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I 창세기 50장 15-21절 I 하나님이 선으로 바꾸사 I 주승중 목사. 송봉모 서강대 신학대학교 교수가 그의 책 '신앙의 인간 요셉'에서 유명한 영화 '삐삐용'의 실제 배경이 되는 실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빠삐용' 영화의 실제 주인공은 프랑스의 '앙리 셀리에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1930년 20살의 앙리가 파리에서 술을 마시고 있을 때에 주변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앙리는 그 근처에 있었다는 이유로 살인 혐의자로 체포되었습니다. 실적에 눈이 먼 검사가 거짓 증인을 세워서 앙리를 살인자로 유죄판결을 받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앙리는 '빠삐용'이라는 감옥에 억울하게 갇히게 됩니다. 그는 감옥에서 자신의 인생을 망친 검사와 그 거짓 증언자에게 복수하려는 일념으로 계속해서 탈출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합니다.
창세기 50장 15-21절 I 하나님이 선으로 바꾸사
- 주승중 목사 -
그러다가 마침내 14년이 지난 1944년 악마의 섬에서 탈출하게 됩니다. 탈출 후에는 남미 여러 곳을 다니며 사업을 하여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리고는 프랑스 헌법상 범죄시효가 만료되는 30년이 되는 1967년 앙리는 파리로 돌아갑니다. 그가 파리로 왜 돌아갔을까요? 그 이유는, 오직 한 가지 검사와 거짓 증언자를 죽이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파리로 간 그는 젊었을 때 거닐던 거리, 친구들과 함께 다니며 추억이 담긴 곳곳을 다닙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살인범이라는 누명을 쓰게 된 장소에 이르게 되었을 때에.. 그 장소에서 그의 마음에 감동과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제가 복수를 포기한 대가로 다시는 저와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그러자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 이러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앙리 셀리에르, 너는 이겼다. 너는 자유롭고 사랑받는 미래의 주인공으로 여기에 있다. 네 원수가 어떻게 살고 있든지 더 이상 알려고 하지 마라. 그들은 과거의 한 부분일 뿐이다. 너는 기적처럼 여기에 서 있다. 그리고 지금 네가 그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이 비극적인 사건에 관계된 사람들 중에 가장 행복한 사람은 오직 너밖에 없다." 그는 악을 악으로 갚기 위해 간 그곳에서 악을 선으로 갚고, 마침내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용서함으로 37년간 갇혀 있던 원한의 감옥에서 비로소 해방될 수 있었고 참 자유를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으로부터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를 먼저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오직 사랑과 용서의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이 이야기를 통해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도 오늘 본문에서 진정한 용서의 사랑을 베풀었던 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의 아버지 야곱은 연수가 다하여 147세의 일기로 그의 조상들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창 49장을 읽어보면 야곱은 그의 열 두 아들을 불러 축복을 하였고 자기를 가나안 땅 헤브론에 있는 '막벨라 굴'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게 됩니다. 그래서 이 막벨라 굴에는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사라' 그리고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가 묻혀 있는 곳이었습니다. 야곱은 그의 조상들이 묻혀 있는 곳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김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언약하신 대로 창세기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는 그 약속의 말씀이 마침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야곱은 열조에게로 돌아갔는데 문제가 하나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요셉의 형들의 죄책감으로 인한 두려움의 문제였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그동안에는 야곱이 살아 계셔서 요셉이 그동안에는 복수를 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자신들에게 복수할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15절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형들은 그동안 보호막 역할을 하고 있던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자신들이 수 십 년 전에 행하였던 일.. 즉 요셉을 죽이려고 하다가 애굽으로 팔아버렸던 악한 행위에 대하여 요셉이 복수를 하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 것입니다. 요셉은 그 당시에는 바로를 제외한 가장 힘 있는 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에 빠져 형들은 두려움에 안절부절못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의 복수가 너무 두려운 나머지 요셉에게 엎드려 자신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셉은 형들의 우려와 달리 안심시키고 그들에게 도리어 위로를 했는데 1-20절입니다.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그리고 더 나아가 요셉은 오히려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들을 기르겠습니다." 여기서 '기르겠다'는 말은 원어로 '보호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그들을 위로합니다. 요셉의 이 놀라운 용서의 선언에 대해서 척 스윈돌 목사님은 그의 책 '순전한 믿음의 사람 요셉'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 50장에 나오는 요셉의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 하신 말씀을 제외하고는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가장 훌륭한 용서의 표현이었다."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요셉은 실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가장 깊이 경험하고 자신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용서를 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요셉과 형들과의 대화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먼저 우리는 요셉의 형들이 가진 죄, 그리고 그로 인한 죄책감을 보게 됩니다.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 야곱이 죽자마자 그들 속에 잇던 죄책감이 돼 살아나서 두려움에 사로 잡히게 된 것입니다.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다가 노예로 팔아넘긴 사건이 몇 년 전 사건입니까? 무려 40여 년 전의 일입니다. 요셉이 형들에 의해서 팔릴 때가 17살이었습니다. 그리고 최소 22-23년이 지난 후에 재회하게 됩니다. 그리고 온 가족이 애굽으로 이주한 지 10여 년의 시간이 또 지나서 야곱은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니까, 약 40여 년의 시간이 지난 것입니다. 그런데도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가 죽자마자 자신들에게 복수를 할지 모른다고 다시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두려웠는지 요셉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18절 '그 앞에서 엎드려서 우리는 당신의 종입니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처음에는 감히 요셉에게 직접 나아갈 수 없어서 사람을 보냅니다. 사람을 보내서 아버지 야곱이 죽기 전에 명령하기를 이렇게 했다'는 거예요. '너희는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성경 어디에서도 야곱이 그의 아들들의 죄에 대해서 알았다고 언급하는 것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경학자들은 요셉의 형들이 야곱의 유언이라고 하면서 만든 유언은 자기들이 살고자 꾸며낸 것이라 확률이 높다고 해석합니다. 또, 그것이 사실이라면 요셉에게 직접 하지.. 다른 사람을 통해서 할리가 없다는 거예요. 더군다나 성경에는 야곱이 형제들의 죄를 알고 있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형제들은 아버지가 하지도 않은 말을 꾸며낼 정도로 요셉의 형들은 커다란 두려움에 빠져 거듭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 핑계를 대면서 둘러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반응이 뭔가요? 아버지의 말을 전하는 자의 이야기를 듣고는, 눈물을 흘립니다. 자신은 이미 형들을 오래전에 진심으로 용서했는데.. 형들은 아직도 자신의 진심을 믿지 못하고, 죄책감에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요셉은 그것에 너무나 안타까워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서야 비로소 직접 찾아가서 바짝 엎드려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 과거의 죄를 용서해 달라."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죄책감으로 참으로 끈질기게 우리에게 두려움을 가져다준다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지나친 죄책감은 우리의 판단력을 흐리고 우리의 삶을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책감은 우리에게 불필요한 두려움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파괴하고, 우리가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이 죄책감이 심한 사람은 늘~ 두려움에 시달리고 건강한 자아상을 가지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학대하고 개인관계에 있어서도 늘~ 위축되어서 제대로 삶을 살지 못합니다. 그 마음에 평강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린 그 대표적인 예로 다윗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한순간의 정욕을 참지 못해서 남의 아내를 범하고 그 허물을 가리고자 그의 남편까지 교사는 죄를 저질렀어요. 그 후에 다윗은 일 년 동안 죄책으로 인한 양심의 가책 때문에 말로 다할 수 없는 번민 가운데 놓이게 됩니다. 그는 그 사건 이후에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가릴 수 있었지만, 그가 가진 양심의 눈은 가릴 수 없었고 더군다나 하나님께서 알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고, 결국 그는 양심의 가책과 죄책감으로 인해서 신음하게 됩니다. 그것을 그는 시편 32:3에서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함으로 내 뼈가 쇠했다.'라고 고백합니다. 뼈는 인간의 생명을 상징하는 피가 생성되는 기관입니다. 그런데 '그 뼈가 쇠했다.' 즉, 그 뼈가 달아 없어졌다는 것은 피까지 마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죄로 인한 양심의 가책과 죄책감으로 인한 피폐함이 극에 달해서 그의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도 심각한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 피폐함을 시편 32:4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진액은 우리의 생명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진액조차 다 빠져나가 버려서 그 생명 자체가 위태로운 순간까지 놓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깊은 죄책감에 빠지게 되면 이렇게 됩니다.
지구촌교회 원로 목사님이 쓴 '당신은 안녕하십니까?'라는 책에 보면 이런 사례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한 여인이 병원에 왔는데 그녀는 특별한 외상은 없는데 온몸의 반이 마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원인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신체적으로 아무런 이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게 정신적인 문제가 아닌가 싶어서 정신과 의사를 만났는데 최면 요법으로부터 그 원인을 찾아 나가게 됩니다. 그 가운데서 뜻밖에 거기서 형부와 불륜관계 사실을 털어놓기 시작했고 그로 인한 엄청난 죄책감을 고백했습니다. 그녀는 고백하기를 "형부와 관계를 시작한 후에 언니가 죽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러면 내가 잘 생긴 형부와 같이 살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형부가 갑자기 죽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내가 형부를 죽게 만들었다는 마음속의 죄책감이 솟구치기 시작하더니 너무나 괴로운 나날을 보내야 했고, 더 이상 언니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더니 온몸이 이렇게 마비되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다윗의 고백처럼 매일같이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그 뼈가 쇠하여지고 진액이 빠져서 결국 그 심령과 육체가 바로 여름 가뭄에 마름길이 되어 그렇게 마비되었던 것이지요."
그 요셉의 형들은 바로 지난 40여 년 동안 바로 이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방패막이라 생각했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만 그들의 마음속에 숨어 있던 그들 마음의 두려움이 돼 살아났고 그 두려움으로 인해서 자신들이 이미 받았고, 또 지금도 받고 있는 그 용서와 사랑의 은혜를 다 잃어버리고 요셉 앞에서 이런 엉뚱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두려움 가운데 아버지가 하지도 않은 말을 꾸며내고 동생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그 앞에 납작 엎드려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우리들 가운데서도 어떤 형태라든지 이런 죄책감으로 인하여 힘들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육신이 지쳐있고, 심령이 혼란한 가운데 있지 않습니까? 아마도 우리들 가운데 많은 분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소소한 죄책감으로 인해서 조금은 피곤하고 무력감 가운데 있는 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죄책감으로 인해 두려움에서 벗어나 온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요셉의 대답을 통해서 그 해답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우리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고 그러하기 당신의 주권 하에 모든 것이 변하여 선으로 만드시는 분임을 믿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선한 것으로 바꾸시는 분이심을 믿을 때.. 우리는 죄책감으로 인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요셉의 생애를 묵상하면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당신의 주권 하에 섭리하시는 분임을 깨달았습니다.
요셉의 생애는 한마디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생애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보내심을 받은 자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요셉처럼 억울하고 부당하게 고난을 당한 사람 찾기가 쉽을 것입니다. 그는 정말 악한 일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많은 생명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섭리 가운데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요셉이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 선하신 분임을 깨달았습니다. 자기에게 일어난 그 모든 일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내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형들을 온전히 용서할 수 있었고, 그 어떤 복수님이나 그 어떤 원망도 가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오늘 본문에서 그 유명한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0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니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려 하셨나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결코 우연이란 없습니다. 하나님이 백성에게 우연이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우리의 삶에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하에 우리 삶 속에 일어나는 그 모든 일들은 결국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들 속에는 선한 일, 악한 일도, 나쁜 일도, 슬픈 일도 우리의 실수도, 실패도 죄악 된 일들도 다 포함됩니다. 그야말로 이 모든 일에는 모든 것이 포함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고,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삶 속에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다 예외 없이 이 모든 일에 포함이 됩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하는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 모든'이라는 말에는 우리의 잘 못도, 실수도, 실패도, 심지어 우리의 죄악조차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요셉이 바로 이 이야기를 오늘 본문에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뭐라고 합니까? "당신들이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그러나 하나님은.." 20절에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로 인해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한 악조차도 선으로 선용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입니다. 분명히 요셉을 팔아버린 형들의 행위는 악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요셉을 미워하여 죽이고자 했습니다.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팔아버렸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는 요셉이 죽였다고 속였습니다. 이 모든 일이 악한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생명을 구원하는 선함으로 삼으셨습니다. 분명히 형들이 동생을 팔아버리는 악을 행했지만.. 섭리의 하나님은 그들의 악이 변하여 선이 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유명한 설교가, 몽고 메리 목사님이 그의 창세기 강해에서 이 부분을 해석하면서 '최고의 악과 최고의 선'이라는 주제로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상 최고의 악을 선용하셔서 최고의 선을 만들어낸 대표적인 사건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죄되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부당하게 체포되어 부당하게 사형 언도를 받으셨어요. 그 십자가에서 무참하게 짓밟힘을 당하셨습니다. 몽고메리 목사님은 전 세계를 통틀어서 이보다 더한 악이 저질러진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갈보리 십자가의 사건은 전혀 죄가 없으신 예수님에게 행해졌던 최고의 악, 악의 극치였다는 거예요. "그러나 이 악 중의 최고의 악으로부터 하나님은 가능한 한 최고의 선, 수많은 사람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최고의 악조차도 선용하셔서 인류의 구원이라는 최고의 선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최고의 악조차도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최고의 선으로 만드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미리 보여준 그 예표가 오늘 요셉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최고의 악을 최고의 선으로 바꾼 사건.. 이게 요셉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해할 수 없는 시련 가운데 있는 분 계십니까?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미움과 저주를 받고 있습니까? 남의 비난 속에 힘들어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일도 우리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의 손길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인내하십시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의 역사가 오늘도 우리의 삶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시고 조금 더 인내하십시오. 악보 변하여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한 가지 더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선하심을 믿음으로 우리들도 요셉처럼 서로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것을 사용하여 선함으로 바꾸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시기에.. 악조차도 사용하셔서 선을 이루시는 분임을 믿었기에 요셉은 그의 형들을 용서하고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이 말은 질문이라기보다는,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잇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표현한 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내가 감히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은 원수 갚는 일이 나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게만 있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바울도 로마서 12:19-21에서 '19 내 사랑하는 자 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씀.
그러면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15에서도 '항상 선을 따르라'라고 증언합니다. 왜? 모든 것, 심지어는 악조차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믿을 때, 그 섭리의 역사는 반드시 합력하여 선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믿기에 우리에게 악을 행하고, 잘못한 사람조차도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악행조차도 바꾸어 선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들을 힘들게 하고 여러분들을 억울하게 만들고, 여러분에게 악을 행하며, 해를 끼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내가 그런 비난을 받아야 할 잘못을 행한 자들이 없는데.. 비난하고 공격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를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그리고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 역사를 믿는 믿음으로 '모든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저와 여러분은 그 상대방을 온전히 용서합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사람의 올바른 신앙 자세. 여기 요셉처럼.. 억울하게 팔려 종살이를 하고 옥에 갇혔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선교사로 보내셨다는 섭리에 대한 믿음으로 악을 선으로 바꾼 선교사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태국판 바울로 불리는 '두앙 짠' 선교사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두앙 짠 선교사님은 미얀마 난민 카렌족 출신입니다. 메짜라는 교회를 세우고 전심으로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날도 오토바이를 타고 전도를 가던 중에 어떤 사람이 조금만 태워 달라고 하길래 복음을 전할 기회가 생각하여 흔쾌히 태워 주었는데 그 사람이 그만 마약을 운반하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졸지에 마약 운반책으로 오해를 받아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35년 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처음에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 얼굴이 전부 피멍으로 일그러졌고 손과 발은 5kg가 넘는 쇠사슬이 메어져 있었습니다. 그는 현재까지 20년째 복역 중에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만일 이런 황당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무리 재판부에 호소를 하고, 설명을 해도 소수민족이라고 말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분명히 그의 오토바이에 마약 운반책이 타고 있다 잡혔기 때문에 법적으로 어쩔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캄캄하고 절망적인 시간 드왕 짠 선교사님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저를 이 교도소의 선교사로 보내셨으니 여기 있는 자들에게 복음의 증인이 되겠습니다. 그날부터 드왕 짠 선교사님은 감옥 안에서 자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는 모든 자, 그의 억울함을 아는 간수들이 먼저 반응하기 시작했고, 죄수들도 드왕 짠 선교사님이 복음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간수들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다루기 힘든, 악질적인 사람들이 억울하게 감옥에 왔다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억울하게 감옥에 왔기 때문에 내가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다면서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드왕 짠 선교사님은 그 누구보다도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이었지만.. 한 번 도 간수들에게 원망하거나 규율을 경기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누구보다도 교도소의 룰을 잘 따랐고, 틈만 나면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태국에서도 가장 악질적이라고 하는 메홍 쏜 교도소에 갇혔는데.. 그로 인해서 그 교도소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800명의 재소자 가운데 200명 이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함께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 교도소 가운데서도 간수들이 가장 발령되기를 싫어하는 이 메홍쏜 교도소가 이제는 간부들의 승진이 보장되는 엘리트 코스가 되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선교사님이 방문했을 때, 드왕 짠 선교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선교사님, 저는 전혀 죄가 없지만 이곳에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교도소에 죄인으로 온 것이 아니라, 선교사로 보냄을 받아 왔습니다." 요셉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팔렸지만.. 팔림을 받은 것이 아니라 보냄을 받아왔다. 요셉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팔렸지만.. 팔림을 받은 것이 아니라 보냄을 받아왔다. 많은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왔다. 그러니 기도해 달라. 제가 이 흉악한 메홍쏜 교도소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복음화시키겠습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인생 최악의 순간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과 용서로 말미암아 놀라운 역사를 가지고 왔습니다. 말할 수 없는 고난이, 절망과 고난의 밤이 그에게 닥쳐왔지만.. 그는 그것을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의 손길로 받아들였고, 마침내 모든 것에 합력하여 선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언젠가 유명한 설교가였던 찰스 스펄전 목사님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악을 선으로 갚는 일은 하나님다운 일이요 선을 선으로 갚는 일은 인간 다운 일이다.
선을 악으로 갚는 일은 악마가 한느 일이요,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짐승이 하는 일이다.
악으로 악으로 갚는 것이 짐승인 것은, 오직 본능에 따라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 나에게 피해를 주었을 때, 나도 그에게 피해를 주고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돼 갚는 것은 짐승이나 할 일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 중에 복음이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그것은 바로 용서의 복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복음 아닙니까? 예수님 십자가 위해서 죄 용서를 구하는 한 강도의 죄를 용서하시고 "네가 오늘 나와 낙원에 있을 것이다." 그렇게 구원해 주셨어요. 십자가의 구원은 그렇게 용서의 복음입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제가 이 용서의 복음을 전하고, 그 용서의 복음을 따라 살아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결코 내가 심판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심판하겠다. 내가 복수하겠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겠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요셉이 뭐라 했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니다. "내가 심판하겠다. 내가 복수하겠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믿지 않겠다는 불신앙의 말과 같지 않습니까? 그래서 야곱은 말합니다. 야고보서 4:12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네가 누구이기에 인간을 판단하느냐? 공의로우신 심판자는 오직 우리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분이 가장 정확하고 공평하게 판단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때로는.. 악조차도 사용하시어 선으로 바꾸어 내시는 하나님. 그 순간에는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오늘도 만사를 주관하시며 죄악조차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께 다 맡겨드리고 우리가 할 일은 서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만사를 섭리 가운데 이루시는 하나님께서는 결국에는 선한 열매를 맺게 하시어 우리를 죄책감 가운데서 온전히 벗어나게 하시고 우리에게 참 평강과 자유함을 주실 것입니다. 바라기는 요셉처럼, 이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를 믿고, 이 용서의 삶을 실천하는 우리의 삶과 가정과 일터 위에.. 그러나 하나님이 그것을 선으로 바꾸시는 놀라운 역사가 날마다 순간마다 있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의 모든 억울함도 고통도 심지어는 우리의 죄악조차 고백하고 올리어 드리오니 우리르 죄책감에서 자유하게 하시고, 서로 용서함으로 먼저 하나님의 기쁨을 회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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