 위로하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정말 사람이 의지가 안될 때가 오거든요. 그때는 하나님의 위로 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찬송가를 부를 수 있었으면 372장을 불렀을 것 같아요. 372장의 가사'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또 나의 슬픔 알까 주 밖에 누가 알아주랴 영광 할렐루야! 나 자주 넘어집니다 오, 주여! 나 자주 실패합니다. 오, 주여!' 누가 알아 줄 수 없어요. 누가 나의 괴로움을 알 수 있겠습니까? 누가 나의 슬픔을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사람이 사람을 위로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 찬송에서 논리를 비약하는 부분이 있어요. '주 밖에 누가 알아주랴' 갑자기 '영광 할렐루야' 그렇게 끝나요. 주 밖에 누가 알아주랴. 여기서 주님을 만나기 시작한 거예요. 그때에 이 고백이 나오는 것이지요. 영광 할렐루야. 지금 이스라엘이 딱 그 심정입니다. '누가 나의 괴롬 알며' 그때 하나님께서 무작정 위로하지 않고 뒤흔들면서 '깨어나라'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 밖에 너에게 소망 없어. 그 이야기를 하는데, 주 밖에 누가 알아주랴? 거기서 이제 영광 할렐루야. 그 순간이 옵니다. 그걸 만나봐야 하거든요.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이미 맛보아봤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가 마음을 가눌 길 없을 때 사람의 위로를 전전하다가 결국엔 하나님의 위로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주 밖에 누가 알아주랴 영광 할렐루야' 그 순간을 또 만나겠지요? 그때에 이제 이 말씀이 들려오기 시작할 것입니다. '누가 너를 위로하랴 나 밖에 없다.'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20절 말씀입니다. '네 아들들이 곤비하여 그물에 걸린 영양 같이 온 거리 모퉁이에 누웠으니 그들에게 여호와의 분노와 네 하나님의 견책이 가득하도다' 여기서 계속 강조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아무리 잘못을 하고, 아무리 죄로 인해서 건물의 모퉁이에 눕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이사야 내내 말씀하시는 바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분노하셨잖아요? 허공에 분노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게 분노하셨고, 하나님이 견책하셨지만 아무에게나 견책하지 않으시고 이스라엘에게 견책하셨는데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무리 네가 잘못하고, 분노의 대상이 되어도 어쨌거나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다.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순종하고 잘할 때는 그래 난 너의 하나님이다. 이스라엘이 잘못된 길로 갈 때에는 '난 너의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했다면 어땠을까요? 그러나 지금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죄 중에 있고, 못났을 때에도 견책하면서라도 너의 하나님이다. 나는 너에게 분노하면서라도 너의 하나님이 되고 있다. 그 말씀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내면에는 착한 아이 증후근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칭찬받을 만한 행동을 하면, 정말 하나님 앞에 기쁘게 나와요. 그런데 그렇지 못할 때는 그렇게 나오지 않거든요. 뒤로 물러난단 말이에요. 심지어 기도도 그렇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인식이 있을 때는 사실 더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하거든요. 그런데 도리어, 물러가버리고 숨어버려요. 하나님 앞에 합당한 모습을 가지고 나오려는 내 의를 의지하려는 마음이 우리 안에 있거든요. 그런 마음 자세는 은혜를 의지하는 모습은 아닙니다. 아무리 못한 죄인이어도 견책하시면서도 나의 하나님이시고, 분노하시면서도 나의 하나님이 되시는 거기 때문에 이 말씀에 비추어 보았을 때..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가? 아무리 죄짓고 못난 상태여도 "그래도 저는 주님의 자녀입니다. 그래도 저는 주님의 것입니다. 그래도 저는 주님의 용서받은 죄인이고자 합니다." 이렇게 나아가야 합니다. 한번 돌아보세요. 내가 하나님 앞에서 잘못할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기꺼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가? 그게 건강한 영적 상태입니다. 나의 의를 찾고, 하나님 앞에 칭찬받을 만한 부분이 생겨야 나아가겠노라 그것은 아직 하나님 마음을 모르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이 죄된 모습. 이 분노의 잔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의 모습. 

  하나님의 분노 이면에는 항상 하나님의 사랑이 있어서 그래도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다. 그 음성을 우리 들을 수 있어야 겠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못났지만 저는 그래도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 원합니다. 그렇게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그림 중에 아담의 손과 하나님의 손이 마주하는 그런 장면이 있어요. 그 그림을 보면, 아담이 굉장히 건방지게 손을 내밀고 있거든요? 그게 사실 건방진 게 아니라 죽은 모습이에요. 어떤 걸 상징하냐 하면, 하나님의 손이 닿으면 이제 사는 거예요. 그런데 손이 닿지 않았거든요. 그러면 죽은 거예요. 그게 우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으면 죽은 거예요. 죽은 몸으로 어떻게 살겠어요? 하나님께로 빨리 닿아야지. 그래서 지금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올 수 있도록 이 자세를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바벨론을 극복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 있습니다. 그들이 그들 자신의 상황에서 헤어나올 수 있는 것은, 단순히 바벨론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왜냐하면 하나님께 잘못해서 징계를 받아서 바벨론에 자힌 거잖아요. 그렇다면 열쇠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지, 바벨론에게서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고요. 자꾸 열쇠를 잘 못 맞추니까, 하나님께서 그걸 촉구하고 있습니다. 21절 이하에 보면 '.. 포도주가 아니라도 취한 자여..' 술 취해 깨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21하.. 이 말을 들으라 22 네 주 여호와, 그의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는 네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비틀걸음 치게 하는 잔 곧 나의 분노의 큰 잔을 네 손에서 거두어서 네가 다시는 마시지 못하게 하고 23 그 잔을 너를 괴롭게 하던 자들의 손에 두리라 그들은 일찍이 네게 이르기를 엎드리라 우리가 넘어가리라 하던 자들이라 너를 넘어가려는 그들에게 네가 네 허리를 땅과 같게, 길거리와 같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스라엘아 너희가 회개하지 않으면 벌을 받게 된다. 그리고 두 번째, 주변 나라들이 형벌의 도구가 될 것이다. 세 번째 그 형벌 이후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회복시키실 것이다. 네 번째, 이스라엘을 압제하면서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이들은 하나님께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여러분 하박국 3장의 논지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징계하는데 악한 백성들을 이용하시더라도 그것이 악인들의 심판을 피할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역시 이스라엘이 징계를 다 받았어요. 결국 하나님의 분노가 이스라엘에게서 거둬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아요. 이스라엘을 심판한 민족들로 하나님의 분노가 옮겨집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은 시편 23편 5절을 맛봅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를 하나님의 도구로 징계하던 민족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됩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죄에서 돌이키라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달성되자.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이스라엘에게서 거둬줘요. 그리고 이스라엘을 징계하던 나라로 옮겨지게 됩니다. 거기서 이스라엘은 원수의 목전에서 밥상을 받게 되지요.

  우리가 이사야 말씀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스케일이 굉장히 크세요. 이스라엘을 징계한 이방민족들에게 분노가 옮겨 가지만 그 이방민족들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공의와 사랑을 펼쳐볼 수 있는 것을 이사야 전체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 새벽에 잠을 쫓고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할 수 밖에 없는 사연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에게만 참 위로가 있음을 고백합니다. 물론 우리들에게 사람을 통한 위로도 주시지만, 주 밖에 누가 알아주랴 하며, 영광 할렐루야를 부르는 순간이 우리에게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그리고 하나님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어서 그들이 죄를 짓던 그렇지 않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셨던 것처럼 오늘도 낙심을 하건 절망을 하건 하나님 앞에, 또 죄 가운데 돌아가던 어떠한 모습에 있던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자 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을 열게 하시고, 우리의 마지막 발걸음 주님께 돌아오는 걸음이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이 모습 이대로라도 저는 주님의 자녀로 살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닿지 않으면 저는 죽은 것과 다름없기 때문에 어떤 모습이든 주님의 자녀로 살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마음이 주님께 돌아오는 지금의 기도시간이 되도록, 오늘 하루가 되도록 우리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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