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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story/설교문

설교문 I 이재훈 목사 I 내게로 돌아오라 I 스가랴 1장 1-6절

by №1★↑♥ 2023. 2. 24.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두 가지 은혜가 있습니다. 청교도들은 이 두 가지를 성도들이 천국으로 날아가는 데 필요한 두 개의 날개라는 비유를 썼습니다. 첫 번째는, 은혜의 날개입니다. 믿음은 은혜의 선물입니다. 믿음은 결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믿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택하여 주셔야 우리의 심령 속에 믿음의 씨앗이 심겨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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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로 돌아오라 I 스가랴 1장 1-6절

- 온누리교회, 이재훈 목사 - 

그러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셔서 허락하신 믿음은 반드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내가 하나님을 선택하는 믿음으로, 내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믿음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의 표현으로는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두 번째는, 회개의 날개입니다. 회개도 은혜의 선물입니다. 믿음의 씨앗이 내 마음속에 들어올 때, 내 마음속에 회개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회개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는 것이라면, 회개하라는 명령을 주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는 것이지만, 회개하라는 명령에 순종해서 나의 결단과 나의 의지로 행함으로, 회개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회개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회개는 우리의 믿음을 더 거룩하고 견고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지요. 성도들은 이 믿음의 두 날개로 날마다 천국을 이 땅에서 경험하게 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한국교회는 믿음은 많이 강조했지만, 회개는 많이 강조하지 못했지 않나..? "한국교회가 회개를 잃어버려기에 무너지고 있다."

스가랴서의 주제는 회개와 회복에 있습니다. 죄에 대한 지적과 심판에 대한 경고를 계속 듣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회개 없이는 진정한 기쁨을 맛볼 수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생각하기를 회개를 강조하면, 기쁨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회개할수록 더 큰 기쁨이 샘솟아 오르게 됩니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으면, 양심에 대한 가책과 죄책감으로 인해서 진정한 기쁨, 정말 맑은 기쁨.. 샘솟는 기쁨을 우리가 경험하지 못합니다. 날마다 죄 가운데 회개할 때, 죄에 대하여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때.. 우리는 진정한 기쁨을 맛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이 회개를 강조하는 예언서의 말씀을 우리는 사랑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언서의 말씀을 사랑하고, 예언서의 말씀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심판, 죄에 대하 경고의 말씀을 사랑하는 성도가 된다면 우리의 삶은 더욱더 거룩하고, 기쁜 삶이 될 줄로 믿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이스라엘 역사 중 이스라엘 포로귀환 시대에 사역했던 선지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세 번에 걸쳐서 포로로 잡혀 갑니다. 그런데 페르시아 시대에 귀환할 때도, 세 번에 걸쳐서 귀환하게 됩니다. 포로의 기간이 70년 정도인데, 이 기간을 계산할 때 은혜스럽게 계산합니다. 제일 마지막에 포로로 끌려갈 때부터, 제일 처음 귀환 할 때를 70년으로 한다면.. 제일 처음 잡혀갈 때와 제일 마지막에 돌아올 때로 하면, 훨씬 더 기간이 길겠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은혜스럽게도 다 합쳐서 70년.. 실제적으로 세 번째 붙잡혀 갈 때와 제일 처음 돌아올 때는 훨씬 더 짧은 기간이 되겠지요?

첫 번째 귀환은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 때, 주전 538년에 고레스 왕의 명령으로 귀환하게 됩니다. 그때 정치 지도자가 스룹바벨이었고, 대제사장이 여호수아였어요. 이 두 사람의 이름이 스가랴서에 종종 등장하지요. 두 번째 귀환은, 페르시아 두 번째 왕으로 아닥사스다 왕 때, 주전 458년에 에스라 제사장의 지도로 이루어집니다. 에스라서를 쓴 사람이요. 세 번째 귀환은, 아닥사스다 왕 20년. 주전 444년 성전을 재건한 느헤미야의 인도로 구환이 일어납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첫 번째 귀환 때, 고레스 왕의 칙령에 의해서 귀환이 일어날 때에 귀환한 젊은 선지자입니다. 

주전 538년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칙령을 발표했을 때..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이방 왕.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려보내면서 성전을 재건할 수 있는 금품도 제공합니다. 성전 재건에 필요한, 느부갓네살 왕 때 빼앗아 왔던 성전의 기물도 다시 돌려주면서.. 성전을 재건하고자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해 주면서 재건하도록 명령을 내려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강제적인 명령은 아니었고, 허용의 명령이었습니다. 바벨론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스라서에 보면, 이스라엘로 귀환 한 사람이 종까지 포함해서 49,697명 약 오만 명 가량만 귀환합니다. 이들은 자발적 의사로 귀환 한 사람들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었습니다. 시편 곳곳에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눈물로 기도하고, 다니엘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을 열고, 기도했다는 표현들도 등장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그들의 추억과 기억 때문에.. 그들은 바벨론 강가에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며 예루살렘을 향한 사랑을 불태웠어요. 그러므로 포로에서 귀환 한 사람들이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은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었습니다. 

에스라서를 보면, 그 배경이 잘 나와 있습니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성전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나이가 많이 든 사람은 예전의 솔로몬의 성전과 비교했을 때 너무나 초라한 성전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어요. 한편으로는 이러한 성전이라도 재건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쁨과 슬픔이 교차되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들은 성전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과 주변의 민족이 이것을 환영할 리 없었습니다. 그들은 방해하고, 위협했고, 거짓으로 바벨론 왕들에게 상소합니다. 이들이 반역을 꿈꾸고 있다는 음모를 제기합니다. 방해와 위협 앞에 그들은 결국 무릎을 꿇고, 스가랴 1장 1절에 등장하는 다리오 왕 2년이 되기까지 성전 재건은 중단된 채 16년의 시간이 흘렀던 것입니다. 

다리오 왕 2년, 성전 재건 사업이 중단된 지 16년의 시간이 흐른 시점에 하나님께서는 두 명의  선지자를 보내십니다. 그들은 바로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입니다. 에스라 5:1-2, '1 선지자들 곧 선지자 학개 잇도의 손자 스가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였더니 2 이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가 일어나 예루살렘에 있던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시작하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함께 있어 그들을 돕더니'

학개 선지자는 스가랴와 동역했던 사람입니다. 16년 동안이나 방치되었던 성전을 다시 재건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돕는 것이 이들의 사명이었습니다. 연대를 계산해 보면, 학개 선지자가 먼저 시작합니다. 다리오 왕 2년 여섯 번째 달에 시작을 했고, 학개 선지자가 두 번의 메시지를 전달한 다음에 스가랴 선지자가 메시지를 전합니다. 스가랴가 메시지를 전하고, 또다시 학개 선지자가 짧게 두 번 메시지를 전합니다. 교차적으로 학개, 스가랴 선지자가 함께 동역을 한 것입니다. 

 

 

학개서의 메시지는 아주 짧고 단도직입적으로 선포합니다. "너희가 잘못되었다. 성전을 재건하라. 너희의 우선순위가 틀렸다. 너희는 이기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강하게, 남성적으로 책망하여 말씀을 전합니다. 그런데 스가랴의 분위기는 사뭇 다릅니다. 동일하게 회개를 강조하지만, 스가랴에서는 학개서에 나오지 않은 아름다운 환상들이 나옵니다. 10개의 환상으로 장차 이루어질 성전 재건과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모습을 환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아름다운 더 나아가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뤄질 하나님 나라. 이와 같은 아름다운 예언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회복시키는 메시지..

사람을 회개시키는 데도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책망을 통한 것이 있고, 하나는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통하여 스스로 뉘우치고 스스로 결단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학개서의 메시지가 남성적이고 부정적이라고 한다면, 스가랴서의 메시지는 여성적이고 모성적이라 볼 수 있습니다. 

스가랴서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은, 학개서에서 나오지 않은 메시지.. 성전 재건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거예요. 건물이 완성되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봐 성전을 재건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것 너머에 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내면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으면.. 성전 재건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학개와 스가랴서는 함께 읽어야 합니다. 결국 둘의 협동사역으로 16년 동안 방치되었던 성전 재건이 다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4년 만인 주전 516년에 완성이 됩니다. 에스라 6:14-15, '14 유다 사람의 장로들이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의 권면을 따랐으므로 성전 건축하는 일이 형통한지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명령과 바사 왕 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따라 성전을 건축하며 일을 끝내되 15 다리오 왕 제 육 년 아달월 삼일에 성전 일을 끝내니라'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사명이 완수됩니다. 보이는 성전은 재건되었지만.. 하나님은 더 깊은 뜻은 하나님의 왕국이 완성되는 것..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변화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것은 회개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말씀을 전했던 대상은, 포로에서 귀환한 사람들입니다. 바벨론에 있어도 되지만, 돌아올 것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바벨론에 남아 있는 사람들보다는, 더욱 하나님을 사랑했고 열망했던 사람들입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하자마자 자기 집보다 성전을 재건하는 일을 가장 우선시 여겼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외부의 방해가 오자, 어느 순간부터 그들의 우선순위가 바뀌었고, 열정이 식어졌습니다. 첫사랑이 식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우선순위에서 점 점 점 점 밀려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자신을 돌아보면서.. 우리 신앙의 우선순위가 뒤 바뀐 채로.. 우리 삶이 흘러내려가고 있지는 않은지.. 하나님을 우선순위에 방치하고, 16년 동안 시간이 흘러간 것처럼.. 우리 믿음의 여정이 오랜 시간 방치된 채로 흘러가고 있지는 않은지..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생활에서 무서운 것이 매너리즘입니다. 매너리즘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빠지는 것이 아니라, 한때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들의 가슴이 식어지면서 나타나는 거예요.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착각과 망상에 빠집니다. 종교적 의식과 행사에 참여하면, 모든 의무를 이행한 것으로 착각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인데.. 우리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지 않고 진심이 담겨 있지 않은 모습..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면 반항으로 이어집니다. 말라기서를 보면, 하나님께 반항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막 지적하세요. 
"내가 너들 때문에 아주 괴로워, 내가 너희들 때문에 아주 지겨워~" 그런 말씀을 하니까 대꾸하기를 "하나님,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괴롭게 했습니까? 언제 하나님을 힘들게 했습니까?" 변명뿐 아니라, 하나님께 반항하는.. 참 뻔뻔스러운 거지요. 우리의 신앙에 회개가 없는 모습이 계속되면.. 종교적 망상과 반항에까지 이르게 될 수 있습니다. 

 

 

포로에서 귀환할 때 그들의 최우선순위는 하나님이었어요. 그러나 점차 하나님이 그들의 삶에서 우선순위에서 뒤처지게 되자.. 그들의 마음이 식어졌어요. 학개서 1장 1절에 보면, 그들의 식어진 마음을 이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같이 읽어볼까요? '다리오 왕 제 이 년 여섯째  곧 그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로 말미암아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여호와의 집을 지을 때가 아직 되지 않았다. 얼마나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입니까? "언젠가 내 믿음도 좋아질 때가 있겠지.." 막연한 기대로는 절대 믿음이 좋아지지 않습니다. 다른 모든 계획들은 신속하고 철저하게 결단하고 실행하면서 유독 믿음에 관해서는 철저하게 실천하지 않고 미룹니다. 지연시킵니다. 바로 우리의 믿음에 회개가 필요하다는 증거입니다. 학개서의 말씀을 통해서는 아주 강하게 책망을 합니다. 그런데 스가랴서의 말씀을 통해서는 아주 강하게 책망을 합니다. 스가랴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로 돌아오라." 똑같은 책망이요, 똑같은 도전이지만, 얼마나 사랑이 가득한 말씀인가요? "내게로 돌아오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받아주시겠다는 거 아닌가요? 은혜의 초청이에요. 똑같은 회개의 도전이지만.. 너희들이 돌아오면 내가 너희를 받아줄 준비가 되어 있다. 

여러분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 분은 언제나 들어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거예요.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하실 수 있을 만큼 능력 있는 분이라는 거지요? 언제든지 부탁해라. 내가 들어줄 수 있다. 쉬지 않고 들어줄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내게로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너희가 언제든 돌아오면 나는 받아줄 준비가 되어있다. "나의 마음은 열려 있다." 은혜의 초청인 것입니다. 스가랴 1:1-3, '1 다리오 왕 제 이 년 여덟째 에 여호와의 말씀이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여호와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 3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돌아오라고 요청하시는 이유가 뭘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당장 주어진 과제인 성전을 재건하는 것, 그 차체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성전을 짓기 위한 노동력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건물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목적이라는 거예요. 

"돌아오라."는 말씀을 주시면서, 반복해서 덧 붙여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만군의 여호와"라는 칭호입니다. 3절입니다. '너희 조상들을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 악한 행위를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한 구절에 세 번씩이나 '만군의 여호와'가 반복되어요. 스가라 전체에서 53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 전체에서 30%가량이 스가랴에서 사용이 됩니다. 왜 만군의 여호와를 강조하는가? 만군의 여호와는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일뿐만 아니라, 모든 세계에 영광을 받으시고 높임을 받으시고 다스리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라는 거예요. 전지전능하시며, 다스리시는 통치자라는 거예요. 내게로 돌아오라는 말씀과 함께 만군의 여호와를 강조하는 이유가 뭘까요? 이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는 거예요. 명령이라는 거예요. 반드시 해해야 되는 명령.. 이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적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 만군의 여호와와 대적이 되고 싶은가요? 아니면, 하나님과 친구가 되고 싶으신가요? 이 명령에 순종하여 돌아오면 어떤 삶의 모습에 있었든지 간에 우리를 다시 만군의 여호와의 친구로, 아름다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맞이해 주십니다. "내게로 돌아오라"는 말씀은 전혀 새로운 메시지가 아닙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반복되었던, 수많은 예언자들을 통해 주어진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잡혀가기 전에.. 이사야,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수 없이 반복되었던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드지 않았기 때문에 반복하고 계신 거죠. 4절 말씀입니다. '너희 조상들을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 악한 행위를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회개하기 어려운 두 종료의 사람이 나옵니다. 첫 번째는 듣지 않는 사람. 즉,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림들일까요? 그 중심 가운데 '나는 회개할 일이 없다.'고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살아 있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늘 보던 말씀이고, 익숙한 말씀이라 할지라도 그 말씀의 부딪힘을 토해 귀 기울여 듣고, 마음을 열어 들음으로 늘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매너리즘에 빠지고 '나는 회개할 일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늘 듣던 말씀 '그거 뻔한 거야.'라며 귀 기울여 듣지 않아요. 마음을 열고, 듣지 않고, 회개할 일이 없다 생각하는 거예요.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 회개가 필요한 사람들이에요. 여러분 불 속에 금속을 녹여 재련해야 하는데 녹지 않으면 무엇에 쓸 수 있겠어요? 말씀과 성령 안에서 예배 가운데 있다 하면서.. 우리의 마음이 놓아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이 돌처럼 굳어져 있다는 거예요. 회개가 필요한 거예요. 

두 번째 회개가 어려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너무나 죄를 많이 짓고, 자주 지어서 말씀과 성령이 거슬리고 양심의 소리에 거역해서 죄를 자주 지으면 회개하기 어렵습니다. 양심이 무뎌지는 거예요. 디모데후서 4장에는 양심에 화인을 맞게 되었다 그랬어요. 에스겔서 36장에 보면, 돌같이 단단해진 마음이라 합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보면, 길가와 같이 단단해진 밭이라고 말합니다. 씨앗이 들어갈 수 없는 상태지요. 욥기 14:13에서는 빛을 거역한 사람들이라 합니다. 빛이 부족해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빛을 역행해서.. 말씀의 음성, 성령의 음성, 양심의 소리에 거역하고 역행해서 죄를 반복해서 짓다 보면 회개하기가 힘들어집니다. 그 마음이 금강석 같이 단단해지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에 성령이 임하면 "내게로 돌아오라"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한줄기 빛을 붙잡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나아간다면.. 하나님께서 돌같이 단단해진 마음도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회개가 어렵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에요. 내게로 돌아오라는 음성을 생명의 말씀으로 듣고, 주님 앞에 나아가고자 한다면.. 돌 같은 마음, 길가와 같이 굳어지고 단단한 마음도 다시금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녹아지고 기경 되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성령님께서 임재하셔서 나타나는 6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죄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계시록 3장에 보면, 성령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안약을 사서 눈에 좀 바르라'라고 했어요. 영적인 안약이 필요합니다. 회개의 첫 단계에서 우리는 이렇게 간구해야 합니다. "성령님 제 눈에 안약을 발라 주시옵소서. 그래서 저의 죄를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신의 옷이 더러운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갈아입지 않는 것처럼.. 내 죄가 얼마나 더러운지 발견하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죄를 슬퍼하는 것입니다. 죄를 슬퍼하지 않고는 절대 회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산고의 고통, 그 산고의 고통이 없이는 회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시편 51편에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기도는 상한 심령이라 그랬어요. 시편 56편 8절을 보면,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무슨 말인가요? 세상에서 흘리는 눈물은 땅에 떨어져 말라 없어지지만. 회개의 눈물은, 하나님께서 병에 담으신다는 거예요. 그 회개의 눈물을 기억하신다는 거예요. 이 슬픔은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도둑질하다가 잡힌 사람이 슬퍼하는 거예요. 사실 이 슬픔은, 죄를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당한 일 때문에 슬퍼하는 거지요. 그리고 어떤 사람은, '아니 내가 안 들킬 수 있었는데..' 안타까워하면서 슬퍼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그러나 자신의 죄를 슬퍼하는 것과 자신이 당할 형벌을 슬퍼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세 번째는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몸 안에 있지 말아야 할 것이 몸 안에 들어가면 구토를 일으키고, 설사를 일으키듯 여러분 고백이라는 것이 바른 그런 것입니다. 우리 영혼에 들어오지 말아야 할 불순물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의 영혼은 토하게 되어 있어요. 안 토하면 죽은 생명인 것입니다. 

고백이란? 바로 우리 영혼에 들어오지 말아야 할 불순물이 들어왔을 때.. 우리의 영혼이 그 죄를 끄집어내서 토해내는 것. 그것이 바로 고백인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그 죄를 토하지 않고, 고백하지 않은 자들이 어떤 고통을 당했는지 시편 기자들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편 32:3-4, '3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4 주의 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셀라)' 원기가 부족하신가요 왠지 모르게 시들시들하지 않나요? 고백하지 않은 죄가 있어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해요. 뼈들이 녹아내리는 것 같다. 토해내지 않으면, 뼈들이 녹아내리는 것 같다. 죄의 고백이 그렇게 중요한 거예요. 죄를 발견하고, 죄를 토해내는 고백이 있을 때.. 거기서 더 나아가 죄를 부끄러워해야 하는 거예요. 

여러분 인간이 짐승과 다른 것은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안다는 거예요. 짐승도 두려움도 있고, 공포도 있지만, 부끄러움이 없어요. 짐승은 부끄러워하게 할 수 없어요. 에스라 9:6입니다.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여러분 사단이 인간을 완전히 장악했을 때, 마음은 돌 같이 단단해지고 이마는 놋 같이 된다고 합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낯이 된다는 거지요. 불의한 자는 수치와 부끄러움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따라 해 봅시다. 우리가 지금 죄를 더 많이 부끄러워할수록, 예수님을 만날 때 덜 부끄러워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이 땅에 살 때에 날마다 주님 앞에 죄를 부끄러워하며 사는 인생은, 주님을 만날 때 부끄러움이 없을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이 땅을 살 때에 부끄러움 없이 살았다면 주님 앞에서 부끄러워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길을 선택하실래요?

다섯 번째는, 더 나아가 죄를 미워하게 됩니다. 죄를 부끄러워할 뿐 아니라, 죄를 미워하게 됩니다. "죄를 미워하기 전까지는, 결코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죄를 혐오하지 않고는 결코 천국을 사모할 수 없습니다." 죄는 미워하지 않으면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죄를 사랑하지 않아!" 아닙니다. 죄를 미워하고, 혐오하고, 거부하지 않고 있다면 죄를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는, 죄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멀리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독사에 물렸을 때, 떨어 버리듯이.. 여러분, 뱀이 여러분을 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물고 있도록 내버려 두시겠어요? 당장 팔에서 떨어 버리지 않겠어요? 회개란 죄를 떨어 버리는 것입니다. 돌이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고 있어요. 에스겔 33:11절입니다.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하나님은 우리가 심판받아 흘릴 피보다, 우리의 눈물을 더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을 더 원하십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돌아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천군천사가 우리 편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모든 위협에서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시면 우리 안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때로는 고난조타도 축복이 될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삶이 건강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어떠한 형편에서도 이길 수 있는 승리의 삶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로 돌아오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우리에게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예정된 진노가 우리에게서 사라질 것입니다. 

 

 

성경에서 반복되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가요? 예정된 진노라 할지라도 돌이키면 하나님께서 돌이키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게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러나 많은 사람이 돌이킬 수 있을 때, 돌이키지 않아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이스라엘 조상들을 예로 들어 이렇게 말하지요. "너희 조상들은 돌아올 수 있는 시간이 있었을 때에 듣지 않고 귀 기울이지 않아서 심판을 받았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고 나서야 그들은 돌이켰다는 거지요.

스가랴 1:5-6절입니다. '5   너희 조상들이 어디 있느냐 또 선지자들이 영원히 살겠느냐 6   내가 나의 종 선지자들에게 명령한 내 말과 내 법도들이 어찌 너희 조상들에게 임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돌이켜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 길대로, 우리 행위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고 뜻하신 것을 우리에게 행하셨도다 하였느니라'

여러분, 이러한 일이 우리에게 있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돌이켜보면 그때에 들을 걸.. 돌이켜 보면, 하나님 말씀하신 대로 그렇게 이루어지는구나.. 그런 후회가 우리의 삶에 없기를 바랍니다. 보라. 지금이 은혜받을 만한 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의 날, 복음의 날, 은혜받을만한 때가 올 것입니다. 지금 바로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되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고 오래 끌면 끌수록 더 위험합니다. 초목은 쉽게 뽑히지만, 뿌리가 깊이 내린 나무는 뽑히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에 죄악이 깊이 뿌리내리기 전에 죄악의 초목 단계에서 뿌리 뽑아 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얼음도 오래 얼릴수록 깨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오래 얼어붙어 있으면 깨지지 않는 심령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속히 회개할수록 더 빨리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더 많이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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