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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story/설교문

설교문 I 고난주간 기도회 I 마가복음 11장 15-19절 I 성전청결 I 서부교회

by №1★↑♥ 2023. 4. 4.

고난주간 저녁기도회. 첫째 날. 마가복음 11장 15-19절, 성전청결. 서부교회. 임채영 목사.

 

마가복음 11장 15-19절 I 성전청결

오늘부터 고난주간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주간, 주님의 행적을 따라가려고 합니다.  이 길이 부활에 이르는 길이기에..

무엇을 따라가느냐에 인생이 좌우됩니다. 파리를 따라가면 화장실로 가게 되고, 벌을 따라가면 꽃을 구경합니다. 도둑을 따라가면 담을 넘게 되고, 참스승을 따라가면 지혜의 집으로 가게 됩니다. 철학을 따라가면 물음표의 세계에 다다르고, 성경을 따라가면 진리의 세계에 이르게 됩니다. 내 생각을 따라가면 겨우 내 수준으로 살고, 하나님의 생각으로 따라가면 하늘의 수준으로 살게 됩니다. 이방 여인 룻은 하나님을 선택해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가면서 예수님의 족보에 오른 여인이 됐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가 사람 낚는 전도자가 됐습니다. 마귀를 따라가면 마귀가 가는 지옥에 가게 되고,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면 천국에 가게 됩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마 4:19). 

오늘은 첫째 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다음 날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쫓으셨습니다. 돈 바꾸는 자들이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지를 둘러엎으셨습니다. 성전에 예수님이 계시면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것을 두고 보지 않으셨습니다. 마가복음 11:15-17절입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며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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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 성전을 찾았습니다. 성전에 들어가라면 성전세를 내야 했는데, 성전에 내는 돈은 거룩해야 한다고 하여 성전 안에서만 통용되는 은으로 만든 별도의 화폐를 사용해야 했습니다. 로마에서 온 사람들은 로마 화례를 성전 화폐로 바꾸어야 했습니다. 헬라에 살던 사람은 헬라 화폐를 성전 화폐로 바꾸어야 했습니다. 

성전에서 유월절 제사를 드리기 원하는 사람은 짐승을 끌고 왔습니다. 먼 지방에 있는 사람들은 짐승을 끌고 여행을 하기가 너무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 짐승을 직접 끌고 올 필요 없이 돈만 가지고 오면 성전 안에서 짐승을 살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자연스럽게 돈 바꾸는 환전소와 짐승을 살 수 있는 가축시장이 성전 근처인 감람산 지역에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이 환전소와 시장은 산헤드린 공의회가 관할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환전소와 시장을 통해서 벌어들이는 돈이 엄청나게 되자 대제사장은 자신의 권력을 이요하여 또 하나의 시장을 성전 내부에 개설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뜰의 넓이는 14 에이커로 18000평 정도였고, 이 뜰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이방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성전귀족들은 이 이방인의 뜰을 시장으로 바꾸어버렸습니다. 그 뜰에는 사방을 대리석으로 붙여서 만든 난간 베란다가 있었고 그것을 떠받치는 네 줄로 된 기둥이 있었습니다. 그 베란다 밑에 그늘이 생겼고 따가운 햇살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 난간을 중심으로 장사꾼들이 한쪽에서는 돈을 바꾸어 주고 다른 한쪽에서는 제사에 필요한 비둘기나 양이나 소를 팔았습니다. 

성전에 들어가려면 성전세로 반 세겔을 내야 했는데, 반 세겔이면 노동자의 이틀 일당에 해당하는 돈으로 우리나라 돈으로 8만 원 정도였지만, 다른 화폐를 가지고 온 사람들은 10만 원, 혹은 12만 원을 주어야 성전화폐를 받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제사를 드리기 위한 짐승은 흠이 없어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흠이 없는 짐승을 가져왔더라도 검역관들은 가능하면 통과시켜주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비싼 값에 성전에서 파는 짐승을 사게 만들었습니다. 성수기에는 밖에서 사는 값의 16배를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남는 엄청난 차액은 고스란히 장사꾼들과 성전 귀족들의 손아귀에 들어갔습니다. 

성전귀족들은 제사는 뒷전이었습니다. 그들은 돈벌이에 전념하였습니다. 성전은 그들에게 엄청난 부를 안겨주는 황금보고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과부들의 머리에 있는 티끌까지 욕심을 낼만큼 돈독이 올라 있었습니다. 많은 민중들은 이들의 악랄한 행위를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용기가 없어 다들 벙어리 냉가슴만 앓고 있었을 것입니다. 성전귀족의 행위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서 이 현장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었습니다. 이 채찍으로 양이나 소를 다 성전 밖으로 내어 쫓았습니다. 또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고, 그들의 상을 엎으셨습니다. 그리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것들을 가지고 나가라고 명령했습니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지 말라"라고 소리쳤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에 장사꾼들은 순순히 밖으로 나갔습니다. 어떻게 30대 초반의 갈릴리 청년의 말을 듣고 권력의 비호를 받은 장사꾼들이 큰 저항 없이 물러나갔을까요? 아마도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일에 대해 그들은 어안이 벙벙했을 수 있습니다. 또는 그들 스스로 부정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이렇게 순순히 물러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단오하고 거침없는 행동과 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동과 말은 그들의 치부를 드러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양심을 찔렀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단호하고 분명한 말씀에 반박할 논리를 찾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예루살렘 성전은 부패의 온상이었습니다. 성전귀족들은 성전을 이용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고, 그들의 세속적 욕망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식민지하에 있는 자신의 동족들의 아픔을 외면하였습니다. 가난한 백성들은 이미 로마 정권에 의해, 또 그 정권에 기생하고 있는 세리들에 의해 착취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패한 성전귀족들은 백성들의 아픔에는 아랑곳없이 성전권력을 이용하여 착취하였습니다. 성전귀족들은 돈에 눈먼 사람들이었고 가난한 사람들의 얼굴에 맷돌질하는 무리들이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제정신을 가지고 있었다면 성전제도를 개혁해서라도 백성들이 자유롭게 성전을 드나들도록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과 비난하였습니다. 17절입니다.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이 강도의 소굴이라는 말은 예레미야 7장을 인용. 소위미야 선지자의 '성전 설교'라 불리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예레미야는 지금 예루살렘 성전 안뜰로 통하는 문 앞에 서서 예배드리기 위해 성전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선포합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4절). 그리고 그 이유를 9-10절에서 설명합니다.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온갖 범죄와 우상숭배를 자행하고 있습니다. 9절에서 말하는 백성들의 죄는 도덕질(8 계명) 살인(6 계명) 음행(7 계명) 거짓맹세(9 계명) 우상숭배(1, 2 계명) 등입니다. 십계명 중 거의 모든 계명을 범하고 있으면서 그들은 성전에 와서는 이곳이 여호와의 성전이며, 여호와께서 지켜주시기 때문에 '안전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11절,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기 '도둑의 소굴'이란 도둑들이 모여드는 곳으로,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은 뒤 시시덕 거리면서 자기 몫을 나누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계명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면서도 성전에 들어와서는 '우리는 '구원을 얻었다'라고 합니다. 성전 밖에서 어떤 삶을 살았든지 성전 안에 있으니까 아무 문제가 없다고 스스로 자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성전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 모든 일이 강도의 소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과 다를 게 없다고 고발합니다. 예레미야의 눈에 혹시 우리의 교회도 도적의 굴혈로 보이지는 않을까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성전이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이 될 수 있을까요.

5-7절을 보면, 성전을 성전으로 만드는 조건이 제시됩니다. 성전에 와서 열심히 제사를 드리고 기도 소리를 높이는 것보다, 먼저 자신의 길과 행위를 바로 잡아야 합니다.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기는 하지만, 그들의 예배는 성전 안에만 갇혀 있고 그들의 일상은 하나님 백성다운 모습이 아닙니다. 그들은 정의를 행하지 않고, 약자였던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했으며,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렸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그곳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닙니다. 성전을 성전 되게 하는 것은 성전 내부가 아니라, 성전 밖 삶입니다. 위선적 신앙생활을 버리고 삶이 예배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간혹 주님께서 우리 교회에 오신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를 생각해 봅니다. 주님께서 둘러엎으실 상이 과연 없을까요? 세상 사람들이 중산층들의 사교장으로 변했다고 비아냥거리는 교회 현실, 이웃의 고통에 대해 무감각한 우리 마음, 알게 모르게 누군가를 차별하는 우리의 못난 습성, 삶의 자리에까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우리의 믿음, 다른 사람들을 제멋대로 재단하고 우리의 생각을 강요하는 폭력.. 주님의 안타까운 눈길을 저는 느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채찍을 드시기 전에 우리가 먼저 마음을 닦고, 삶의 방식을 바꾸고, 교회를 변화시켜 주님의 몸으로서 바로 서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주님을 모시고 산다면 어떻게 이웃을 무시할 수 있겠으며, 어찌 돈의 지배를 기정사실로 여기겠으며, 어찌 종교를 권력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잊지 마십시오. 주님은 우리와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을 열기 원하십니다. 이 벅찬 소명에 따라 진실의 길, 참의 길을 향해 날마다 순례자의 심정으로 사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고린도에 교회를 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고린도는 번성한 그리스의 도시였습니다. 고린도 사람이라는 말을 맘껏 향락을 누리는 사람, 음란한 사람이라는 뜻이었지요. 무엇보다 고린도에는 신전이 많았습니다. 아프로디테를 대변하는 1000여 명의 신전 창기들의 축전은 얼마나 대단했을까요. 세상 모든 엄친아의 원조, 아폴론의 축제는 또 얼마나 요란했겠습니까. 이 신전의 도시에 교회를 세우려면 먼저 그럴듯한 신전부터 지어야 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의 성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고전 6:19, 새번역). 사도 바울이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에게 한 말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그 어떤 신전도 지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거대한 신전들은 진짜 성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짜 성전은 돌이 아니라 몸으로 지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성전은 돌로 지은 신전에 우상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을 세운 성전에 성령을 모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지으신 성전도 몸으로 짓는 성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입니다."(고후 6:16, 새번역)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서 본문 고린도전서 3:16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또한 고린도전서 6:19-2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 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을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처럼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은 저와 여러분 안에는 성령께서 들어와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몸은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을 주고 사셔서 우리의 몸을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이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 된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성전'이라는 말의 원어는 '나오스'입니다. 이 단어는 '성전' 중에서도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인 실제 '성소'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성소를 포함한 성전 경내를 통칭하는 '하에론'이라는 단어와 구별되어 사용되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께서 성소로 삼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우리의 심령은 '성소'에 해당하고, 우리의 몸은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다 함께 이렇게 고백해 보겠습니다.

주님 제 몸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주님 제 몸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나부터 개혁하여야 합니다. 흔히 우리는 개혁하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상대에게 있는 똑같은 문제가 바로 나에게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타인은 나의 거울입니다. 내가 먼저 변화되고 나 자신을 먼저 개혁할 때 진정한 개혁이 가능합니다. 개혁의 점화 지점은 나의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개혁의 불꽃은 나의 마음속에서 시작하여 타오를 때 비로소 번져나가 우리 모두의 변화를 이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뿌리부터 개혁하여야 합니다. 개혁의 성과나 결과물은 흔히 외부로 나타는 것에 의해서 파악됩니다. 하지만 진정한 해 개혁은 뿌리부터 진행되는 근본적인 변화이어야 합니다. 뿌리가 바뀌지 않고는 나무가 바뀌지 않습니다. 의식과 마인들의 변화가 없이는 행동의 변화란 일시적일 뿐입니다. 제도를 바꾸어도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또 다른 문제를 양산할 뿐입니다. 그런 면에서 심령의 변화(엡 4:24)는 진정한 변화의 방법입니다. 

 

 

'한국의 오순절'이라고 평가받는 1907년 대부흥운동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 길선주 장로다. 1903년부터 이미 한국 땅에는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선교사들은 이 부흥의 불길을 전국적으로 퍼져나가게 하기 위하여 신년초에 전국적으로 특별집회를 갖기로 계획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평양에서도 신년특별집회가 열렸다. 1907년 1월 6일부터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이 집회에는 약 1500명이 모였다. 그러나 1주일 동안 열심히 기도하였는 데에도 아무런 역사가 나타나지 않았다. 일부 선교사들은 이제 평상시로 돌아가자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주일 저녁 예배 시간에 길선주 장로가 설교 대신에 자신의 죄를 자백했다.

"나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주실 수가 없습니다.
1년 전에 친구가 임종 시에 나를 자기 집으로 불러서 말하기를
길 장로,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니 내 집 살림을 돌보아주시오라고 부탁했습니다.
나는 잘 돌보아드릴 터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재산을 관리하며 미화 100달러 상당을 훔쳤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 것입니다. 내일 아침에는 그 돈을 미망인에게 돌려 드리겠습니다

길선주가 이렇게 회개하자 교회당을 억눌렀던 이상한 힘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날 밤 예배는 7시에 시작되었는데 새벽 2시가 지나도록 사람들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였다. 이 집회에 직접 참석하였던 정익로 장로는 이날 밤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그날 밤 길선주의 얼굴은 위엄과 능력이 가득 찼으며 순결과 성결로 불붙었다.
그는 길선주가 아니었고 바로 예수님이었다.
그는 원래 눈이 어두워서 나를 잘 보지 못하였을 것이나 나는 그의 앞에서 도피할 수 없었다.
하나님이 나를 불러놓은 것으로만 생각되었다.
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죄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엄습했다.”

진정한 성령의 역사는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질 때 나타난다. 길선주의 회개는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의 시발점이 되었고, 이로 인해 한국 교회는 놀라운 오순절의 은혜를 경험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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