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회를 포함하여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 교회에서 성찬식은 일 년에 몇 번 특별한 절기에 갖는 성례식으로만 이해되고 있는 느낌입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의 경우 그들이 모임의 이유 그 자체가 성찬식이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행전에서 자주 반복되는 표현 중 하나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였습니다. 떡을 떼기 위하여 곧 성찬을 위해 모였다는 것입니다.
04. 성찬의 공동체 I 마태복음 26장 26-30절
우리 시대의 영성작가인 고 헨리 나우엔은 그의 명저인 <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라는 책에서 그의 유대인 친구에게 우정의 편지를 쓰면서 성찬식이야 말로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상징이라고 설명합니다. 본문 26절에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로 가시기 전날 밤 소위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나누어 주시는 장면에서 복음서의 기자는 네 개의 의미심장한 동사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 가지사(take / took)
- 축복하시고(blessed)
- 떼어(brake)
- 주셨다(gave)
헨리 나우엔은 이 네 개의 동사를 근거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 선택받은 자
- 축복받은 자
- 상처받은 자
- 나누어주는 자
성찬식은 이런 우리의 정체성(우리가 누구인가?)을 확인하는 자리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확인하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철저하게 성찬 공동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작, 그러면 성찬을 통해서 확인해야 할 우리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우리는 선택받은 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여러 개이 떡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여 성찬용으로 사용합니다. 그 구별된 떡은 선택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인류를 위한 속죄의 어린양으로 창세전부터 선택되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된 당신과 나도 창세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다고 증거 합니다. 에베소서 1:4-5,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사하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 선택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되어진 것이며 전적인 그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를 어떻게 느끼고 있던 상관없이 하나님의 기쁨과 사랑의 대상들인 것입니다. 그는 기쁨과 사랑으로 우리를 그의 자녀로 선택하셨습니다. 마태복음 3:17을 보세요.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의 문이 열리며 하늘의 음성이 들려온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을 선택하신 하나님이 당신에 대하여 동일하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보신 일이 있으신지요?
사단이 하는 가장 파괴적인 일은 우리의 자아상과 자존감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는 우리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지 아무도 우리를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없으며 우리를 인하여 기뻐하는 자는 없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단의 음성을 진리로 믿은 사람들의 현저한 특성의 하나는 스스로를 학대하고 스스로를 포기합니다. 최근 자신의 존재와 스스로의 인생에 대한 열등감에 빠져 계신 분은 안 계시는지요? 아니면 최근 나를 주의 자녀로 선택하신 그 기막힌 은혜를 인하여 감격해 보셨는지요?
하나님은 부족하고 어리석은 우리를 택하셔서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또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것입니다. 이런 택함을 받은 우리는 이제 과거의 모습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고 말하면서 또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벧전 2:10)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이 말은 예전에는 내가 내 삶의 주인이었으나 이제는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라는 의미며, 이제는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충성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세상에 사는 60억의 사람들 중에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셨음은 정말 특별한 섭리이며 뜻밖의 은혜입니다. 이것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최고 금액에 당첨된 복권을 무심코 휴지통에 버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2. 우리는 축복받은 자 입니다.
예수께서 떡과 잔을 가지신 후 바로 그다음에 하신일은 축복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창세기 1:28을 보세요.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인간을 창조하시고 복을 주셨어요.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아동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축복하는 일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제일 먼저 축복합니다. 아이의 생일 행사의 최고 걸정은 축복의 메시지를 주는 것입니다. '바 미츠바'. 성인식의 절정도 랍비와 부모, 이웃들이 함께 모여 어른이 되는 아이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아이가 학교에 입학할 때 축복합니다. 여행을 떠날 때에도 전장에 나갈 때에도 축복합니다. 부모가 자신의 인생이 다했다고 느낄 때 그는 마지막으로 자녀들을 불러 유언과 같은 마지막 축복을 남깁니다. 우리는 모두 축복 속에 태어났으며 축복을 누리고 살다가 축복을 남기고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적인 인생입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에게 어떤 사람의 인생은 저주받기 위해서 태어난 것처럼 보여질 때가 있습니다. 아니 나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느끼는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사단이 하는 일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기억나십니까?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0:10에서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여기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가 가진 소중한 것을 훔치고 우리를 멸망시키는 도적이 누구이겠습니까? 사단 마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저주하고 싶을 때 인생이 저주라고 느끼고 싶을 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 순간 우리 안에 저주의 영들이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영들을 결박하십시오. 그리고 자신을 축복하십시오. 여러분의 배우자를 축복하십시오. 자녀들을 축복하십시오. 이웃들을 축복하십시오. 이웃을 파괴하고 저주하시는 사단의 도구가 되지 마십시오. 축복의 도구가 되십시오. 예수의 영은 축복의 영이십니다. 말로 축복하십시오. 기도로 축복하십시오. 미소로 축복하십시오. 기독교 문화가 낳은 가장 아름다운 언어는 "God bless you."입니다. (생일 축하 노래에는 본래 이 말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축복받은 자, 아니 축복받아야 할 인생인 것입니다.
조시 맥도웰(Josh Macdowell)이라는 학원 순회 전도자가 비행기를 탔는데 여 승무원이 장미를 들고 있어서 "축하합니다. 애인에게 받으셨나요?"하고 물었더니, 뜻밖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아니에요. 제가 저 자신을 위하여 샀답니다."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그녀가 측은해지더랍니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고 합니다. "무슨 그럴만한 이유라고 있으셨는지요? 혹시 오늘이 생일이십니까?" "아닙니다. 제가 살아있고 여기에 존재하고 오늘도 이 비행기 내에서 사랑하는 이웃들을 만나 그들을 섬기는 자로 선택되어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하고 감격해서요. 나 자신을 축하하고 싶었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선택받은 나 자신을 위하여 한 송이 장미를 사실 의향이 없으신지요?
3. 우리는 깨어져야 할 자입니다.
성찬의 떡은 선택되어졌고 축복받은 떡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축복하신 떡을 다시 취하신 예수님은 이제 그 떡을 깨트리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개역 한글역에는 '예수께서 떡을 떼며..' 하셨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 broke the bread'라고 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왜 이 깨트림이 필요할까요? 그것은 마지막 단게인 '나누는 자'가 되기 위해서 인 것입니다. 깨트려지지 않으면 나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엔은 이 단계의 우리를 가르쳐 상처받은 자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깨트리실 때 우리에게는 상처가 생갑니다. 그러나 그 상처는 필요한 상처인 것입니다. 아무도 깨트림의 경험을 즐거워할 수는 없습니다. 깨트림은 아픔이요 고난이요 상처인 것입니다. 그러나 깨트림은 필요한 것입니다. 깨트려져야 빛이 흘러나오고 향기가 전달됩니다. 인생의 상처 없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이웃의 상처를 만져주는 인생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상처는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그의 상처는 십자가였습니다. 그가 십자가로 가시기 전에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요한복음 12:24를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알 그대로 있거니와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신 말씀을 말입니다. 한 알의 밀로 오신 그분이 십자가의 깨어지심으로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십자가는 필요했던 것입니다. 당신의 십자가도 그래서 필요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피하지 마십시오. 십자가에 달려 우리는 죽어야 하고 피 흘려야 하고 찢어져야 하고 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렇게 기도 하십시오.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4. 우리는 나누어 주는 자입니다.
예수께서는 최후의 만찬 그리고 성찬의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그가 취하시고 축복하시고 깨트리신 떡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나누어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라고.. 다시 말하면 그가 떡을 나누어 주실 때 그는 단순히 떡과 잔을 나누어 주신 거시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몸 곧 자신의 존재 그 자체를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성찬의 은혜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 이 생명을 받은 자들이 이 생명을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찬의 궁극적인 목적은 나눔으로 실현되는 것입니다. 나누시기 위하여 그분도 취하시고 축복하시고, 깨트리셨던 것이 아닙니까? 떡을 받은 사람이 자기 옆 사람에게 전하면서 목사님에게 받은 동일한 메시지를 반복합니다. "이것은 형제를 위하여 깨어지신 주님의 몸입니다. 받아 드시지오. 그리고 이 떡을 또 다른 이웃에게 나누어 주십시오."
중요한 것은 나눔을 생활화하는 일입니다.세상에는 주는 자와 받는 자, 두 가지 유형의 인생이 있을 따름입니다. 우리가 어려서는 주로 받는 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숙해 가면서 우리는 조금씩 주는 것, 나눈 것의 중요성을 배워가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숙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 사도도 친히 그가 전도하고 양육한 에베소 교회 지도자들에게 주는 마지막 말씀에서 사도행전 20:35를 보세요.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경험한 최대의 사건은 요한복음 3:16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로날드 사이더(Ronald Sider)라는 신학자는 요한복음 3:16을 체험한 모든 성도들이 요한일서 3:16에 순종하고 있지 않는 한 아직 그의 믿음의 삶은 온전하다고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3:16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요한일서 3:16을 기억하고 있을까요?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어지는 1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2020-04-11 서부교회 고난주간 온라인 저녁기도회 넷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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