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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story/설교문

[ 사도행전26 ] 사도행전 3:1-10 I 앉은뱅이는 과연 누구인가? I 주승중 목사

by №1★↑♥ 2021. 7. 23.

  예루살렘이 높이가 23M나 되고, 넓이가 18M나 되는 거대한 문이 있었습니다. 그 문은 은과 금으로 두껍게 입혀진 놋쇠로 만든 웅장한 문이었죠. 그리고 그 문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는 8개의 문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문을 흔히 '미문' 아름다운 문이라 불렀습니다. 

 

앉은뱅이는 과연 누구인가?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이 문은 은으로 도금되고, 금으로 장식한 문들보다 훨씬 더 진귀한 성문이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장 아름답고, 웅장한 황금 문 앞에는 이와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구궐을 유일한 생계수단으로 삼고 있는 유일한 한 불쌍한 인간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 당시 가장 아름답고 웅장한 문 앞에 가장 서글프고, 초라한 모습의 인간이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습은 참으로 역설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그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된 이였다고 합니다. 그는 살다가 사고와 병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한번 도 걸어본 적이 없는 선천적인 장애우였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22에 의하면 그는 40세 가량 되는 남자였습니다. 무려 40년 간이나 앉은뱅이로 비참한 인생을 살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그가 미문 앞에 앉아 있습니다. 그가 미문 앞에 앉아 구걸한 것은 아마도 예루살렘 대성전으로 통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통행이 가장 많은 곳으로 구궐 하기 가장 쉽고, 말하자면 목이 좋은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평생을 성전 미문 앞에서 구궐 하는 불쌍한 인생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제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그의 생애가 온전히 치유되고 변화된 사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이 사람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보겠습니다. 그는 이미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이였고, 40년 동안이나 앉은뱅이로 살아왔습니다. 아마도 그는 어린 때에는 부모님들의 보호를 받으며 자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세월이 지나고 40살이 된 이 시점에는 그 당시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50이 안되었다는 기록을 보면, 그의 부모님들은 이미 다 이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혹시 그에게 있었을지 모르는 형제들도 저마다 개인의 삶으로 바빠서 그를 도와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철저하게 혼자서 생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걸을 수 없어서 생활의 아무런 능력이 없는 그가 무엇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는 그를 불쌍히 여긴 친척들이 성전 문에서 구궐 하도록 도와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날마다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궐을 합니다. 그 당시 성전 미문 앞에는 많은 거지들이 줄지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성전으로 올라가는 이들에게 자비를 구하는 것이 비교적 쉬웠고, 또 성전에 예배드리러 올라가는 사람들의 마음이 그대로 다른 이들보다는 좀 더 관대한 마음으로 자선을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당시 성전 미문을 '자비의 문'이라고도 불렀다고 해요. 그리고 그도 날마다 자비의 문 앞에 앉아서 사람들의 자비를 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나마 그 일도 누군가 성전 미문 앞으로 데려다 주지 않으면 할 수 없었지요. 그래서 오늘의 본문 2절에 보면, '사람들이 메고 오니'라고 했어요. 여기서 사람들이 누구인지 성경이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어쨌든 그걸 보면, 자신의 힘으로 움직일 수 없었던 선천적인 장애를 입고 있었고, 태어난 이래 한 번도 성전 미문 앞으로 넘어가 보지 못한 채 구궐 하는 불쌍한 심령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던져 준 그 자비의 동전들을 기대하며 하루 종일 그렇게 쭈그려 앉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구궐 하는 일이 수치스러워서 고개도 잘 들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이 지나갈 때 손을 내미는 것이 부끄럽고, 돈 한 푼 달라는 소리를 크게 내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구궐이 점 점 더 익숙해졌겠지요? 그러다 보니 창피하단 생각도 사라지고 이제는 어느 정도 배짱도 생겨 사람들이 지나가면 제법 큰 소리로 도움을 청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깡통에 떨어지는 동전 소리를 즐기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어느덧 첫눈에 돈을 줄 것 같은 사람과 주지 않을 것 같은 사람도 아마도 대충 알아차릴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는 점점 더 한 푼, 두 푼, 동전으로 만족하게 되었겠지요. 어쩌면 그가 하루 중 가장 기쁨을 느끼는 시간은 해가 지고, 집에 돌아가서 깡통에 들어있는 동전의 촉감을 느끼는 순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그는 서서히 구궐 하는 생활에 적응하면서 영육의 완전한 앉은뱅이가 되어 갔을 것입니다. 40년 동안 그렇게 남들에게 구궐 하며 얻어먹다 보니, 거지근성이 점점 체질화되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에게는 이제 더 이상의 변화가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도리어 변화는 그에게 두려움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만일 그에게 어떤 치료와 변화가 일어난다면, 오히려 그에게 그것이 두려움으로 다가올 수도 있지요. 

  왜? 구걸하는 좋은 자리도 끝장이니까요. 그러면 그 다음 부터 제 힘으로 노력하면서 먹고살아야 합니다. 당장 다른 사람과 먹고살기를 위한 생존 경쟁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몸부림쳐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어쩌면 앉은뱅이로 힘 안 들이고 얻어먹고사는 것이 성한 몸으로 벌어먹기 위해서 고생하고 투쟁하는 것보다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지금 이 사람의 심정을 이야기하는 의도가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점점 더 무너져가는 그에게서 우리의 영적인 모습을 봐야 합니다. 때로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도 '나도 한 번 일어나 보고 싶다. 나도 남들처럼 걷고 싶고, 마음껏 뛰어보고 싶다'는 갈망이 왜 없었겠어요? 그러나 결국 그는 그때마다 스스로 이렇게 위로하고 만족했을지 모릅니다. 어차피 자기 힘으로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생활도 나름 괜찮지 않냐? 수고하지 않아도 얻어먹고 살 수 있지 않냐?' 그렇게 타협하며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우리는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이로 태어나 40평생을 구걸하며 살아온 이 사람의 모습을 통해서 영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뭐냐? 제가 방금 말씀드렸듯이 이 앉은뱅이의 모습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영적인 모습은 아닐까요? 다시 말해서 이 앉은뱅이의 모습은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해왔지만.. 모태 신앙으로 어머니 배속에서부터 교회 다닌 사람들.. 그러나 여전히 제 힘으로 일어나 걷지 못하고 신앙의 타성에 젖어 앉아 있는 오늘 우리들의 영적인 모습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교회 안에 보면 많은 이들이 영적인 앉은뱅이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수십 년을 교회 출석하고, 주일이 되면 예배도 드리고 신앙생활하지만.. 내가 왜 예배드려야 하는지.. 내가 믿고 고백하는 바 가장 중요한 신앙의 내용이 무엇인지.. 그리고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지체로써 내가 섬기고 봉사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 분들은 습관적으로 주일이면 교회에 나와 찬송하고 기도는 합니다. 그리고 예배 후에 함께 식사도 하고 교제도 합니다. 그러나 그게 다입니다. 교회에서 어떤 희생과 봉사와 섬김을 요구하면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생각합니다. 외면하지요. 

  그럼으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의 신앙의 영적 상태가 과연 어떠한지에 대해서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 성도들 가운데 church man이 많다고 합니다. 교회는 출석해요. 그런데 주일 예배만 출석하는 것으로 신앙생활의 의미를 다했다고 생각하며 만족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지요.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주는 영원한 생명과 성령님으로 말미암은 능력과 변화에는 무감각한 채, 자신들에게 동전과 같이 던져지는 좋은 이야기, 혹은 교양이나 철학 에세이처럼 설교 아닌 설교를 들으면서 그것으로 만족해하고 그것을 신앙생활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모습은 없는지.. 그래서 교회는 다니지만 아직도 내 안의 진정한 주인은 예수님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주인 되어 있는 모습. 그래서 예배 시간에 찬송은 부르지만 그 마음속에서 진정한 감사가 없고, 기도는 하지만 기도가 이루어진다는 믿음과 확신이 없이 중언부언하는 것은 아닌지..? 여러분 이러한 church man이 현대판 앉은뱅이의 모습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떤 모습입니까? 앞서 언급한 모습이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나요? 바라기는 우리 주안의 성도님들은 church man이 아닌, 진정한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사실 제 모습을 굉장히 많이 돌아보았습니다. 영적으로 타성에 젖어 있는 내 모습은 없나? 언뜻 언뜻 제 모습을 앉은뱅이의 모습  속에서 제가 보았어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제가 본문을 묵상하면서 발견한 것이 오늘의 사건을 한국교회와 관련하여서 좀 더 생각해야 한다. 어떤 성경 주석가 해석에 따르면 이 '앉은뱅이의 모습은, 그 당시 유대인들과 유대교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40세 된 앉은뱅이는 방황과 불순종의 40년의 광야생활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의 자화상이라는 것입니다. 성전 앞에 방치된 앉은뱅이, 성전의 종교는 그에게 아무런 도움도 희망도 주지 못했습니다. 그가 40년이라는 세월을 성전 앞에서 구궐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성전 종교는 동전 몇 푼만 던져주는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성전 종교는 이제 더 이상 사람들에게 구원과 희망을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성전 안에는 온 갖 종류의 보석과 아름답고 화려하게 치장을 하고 있었지만, 정작 그들의 종교는 허울 좋은 껍데기일 뿐이었고 형식과 의식만이 남은 종교. 오히려 성전은 예수님의 표현에 의하면 강도의 소굴로 변해 있었습니다. 성전의 제사장들이 먼 지역에서 오느라 희생제물을 가져오기 힘들잖아요. 희생제물은 조금이라도 흠이 있으면 안 되거든요. 그런데 먼 거리에서 희생제물을 가져오다 보면, 흠이 생길 수도 있지요. 그래서 멀리서 오는 사람들은 희생제물을 직접 가지고 오는 대신에 돈을 가지고 와서 희생제물을 산거예요. 그걸 이방인의 뜰에서 제사장들이 커미션을 받아먹고 허락을 해주고 있었어요. 그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거룩한 분노를 일으키신 거예요.

  마 21:12-13 '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13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그 당시 유대인의 성전 종교는 겉으로는 화려하게 치장하고, 거룩하고 복자한 형식의 성전 제사를 드리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그에게 아무런 도움도 희망도 구원도 소망도 줄 수 없는 무능하고 타락한 종교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성전이 다 허물어질 것을 예언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역사를 보면, 이런 역사가 반복해서 일어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모임이었지요. 그들에게 은과 금은 없었어요. 그러나 그들에게는 놀라운 권능과 힘이 있었어요. 성령님의 역사가 언제나 함께하시고, 성령님의 임재하심이 있었어요. 초대교회는 거룩한 두려움이 있는 교회였어요. 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고, 날마다 구원받는 백성들이 늘어나는 생명력 있는 교회였어요. 그래서 사도행전 2: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7절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이랬던 교회가 중세로 넘어가면서부터 세상적인 힘과 권력을 쥐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교회 안에 금과 은이 넘쳐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교회는 정말 있어야 할 영적인 힘과 능력을 잃어가기 시작한 거예요. 교회가 세상적으로 가난할 때에는 세상을 살리는 영성의 수원지 역할을 감당했었는데, 교회가 세상적인 힘과 권력과 재물을 소유하면서부터 교회는 타락과 멸망의 길로 나아갔던 거예요. 다시 예루살렘에 있었던 유대교 성전 종교와 같아진 것입니다.

  언젠가 중세의 한 교황이 유명한 신학자였던 아퀴나스와 함께 화려한 금으로 치장된 성 베드로 성당을 둘러보다가 이렇게 말했지요. "토마스 이제 우리는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라는 말은 못하겠구만.." 왜? 금과 은이 너무 많으니까.. 그때 토마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황님, 이제 우리는 금과 은과 없다는 말은 없다는 말뿐만 아니라 '내게 있는 것을 너에게 주노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는 말'도 못합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권세가 없습니다." 그리고 아퀴나스가 나중에 이런 말을 합니다. "초대교회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을 너에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말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우리 교회는 금으로 기둥을 만들고 대리석으로 바닥을 깔아 엄청난 하나님의 집을 지었다. 교회는 땅도 많이 가지게 되었다. 건물도 가지고 있다. 사람도 많다. 금과 은은 이제 내게 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은 없다." 

  여러분 아퀴나스의 이 말이 중세 교회만 적용되는 말일까요? 저는 요즘, 한국에 있는 교회를 바라보면 아퀴나스의 말이 오늘 우리를 향하고 있는 말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그래서 안타깝습니다. 여러분 우리 한국의 초대교회 어땠나요? 영광스럽지 않았나요? 교회가 쓰러져 가는 나라의 희망이었어요. 가난하고, 천대 받는 사람들이 교회로 나왔어요. 기울어져 가는 나라의 희망이었고, 젊은 이들이 교회로 교회로 몰려왔어요. 1919년 3.1 운동 당시 기독교 인구가 1%가 채 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33인의 독립운동한 서명한 사람들이 16명이 기독교 인이었고, 그 절반이 목사님들이었어요. 국채보상운동, 금연운동, 절주 운동, 애국계몽운동의 중심에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어요. 한국의 초대교회는 영광스러운 모습이었어요. 대부분의 민족지도자들이 그리스도인이었어요. 도산 안창호, 김구, 이승만, 월남 이상재, 조만신, 남강 이승훈.. 

  인구의 1/100, 1%도 되지 않는 기독교인들이 민족의 운명을 짊어지고 나아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오늘의 한국교회는 로마 천주교회와 합하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인구의 25%입니다. 개신교인 860만, 로마 천주교회 4500만 합쳐서 1,300만이 넘어요. 국민 4사람 중 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1%에 비하면 엄청난 성장이잖아요? 그런데 한국교회 어떻습니까? 거룩함을 잃어버렸어요.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바라보고 걱정을 해요. 수년 전에 한 대형교회에서는 비자금이 몇 백억이 드러나 재정을 담당하고 있던 장로님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요. 그거 감추려고, 자기가 다 짊어지고 간 거예요.  계속해서 목사들의 성추문이 터지고 있고, 강남의 또 한 대형교회는 법원에서 판결하기를 담임목사 목사 자격 없다. 그다음 많은 교회들이 목회 세습을 통해 교회를 사유화하는 범죄를 하나님 앞에서 저질렀고, 지금도 저지르고 있어요. 여러분 이게 지금 진행되고 있는 한국교회의 자화상입니다. 

  40년 앉은뱅이의 모습이 한국교회의 자화상입니다. 지난 2000년의 교회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숭실대 김회권 교수가 정확하게 지적하듯이 "교회가 가난할 때는 세상을 살리는 생명의 원천수 역할을 감당했지만, 교회가 은과 과 금으로 가득하더니 무기력한 공동체가 되어 버렸다." 이게 교회의 역사입니다. 교회가 가진 것이 많아지면.. 기득권과 이익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세습이 되고, 자기들만의 이익집단으로 전락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게 교회의 역사요, 중세교회도 그랬습니다. 분명히 온전한 교회의 모습이 아니잖아요. 이런 모습은 교회가 이미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나서 세속 왕국에 속해 있는 모습입니다. 이런 교회에 미래가 있을까? 

 

  그렇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 한국교회의 문제는 교회 밖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를 반대하고 욕하는 안티기독교 세력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우리들.. 은과 금으로 가득찬 교회를 바라보며 만족해하며 배 두드리고 있는 영적 앉은뱅이 된 우리 자신의 문제가 아닐까요? 한국교회의 이런 모습은 2000년 전의 유대 종교의 모습, 40년이나 방치된 자에게 아무런 도움도, 아무런 구원의 희망도 주지 못했던 유대인의 성전 종교와도 같은 모습이 아닌지.. 그렇다면 이제 우리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에 의하면 성령의 능력을 힘입은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의 손을 잡아 일으켰어요. 그리고 그는 뛰었고,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다고 했어요. 평생을 성전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성전 앞에서 구궐 하던 그가 온전히 변화되었어요. 그리고 하나님을 찬미했어요. 그러므로 주안의 성도 여러분, 만일 이 앉은뱅이의 모습이 혹시 오늘 저와 여러분의 영적 신앙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이제 우리도 일어나야 합니다. 일어나 성전 안으로 들어가야 해요. 앉은뱅이 상태에서 주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지 못한 채, 교회의 문간에 너무 오래 머물며 살아온 자리를 이제는 털고 일어나야 합니다. 세상과 사탄이 주는 재물과 동전에 만족해하면서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오는 불신앙의 자리에서 이제는 털고 일어나야 합니다. 주님의 손 붙잡고 우리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변화가 일어나야 하고, 우리 신앙생활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초대교회의 사데 교회와 같이 죽은 교회가 됩니다. 살았다 했지만, 죽은 교회다.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의 신앙을 다시 한번 점검합시다. 기도하면서 잠자고 있는 우리의 신앙을 다시 한번 깨웁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손을 내밀고 계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손을 붙잡고 일어나서 살아 움직이는 부활신앙으로 우리 다시 한번 나아갑시다. 

 

 

  해서 무너져 내리는 이 다윗의 장막을 일으켜 세우는 데 저와 여러분이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다음 주에 우리가 좀 더 자세하게 말씀을 나눌 거예요. 오늘은 먼저 기도하기 원합니다. 기도할 때에 자신의 모습을 먼저 돌아보기 원합니다. 내가 지금 앉아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일어서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는 모습은 혹시 없는지.. 먼저 주님 앞에 회개합시다. 고백합시다. 성전 문 앞에서 동전을 구궐 하며 초라하게 앉아 있는 이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 사람이 혹시 저와 여러분은 아닙니까? 말은 많으나 순종과 행함은 없고, 타성에 젖어 변화를 두려워하는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우리 목사님들 어떻습니까? 이 모습이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은 아닙니까? 금과 은은 있지만,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린 한국교회의 모습이 이 영적 앉은뱅이의 모습이 아닌지..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이 시간 다시 한번 주님 불쌍히 여겨달라고, 다시 한번 주님 손 잡고 일어나게 해 달라고, 잠자고 있는 우리의 신앙을 깨우게 해달라고 한국교회를 불쌍히 여기시고, 아버지 하나님 다시 한번 한국교회가 영적 앉은뱅이의 상태에서 일어나게 해 달라고.. 그 일에 우리가 쓰임 받게 해달라고 이 시간 주님 부르고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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